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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1.01.24 움오름 주일 설교 - "그물을 들 수 없더라"(요 21:1-6)










요한복음 21:1~6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4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5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6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설교문


1. “없나이다”


지난 수요일 핸드폰의 전원을 끄고 다락방으로 올랐습니다. 연말부터 연초에 걸쳐 이어진 각기 다르면서도 닮아있는 일들 앞에서 힘겨웠습니다. 말로 잘 설명할 수 있고, 말로 진심을 표명하고,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은 하면 할수록 또 다른 감정의 불을 지폈습니다. 원치 않은 화가 일었습니다. 도저히 제 힘으로는 풀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어두운 다락방 기도의자에 의탁해 무릎을 꿇고 고요히 제 영혼의 무게를 하나님 앞에 달았습니다.


오르락 내리락 하던 감정의 등락 속에서 제 수준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문하듯 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 2020년만 하더라도 목표에 1/2 밖에 이루지 못했지만, 성경을 2번 통독했습니다. 지금껏 나름 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읽은 만큼 저는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평소의 삶이 기도여야 한다며 말했던 것에 비춰보면 수도 없는 기도를 드렸을텐데, 저는 그 기도만큼 괜찮은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형편없는 자체평가표 앞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부정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결과를 보며 지금껏 무엇에 열광했고, 무엇에 열중했는지 말문이 막혔습니다. 혹자는 이런 제 모습을 보며 “뭘 그리 자신에게 박하게 구느냐?”고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목회자가 구도자이길 포기하지 않은 한 정직한 자기평가 앞에 서야함이 마땅치 않겠습니까? 마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무질서가 더해지는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entropy)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이 계속되는데도 흐트러짐이 더한다면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렇듯 인간의 노력과 애씀이 허무하다면 어떻게 방향을 수정해야 할까요?


열은 결코 차가운 곳에서 뜨거운 곳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빛 또한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비추지 않습니다. 저는 빛이고, 열이신 주님의 존재에 기대어야 했습니다. 내가 이만큼 애썼다는 인간의 의가 빛나는 곳에서는 소망이 자라지 않습니다. 이러한 삶은 아무리 반복된들 이름만 그리스도인이란걸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요즘 서초동 주변엔 악기를 메고 걸어가는 고3 입시생들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띕니다. 대입실기가 한창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절감하시겠지만, 고3이 되었다고 저절로 실력이 올라가고 잘 하는 학생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매일매일 선생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음정을 잡고, 화음과 리듬을 만들어 가는 지루한 반복을 거쳐야만 조금씩 나아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어제의 자기를 딛고 올라가는 학생만이 목표로 한 곳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지났다고, 믿은지 좀 되었다고 저절로 더 나은 그리스도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더 닮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이 그렇듯 믿음 안에도 ‘저절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만지시도록 자신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다듬어 가시도록 맡겨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에 앞서 우리 자신이 탄 배가 비어있음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고백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나이다”


한편으론 ‘내가 지금까지 한게 있는데’, ‘내 나이가 몇인데’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자신을 들여다 볼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자신의 무게를 하나님 앞에 달아볼 때 무질서의 법칙을 역행하는 하늘의 법칙에 닿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각자의 이름을 넣고 묻고 답해 보실까요?


“ㅇㅇ야~ 너에게 고기가 있느냐?”

“없나이다”



2. 실패의 밤이 아침과 만나듯


7명의 제자들은 동이 틀때까지 그물질을 했지만, 단 한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있는 힘을 다 짜내고 온갖 시도를 다 해보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습니다. 자리를 잘못 잡아서 그럴까 싶어 자리를 옮겨 보았습니다. 어구가 나빠서 그런가 싶어 그물도 바꿔 보았습니다. 노력이 부족한가 싶어 힘을 내어 한번 더, 한번 더 그물을 던지다 보니 날이 샐 정도였습니다.


상황이 이 정도 되면 ‘안 잡히는게 이상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는데도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상태입니다. 이쯤 되면 묘하게 닮아있는 과거가 생각났을 겁니다. 제자들의 그 과거를 찾아서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눅 5:1-11입니다.


