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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사순절 23일 움오름 묵상

최종 수정일: 2019년 4월 5일


묵상의 말씀
  • 민 22:3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들고 길에 선 것을 그가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 민 22:32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 민 22:33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성경 속으로


렘브란트가 그린 <발람과 당나귀>의 배경이 되는 것은 민수기 22장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광야생활을 거의 마치고 아모리 사람들의 땅을 지나 가나안으로 향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모리 사람들이 허락지 않아 전쟁이 발발했고, 그로 인해 패배한 아모리 사람들의 땅을 이스라엘이 차지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두려워 한 나머지 사신들을 유브라데 강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보내어 신탁자 발람을 청합니다.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넘어뜨릴 계책으로 신의 이름으로 그들을 저주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워낙 돈을 좋아했던 발람은 재물에 혹해 모압 사신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물론 따라 나서기전 여호와 하나님께 갈지 말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영이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따라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그는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잘 아시는 하나님은 가라 하십니다. 이는 ‘네 맘대로 해라’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발람은 신이 나 아침 일찍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을 거느린 채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그런데 길을 나선지 얼마되지 않아 나귀가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을 했습니다. 하지만, 나귀는 더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되려 발람 밑으로 바짝 엎드렸습니다. 화가 끝까지 치민 발람은 지팡이를 들어 사정없이 나귀를 내려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여시니 자신을 때리는 발람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왜 때려? 내가 뭘 잘못 했다고 이렇게 가혹하게 때려?”


황당한 발람은 나귀에게 대답합니다.

“네가 나를 거역했기 때문이다. 만약 내 손에 칼이 있었다면 너는 맞는게 문제가 아니라 당장 죽었을거다”


나귀가 또 다시 묻습니다.

“생각해 보시오! 내가 오늘 이때까지 당신을 태우고 다니면서 언제 한번이라도 이렇게 한 적이 있소?”


발람이 대답했습니다.

“물론 없었지! 그러니 네가 미친게 분명한거지.”


나귀와 발람 사이의 대화가 이쯤되자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십니다. 그때 발람은 천사가 손에 큰 칼을 빼들고 그를 향해 치려는 것을 발견하고 급히 머리를 숙이고 엎드립니다. 그런 발람을 향해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 민 22:32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 민 22:33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그제서야 발람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렇게 아룁니다.

  • 민 22:34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범죄하였나이다. 알지 못하였나이다. 돌아가겠나이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하며 외친 발람의 진심어린 고백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냥 돌아가면 될 것을 그는 또 다시 모압 사신들을 따라 길을 이어갑니다.



그림 속으로


렘브란트가 이 작품을 그린 것을 1626년, 그의 나이 20세였을 때입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피테르 라스트만에게 잠시 그림을 배우는 동안 그는 분명 스승의 작품 <천사와 예언자 발람, 1622년 작>을 보았을 것이고, 그림의 주제를 스승의 작품에서 빌려 왔음이 틀림없습니다. 렘브란트는 나귀를 타고 있는 발람의 모습을 라스트만의 그것과 비슷하게 처리했지만 천사는 주름진 옷의 곡선을 강조하여 라스트만의 정적인 표현과 달리 동적인 느낌을 부여했습니다.


그림을 보십시오. 붉은 빛 염료와 금실로 수놓은 귀한 옷을 입은 하얀 수염의 남자가 뭉둥이를 들고 나귀를 내리치려 하고 있습니다. 땅바닥에 무릎을 끓고 엎드린 나귀는 하얀 이빨을 드러낸 채 자신을 내리치는 나이든 남자, 발람을 향해 뭔가를 외치는 듯해 보입니다.


나귀의 뒤엔 긴칼을 든 천사가 나귀를 향해 몽둥이를 내리치려는 발람의 모습과 유사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휘날리는 천사의 옷의 움직임을 보건데 그의 움직임이 재빨라 곧 칼이 발람의 목에 와 닿을듯해 보입니다.


