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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0.09.13 움오름 주일 설교 - "안식 후 첫날 일찍이"(요 20:1-10)

최종 수정일: 2020년 9월 13일








요한복음 20:1~10

1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2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3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4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5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6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7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8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9(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10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설교문


1. 막무가내의 사랑


요 18장 - 19장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공관복음서와는 다르게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인간구원을 위해 자발적 타살의 길을 선택하신 예수님, 맹세 이후 채 몇시간도 되지 않아 배신하고 도망간 제자들, 베드로의 부인과 저주, 대제사장 무리들의 간악한 고소와 협박, 총독 빌라도의 우유부단함과 십자가형 판결,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등 모두가 어둡고 침울한 수난의 이야기들을 마치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듯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둡고 아픈 이야기 속에서도 작은 빛을 반짝이며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시름하는 동조자(the anxious sympathizer)’였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여 장례를 치르는 그 모습은 눈시울마저 적시게 합니다. ‘아,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진 속에서 이런 것이 믿음의 이야기구나’라는 것을 생각케 합니다.


이런 사건들을 거치며 맞이하는 요 20장은 그 첫머리에서 앞부분의 어두움에 닿아 있는듯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 20:1 상반절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십자가의 죽음과 장례에 연이은 어둠이 여전히 예루살렘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아직 어두울 때’라고 할 때의 ‘어두움’이라는 단어 σκοτίας(스코디아스)는 자연의 빛이 없으므로 인해 어둡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이 어두움은 ‘빛’(요 1:5)이라는 단어로 시작해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던 요한복음의 특징으로 볼 때에 빛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살해한 암흑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두움을 뜻하는 σκοτίας(스코디아스)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비밀스럽게’라는 뜻입니다. 물리적인 어두움과 영적인 어두움이 짙게 드리워진 그날 슬픔의 새벽에 σκοτίας(스코디아스),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 20:1의 상반절에 이은 뒷부분을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요한복음은 그 어두움 속에서 비밀스럽게 막달라 마리아가 혼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왔음을 기술합니다. 그런데, 막 16:1-3을 보니, 다른 두 여인이 동행했습니다.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1절: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절: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절: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막달라 마리아는 작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와 함께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보통 유월절과 부활절이 있는 3월 중순 - 4월초 예루살렘의 해뜨는 시간(BMNT, 여명)은 05:40 - 05:30대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시간은 막 16:2을 참고할 때 05:30즈음이었을 같습니다.


왜 이 여인들은 그 컴컴한 새벽에 그것도 죽은 예수님이 장사된 무덤을 찾아간 것일까요? 앞선 막 16:1에 의하면,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향품은 이미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금요일 장사지낼 때 30kg이나 시신에 발랐는데, 왜 다시 그렇게 하려 했는지 의문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지난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금요일 오후 3시에 운명하신 예수님을 해가 지기 전 단 3시간 만에 장례하기엔 시간이 무척 급박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미처 향품을 덜 처리하고 장사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여인들이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새벽에 여인들이 겁도 없이 무덤을 향하면서도 그들이 걱정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덤입구를 막고 있던 그 큰 돌을 누가 치워줄 것인지? 무엇보다도 총독의 인장이 찍혀 함부로 열지 못하도록 봉인된 그 돌을 어떻게 치울 수 있을건지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었습니다.


참 막무가내입니다. ‘막무가내’(莫無可奈)라는 말이 의미하듯, ‘한번 굳게 고집하면 도무지 융통성이 없음’ 같이 그녀들의 행동이 그러했습니다. 아무런 대책없이 그저 그 새벽에 향품을 들고 무덤을 찾아 나선 겁니다.


그런데, 워낙 사랑이라는 것이 이처럼 막무가내, 무대책이지 않습니까? 모든 계획과 대책 하에서 사랑하면 그게 계산이지 어디 사랑이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오늘날 우리가 그나마 사람의 도리를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이 모두 대책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들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 아닙니까? 비록 남들이 보면, 순진하고 나약한 사람, 대책없이 낭만적인 사람이라고 했을지 모르나 아파하며 낳은 자식을 포기하지 않고, 대책없이 사랑해 주신 부모님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수많은 핍박과 다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강한 생명력과 전파력을 가졌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책없이 주님을 사랑한 선배들 덕분이었습니다. 새벽 어두움을 뚫고 주님의 무덤을 향하던 여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 모습을 되돌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대책 하에서 우리는 주님을 믿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계획 하에서 주님께 나아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도대체 주님은 우리의 대책과 계획의 몇번째 위치하고 있습니까? … 심각하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식 후 첫날 어두움 속에서 비밀스레 무덤을 향하던 여인들은 이렇게 오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2.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새벽,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해 보니,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무덤문이 이미 열려 있었습니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고, 또 다른 놀라움과 걱정거리였습니다. 당시 무덤의 입구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데 어렵지 않은 크기였습니다. 그렇기에 그 입구 전체를 막으려면 적어도 지름 170cm 이상의 돌이 사용되었을 겁니다. 이 크기와 무게로 볼 때 여인 몇명이 옮길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그게 열려 있었으니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게다가 열려진 무덤 안을 조심스레 들여다 보니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으니 더더욱 놀랄 일이었습니다. 요 20:9이 설명하듯이, 세 여인들이나 이어 찾아온 베드로나 요한 모두 성경에서 예언된 예수님의 부활을 아직 알지 못했기에 그들의 놀람과 슬픔은 더 가중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잃었다는 비통에다 주님의 시신마저 잃어버렸다는 슬픔까지 더해 졌으니 말입니다.


