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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0.09.27 움오름 주일 설교 - "놓여 있더라"(요 20:1-10)








요한복음 20:1~10

1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2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3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4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5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6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7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8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9(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10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설교문


1. 허탄한 듯이 들려


유월절 안식일이 지나고 맞이하는 첫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두 여인과 함께 예수님의 무덤을 향했습니다. 무덤 입구는 바위로 굳게 닫혀 있을 뿐 아니라, 군인들이 지키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무덤에 들어갈 방법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덤을 찾았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그냥 그렇게 보내 드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시신에 향품을 좀 더 발라 드려야겠다는 애뜻한 사랑 때문에 그 새벽 무모하게도 무덤으로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의 예상과는 달리 그날 새벽 예루살렘을 흔들었던 지진 탓인지 무덤 문은 열려 있었고, 지키던 군병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렵고 이상했지만, 무덤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엷은 새벽 빛에도 무덤 안은 비어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땅히 놓여 있어야 할 시신이 없어졌으니 얼마나 무섭고 당혹스러웠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놀라고 두려웠던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제자들이 숨어있던 모처로 내달려 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 20:2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한 마디로 예수님의 시신을 누가 훔쳐갔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생전에 수도 없이 사흘 후 부활에 관해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빈 무덤을 전하는 여인들이나 제자들은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한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그런데, 요한복음의 기록을 보면, 이 장면이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와 요한 간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누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눅 24:11-12입니다.


11절: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절: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방금 읽은 누가복음과 앞서 요한복음을 종합해서 볼 때,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은 다수의 제자들에게 무덤문이 열려 있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시신도 도둑맞아서 온데간데 없어졌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새벽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 말을 허탄한 듯이 여겨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말 사전에 ‘허탄하다’는 단어는 ‘거짓이 많아서 미덥지 않다’고 할때에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그날 새벽 여인들의 증언에 대해 제자들은 거짓말이라고 판단해서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돌아가신 예수님이 혼자 걸어서 나오셨을리가 없습니다. 또 무장한 군인들이 둘이 한조가 되어 순번에 따라 밤새 지키고 있었을 것이기에 시신을 누가 훔쳐갔다는 것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참 기가막힌 아이러니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당사자들은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나사렛 예수의 부활을 염려해서 총독의 인장을 찍어서 무덤입구를 막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병사들로 철통같이 경비케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부활을 1도 믿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예수님의 제자들부터 거짓이라 생각할 정도로 황당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았습니다. 참 묘한게 우리 속에 있는 이 믿음이라는 것의 역할입니다. 믿음이란게 있으면 수천년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 곁에서 무려 3년 동안 동거동락하며 직접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황당한 거짓말로 간주해 버립니다.


믿음에 대한 이러한 신비를 경험적으로 잘 알던 히브리서 기자는 히 11:6을 통해 믿음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2.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여인들이 전하는 말을 대부분 예수님의 제자들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은 여인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자마자 일어나 무덤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직접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무덤까지 내달려가는 이 본문을 몇번이고 가만히 읽다보니 참 코믹했습니다. 분명 웃을 상황은 아닌데, 이들의 행동이 여간 웃기지 않았습니다.


요 20:3-5입니다.


3절: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절: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무덤을 향해 먼저 뛰쳐 나간 이는 분명 베드로였습니다. 그 뒤를 요한이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요한이 베드로를 추월했습니다. 앞서 읽은 4절에 보면,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이 이렇게 한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가 십자가 아래에 있었던 유일한 제자이고, 둘째는 아리마대 요셉이 마련한 무덤에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같이 장사한 사람으로서 무덤동굴의 위치를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장 서 안내할 목적으로 ‘더 빨리’ 달려갔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살펴볼 요 21장에도 나와 있듯이 베드로와 요한 이 두 사람은 묘한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마치 경쟁적으로 달렸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참 심각한 장면인데도 웃음이 나오는 겁니다.


이쯤에서 우리 같이 상상해 보시겠습니다. 먼저 무덤에 도착했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같으면 무덤 속을 확인해 보지 않겠습니까? 거기까지 힘을 다해 내달려 갔다면, 숨을 헐떡이며 무덤 안을 보며 확인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먼저 도착했던 요한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5절에 보면, 허리를 구부려 슬쩍 무덤 안을 보고는 더이상 들어가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8절에 보면, 뒤따라온 베드로가 무덤 안에 들어가 여기저기 확인해 본 후에서야 비로소 요한도 들어가 살펴보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고 안쓰럽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요한의 모습을 보니 그의 모습 속에 감춰있던 우리 모습이 보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주님께 한 발작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주님께 사랑받는다고 하면서도 한걸음 더 다가가지 못합니다. 주님의 무덤까지 먼저 내달렸음에도 본질의 확인 앞에서는 주저하며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혹 이게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요? 스스로의 한계를 정하고, 선을 그어 놓고 사는 모습 말입니다. 교양의 이름으로, 합리의 이름으로 치장하고선 믿음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 말입니다.



