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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0.05.24 움오름 주일 설교 - "채찍질하더라 2"(요 19:1-3)

최종 수정일: 2020년 6월 1일









요한복음 19:1~3

1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2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3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설교문


1. 세네카 그리고 시편 119


대중에게 잘 알려진 정치가요, 철학자 중에 예수님과 같은 해(BC 4년)에 태어나 동시대를 보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루키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입니다. 부잣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생의 후반에 네로의 스승이기도 했던 화려한 삶이었지만, 그도 한때 인생의 한 부분을 혹독한 시련 속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AD 41년, 로마황제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코르시카섬에 유배되었던 세네카는 물도 불도 없는 그곳 한 지역에서 삶을 살아내야 했습니다. 척박하다 못해 매일 생존 자체를 고민하고 걱정해야 했던 상황이었지만, 그는 그곳에서 자연과학과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위로문>이라는 제목으로 3편의 짧은 글( <화에 대하여>, <여가에 관하여>,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을 남겼습니다.


작년에 세네카의 저서 중에 8년의 유배 중 썼던 책 중의 하나인 <화에 대하여>를 구입하여 읽었습니다. 온갖 어려움과 고통을 거치며 하루에도 수없이 변하는 감정을 다듬으며 적었던 글들이기에 세네카의 글엔 힘이 있었고, 남다른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2천년 전에 인간의 내면을 그토록 잘 들여다 보며, 인간의 심연에 감정이 ‘나는 것’과 ‘내는 것’을 이토록 구분할 수 있었을까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가 고난과 역경에 대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단언컨대, 위대한 사람은 때로는 역경을 반긴다. 신은 자신이 인정하고 사랑하는 자들에게 역경을 주어 단련시키고 시험하고 훈련시킨다. 불운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다. 불은 금을 단련시키고, 불행은 용감한 자들을 단련시킨다.”


태어나 한 평생 세상을 살아가며 한 번도 고난과 역경을 마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어떤 면에서 고난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참 사람되어 가기 위한 과정이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고된 유학생활 중 몸이 아프고 힘들 때마다 시편 119편을 읽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시편 119편은 150개의 시편 중에 가장 긴 시편으로서 모두 176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176절은 다시 각각 8절씩 묶여 총 22개의 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릿말 성경에는 연의 구분이 없이 기록되어 있지만, 몇몇 영어성경만 하더라도 연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8절씩 묶여 구성된 22개의 연은 히브리 알파벳 22개의 순서에 따라 각 연의 첫번째 문자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한글로 비유하자면, ‘ㄱ,ㄴ,ㄷ순’으로 시를 이어간 것입니다. 일명 답관체, 또는 아크로스틱 포임(acrostic poem)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그 유학생은 이렇게 구성된 시편 119편의 176절의 한 절, 한 절을 읖조리고, 곱씹으며 아픔의 시간을 견디고, 또 이겨갔습니다. 그 사람의 고백을 듣다보니, 정말 시편 119편은 아프고, 힘들고, 위급할 때 읽어야 할 성경이 맞았습니다. 보십시오~ “119”라고 적혀 있지 않습니까!


특별히 시편 119편의 67절과 71절은 고난과 아픔을 겪었던 사람의 진한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찾아서 우리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구약 892쪽).


시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편은 이렇게 고난과 우리 삶의 상관관계를 밝힙니다. 나아가 그 삶 속에서 진정 사람을 살릴 뿐 아니라, 사람을 사람되게 세워가는 것이 주님의 계명과 율례, 주님의 말씀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 기록자의 고백처럼 오늘도 주님의 말씀이 아픔 가운데 있는 우리를 세우고, 우리를 붙드시고, 마침내 이기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드립니다.