이 날 무덤의 돌이 옮겨진 일에 대해 마태복음은 좀 더 구체적인 장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 28:1-4입니다.


1절: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절: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절: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요한복음은 무덤문을 언급하며 ‘열려있었다’는 수동태 완료형으로 기술했지만, 마태복음은 이를 누가, 능동적으로 했는지를 밝혔습니다. 안식 후 첫날(주일) 새벽,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하기 전, 큰지진과 함께 강림한 천사가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옮겼습니다.

‘부활’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은 이렇게 뚜렷한 자연의 표적과 함께 시작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난 큰 지진은 예루살렘에 거하던 주민과 순례객들의 새벽잠을 깨웠을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자연의 한 현상이었겠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하신다는 표징이었습니다. 성경엔 하나님의 새 일과 자연의 기적이 결합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 때도 그러했고, 엘리야 때도 그러했듯이, 그날 부활절 새벽이 그러했습니다.

믿지 못할 이 사건 앞에서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기겁을 했습니다. 지진에 이어 나타난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흰 천사의 모습’은 마치 이사야 선지자가 경험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연상케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신실한 제사장이었던 이사야 마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고 고백하며 떨게 했듯이, 그날 새벽 단 한 천사의 임재 앞에서도 군인들은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마 28:2)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무덤과 인간 생활의 공간을 나눠었던 돌을 옮기셨습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지우셨습니다. 더이상 죽음이 인간 존재의 끝이 되지 않도록 새로운 부활을 허락하셨습니다. 인간은 짙은 어두움을 이 땅에 드리웠으나, 하나님은 빛으로 새로운 새벽을 맞이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부활절 새벽의 풍경입니다.



3. 사라진 2박 3일


요한복음을 비롯한 사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죽음이후 바로 부활의 새벽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어느 하나도 죽음이후 부활까지의 시간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청년시절 이 부분이 궁금했습니다. 분명 죽음이 끝이 아님을 믿기에, 천국과 지옥의 실존을 확신하기에 예수님의 영혼은 그 동안 어디에 계셨을지가 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복음서 모두가 침묵하기에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전서를 읽다가 이 부분에 대해 눈이 확 뜨졌습니다. 벧전 3:18-20입니다.


18절: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금요일 오후 3시에 운명하셨던 주님의 영혼은 이후 금요일 9시간, 토요일 24시간에 이어 안식후 첫날(주일) 대략 새벽 5시까지, 이렇게 총 2박 3일, 38시간 동안 지옥에 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영혼은 왜 지옥에 가셨습니까? 앞서 19절을 보면,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 3가지가 논란이 되어 왔습니다. 첫째는 ‘옥’(φυλακή, 퓔라케)이란 단어이고, 둘째는 ‘영’(πνεῦμα, 프뉴마)이란 단어이며, 셋째는 ‘선포’(κηρύσσω, 케루소)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옥’이란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지? ‘영들’이란 누구를 말하는지? ‘선포’란, 무엇을 외치셨는지? 등에 대한 논란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옥’이란 베드로후서 2:4에서도 언급하듯이 ‘지옥’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카톨릭에서 말하는 연옥이 아님). 또한 ‘영들’이란 노아홍수 때에 심판받아 지옥에 있던 사람들의 영혼이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영의 형태로 ‘선포’하셨다는 것은 ‘부활의 소식’과 더불어 ‘복음’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자연스럽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부분에 대해 왜 굳이 예수님께서 지옥에 심판받아 있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셨겠느냐며 그것은 부활의 선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수천년 전에 홍수로 심판받아 지옥에서 고생하며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 부활했다!”라고 선포하시고 가신다면, 거기에 있던 영들에겐 뭐가 유익이며, 또한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고통의 형벌 가운데 수천년을 지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난데없이 나타나서 “부활”이라고만 외치며 사라졌다면, 죽은 사람에게 더 죽으라는 메시지 말고 뭐가 되겠습니까? 그러니 이게 말이 안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그곳 지옥에서 도대체 무엇을 외치셨던 걸까요?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과 더불어 복음입니다. 요 11:25-26에서 하셨던 말씀과 같은 선포였습니다.


