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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사순절 29일 움오름 묵상

최종 수정일: 2019년 4월 22일


묵상의 말씀
  • 삼상 18: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성경 속으로


우발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살인적이던 사울왕의 광기는 점점 차분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살해 음모로 변해갔습니다. 질투에서 비롯된 왕의 사악한 살인 음모가 갈수록 더 교묘해 지고 집요해 질수록 다윗의 삶도 일상이 파괴되어 갔습니다. 하지만, 누구 하나 통제할 수 없는 왕의 비열한 증오와 광기 속에서도 다윗이 그나마 숨 쉴 수 있었던 것은 요나단이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왕의 장자로서 왕위 계승 1순위자 였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왕위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신뢰와 하나님의 선택이 자신보다는 다윗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그의 아버지가 증오와 광기를 다윗과 자신을 위협함에도 불구하고 그 보다 더 큰 사랑으로 다윗을 품었습니다.


만약 살의로 둘러 쌓인 그런 환경 속에서 요나단마저 없었다면, 다윗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늘의 부르심을 포기한 채 목동의 자리로 돌아갔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손 쉬운 방법을 동원하고,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규합하여 궁중 반란을 일으켜 사울왕을 제거한 뒤 왕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요나단이 있었기에 다윗은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소명을 더더욱 단단하게 다져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을 죽이는 길만이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사울왕이 믿게 된 이후부터 다윗과 요나단은 함께 우정을 나누며 지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슬프게도 둘은 가슴아픈 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자신을 믿어주고, 지지해 주고, 격려해 주던 사람을 떠나야 한다는 것은 떠나는 다윗에게나, 보내는 요나단에게 있어 더 없는 아픔이요, 슬픔이었습니다. 하지만, 폭력의 길을 거부하고 기꺼이 사랑과 섬김의 길을 선택했던 요나단의 길은 다윗 속에 그대로 전이되어 광야 속에서 더 아름답게 승화되고 다져졌습니다. 그 결과 사울왕에게서 받았던 그 어떤 악과 상처도 더이상 다윗 속에 침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다져지고 정화된 선 앞에서 지독했던 악도 다윗을 오염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림 속으로


결혼 8년만인 1642년, 4명의 자녀 중 3명을 잃고,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마저 잃었던 렘브란트는 그 누구보다도 이별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꼈던 사람입니다. 하나 뿐인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겨우 버텼던 서른여섯, 그 슬픔의 계절에 그는 <다윗과 요나단의 이별>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림은 사울 왕의 질투로 목숨이 위태롭게 된 다윗을 요나단이 아버지 몰래 빼돌려 보내는 이별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떠나 보내는 요나단은 정면을 향하게 했고, 떠나는 다윗은 등을 보인 채 흐느끼는 듯한 뒷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화가 자신을 요나단의 품에 기대어 흐느끼는 다윗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도 다윗처럼 그 누군가의 품에 안겨 절망을 토하듯이 흐느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렘브란트는 이처럼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고 위로하고 위로 받을 수 있는 ‘두려움 없는 우정’을 그렸습니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 무언가가 현재에 부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을 온전히 안아주고 받아주는 넓다란 품이 없는 현실의 아픔을 화폭 위에 승화시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안고 보듬어 주는 요나단의 얼굴을 보니, 다윗보다 훨씬 나이들어 보입니다. 친구로 보인다기 보다는 되려 젊은 아버지에 가깝습니다.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요? 36살, 오늘날 우리 나이로 보면 젊지만, 17세기에 비춰보면 중년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렘브란트가 중년에 가까운 연수를 살면서도 쓰라린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또래의 우정을 만나지 못했던 연유가 아닐까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의 품을 우정에 기대어 표현한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다윗과 요나단의 이별>이라고 명명된 렘브란트의 작품 속에는 역설적이게도 이 땅에서 부재한 사랑, 부재한 우정을 봅니다. 울고 있는 다윗의 뒷 모습을 통해 아내와의 사별을 슬퍼하는 화가의 마음을 볼 수 있는 동시에, 이 땅 그 어디에서도 위로다운 위로를 받지 못한 채 하늘에 기대어 우는 렘브란트를 만납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유심히 살피다보니, 이 그림과 같은 미술관에 있는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1669) 을 보는듯한 착각이 듭니다. 분명 <다윗과 요나단의 이별>은 이별을 하는 장면이고, <탕자의 귀환>은 집을 나가 방탕한 생활을 하다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안아주는 아버지의 모습인데도 어떻게 이 두 그림이 묘하게 비슷한 느낌과 감동을 주는지 신비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오른손은 크고 두꺼운 손으로 강하게 잡고 있습니다. 왼손은 가늘고 여린 손으로 편 손으로 쓰다듬고 다독이고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탕자의 귀환>에서 묘사했듯이, 그것은 모성과 부성이 함께 공존하는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렘브란트는 이것을 담고자 상식적인 사실성을 넘어 그림에 담았습니다. 이 모습이 <다윗과 요나단의 이별>과 <탕자의 귀환> 이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다시 <다윗과 요나단의 이별>을 살펴 보십시오. 크고 넓은 요나단의 품에 머리를 파묻고 흐느끼는 다윗의 모습이 <탕자의 귀환>에서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의 품에 안겨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과 매우 닮아있지 않습니까?


