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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1.08.22 움오름 주일 설교 - "웃사가 아닌 오벧에돔으로"(삼하 5장~6장)

최종 수정일: 2021년 8월 22일




삼하 5장~6장

5장

1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2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3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4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5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6왕과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주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그들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7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8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9다윗이 그 산성에 살면서 다윗 성이라 이름하고 다윗이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10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11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12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13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두었으므로 아들과 딸들이 또 다윗에게서 나니14예루살렘에서 그에게서 난 자들의 이름은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15입할과 엘리수아와 네벡과 야비아와16엘리사마와 엘랴다와 엘리벨렛이었더라17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요새로 나가니라18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19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20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그들을 치고 다윗이 말하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 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 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부르니라21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치우니라22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23다윗이 여호와께 여쭈니 이르시되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24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공격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25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


6장

1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2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3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4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5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6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7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8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9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10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11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12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13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14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15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16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17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18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19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20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21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22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23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설교문


1. 성공 이후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둔 후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할까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을 16강으로 이끈 다음 거스 히딩크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픕니다(I am still hungry)."


히딩크가 이끄는 한국팀은 월드컵이 개최되기 전까지 가진 평가전에서 연이어 5:0으로 다른나라에 패했습니다. 그 결과 ‘오대영’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감독이었기에 사람들은 그저 16강에 드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습니다. 하지만, 히딩크는 그 이후까지 내다보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계획은 나름대로 철저한 조사와 준비 위에 세운 목표였습니다. 그 목표대로 대한민국 대표팀은 유럽의 강호 이탈리아와 스페인 마저 꺾고 4강에 드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성공 이후 어떤 이들은 히딩크처럼 “나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며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내닫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 누가복음 12장에 기록된 어리석은 부자처럼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9)며 현실에 안주하는 삶도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비롯해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오로지 육신적 즐거움에 집중된 삶을 살아갑니다.


다윗은 어떠했을까요? 사무엘하 5장 앞부분은 사울을 이어 왕이 되었던 이스보셋의 사망 이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대표하는 장로들이 다윗을 찾아와 왕으로 기름붓고 옹립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20여년 전 사울왕 휘하에서 다윗이 이스라엘 군사들을 이끌고 올렸던 큰 전과를 회상했습니다. 또한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주권자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음을 인정했습니다.


참으로 긴 세월이었습니다.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때로부터 무려 25년여의 시간이 걸려 이룬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얼마나 만감이 교차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이때의 다윗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사무엘하 5장 - 10장은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된 후 다윗의 행위와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모습들을 2주일에 걸쳐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와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경청해 보시겠습니다.



2. 7년 6개월 -하나님의 때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된 이후 다윗의 통치행위를 살펴보기 전에 한 가지 생각해 볼게 있습니다. 이전엔 별 의미없이 그저 외웠던 부분인데 이번에 그 숫자의 의미가 마음에 묵직하게 다가왔던 부분입니다. 그것은 헤브론에서 유다 한 지파의 왕으로 재위했던 7년 6개월입니다. 이게 왜 의미가 있느냐는 11지파의 왕으로 있었던 이스보셋의 재위기간과 같이 생각해 보시면 짐작이 가실 겁니다.


사울왕이 전사한 뒤 다윗은 헤브론으로 가서 유다왕이 되었습니다. 그때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던 사울의 군 사령관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중 남아있던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워 대립했습니다. 그 이스보셋이 몇년간 왕으로 있었습니까? 겨우 2년입니다. 그럼,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 왕으로 되기까지의 기간이 몇년이 남습니까? 5년 6개월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사무엘하 5장 앞부분을 보면, 이스보셋이 살해되고 난 뒤 금방 이스라엘 장로들이 와서 다윗을 왕으로 옹립한 것 같지만, 실은 5년하고도 6개월의 시간이 더 지났다는 겁니다.


