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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1.08.08 움오름 주일 설교 - "슬픔을 노래하라"(삼상 31장~삼하 1장)

최종 수정일: 2021년 8월 15일







삼상 31장~삼하 1장

31장

1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2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3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2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3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4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5골짜기 저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쪽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에서 사니라6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7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고8그의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9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10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11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


1장

1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2사흘째 되는 날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는데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그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3다윗이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니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하니라4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너는 내게 말하라 그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하는지라5다윗이 자기에게 알리는 청년에게 묻되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6그에게 알리는 청년이 이르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기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데7사울이 뒤로 돌아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8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9또 내게 이르시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 청하건대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10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하니라11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12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13다윗이 그 소식을 전한 청년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하니14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15다윗이 청년 중 한 사람을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그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16다윗이 그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언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 하였더라17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18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19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20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21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니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 같이 됨이로다22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23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24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25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26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27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




설교문


1. 오늘과 내일 사이의 밤


신영복 선생의 시 <오늘과 내일 사이>에는 오늘과 내일이라는 사람의 삶과 그 사이에 존재하는 밤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제가 불행한 사람은

십중팔구 오늘도 불행하고,

오늘이 불행한 사람은

십중팔구 내일도 불행합니다.


어제 저녁에 덮고 잔 이불 속에서

오늘 아침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어제와 오늘 사이에는 '밤'이 있습니다.


이 밤의 역사는 불행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입니다.

밤의 한복판에 서 있는 당신은

잠들지 말아야 합니다.

새벽을 위하여 꼿꼿이 서서

밤을 이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상 31장에는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선택받았던 한 사람의 종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고, 또 왕이 되었지만, 그 자리를 잃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대중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어떻게 하면 대중의 지지와 환호를 받을 것인가에 목말라 했습니다. 이런 그의 삶에는 행복이 없었습니다. 그에겐 어제도 불행했고, 오늘도 불행했고, 그의 종말 마저도 불행으로 마감되었습니다. 그에게 되돌릴 수 있는 수많은 기회와 시간이 있었지만, 그는 애써 외면했습니다. 자신의 내면과 싸우지 못하고, 바깥의 적들과 싸우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렇게 40년을 보낸 그는 최후의 전날 밤마저도 변장한 채 사술에 의지하다 비참한 종말을 맞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밤의 이야기입니다.


신영복 선생이 살아 계실 때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을 평가하는 데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거예요. 그 사람이 세속적 가치에서 얼마나 뭘 이뤄냈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인생에 시대가 얼마나 들어와 있는가도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시대를 정직하게 호흡하고, 시대의 아픔과 함께하는 삶,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요? …”



2. 삶의 총평을 듣다


사울의 삶 또한 여러 가지 기준으로 평가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세속적 기준으로 보자면, 그는 상당히 뛰어난 왕이었습니다. 사사시대에서 왕정통치라는 변화의 시기에 그는 무난하게 제도를 안착시켰습니다. 필요할 때 모이는 예비군 성격의 부대를 상시부대로 만들어 외부 적들로부터 국가를 방어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초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부터 시작해서 남쪽의 아말렉 뿐 아니라, 당시 최강의 적이었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도 혁혁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기준으로 사울을 보면 그는 어떻습니까? 역대상 10장은 오늘 본문과 같이 사울의 죽음을 기록하며 그가 왜 블레셋에 패전해 길보아 산에서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역대상 10:13-14입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사울의 삶은 세속적으로는 더 없이 찬란하고 환호받는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여호와께 범죄’한 삶이었다며 대표적인 그의 죄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어긋난 신앙은 신접무당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사술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왜 신접무당에게 물으러 갔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방금 읽은 역대상 10:14은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신접한 무당에게 의뢰하기 이전부터 줄곧 이어온 그의 삶에 대한 총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전생애를 간략하게 보여주는 이런 유우머가 있습니다.


천지창조 때 하나님이 소를 만드시며 소에게 "너는 60년을 살아라. 단 사람들을 위해 평생 일만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소는 죽도록 누군가를 위해 일하는 삶이라면, 30년은 버리고 30년만 살겠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개를 만드시며 "너는 30년을 살아라. 단 사람들을 위해 평생 집을 지켜야 한다”고 하시자 개는 15년은 버리고 15년만 살겠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 원숭이를 만드시며 "너도 30년을 살아라. 단 사람들을 위해 평생 재롱을 떨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원숭이도 15년은 버리고 15년만 살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시며 "너는 25년만 살아라. 단, 너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머리를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이 하나님께 아뢰기를 "그렇다면 소가 버린 30년, 개가 버린 15년, 원숭이가 버린 15년을 다 제게 주십시요"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25살까지는 주어진 시간을 그냥 저냥 살다가, 소가 버린 30년으로는 55살까지 일만 하고, 개가 버린 15년으로는 퇴직 후 집보기로 살고, 원숭이가 버린 15년으로는 손주 보며 재롱떨며 산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공감이 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삶이 짐승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 시대를 정직하게 호흡하고, 시대의 아픔과 함께하는 삶을 구현해 가지 않는다면 이 시대에 사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 시대의 아픔을 외면한다면, 아무리 긴 생을 산다고 한들 우리 삶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하나님의 총평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3.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애도