렘브란트의 그림 <다윗과 요나단의 이별>에서 요나단은 터번을 쓰고 기품 있는 옷의 옷차림을 한 채 한없이 애처로워하는 표정으로 다윗을 감싸주고 있습니다. <탕자의 귀환>에서 잘려나간 머리카락, 다 헤어진 옷, 벗겨진 신발에서 드러난 거지꼴의 탕자와 달리 다윗은 귀티나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건네 준 겉옷과 칼이 다윗을 고귀하게 세워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힘없이 고개를 숙인 그의 모습으로 안겨있지만, 그는 요나단에게서 받은 위로와 힘으로 인해 고귀하고 존귀한 사람으로 다시 일어서게 될 것임을 예고해 줍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한 아들이지만 살아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기뻐하는 ‘사랑에 눈먼 아버지’처럼 요나단도 사랑에 눈먼 아버지가 되어 다윗을 안아주고 격려해 줍니다. 그 사랑이 아버지의 품 안에서 탕자가 다시 태어나듯이, 다윗으로 하여금 나날이 깊어져 가고, 교묘해 져 가던 핍박과 위협 속에서도 고귀함을 잃지 않고 더 깊어지고 성숙해 가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이별>을 다시 들여다 봅니다. 적갈색이 작별의 슬픔을 더 고조시켜 줍니다. 명확하게 구분되는 원색이나 순백의 색상이 아닌 노을빛에 물들어 가는듯한 적갈색 이별 속에 다윗의 슬픔이 보입니다. 렘브란트의 아픔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아픔 속에, 그 슬픔 속에 그 모든 아픔과 슬픔 마저도 넓은 품으로 녹여가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삶 속으로


자녀를 잃고, 아내마저 먼저 보낸 렘브란트는 왜 그의 아픔과 슬픔을 다윗과 요나단의 모습 속에 담았을까요? 왜 요나단의 품에 안긴 다윗의 모습 속에 본인의 뒷모습을 새겨넣고 위로받고 싶어 했을까요?


무언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 무언가가 현재에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슬픔을 온전히 안아주고 받아주는 품이 없다는 현실이 외로웠습니다. 생의 길을 걸으면서 깊게 베이고, 생채기난 그 마음 하나 헤아려주는 친구를 만나지 못했기에 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의 품에 기대어 그 사랑을 그리워 했습니다.



그렇기에 <다윗과 요나단의 이별>이라고 명명된 렘브란트의 작품 속에는 역설적이게도 이 땅에서 부재한 사랑, 부재한 우정을 봅니다. 울고 있는 다윗의 뒷 모습을 통해 아내와의 사별을 슬퍼하는 화가의 마음을 봅니다. 동시에, 이 땅 그 어디에서도 위로다운 위로를 받지 못한 채 하늘에 기대어 우는 렘브란트를 만납니다.

하늘의 위로에 기대어 울고 있는 렘브란트에게 어깨를 내어주신 주님은 생채기 난 아픔에 소금마저 껴 안고 버티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진정한 친구가 없는 세상, 친구를 위해 목숨은 커녕 작은 손해마저 감내치 않으려는 우리 수준임을 절감하기에 역설적이게도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주님의 말씀은 희망과 소망이 됩니다.


……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렘브란트의 슬픔을 담은 <다윗과 요나단의 이별>은 요나단의 사랑이라는 밑그림 위에 다윗의 슬픔을 새겼습니다. 길 잃을 뻔한 다윗의 슬픔은 요나단의 사랑 안에서 고귀한 순명의 길로 인도되어 갑니다. 폭력의 길을 단호히 거부한 채 아버지의 정적마저 친구로 품었던 요나단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한 사람의 내면과 심성에 침투해 감으로써 그 영혼과 삶마저 치유하고 정화시켜 갑니다.


그리하여 과거로 회귀하거나 손쉬운 방법을 동원하고픈 유혹과 되갚음의 순환고리에서 벗어나 누군가를 품게 합니다. 나아가 부르심의 그 길을 기억하며 때로 지루하기도 하고, 지난하기도 한 일상의 광야 속으로 우리의 걸음을 자발적으로 옮기게 합니다. 나를 위해 당신의 생명마저 내어주신 ‘친구’ 예수님의 그 사랑이 오늘도 우리를 이렇게 세워가십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 속에 희망과 소망을 보는 사순절 아침.



소의 걸음



<렘브란트, ‘다윗과 요나단의 이별’, 1642년, 패널에 유채, 73×61㎝, 에르미타주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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