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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0.12.6 움오름 주일 설교 -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 20:24-29)-대림절 2주









요한복음 20:24~29

24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8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9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설교문


1. 망원경, 양탄자, 사과


오늘 예배순서지 <움이 트는 생각>에 ‘공주와 삼형제’라는 탈무드 이야기를 실으며, 이렇게 질문드렸습니다. “만약에 내가 공주의 아버지라면,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왜 그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시기 전 다시 한번 그 이야기를 되새김해 보겠습니다.


어떤 나라에 왕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예쁜 외동 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중한 병에 걸려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용하다는 의사들이 찾아와 치료해 보았지만, 공주의 병은 좀처럼 낫지 않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병이 깊어만 가자 왕은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쓰서 궁궐 앞에 붙였습니다.

“공주의 병을 고쳐주는 사람은 사위로 삼을 것이며, 이후 왕위를 물려주겠다.”


그 무렵, 이 나라의 시골마을에 삼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자 보물이 있었는데,

첫째는 먼곳을 바라볼 수 있는 망원경,

둘째는 하늘을 날수 있는 양탄자,

셋째는 어떤 병이라도 고칠 수 있는 사과를 갖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첫째가 망원경을 살펴보던 중 궁궐 앞의 포고문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둘째가 양탄자를 타고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왕궁에 삼형제가 도착하자 셋째가 마법의 사과를 공주에게 먹였습니다. 그러자 공주의 병이 거짓말처럼 나았습니다.


너무나 기뻤던 왕은 잔치를 베풀고 삼형제의 공을 치하하며 공주의 신랑을 선택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첫째는 자신의 망원경이 없었다면 그 사실을 몰랐을 것이라며 자신이 공주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둘째 또한 자기 양탄자가 없었더라면 그 먼 곳을 곧장 갈 수 없었을 거라며 자신이 선택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아무리 그래도 마법의 사과가 없었다면 공주의 병을 고치지 못했을 꺼라며 자신이 공주의 신랑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왕은 셋째를 사위로 선택하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보물이 남아 있지만, 셋째는 자신의 보물을 주어 남아 있지 않다.”


가족님들은 왕의 선택이유에 얼마나 동의하십니까? 앞서 질문드린 것처럼 “만약에 내가 공주의 아버지라면,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왜 그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지난 12월 3일(목)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었습니다. 수능 전에도 몇몇 학교에서는 논술시험을 실시했지만, 이후에도 논술시험이 있을 예정입니다. 논술을 지도하던 한 선생님이 오늘 우리가 나눈 ‘공주와 삼형제’라는 탈무드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전하며 어떤 이를 선택할지 물었습니다. 물론 질문한 선생님은 은근 셋째를 기대하며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의외의 대답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전 첫째라고 봐요. 아무리 다른 것들이 있었지만 처음에 보지 못했다면 공주는 죽었을 거잖아요.”

“그런 게 어디 있어. 망원경과 양탄자는 다시 사용할 수 있잖아. 그런데 막내는 사과를 공주에게 먹여 버렸잖아. 막내가 불쌍해.”

“맞아. 나라면 막내를 택하겠어. 막내는 자신의 모든 걸 공주에게 주었잖아. 그게 사랑이잖아.”


선생님은 수업이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웃음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그건 가식이야. 난 빈털터리인 막내 싫어. 망원경이나 양탄자를 가진다면 돈도 많이 벌 수 있잖아. 우리 솔직해지자구.”

“그래도 막내를 택할 거야. 내가 공주니까 돈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 아니니?”

그때 한 아이가 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새~앰, 꼭 한 명만 선택해야 해요? 세 명 모두 데리고 살면 안 되나요?”


세대의 생각이 녹아든 답변 같습니다. … 어떻습니까? 누구를 선택하셨습니까? 왜 그를 선택하셨습니까?



