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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사순절 30일 움오름 묵상

최종 수정일: 2019년 4월 22일


묵상의 말씀
  •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 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 시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성경 속으로


어떤 부자와 가난한 한 노부부가 지근거리에 이웃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양과 소가 엄청나게 많았지만 가난한 노부부는 암양 새끼 한마리뿐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에겐 새끼 양을 자식처럼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 집에 손님이 왔는데, 이 부자가 자기 집의 많은 양과 소 중에서 잡아 손님을 대접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노부부의 한마리뿐인 새끼양을 강탈해 손님 대접을 했습니다.


나단으로부터 이 사건을 전해들은 다윗 왕은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한다며,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고 분노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남의 양을 빼앗거나 훔친 것은 사형이 아니었습니다. 네 배로 되갚으면 됐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분노하며 그가 마땅히 죽을 자라고 했습니다. 사형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4배의 보상도 언급했습니다.


다윗의 판결을 듣자마자 선지자 나단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


나단의 이야기는 밧세바를 범할 뿐 아니라, 그의 남편이요, 다윗의 충직한 신하였던 우리아를 교살했던 죄에 대한 선언이었습니다. 이 죄의 참극은 봄날 어느 해질무렵 시작되었습니다. 해가 바뀌어 왕들이 전쟁에 직접 출전할 때가 돌아왔습니다. 겨울동안 일년 강우량의 대부분의 비가 내리는 팔레스틴에서는 봄이 되면 도로 사정이 좋아서 전쟁할 수 있는 기본적인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주로 봄과 가을에 대부분의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왕들은 새봄의 첫 전투를 진두지휘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며 그들과 동거동락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도 바로 그러한 출전의 시간이 다가왔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출전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왕정은 안정되었고, 남과 북의 통일이후 국가의 기틀이 확고하게 갖춰졌기에 굳이 자신이 나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군사들이 대부분 전장에 나간 뒤 그 넓은 도성에 홀로 남았다는 것은 그의 영혼이 벌써 병들었다는 것의 반증이었습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저녁무렵 그는 궁궐근처 집들의 안뜰이 내려다보이는 궁궐 옥상을 거닐다 목욕하는 한 여인을 목격했습니다.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는 그녀가 자신의 충복의 아내인 것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면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는 신하를 보내어 그녀를 궁궐로 불러 들였습니다. 그리고 위계에 의한 폭력으로 그녀를 범했습니다. 그후 그녀가 임신사실을 알려오자 전쟁터에 있던 그 남편을 불러 특별휴가를 줌으로써 무마하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충직한 그의 부하 우리아가 동료들을 생각하며 노숙을 택하자 그는 요압장군에게 편지를 보내어 전쟁터에서 교묘하게 전사토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남편에 대한 애도기간이 끝나기 무섭게 밧세바를 데려와 그녀와 결혼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다윗은 능수능란하고도 교묘하게 처리했습니다. 어느덧 그는 사람들의 소유와 생명을 쥐고 맘대로 하는 신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스스로 신 놀이에 취해 너무 커진 만큼 하나님은 작아지셨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삶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소유에 대한 집착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그가 바로 당신입니다”라는 나단의 선언을 통해 자신의 죄를 직시했습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을 교살한 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신이 되어 하나님을 모독했던 죄를 깨달았습니다. 잘못된 도덕적 죄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근본적인 죄를 보았습니다. 하나님 대신 자신을 중심에 놓았던 바로 그 죄였습니다.



그림 속으로


1652년 에칭(etching)으로 작업한 렘브란트의 <기도하는 다윗>은 표면적인 자신의 죄 뿐 아니라, 근원적인 자신의 죄를 인식한 다윗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을 피해 도망자로 살아가던 광야생활에서나, 수많은 전투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경건함을 잃지 않던 예배자였습니다. 거인 골리앗 앞에서도 보이는 거인 보다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의식하던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한 여인 앞에서 무참하게 침몰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되짚어 보면, 그는 한 여인으로 인해 침몰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을 보기 전에 이미 침몰해 있었습니다. 밧세바 사건은 그의 영적이고도 내면적인 상태가 이미 그렇게 변해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을 뿐입니다.