1절: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절: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절: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절: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절: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절: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절: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날도 아침이었고, 한마리의 물고기를 잡지 못했던 날이었습니다. 눅 5:5 베드로의 표현을 보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나 잡은 것이 단 하나도 없는 허무한 아침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아침’이란 단어와 ‘허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밤이 안긴 허무가 아침과 조우했을 때 얼마나 당혹스러웠고, 또 참담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참담함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그들로 인생의 목적을 바꾸게 하는 기점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전환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인생의 참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따르는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때로 평소와 다른 상황이 우리를 특별함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던 긴밤이 아침과 이어지듯 우리의 실패가 주님과 대면케 합니다.


통상 사람들이 삶에 기대하는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조건이고, 다른 하나는 노력입니다. 우선 조건이 좋으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용기와 신념의 성공신화가 더해져 노력만 하면 만사에 안 될 일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삶이 이렇습니까? 삶은 이처럼 고분고분하지도 만만치도 않습니다.

조건이 좋은데도 안되는 일이 있고, 온갖 노력을 다 했는데도 실패하는 일이 잦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겁니다. 요 15:5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삶을 살아가며, 영적여정을 걸으며 이렇게 자신의 무능함을 깨치는게 영성입니다. 그게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무리 해도 안되는 것이 있음을 알면 과거의 방식을 버려야지요! 버리면, 실패가 주님 안으로 점점 더 들어가게 합니다. 그 결과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무익하다고 생각했던 조각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롬 8:28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3. “배 오른편에 던지라”



지난 2주 동안 한장의 그림이 계속 제 마음에 자리했습니다. 과거엔 렘브란트의 그림이라고 했지만, 현재엔 렘브란트 추종자의 그림이라고 일컬어 지는 이 작품의 이름은 <큰 창 드리운 방 탁자에서 독서하는 남자, A Man seated reading at a Table in a Lofty Room>입니다.

화면의 그림을 보십시오. 높다란 천장과 그에 걸맞는 길죽하고도 큰 창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들어온 빛이 온통 캄캄한 방의 한 부분을 환히 밝힙니다. 방 안에 다른 일체의 조명은 없습니다. 창으로 드리운 빛이 아니었다면 방 안은 어떤 사물도 분간치 못했을 겁니다. 그 방 창가에 모자를 쓴 듯한 한 남자가 벽에 기댄 채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읽는지, 왜 더 밝은 밖에서 읽지 않고 어두운 방 창가의 빛에 기대어 읽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창에서 들어온 빛이 방 안의 어둠을 밝혀줄 뿐 아니라, 어둠과 밝음의 경계를 그어주는 것처럼 묘한 깨달음과 위안이 그림을 통해 다가왔습니다. 저 짙은 어둠 속에서도 한줄기 빛에 의지해 책을 읽는 사람은 분명 어둠 속에 있되 어둠을 살지 않을 겁니다. 빛에 기대어 읽은 책만큼 그는 어제의 슬픔과 실패를 딛고 일어설 겁니다.


엽서에 담겨있는 해당 그림을 책상 위에 두고두고 보다보니, 어느듯 제가 그 그림의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이 긴 어둠 속에서 밤을 보낸 제자들 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어두운 방으로 빛이 들어오듯 주님은 어둠 속 제자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주님의 이 질문은 마치 범죄 후 무화과 나무 아래 숨어있던 아담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연상케 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실패와 범죄로 하나님의 눈을 피해 숨어 있던 아담을 찾듯이 주님은 당신께 멀어진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21:6입니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어떤 이들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는 주님을 말씀을 이렇게 적용합니다. “믿음이란 우리 인생의 왼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일면 은혜스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이 밤새 고기잡이 하며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보지 않았겠습니까? 배 오른쪽이건, 왼쪽이건, 앞 뒤 사방팔방 가리지 않고 모두 던져 보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간단명료합니다. ‘순종’입니다. 순종이라고 하니 진부한 결어같지만, 분명합니다. 순종입니다. 이 간단하고도 진부한 것 같은 한 단어가 그리스도인의 성공과 실패, 성숙과 품격을 나누게 합니다. 생각나시는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정당한 부모의 말씀에 불순종을 거듭하는 자식 치고 올바르게 자라는 사람 보셨습니까? 기꺼이 순종하는 자녀치고 잘못된 사람 보셨습니까? 골 3:20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왜 성경이 부모에게 순종을 강조합니까? 왜 그것을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까? 부모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보이는 표식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부모에 불순종하면서 하나님을 공경하고 순종한다는 것은 거짓이요,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양손을 한번 펼쳐 보십시오. 듣지만 마시고, 양 옆으로 쭉 뻗어 보십시오. 삶의 성공과 실패는 이처럼 배 한 칸 사이입니다. 제자들이 탔던 배의 왼편에서 오른편까지 거리는 불과 몇 발자국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순종과 불순종의 거리도 우리가 양손을 뻗은 이 한칸 사이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천양지차입니다.