이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제는 그때이다!”며 충언을 다했겠습니까! 전체 이스라엘을 접수하자고 간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다윗은 인위적으로, 또는 무력을 앞세워 이스라엘을 접수하려 하지 않았고, 그렇게 왕이 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약속이 순리와 자연스러움 속에서 이루어 지기를 바라며 그날 그날에 주어진 자기 삶을 충실히 살아 갔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5년 6개월이 더 지나 전체 이스라엘이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고 세우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늘 자신이 원하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요 7:6)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늘 우리의 시간표를 내세웁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때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때가 이루어 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그 자체가 믿음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이 부분을 제가 묵상하며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당연히 내년 3월이면 창립 7주년이 되는 움오름교회를 생각했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할 것 없이 어려운 covid-19 상황이지만, 맨땅에서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는 교회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이때를 어떻게 겪어가야 할지, 어떻게 하나님의 때를 살아가며 하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게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 뿐 아니라, 우리 가정 가정마다, 일터마다 하나님의 때를 준비하며 굳건히 기다려 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관여하실 때에만 모든 것이 완벽하고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 이런 하나님의 관여하심과 간섭하심이 있기를 구합니다.




3. 예루살렘과 블레셋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자 다윗이 한 첫번째 일은 예루살렘을 신앙과 통치의 중심, 수도로 삼은 것입니다. 신앙적인 중심지로 만드는 것은 사무엘하 6장에 나오기에 그 부분에서 다루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왜 많은 장소 중에 다윗은 예루살렘을 선택해서 수도로 삼았을까요? 이는 3가지 이유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남과 북의 분단을 잇기 위함이었습니다.

: 당시 예루살렘은 여부스 족속이 차지하고 있던 장소였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후부터 근 400년 이상 그곳은 이스라엘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의 미완성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을 차지하는 것은 완성하지 못했던 약속의 성취이자 남과 북의 끊어진 곳을 잇는 주요한 일이었습니다.


둘째, 지형적 측면에서 물이 풍부할 뿐 아니라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입니다.

: 예루살렘은 기혼 샘을 비롯해 2개의 풍부한 수원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주변이 깊은 골짜기로 되어 있었기에 그 자체가 철옹성과 같아서 적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했습니다. 근 400년 이상을 이스라엘이 여부스의 땅을 손도 대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견고한 요세이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셋째, 민족통합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 다윗이 유다지파였기에 유다지역에 수도를 정했다면, 차별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특정지파 지역을 수도화했다면, 이 역시 유다지파로부터 역차별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이런 이유로 다윗은 그 어떤 지파에도 속하지 않았던 땅을 정복하여 수도를 삼음으로써 모든 지파를 함께 어우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고 난 뒤 다윗은 두 차례에 걸쳐 블레셋과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사울의 전사 이후 거의 각 지파화 되어 있던 이스라엘은 블레셋 입장에선 별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통합된 국가가 될 뿐 아니라,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요주인물인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심각한 사안이었습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장차 자신들에게 어떤 근심이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군사를 일으켜 먼저 그 싹을 제거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서 기습적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 정남향에 있는 르바임 골짜기에서 블레셋과 두 차례 전쟁을 치르며 서로 다른 전략을 취해 승리했습니다. 한번은 그대로 나가서 일전을 치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매복하며 기다렸다가 치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번 모두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 응답하심을 받은 후 행동함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광야생활할 때부터 연습하고 습관화된 기도가 승리의 비결이요,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때의 승리를 경험하며 그곳 장소 이름을 ‘바알브라심’(삼하 5:20)이라고 지었습니다. ‘흩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견고한 대적을 앞서 행하시며 무찌르시고 흩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표현한 적합한 말이었습니다. 그날 마치 물이 뿌려짐같이 흩어진 블레셋은 다윗과의 두번의 전투 이후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오랫동안 근동지역을 강력하게 지배했던 세력의 위협은 끝이 났습니다. 헷족속(힛타이트)으로부터 전수받은 최신식 철기문명으로 당대를 호령하던 블레셋은 그렇게 저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블레셋의 땅’이라는 뜻의 팔레스타인(Palestine)이라는 이름 속에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4. 수레로 언약궤를