렘브란트는 이를 의식이나 한듯 전체적인 부분을 검게 표현했습니다. 특별히 다윗이 즐겨 연주하던 하프가 방바닥에 나뒹굴고 있습니다. 깨어있는 영으로 늘 하나님께 나아가며 찬양의 제사를 드리던 날이 이미 오래 전이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자리엔 그를 향한 백성들의 환호가 대신했고, 그의 마음 속 중심자리엔 하나님 대신 그가 차지했습니다. 여전히 예배에는 참석했지만, 그것은 의례적인 종교행사였지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신이었고, 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하프는 이러한 다윗의 신앙 상태와 무딜대로 무뎌진 그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무릎을 꿇고 침상을 적시는 다윗의 진심어린 회개를 보여주기 위해 화려함을 모두 제거하고 사물과 다윗의 형체조차 극도로 단순화 시켰습니다. 화면은 위에서 아래까지 모두 어둡습니다. 다윗의 죄가 얼마나 심각했고, 그의 상태가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림 속 다윗의 얼굴은 윤곽만 남기고 어둠속에 있습니다. 슬픔 속에 잠겨 긴 밤을 지새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멀리 어둠을 몰아내는 태양의 긴호흡이 동쪽 창을 어스럼하게 밝혀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렘브란트는 걷힌 커튼 사이로 회개하는 다윗을 보여주며 음영을 아주 묘하게 표현했습니다. 창을 향한 다윗의 얼굴부분과 그의 기도하는 손은 검게 표현한 반면, 그의 옷은 환한 흰색으로 묘사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 시 51:10-12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아직 완연한 밝음이 자리한 아침은 아닙니다. 밤을 새워 울부짖은 회개의 기도도 부족했다고 여겼는지 그는 계속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채 빛이신 하나님을 응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가 드린 상한 마음(broken heart)의 기도를 받으셨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인식하든, 하지 못했든 죄로 물들었던 몸을 덮은 옷을 흰옷으로 물들였습니다.


스스로 신이 되었던 중심에서 내려와 하나님 앞에서 그 은혜를 구하는 다윗의 기도… 간절했던 그 기도를 렘브란트는 창가에서 스며들어와 몸을 두른 옷을 물들이는 빛으로 그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다윗의 얼굴은 여전히 어둠 속에 묻혀 있지만, 그의 이마에서 코로 이어지는 부분에서부터 점차 밝아 옵니다. 마치 에스겔의 환상 속 성전 동편에서 흘러온 작은 물줄기가 점점 넓어지고 깊어져 염해를 다 덮듯이, 이마에서 시작한 작은 빛은 그렇게 다윗을 온통 빛으로 물들여 갑니다.



삶 속으로


죄사함을 구하는 기도는 몇 번을 구해야 할까요? 얼마나 길게 드려야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한번의 기도로 충분할까요? 그렇지 않다면 어느 때까지 용서를 구하고 회개해야 할까요?


죄사함과 회개 그리고 용서에 관해 성경은 몇 번까지 해라, 또는 몇 시간 동안 구해라는 말씀은 명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애초부터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으셨기에 성경에 기록하지 않으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렘브란트의 그림 <기도하는 다윗>을 보며 이 질문에 대한 화가의 대답을 봅니다.


밤을 세우며 드린 죄사함을 구하는 기도가 여전히 부족하다 여기며 기도하고 있는 다윗의 콧등을 타고 흘러 내리던 빛, 그리고 그 빛에 의해 이미 하얗게 물든 그의 옷과 주변의 풍경이 바로 그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죄의 어둠을 능가하는 빛입니다. 비록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빛은 충분히 우리를 덮고도 남음이 있는 빛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죄와 임재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둔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있음의 반증이 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고, 필요한 대로 주님의 역할을 규정합니다. 우리가 선 각도에서 그렇게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 생각을 넘어 새로운 빛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며, 은혜로 우리를 물들여 가십니다.


그 은혜에 물들여 져 새로이 일어서는 사순절 아침. 이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말없이 당신께>


-한희철



말 너머 계신 당신께

말로써 나아가는 게

어렵습니다.


저녁 어스름

강물 거슬러

제 집으로 돌아가는

물새처럼

말 없이도

당신께 가는 길을 배우고 싶습니다.



소의 걸음



<렘브란트, ‘기도하는 다윗”, 에칭,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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