4.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눅 5:1-11을 앞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닮은듯, 닮지 않은 것 같은 요 21장 사건과의 가장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 먼저 눅 5:6을 읽고 그 다음에 요 21:6 후반절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눅 5:6입니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다음 요 21:6 후반절입니다.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앞선 눅 5장의 상황은 물고기가 많아서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그런데, 요 21장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물고기가 많아서 그물을 들 수 없는 지경인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두 차이가 어디에서 기인되었을까요? 눅 5장에서는 고기를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고 하실 때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고 그물을 던졌습니다. 눅 5:5입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베드로가 한 말의 뉘앙스를 최대한 살려서 다시 해석해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밤새도록 해봤지만, 허탕만 쳤습니다. 당신이 말씀하니 내가 한번 해보기나 하지요”. 베드로의 말은 기꺼운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주변에 예수님을 둘러 싼 군종에 압도되어 마지못해 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엄청난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물론 그물이 찢어져 가면서 말입니다.


이에 반해 요 21장의 상황은 다릅니다.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목소리에 제자 중 어느 누구하나 대꾸하거나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렇게 순종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요 21장의 상황을 겪으며 눅 5장의 일을 떠올렸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은 이렇게 어제의 나를 버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절지동물·선충류 같은 무척추동물이 성장이나 변태를 하기 위해 외골격을 벗어버리는 탈피(ecdysis)를 거치듯 사람도 과거의 실패를 딛고 나아가야 자랍니다. 어제의 잘못된 습관을 지닌채 아무리 피나는 연습을 해도 연주가 발전이 없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혹 아픈 상황 가운데 계십니까? 말을 하면 할수록 관계가 틀어지고 더 어려워지십니까? 억울하고 분해서 잠못 이뤄 하십니까? … 과거에도 이러신 적이 있었습니까? 그때엔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과거의 방법이 현재에는 통하지 않고 있습니까?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으실 수 있으나 오늘 말씀의 장면 속으로 우리 상황과 감정을 가지고 나아가셨으면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삶의 탈피의 때입니다. 이건 하고 말고의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때가 되었는데도 탈피하지 않은 뱀은 본인을 싸고 있는 허물에 갖혀 고사당하듯이, 우리 역시 버리지 못하고 고집하는 틀 때문에 소멸되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소망이 있는것은 아프지만, 우리가 고집스런 우리의 방식과 방법을 내려놓을 때 빛이 들어옵니다.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결과가 달라집니다. ‘내 인생’,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신 분의 것(행 17:25)입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 인도하심에 맡기며 순종하는 것이 우리 삶을 마지막까지 향기롭게 세워가는 일체의 비결입니다. 우리 생의 그물을 가득 채우는 길입니다. 이 일체의 비결을 깨달은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 1820-1915) 여사는 1874년 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에 다음과 같이 담았습니다.


1.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2.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3.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그의 사랑 어찌 큰지 말로 할 수 없도다

성령 감화 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믿음 안에 ‘저절로’는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하며 날마다 우리 자신을 주님께 내어놓는 그리스도인 되길 원합니다. 우리 자신의 무능을 깨달아 날마다 주님 안으로 점점 더 들어가길 원합니다. 간단하고도 진부한 것 같은 순종이 그리스도인의 성공과 실패, 성숙과 품격을 나누게 함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기꺼운 순종의 삶 살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며 순종하는 함으로써 메마른 반석에서도 샘물을 내시는 하나님의 은혜 누리며 이 땅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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