가장 강력한 적 블레셋의 위협이 제거되자 다윗은 바알레유다로 가서 하나님의 법궤를 옮겨오려 했습니다. 언약궤는 엘리 제사장 시절 블레셋에 빼앗겼다 되찾은 이후 줄곧 기럇 여아림으로 알려진 바알레유다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른바 법궤이송작업을 위해 단지 몇명의 제사장을 보내기 보다는 3만명이라는 대규모의 인원을 선발해 옮기도록 했습니다. 나름 최고의 예의를 다했으며,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전 이스라엘에 알리고자 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했던 이유는 세속적인 눈과 신앙적인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세속적인 눈으로 보자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김으로써 예루살렘을 정치적이고도 종교적인 중심지로 삼으려는 의도였습니다.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에 반해 신앙의 눈으로 보자면, 별로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은 시골동네에 수십년째 보관되어 있던 법궤를 자신이 거주하는 예루살렘으로 모셔 옮으로써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을 더더욱 고취하고 독려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이쪽으로 보든, 저쪽으로 보든 여하튼 다윗의 마음엔 하나님의 권위 아래 이스라엘을 통치하고자 하는 신앙적 열망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무엘하 6:2에 보니 다윗은 최초 법궤를 ‘메어 오려’했다가 이후 특별히 제작한 새 수레에 싣고 운반하는 것(3절)으로 바꾸었습니다. 수레로 법궤를 옮기는 책임은 그때까지 법궤를 보관하고 있던 아비나답의 아들들인 웃사와 아효가 담당토록 했습니다. 그때 아효는 앞에서 수레를 끄는 소들을 인도했고, 웃사는 수레 뒤를 따랐습니다. 그 양 옆에는 수많은 환영인파가 도열해 각종 악기들을 연주하며 법궤의 예루살렘행을 축하하며 환호했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와 보이던 그때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소들이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수레에 실린 법궤가 위태로와 보였습니다. 순간 뒤에서 따르던 웃사가 손으로 법궤를 잡았습니다. 법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려는 판단에서 취한 행동이었습니다. 웃사의 의도는 순수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불경한 행위로 보시며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게 하셨습니다.


한순간 축제가 비극으로 바뀌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당황한 다윗도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 않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율법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통해 명하신 율법(출 25:13-14)엔 언약궤를 만들면서 네 모서리에 고리를 달아 긴 나무 막대기를 끼워서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어 운반토록 하셨습니다. 제사장들조차 손으로 법궤를 만지지 못하게 하신 것은 당연하구요.


근데, 다윗은 최초 계획과 달리 언약궤를 수레에 실어 옮기도록 했고, 웃사는 그것을 아무 생각없이 손으로 만졌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왜 수레에 법궤를 옮기도록 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블레셋의 영향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스라엘로부터 법궤를 빼앗아 간 후 블레셋에서는 각종 전염병을 비롯해 온갖 난리를 겪었습니다. 법궤를 옮겨 두는 곳마다 재앙이 생겨 도저히 계속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새 수레에 법궤를 싣고 젖먹이 송아지를 둔 암소 둘에 멍애를 메어 이스라엘 땅으로 가도록 했습니다.


그들에겐 이스라엘 율법도 몰랐고, 또 그 법대로 옮길 제사장도 없었기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 수레였습니다. 그것을 다윗과 주변 사람들이 그대로 흉내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이들이 했던 행위를 하나님께서 용납하셨다고 해서 그 법 아래 있던 사람들에게조차 용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법궤를 운반하는 일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하나님의 계시로 보기 보다는 자기 시대의 윤리와 도덕으로 한정하려는 시도들도 이와 별 다르지 않습니다. 계시의 말씀을 특정한 문화에 동화시켜 나름 합리적인 유권해석을 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일에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5. 웃사와 오벧에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꼭 집고 넘어갈 사람이 있습니다. 웃사입니다. 과연 웃사는 억울하게 죽었을까요? 하나님의 벌하심은 과한 행위였을까요? 그게 아니라면, 왜 웃사는 죽어야 했을까요?