전쟁에 패하고, 요나단과 다른 아들들을 포함한 수많은 이스라엘 군사들이 전사했습니다. 사울은 화살에 맞은 자신의 상처를 보며 회상불가라는 생각이 들자 자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습니다. 블레셋에 사로잡혀 모욕과 고문을 받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가므로 이스라엘 성읍들은 절로 블레셋 군사들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사울이 죽은 다음 날 이스라엘 군사들의 군장을 벗기려 전장을 돌던 블레셋 군인들은 사울과 세 아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사울의 머리를 베고 갑옷을 벗겨 전리품으로 취했습니다. 사울의 시신을 온 블레셋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벧산 성벽에 못 박아 전시했습니다. 사울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모욕을 죽어서까지 당하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 하나 나서 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백성들이 없었습니다. 그 또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적진에 들어가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밤새 벧산으로 달려갔습니다. 성벽에 매달려 있던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신을 몰래 내린 후 야베스로 가져가 화장한 뒤 뼈를 거두어 장사지내고 7일간 금식하며 애도했습니다. 당시 유대 문화 속에서 시신을 화장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아마도 더이상 왕의 시신이 훼손되지 않기를 바랬기 때문일 겁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당시 상황은 모두가 블레셋이 두려워 숨고 도망가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유태인도 아니면서 적진까지 들어가 사울과 아들들의 시신을 가져와 장사지냈을까요? 그 대답은 사무엘상 11장에 기록된 사건으로 거슬러 갑니다. 사울이 왕이 되자 마자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암몬왕 나하스에 의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사울이 군사를 일으켜 암몬을 물리치고 길르앗 야베스를 구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려 40년 전 일이었습니다. 숫한 시간이 흘렀는데도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은혜를 잊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 생명을 걸고 시신을 거둬 장사지냈습니다. 죽은 이에 대한 예의를 다했을 뿐 아니라, 받은 은혜에 반응하기를 주저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먼저 간 이에 대한 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진정한 애도였습니다.



4. 죽음을 이용하는 자


사울이 죽을 당시 다윗은 시글락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참여할 뻔 했던 위기와 아말렉의 침략이라는 비통을 극복한 후 안정을 찾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가 시글락에 머문 지 3일째 되던 날에 이스라엘 전장에서 한명이 찢어진 옷을 입고 온 몸이 흙먼지를 덮어 쓴 채 내달려 왔습니다. 아말렉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윗을 보고 엎드려 절하며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알렸습니다.


다윗은 그에게 어떻게 해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아는지를 물었습니다. 아말렉인은 그가 우연히 올랐던 길보아 산에서 보았던 목격담을 쏟아 놓았습니다. “사울은 자기 창에 기대어 있었고, 그 뒤를 블레셋 병거와 기병이 추격하고 있었는데…” 그런 와중에 사울이 자기를 보더니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는 겁니다. 블레셋 사람에게 잡혀 수치를 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아말렉 사람은 자신이 보기에 사울이 회복할 가능성이 없었기에 그의 원대로 자신이 사울을 죽이고, 그 징표로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갖고 왔다고 했습니다. 아말렉 사람의 진술엔 다수의 진실과 끝을 살짝 바꾼 거짓이 섞여 있었습니다. 사울이 중상을 입었던 것도 맞았고, 죽여 달라고 했던 것도 맞지만, 그에게 부탁한 것이 아니라, 사울의 무기 든 시종에게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사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아말렉 인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말렉 사람이 사울을 죽였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사울의 죽은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왜 이 사람은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다윗에게 거짓말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거짓말을 통해 자신이 받을 이익과 혜택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며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가져가면 다윗이 분명 기뻐하며 굉장한 상을 내릴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게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십수년간을 광야를 헤매며 도망자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속적 표현을 빌리자면, 다윗에게 사울은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원수를 대신 죽여 주었으니 다윗이 기뻐하며 상을 내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말렉 사람의 이런 기대와 달리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들은 다윗은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옷을 찢고, 저녁 때까지 슬피 울며 금식했습니다(삼하 1:12). 그리고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고 이용한 아말렉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마도 그 명령 앞에서 아말렉 사람은 “사실은 제가 죽인 게 아닙니다. 목격했을 따름입니다. 살려 주십시오”라고 호소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내린 명령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타인의 비극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사람은 함께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IMF 당시 모든 물가가 치솟고 수많은 사람들이 길바닥으로 나앉을 때 어떤 이들은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을 이용해 더 큰 부를 일구었습니다. 복잡하던 강남대로에 다니는 차가 한산하자 오히려 편하다고 즐거워 했다는 사람들은 동시대의 아픔을 가슴에 담지 못하는 졸부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늘 본문 속에서 만나는 아말렉 사람과 하등 차이가 없습니다. 무릇 사람은 누군가의 슬픔에 같이 슬퍼할 줄 알고, 아픔에 같이 아파할 줄 알아야지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더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5. 다윗의 애도


사람이 누군가를 잃은 상실을 애도하는 데는 3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는 것’입니다.