2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것은 한마디로 ‘패자부활전’이었습니다. 심판받아 죽은 이들에게조차 재도전의 기회를 주시는 주님의 부활전이었습니다. 이처럼 죽으신 예수님께서 영으로 지옥에 까지 가셔서 부활의 소식과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은 다음의 몇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죽으심은 실제적인 죽음이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살아있는 이와 죽은 이에게 모두 미치는 복음이었습니다.



4. 째째하게 굴지 말고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전도구호로 널리 사용된 것이 “예수천당, 불신지옥”입니다. 조사해 보니,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이 구호를 사용한 사람은 ‘최권능’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최봉석(1869-1944) 목사였습니다.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사에 위대한 '전도 대장'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핵심 사상인 ‘이신칭의'교리와 잇닿아 있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믿음과 구원을 간결하게 설명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 2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 이후의 삶, 또는 믿음과 관한 삶이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 적용하면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단순 논리로 오용될 소지가 많습니다.


다른 하나는, 앞선 벧전 3:18-20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복음을 듣지 못했거나, 거부한 채 죽은 이들에게까지 미치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계 21:1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기존의 논리와 법칙이 작동하는 하늘과 땅이 아닌, 완전 새로운 법칙이 적용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요, 은혜입니다. 주님의 약속하신 하나님의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던(벧후 3:13)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이와 관련한 부분을 담아 우리에게 물려준 것이 바로 사도신경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그 사도신경에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게 유일하게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만 제외시킨 구절이 있습니다. 전세계 기독교인들과 카톨릭 교회에서 공통되게 고백하는 구절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만 제외시킨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He descended into hell)”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넣어 사도신경의 원래의 문장대로 고백해 보면 이렇습니다.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습니다. 그는 지옥에 내려가셨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 ”


진리를 알고 있고,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이 두려웠기에, 무엇이 염려가 되었기에 온 세계의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고백하는 신조의 구절을 교묘하게 제외시켰을까요? 어쩌면 감당이 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감당이 되지 않는다고, 우리가 주장하는 교리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감춘다면 어떻게 정직한 구도의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비록 이해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인식과 지성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기에 겸허히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믿기에 열린 마음으로 마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심판받아 죽은 노아 때의 영혼들이 있던 지옥에 까지 내려가셔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신 주님은 오늘도 한 영혼이라도 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깨닫고, 체험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렇다면, B.C(Before Corna)와 A.C(After Corna)로 명명할 정도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뒤흔들고 바꾸어 버린 이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모습으로 이 암울한 어둠의 시간을 걸어가야 할까요?


때로 어둡고 그늘진 시간을 걸을 때에 생각나 흥얼거리던 노래가 있습니다. 70-80년대 인기그룹이었던 들국화의 노래 <사노라면>입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흐린날도 날이 새면

해가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게

한밑천인데

째째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비가 새는 작은 방에

새우잠을 잔대도

고운 님 함께라면

즐거웁지 않더냐

오손도손 속삭이는 밤이 있는 한

째째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이제는 이 노래의 가사처럼 ‘새파랗게 젊지’는 않지만, 째째하게 굴지말고 살려합니다. 가슴을 쫙 펴고 한 명이라도 더 안으며 살려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셨던 “다 이루었다”(요 19:30)는 말씀을 “다 품었다”라고 해석했던 것과 같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품는 교회, 품는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했으면 합니다. 캄캄한 어둠의 시절에도 비밀스레 어둠을 뚫고 주님의 부활로 나아가던 여인들과 같이 무모한 사랑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길 원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어려움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힘듦과 아픔이 지속되다 보니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한두 달이 지나 날이 따뜻해 지면 끝날 것 같다던 전염병은 한 여름이 지나는 동안에 더 왕성히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들어 왔습니다. 이제는 어떻게든 이 어두움과 어려움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연습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이 어두움의 시기, 아픔과 슬픔의 돌을 옮겨주시기를 감히 구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심판받아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에게 까지 복음을 전하시며 패자부활전을 허락하신 주님이시라면, 당연히 고통 가운데 있는 자녀들의 소리에 귀 기울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

지금의 우리를, 미래의 우리를 붙들고 계시고, 책임져 주실 하나님~

무덤의 돌을 옮기시고, 주님을 부활시키셨듯이, 우리의 일상을 새롭게 살려 주옵소서. 새하늘과 새땅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시면, 우리도 주님을 닮아 사람들의 아픔의 자리에 까지 내려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이웃과 더불어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친구된 교회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칠흙같은 어두움 속에서도 부활을 목격하는 주님의 비밀스런 증인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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