그냥 보기에 웃사는 억울합니다. 자기 일에 충실했고, 소들이 날뛰는 바람에 법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그저 잡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죽임을 당하다니 이건 너무 억울합니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앞서 가던 아효나 뒤에 따라가던 웃사나 모두 제사장의 아들들, 다시 말해 신분이 제사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던 블레셋이 했던 행위와 하나님의 법을 알고 실행해야 하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하는 행위의 무게가 같겠습니까? 같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웃사와 아효는 하나님의 명하신 율법에 따라 법궤를 돌보고 섬기던 제사장이었지만, 그들은 율법을 무시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무엘하 6:2에 최초 다윗이 법궤를 메어 오려고 했던 것을 수레로 대체한 것도 이들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분명 수레는 제사장이 메고 가는 것보다 효율적입니다. 노동력을 아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비인격적입니다. 웃사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이 만나는 인격을 비인격화 해버렸습니다. 무분별하게 이방문화를 받아들여 합리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했습니다. 소가 날 뛰자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법궤를 잡았다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어떨까요? 그것은 단순히 손으로 만진 행동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율법을 어떤 식으로 대했는지가 반영된 행위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돌발적인 행위가 아니라, 평소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습관이었을 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웃사의 죽음이 과연 억울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제사장으로서 직무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당연한 하나님의 심판 아닐까요?


웃사의 죽음을 바라보던 다윗의 마음은 당혹스러웠고, 착찹했을 겁니다. 지금껏 숱한 광야생활과 망명생활 가운데, 그리고 전장터에서 하나님은 자기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돌발적인 죽음과 심판 앞에서 얼마나 생각이 복잡했겠습니까! 당황한 다윗은 즉시 법궤운송작업을 중단시켰습니다. 법궤를 다시 임시 보관토록 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 집이 아니라, 가드출신의 사람, 다시 말해 블레셋 출신 오벧에돔의 집에 맡겼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을 비롯해 지켜봤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당황했고 두려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제사장이 죽어가던 때에 누가 감히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 집에 모셔 두려고 마음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블레셋이라는 이방인이었다가 이스라엘이라는 신앙사회로 옮겨온 오벧에돔이 아니었다면 누가 감히 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비록 신앙연륜은 턱없이 모자라고 아는 것은 일천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오벧에돔의 마음은 이스라엘의 그 어떤 이보다 더 맑았습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아셨기에 법궤가 머무는 석달 동안 하나님은 오벧에돔 뿐 아니라 그의 온 집에 복을 더하셨습니다(삼하 6:11).


잠시 등장했지만,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은 그가 맡았던 법궤랑 무척 닮은 사람입니다. 길이 110cm(2 규빗), 높이와 넓이가 60cm(1.5규빗)인 법궤는 당시 최고의 목재였던 백향목(cidar)으로 만들어 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광야에서 자생했던 가시나무가 그 재료였습니다. 목재로서의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크기와 넓이가 나올 수 없는 가시나무였기에 한 조각, 조각을 자르고 붙여서 길이 110cm, 높이와 넓이 60cm의 직육면체 상자로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안과 밖을 순금을 녹여 붙여 영롱한 빛으로 빛나게 했습니다. 이것이 법궤입니다.


하나님께선 보잘 것 없고 볼품없는 이 가시나무 안에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담게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이스라엘이 하찮게 보던 블레셋 출신 오벧에돔의 집에 거룩한 법궤가 보관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가시나무 같은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머물도록 하셨습니다. 이 거룩함이 빛나고 드러남으로써 하나님의 복이 머무는 오벧에돔의 집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드립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늘 준비되어 있는 우리의 시간표대로 하나님이 움직여 주시기를 바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때를 위해 우리를 준비해 가는 그리스도인 되기를 구합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이 관여하실 때에만 모든 것이 완벽하고 평화로울 수 있음을 아오니, 하나님~ 우리 삶에 관여하시고, 간섭하여 주옵소서.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이 산재한 인생이지만, ‘바알브라심’, 오랜 시간 우리를 괴롭혔던 블레셋은 흩어지게 하옵소서. 우리 앞서 흩으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도하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윤리와 도덕으로 한정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 오늘 나에게 주시는 계시의 말씀으로 받는 경건한 그리스도인 되기를 구합니다. 특정한 문화에 동화시켜 나름 합리적인 해석을 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일에 깨어 있는 말씀 앞에 살아 있는 신앙인 되게 하옵소서.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신앙과 말씀을 맘대로 재단하지 않게 하셔서 볼품없고 투박한 우리 인생 안에 거룩함을 담은 오벧에돔으로 매일매일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런 우리 삶으로 하나님의 복이 흐르고, 흘러 주위로 전해 가는 은총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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