2. 너를 위하여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해봅니다. 유대인들은 왜 ‘공주와 삼형제’라는 이야기를 <탈무드>에 기록했을까요? 어쩌면 이 이야기를 통해 후손들에게 희생적인 사랑의 소중함을 가르치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자신이 가진 전부를 주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한 셋째를 통해 그것이야말로 사랑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진실한 사랑은 반드시 희생을 내포합니다. 주위를 둘러 보십시오. 가로수의 무수한 잎들의 희생이 없었으면 나무가 자랐을까요? 한 알의 밀이 썩지 않았는데, 들판의 무수한 곡식을 거둘 수 있었을까요? … 사람 사이도 이와 같음을 깨달은 김남조 시인은 ‘너를 위하여’라는 시를 통해 이렇게 그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너를 위하여>

-김남조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뜨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오늘은 지난주일에 이어 대림절 둘째주일입니다. 대림절이란 무엇입니까? 다음백과사전은 대림절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탄생일 전 4주 동안의 기독교 절기. 3~4세기 갈리아와 스페인 지역에서 시작하여 6세기에 이르러 로마 교회의 교회력에 포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고 재림을 기다리는 데 의미가 있다. 중세에는 고행, 금식, 금욕이 주된 내용이기도 했으나, 종교 개혁 이후 근대에 이르러 기쁨의 절기라는 본래의 의미를 되찾았다.


백과사전의 요약처럼 대림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다’(adventus)는 본래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기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속엔 우리가 잊지말고 기억해야 할 보다 근본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기쁨을 위해, 아니 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자기비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소중한 것 무엇이나’ 주시며 마침내 당신의 생명까지도 내어주신 주님의 자기포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대림절은 단순히 주님 오심을 기뻐하는 것을 넘어서 주님의 자기비움을 기억하는 겁니다. 주님의 자기포기를 닮아가는 겁니다. 그것이 진정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기뻐하고,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함이요, 본분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더 사랑하기 위해 나를 포기해 보셨습니까? 누군가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나를 비워보셨습니까? … 그리고 이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십니까?”



3.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그 고백의 이유?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몇주째 나누는 바와 같이 부활하신 주님은 꽁꽁 걸어 잠긴 문을 뚫고 2번이나 제자들 가운데 찾아오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무론이거니와 첫번째 자리에 없었던 도마에게도 주님의 나타나심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분이 살아오셨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충격적인 것은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결과 도마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요 20:28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가 이렇게 고백한 이유는 2가지 때문입니다. 첫번째는 ‘평강’을 인사하신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때 주님이 사용하신 언어는 ‘용서의 언어’였습니다. 죽음의 고통과 어둠을 뚫고 오신 예수님은 복수자가 아니라 용서하는 이로 제자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는 십자가 아래에서 형집행을 하던 로마 백부장이 충격을 받아 말했던 다음의 고백을 연상케 합니다. 막 15:39입니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식민지 청년이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던 사형집행관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과연 말이 됩니까? 가당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백부장이 그렇게 말한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고통 가운데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놀리며 저주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던 주님의 언어 때문이었습니다. 눅 23:34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잘잘못을 따지고, 엄중한 벌을 내리셔야 할 주님께서 평강을 말씀하셨습니다. 복수가 아닌 용서의 선언이었습니다. 그것은 못자국으로 움푹 파인 손바닥으로 토닥이시는 용납의 언어였습니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도마에겐 충격이었습니다.


두번째로 도마에게 충격이었던 것은 “못자국난 손을 봐라.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에 넣어 봐라. 그리하여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들으며 도마는 도저히 그들의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부활을 전하면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제자들의 삶과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도마는 자신이 직접 주님의 상처를 보고,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믿고 싶지 않다가 아니라, 믿고 싶다는 그의 간절한 소망의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마의 그 말은 분명 주님이 계시지 않은 자리에서 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 말을 정확하게 재생하시며 당신의 상처난 자국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구나 상대에게 자신의 장점과 강점을 보이려고 하지, 상처를 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얕잡아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용서의 언어와 더불어 당신의 상처를 먼저 보이셨습니다. 약하고 무능해 보일수도 있는 그 상처를 보이시며 도마에게 믿음을 권하셨습니다. 사랑했기에 가졌던 상처, 사랑했기에 아팠던 흉터를 보이시며 믿는 자가 되라 하셨습니다.



4. 당신의 상처들은 어디 있는가?