3. 예수님의 수의


자동차 회사인 피아트의 도시라고 알려진 이탈리아 토리노에는 '토리노 두오모( Duomo di Torino)‘라고 불리는 '산 지오반니 바티스타 대성당(Cattedrale di San Giovanni Battista)'이 있습니다. 1491년-1498년에 지었으며, 1997년 화재로 일부 소실되었다가 다시 복구된 이 성당의 외형은 유럽의 여타 성당과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토리노 성당을 찾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성당에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가 보관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가로 1m, 세로 4m의 아마포(linen)로 된 이것은 시신에 입히는 수의라기 보다는 시신을 감싼 침대보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것은 십자군 전쟁 때 터키에서 발견되어 1572년부터 이탈리아 토리노 성당에 보관돼 오고 있습니다.


근 5백여년 동안 토리노 성당에 보관되어 오던 이 세마포가 유명해 진 것은 1898년 5월 28일의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의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던 이탈리아의 변호사 겸 아마추어 사진가인 세콘도 피아(1855-1941)가 성당의 허락을 받아 수의를 촬영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찍었던 필름을 암실에서 현상하며 네가티브(Negative) 필름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의 얼굴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너무나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사진건판을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세콘도 피아가 이 사실을 교회의 성직자에게 보고하자 그들은 피아가 사진을 조작했다고 주장하며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성수의에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새겨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바티칸에서 나서서 확인토록 했습니다.


그래서 1931년 주세페 엔리(Giuseppe Enrie)라는 사진가에게 다시 사진을 찍도록 했습니다. 엔리가 사진을 찍은 후 필름을 현상해보니 세콘도 피아가 찍었던 것처럼 네가티브 필름에서 과연 사람의 얼굴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이 사진이 일단 공개되자 과학자, 교회관계자, 역사학자, 작가들 사이에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예수님의 수의가 보존되어 왔으며, 또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어떻게 세마포에 새겨졌는지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논쟁이 과열되자 1958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는 성수의에 나타나 있는 예수의 얼굴 모습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교황을 비롯한 카톨릭측의 공인에도 불구하고 수의에 대한 논쟁은 그 이후 여전합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의 시체를 수의로 감쌀 때에 얼굴모습이 새겨졌다고 주장했고, 어떤 이는 부활하기 직전, 영혼이 돌아와 숨을 쉬기 시작할 때에 찍혔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연적으로 산화작용에 의해 수의에 얼굴 모습이 그려졌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세마포의 어떤 성분이 공기 중 화학작용을 일으켜 그런 모습이 그려졌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정확한 답은 여전히 신비로 가려 있습니다.



4. 놓였고, … 놓여 있더라


오늘 본문의 핵심은 빈무덤과 더불어 무덤 속에 놓여 있던 수의, 바로 예수님의 시신을 감싼 세마포입니다. 만약 이 장면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표현한다면, 저는 무덤 속을 파고 들어온 스팟조명이 소리없이 비추고 있는 가지런히 놓인 세마포로 할 것 같습니다.


조금 전 제가 ‘가지런히 놓인 세마포’란 표현을 썼는데, 이렇게 말씀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말 성경에 ‘놓여있다’고 번역된 단어가 5절, 6절, 7절에 3번이나 등장합니다. 이중 5절과 6절은 κεῖμαι(케이마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7절은 ἐντυλίσσω(엔튈릿소)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설명드리자면, κεῖμαι(케이마이)는 그냥 아무렇게, 또는 무질서하게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정돈되게 쌓여있다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ἐντυλίσσω(엔튈릿소)도 수건을 접고, 붕대를 감듯이 잘 정돈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전 개역성경에서는 ἐντυλίσσω(엔튈릿소)를 ‘개켜있다’라고 번역했는데, 이 번역이 훨씬 본래 의미를 잘 살린 번역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κεῖμαι(케이마이)와 ἐντυλίσσω(엔튈릿소)를 사용하여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강조하려 하려는 걸까요? 그것은 명확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누군가가 훔쳐갔다면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가 그렇게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도둑이 어떤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쳐가면서 가지런하게 정리 정돈해 놓고 가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무덤 밖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어서 시신을 훔치기도 바쁜데, 세마포 정리하고, 머리의 수건을 정성스럽게 개어서 딴 곳에 보관해 둘 정신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 정리할 시간 있겠습니까? 그저 내팽개치고 갈 뿐입니다.