: 유교적 문화 속에서 우리는 우는 것을 극도로 금지당해 왔습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여성 주도권 금지를 강조한 면이 강함).’, ‘남자는 함부로 울지 않는다’… 등의 말을 들으며 울음이 금지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친구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 지으시며 참 인간의 삶에는 눈물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이 흘리는 눈물에는 슬픔을 정화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충분히 슬퍼하고 마음껏 울므로써 슬픔이 흘러갈 통로가 만들어 지고, 상실의 아픔이 씻겨 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충분히 울어야 합니다.


둘째, 슬프다고, 힘들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상실 앞에 우리는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약한 존재입니다. 그럴 때 자신의 약함을 애써 감추지 말고 드러내야 합니다. 억지로 참으며 혼자서 감내하지 말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필요하다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시간을 갖고 떠나 보내야 합니다.

: 우리 문화 속에는 “빨리”라는 의식이 내재해 있습니다. 이것은 은연 중 사람을 떠밉니다. 하루 속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잡아야 합니다. 슬픔은 쓸데없는 감정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식들이 끝없이 사람을 다그칩니다. 애도에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무론하고 상실에 대한 최고의 명약은 ‘시간’입니다. 시간이 지나야 몸에 난 상처가 아물듯 마음의 상처 또한 회복됩니다. 세월이 필요합니다. 상실로 난 상처는 세월의 토닥임 앞에서 치유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슬픔 앞에 서서 슬픔과 직면해야 합니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냈습니다>는 책 속에서 채정호 작가는 이렇게 애도를 표현했습니다.


“애도의 핵심은 슬픔을 직면하고 겪어내는 것입니다. 애도를 피하거나 빨리 끝내려는 노력은 슬픔에서 도망치는 것과 같습니다. 애도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더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뜻입니다. 어차피 통과해야 할 슬픔의 터널입니다. 터널을 통과하지 않고 빛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이 터널을 무사히 통과한 뒤, 새로운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장에서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잃은 상실을 위 3가지 기준대로 표현했습니다. 소리내어 울었고, 금식하며 애도했습니다. 상실의 슬픔을 숨기지 않고 노래로 표현했습니다. 3번이나 “용사들이 엎드러졌다니,엎드러졌다니”(삼하 1:19. 25, 27)라며 사울과 요나단이 당한 참변에 대해 슬퍼했습니다.


나아가 다윗은 자신이 지은 애가를 유다 사람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사울과 그의 유력한 아들들이 전사했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다윗의 눈치를 보았을지 짐작이 됩니다. 분명 국가적, 민족적으로 비극이고 슬픔임에도 불구하고 다음 대권주자의 눈치를 보며 슬퍼도 슬픈 티를 내지 않으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이럴 때 다윗이 친히 지어서 부르게 한 애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껏 슬퍼하고, 소리내 울며, 애도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다윗 개인에게서 시작한 애가는 시글락 전체에 퍼지고 곧 이스라엘 전역에서 울려 났을 겁니다. 그 애가 속에 깊이 내재한 탄식은 한 민족의 인간다움을 회복시켜 갔을 겁니다. 참혹한 상실과 울음 밑바닥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며 새로운 소망으로 내일을 살아가도록 했을 겁니다.


오늘 우리 삶에는 이런 애도가 있습니까? 이런 탄식이 있습니까? 상실과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과 만나는 이 감격스런 아픔이 있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슬픔’이라는 매우 섬세하고 강한 감정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인간다움의 표징이며, 하나님과 잇닿아 있는 감정선임을 확인합니다. 그러기에 이 시간 하나님께 비옵기는 상실과 아픔이 상존한 이 땅에서 우리가 슬픔과 만날 때 우리 속에 더 깊이 들어오시기를 청합니다. 마음 속 심연에서 복잡한 감정들의 부유물에서 벗어나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를 더 깊이 만나기를 구합니다.


또한 우리 삶이 우리 시대와 별개의 삶이 아닌 시대의 아픔과 함께하는 삶이기를 원합니다. 시대의 아픔으로 하나님 앞에서 울고 기도하며, 회복을 노래하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깊은 탄식은 우리 시대를 하나님 앞에 돌아서게 하는 시편의 노래, 다윗의 애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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