토마시 할리크(Tomáš Halík)는 체코의 가톨릭 신부이자 신학자입니다. 할리크는 그의 책 <상처 입은 신앙>의 제 10장 ‘아름다운 신부, 가엾은 교회’를 통해 인간 속의 상처가 의미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다시 한번 마르티노 성인의 이야기를 떠올려 봅시다. 그는 빛나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위장한 교활한 그리스도의 적을 알아차렸습니다. 그 형상에는 상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훌륭한 지도자와 신학자 그리고 관리자들을 만난다면 어떨까요? 더불어 자선, 정치, 문화 영역에서 이론의 여지 없는 공로로 인해 빛나는 성공하고 매우 영향력 있는 교회는 어떻습니까? 그림자도 오점도, 흠도 고통스러운 흉터도 없는 교회는 또한 어떻습니까? 만약 그와 같은 교회를 만난다면 나는 소스라치며 도망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악마의 속임수라고 확신합니다. 내가 그러한 교회를 갈망하게 된다면 나는 구마기도부터 할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겸손과 거룩함으로 가득 차고, 어느 누구도 분노를 살 일을 하지 않는 복음적인 가난한 교회!!! 그렇습니다. 그 아름다운 신부, 성경에서 읽은 ‘어떠한 흠도 없이 거룩하고 나무랄 데 없는 교회(엡 5:27)를 만난다면, 이번에는 나는 지옥의 분장사들이 더 많이 노력했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상처들은 어디 있는가?”라고 묻겠습니다. 우리의 인간적 약점, 죄 그리고 얕은 믿음의 모든 표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당신 말씀의 씨앗을 뿌렸고 인간을 빚어냈던, 늘 먼지투성이고 진창인 인간의 대지는 어디 있습니까? 당신은 말씀을 보내 당신 아들의 살이 되게 했고, 또한 신비로운 몸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여전히 영원히 불결하고 난잡한 대지 위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와 나와 같은 인간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연인인 교회에 대해 지켜야 할 신의의 본질은 어쩌면 인내가 아닐까요? 그 인내는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그것은 시간의 끝에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거룩하고 나무랄 데 없는 교회를 보고 경함할 것이라는 헛된 약속에 저항할 힘을 주지 않습니까? (번역문을 다소 의역하여 다듬었음)


토마시 할리크의 책을 읽으며 저 자신의 욕망과 많이 다투었습니다. 이 땅의 크고 작은 교회를 떠나 목회자 치고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가 좀 더 순전하고, 좀 더 헌신된 신앙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때로 목회자로서의 무능함과 한계를 절감하면서도 교회가 더 앞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 별별 생각을 다합니다. 그러다 안되면, 때로 화장을 넘어 분장을 꾀하기도 합니다. 좋게 보이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속 도마가 깊이 체험한 주님, 하나님은 완전무결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상처와 흉터를 지닌 분이었습니다. 꾸밈없이 그 상처를 보이시는 분이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다 내어줌으로써 받은 상처, 사랑함으로써 비우고 포기함으로 가진 흉터였습니다. 이 상처가, 이 흉터가 도마로 하여금 이렇게 고백하게 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우리에겐 이런 상처가 있습니까? 사랑하므로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런 흉터가 있습니까?


오늘은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며,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둘째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의 대림절은 어떤 기다림이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대림절은 사랑하기에 나를 더 내어놓는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대림절은 나를 내어줌으로 더 기뻐하는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대림절은 용서의 언어로 채워지는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대림절은 사랑함으로 받은 상처, 사랑하기에 얻은 흉터를 보이는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이런 대림절이야 말로 사랑 때문에 상처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진정 기다리는 맞이함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상처받기 싫어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기를 원합니다. 사랑할 때 상처받는 것이 당연함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고로 더 사랑하겠다는 우리의 다짐은 곧 더 상처받겠다는 결의이게 하옵소서.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며, 다시 오심을 대망하는 대림절 절기에 우리의 언어가 용서의 언어로 채워지게 하옵소서. 복수와 되갚아줌이 마땅한 보복의 세태 속에서도 품고 사랑하는 신앙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사랑함으로 보여지는 우리의 흉터와 상처 속에서 수많은 도마들이 신앙으로 고백하게 하옵소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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