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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나무 아래 서 보라”

뜨락을 걷고 또. 걷다 문득 울타리에 심어 둔 잣나무 아래 섰습니다. 푸른 잎들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때 잣나무가 들려주는 2가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힘겨운 육체에 푸르게 스며들었습니다.

하나, “상록수라 하여 잎이 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오.”

늘 푸른 나무라고 해서 잎을 떨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새 가지에서 새 잎이 돋아나면 2년 이상 달려 있던 오랜 잎은 주기적으로 낙엽이 되어 땅에 자리합니다. 그러고 보니,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늘 푸른 나무는 없습니다. 떨어지는 잎만큼 새 잎을 틔워 내기에 늘 푸른 나무처럼 보일 따름입니다.

사람도 그렇지 않나요? 단 하나의 아픔도 없고, 상처도 없이 일평생을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때론 눈물 흘리기도 하고, 삼키기도 하며 살아가는 거지요. ‘울음’의 받침을 때내어 ‘웃음’으로 바꾸니 늘 행복한 사람처럼 보일 뿐지요. 슬픔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기에 이겨 가는 거지요.

상록수라 하여 잎이 지지 않는 것이 아니듯, 행복한 사람(행복하게 보이는)이라 하여 슬픔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지는 잎만큼 새잎을 틔우며 푸르게 자라듯 슬픔만한 행복으로 감싸며 푸르게 사는 것이지요.

또 하나, “절제하지 않으면 자랄 수 없어요”

잣나무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면, 푸른 잎에 가려 보이지 않던 수많은 잔가지들이 보입니다. 누렇게 변해 있는 잎들과 바싹 말라있는 작은 가지들이 거미줄처럼 나무를 엮고 서 있습니다.

누군가는 윗가지를 위해 헌신하는 밑가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작은 것의 희생으로 자라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무가 전하는 말은 달랐습니다. “절제하지 않으면 자랄 수 없어요”

절제란? 선택한 것을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더 나은 것을 위해 나은 것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절제는 선택과 균형 사이에 존재 합니다. 더 나아가기 위해 현재를 멈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잣나무의 푸른 가지는 자람을 위한 가지의 포기의 결과입니다. 푸름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은 잎들의 내려놓음입니다. 자람을 위한 멈춤의 결과입니다.

어쩔 수 없이 멈춰서 바라봐야만 하는 시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서야 하는 상황, 이 모두가 힘겹고 삶을 짓누르겠지만, 그래도 힘을 내려합니다. 나무가 전해 준 이야기를 마음에 담으며 현재를 다듬으려 합니다.

어려울 때 나무 아래 서 보십시오. 나무가 전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소의걸음 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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