하지만, 맨 뒷쪽에 말을 타고 있는 모압왕의 사신들은 영문을 모르는 방관자처럼 멀뚱이 쳐다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발람의 우편에 검게 칠해져 있는 어두운 부분에 발람이 수족처럼 부리는 두 하인이 서 있습니다. 표정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검은 그림자 같이 표시된 하인들은 어쩌면 밝고 화려한 옷을 입은 선지자 발람의 페르소나(persona)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림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뭐가 눈에 제일 많이 들어옵니까? 칼을 든 천사입니까? 몽둥이를 든 발람입니까? 아니면… 천사가 든 칼입니까? 발람이 든 몽둥이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뭔가를 소리지르는듯한 나귀의 입입니까?


그림을 보고, 또 보고, 또 다시 보았더니, 움푹 파인듯한 발람의 눈에 시선이 머물며 떠나지 않습니다. 마치 애초 눈동자가 없는듯한 사람처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그것처럼 발람이 서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눈동자는 살아있는데, 심지어 나귀의 눈동자도, 말의 눈동자도 선명한데, 유독 선지자라고 하는 이의 눈은 없는 눈으로 존재해 있습니다.


그는 눈을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빼앗긴 걸까요? 아니, 그는 그의 눈을 어디에 두고 왔을까요? … 돈에 눈이 멀어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따라나온 선지자 발람은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선지자란? 앞 일을 내다보고 미리 아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로 자신의 앞에서 자신을 향해 칼을 든 천사도 보지 못하는 우매한 사람이었습니다. 차라리 맑은 눈으로 사리를 분변하던 나귀야 말로 스스로 눈을 닫아버린 선지자보다 더 선지자처럼 보이는 이 씁쓸함… 그리고, 안타까움



삶 속으로


렘브란트의 작품 <발람과 나귀>를 들여다 보다 문득 예루살렘으로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는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만약 그때 나귀가 ‘발람의 말하던 나귀’였다면, 나귀는 어떻게 했을까 상상해 봅니다. 어쩌면… 그 역시 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온 몸으로 버티며 애원이라도 하지 않았을까요?


“왜 굳이 주님을 죽이려는 저 곳으로 들어가렵니까? 저 환호하는 자들의 소리가 곧 ‘죽여라’, ‘십자가에 못박아라!’는 소리로 바뀔텐데, 왜 하필 저 곳으로 가시려 합니까?”


온 몸에 근육을 세우고 버티는 나귀를 쓰다듬으며 주님은 이러지 않으셨을까요?

“그래, 안다! 나도 알고 있단다… 저 곳은 죽음을 향한 문이고, 저 안에는 죽음이 기다린다는 것을. 그래도 나는 저 곳을 향해 가야 한단다. 내가 가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으면, 모두가 살지 못하고, 모두에게 소망이 없음을 알기에…”


돈에 눈이 멀어 죽음의 길인 줄도 모르고 나귀를 채찍질하며 달리려는 바람과 사랑에 눈이 멀어 죽음의 글임을 알면서도 그곳을 끝내 향하는 주님이 교차하는 사순절 아침...


눈먼 선지자 발람을 보며 거울 속에 비치는 나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쳐다 보며 자문해 봅니다. ‘나는 무엇에 눈이 멀어 있나?’

그리고 또 하나 하나님께 구합니다.


눈먼 믿음, 눈먼 경건이 되어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한 채 걸어가는 삶이 아니길 기도합니다. 나의 길을 돌이키시려, 나를 살리시려 나귀를 돌리시는데, 그 나귀를 향해 채찍으로, 막대기로 내리치는 우매함이 아니길 기도합니다. 길이 아님을 알면서도 가고 싶음을 포장하여 기도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말씀으로 씻겨지고, 닦여진 눈동자에 하나님 이뻐하시는 눈물꽃 피우며 이 땅을 걷는 맑은 그리스도인 되기를 하늘에 구합니다. 빛나는 날 되소서~



소의 걸음



<렘브란트, 발람과 당나귀, 1626년, 유채 63x46.5cm 파리 크나큰 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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