그런데도 무덤 안에 세마포가 정성스럽게 정돈되어 있고, 머리의 수건이 개켜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결코 도난 당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겁니다. 동시에 이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정성스레 개켜있던 세마포와 수건은 예수님 부활의 소중한 증거품이 됩니다.



5. 질서와 변동성


지난주중 e-book으로 경제, 금융 관련 책을 읽고 여의도에서 채권업무를 맡고 있는 가까운 분(하나금융투자 육민혁 이사)과 통화를 하며 이것저것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그분이 옵션(option)에 영향을 미치는 5가지와 우리의 삶을 연관지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옵션(option)이란? 일정 기간 내에 특정 가격으로 상품, 주식, 채권 등을 팔거나 또는 살 수 있는 권리인데, 이 가격을 결정하는 5가지 요인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현재, 목표, 이자, 시간, 변동성> 등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 Rate(이자율)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고, T(시간)는 꾸준히 줄어들 뿐입니다. V(변동성)가 생김으로써 P(현재)가 바뀌면서 G(목표)에 가까워 집니다. (P와 G가 멀면 본인도 괴롭고 남들도 허황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P가 G에 가까우면 그만큼 행복감도 높아질 수 있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이 5가지 요소 중에서 ‘변동성’이라는 Volatility만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교육을 통해서 바뀌기도 하고, 어제와 다른 오늘의 행동을 통해서도 바꿀 수 있습니다. 조그마한 생각의 변화와 실행에 의해서도 바뀌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변화되면 Present가 바뀝니다. Present가 개선되고 나아지면서 Goal도 바뀝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뀌어지다보면, Rate, Time이 바뀝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선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선순환이 일어나는 겁니다.


금융에서는 Volatility가 없는 회사는 죽는다고 합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변화의 움직임이 없으면 현재의 가치가 바뀌지 않는데, 그런 회사가 어떻게 계속 생존해 갈 수 있겠습니까? … 그런데, 이게 어디 기업의 이야기에 한정된 일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바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도 Volatility가 없으면 더이상 산 사람이 아닙니다. 살았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을 듣다보니 부활의 새벽 빈 무덤 안에 잘 정돈되어 있던 세마포와 개켜있던 수건이 떠올랐습니다. 그 긴박했던 부활의 새벽에 예수님은 스스로 변동성을 만드셨습니다. 죽은 몸이 되어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세마포를 걷고 정리하셨습니다. 당신의 머리를 감쌌던 수건을 정성을 다해 개셨습니다. 존재와 육신의 소멸로 갈 수 밖에 없는 죽음의 자리를 정리하셨습니다. 죽음이라는 혼돈의 자리에 질서가 잡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결과 죽음의 공간은 부활의 공간으로, 소멸의 자리는 생명의 자리로 탈바꿈되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부활의 의미를 우리가 인식한다면, 우리 삶의 자리는 어떻게 가꾸고, 바꾸어 가야 할까요? 그런데, 만약 우리 삶에 이러한 부활의 능력이 보이지 않는다면, 혹 그전에 마땅히 정리해야 할 우리 삶이 그대로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오늘의 굳어 있는 모습은 십중팔구 내일의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그러기에 내일의 모습은 오늘의 결과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움직인다는 것은 어제의 내가 아니라, 다른 나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허탄하게 듣던 것에서 일어나 믿음으로 귀를 기울이는 겁니다. 의심하고 주저하던 것에서 벗어나 한걸음 더 믿음의 장으로 내딛는 겁니다. 우리를 두르고 있던 세마포와 수건을 정리하여 흐트러진 우리 삶에 질서를 불어넣는 겁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삶을 움직이시는 주님의 변동성 안에서 더 생기있고, 더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모해 갈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죽음의 자리를 생명의 자리로, 무질서의 자리를 질서의 자리로 변화케 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자리에 변동의 힘을 불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비록 전염병으로 인해 각처소에서 예배드리지만,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이 주일이 우리 삶의 흐트러지고 어긋난 것들이 정리되고 질서가 잡히는 주님의 날 되기를 구합니다. 이제는 우리 삶이, 우리 인생의 길이 더 나아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향해 한탄하고 원망하는 길에서 벗어나기를 구합니다.


주님의 부활이 죽음 가운데서 새로운 변동성을 만들어 내었고,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형성했듯이, 우리 삶에 그러한 생명과 부활의 움직임이 일어나기를 구합니다. 이를 위해 어지러웠고, 이리저리 나누어졌던 우리 마음의 분심을 정리하겠습니다. 허탄과 게으름이 만든 믿음의 부재에서 일어나 주님의 말씀을 진리의 푯대 삼아 걸어가겠습니다.


주님~

우리가 이렇게 변동성을 만들어 매일 조금씩 또 조금씩 나아갈 때 우리 삶이 온전히 변화를 일으키시는 주님의 기운, 부활과 생명의 영으로 가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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