2. 또 다른 관점에서 고난을 바라보다


지난 주일 동일한 본문을 나누며 예수님의 고난의 형태와 그 앞에서의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한때 일명 성공하기 위해서 지능지수라고 하는 IQ(Intellence quotient)가 높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시대는 그에 못지 않게 사회성지수 SQ(Social quotient)와 감성지수 EQ(Emotional quotient) 등 다양한 능력들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저는 비록 전문가는 아니지만, 교육학과 기독교교육학을 공부하고, 또 50년의 삶을 살아 오면서 관찰해 본 바에 의하면, 위의 지수들과 더불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한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바로 ‘태도(attitude)입니다. 보통 쉽게 ‘태도’를 ‘맘의 자세’ 정도로 이야기 하지만, 태도란? 개인의 행동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규칙성입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로써 판별되는 것입니다.


몇년 전 인기리에 상영했던 영화 킹스맨의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manners maketh man”(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이 말을 차용해서 말하자면,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Attitude maketh man”(태도가 사람을 만든다)


태도가 사람을 만듭니다. 고난 앞에서의 태도가 나사렛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 되게 했습니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고, 참으며 기다리던 ‘태도’가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지게 했습니다. 그와같이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힘겨운 일들 중에 반복되는 우리의 태도가 더 나은 우리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지난주일 본문을 고난당하시는 주님의 입장에서 관찰하고, 적용했다면, 오늘은 그 고난을 가했던 빌라도와 대제사장을 비롯한 산해드린의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2천년 전 나사렛 출신인 청년 예수는 갈릴리 유역에서 말씀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종교권력자들에게 위협이나 근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조금씩 입소문으로 전해지기 시작하여 점점 대중이 따르기 시작했지만, 당시 메시야라고 자칭하다 금새 소멸되어 간 여타의 부류들 중의 하나일 것이라 간주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활동반경을 예루살렘으로 넓히고, 성전정화사건을 2차례에 걸쳐 일으키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까지 하자 종교권력자들의 태도와 입장은 급전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했고, 구체적인 기회를 엿보다 가룟유다의 배신을 틈타 전격적으로 결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부분은 ‘종교의 정치화’입니다. 종교가, 특별히 기독교가 정치화 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논하기에 앞서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정치화하는 것은 갖고 있던 것(기득권)을 지키고자 함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교회가 기존에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많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 정치화입니다.


누리는 게 많고, 가진 게 많은 게 꼭 나쁘다거나 불필요다는 것은 아닙니다. 늘 그것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가 먼저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득권’을 본다면, 그것은 그 시대와 사회 속에서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를 생각한 뒤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는 올바른 기득권자의 태도입니다. 그걸 못하니 어떻게 됩니까? 가지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도록 강요받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정당이 선거를 통해 심판받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가진 것으로 시대 속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누리고, 갖고 있던 것을 내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내어 놓지 않으려 하다보니, 교회가 정치세력을 찾거나 세력화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신앙공동체가 되어야 할 교회가 이익집단화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정치화하면 안되는 걸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복음서에 흐르는 예수님의 정신에 비춰볼 때 교회는 정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해야 합니다. 단, 교회가 정치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차별받는 소수자를 위해 참여해야 합니다.


AD. 410년 8월24일 알라릭이 이끄는 고트족과 노예들에 의하여 로마가 함락되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거스틴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후 22년간 <신의 도성(City of God)>이란 책을 지으며 생각하며 정리했습니다. “사람이 세운 이 세상 나라는 무너진다. 무너지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관을 내어 놓았습니다.


‘신의 도성’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유형적 가치들이 무너질 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해야 합니다. 잃어가는 것들을 붙들고 지키기 위해 이익집단화 할 것인가? 아니면, 이 시기 돌봄을 받지 못하는 소외된 이들의 손을 잡고 다른 더 소중한 것들을 세워 갈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만약, 교회가 지금까지 교회에 허락된 것들을 하나님과 시대의 부름에 맞게 제때, 제대로 반응하고 응답하지 못했다면, 잃어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시대가 내어놓아라 하는데, 내어놓아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 하지만, 잃어가는 아픔 속에서 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가치를 세워갈지, 어떻게 세워갈 것인지를 반드시 고민해야 해야 합니다.



3. 타인의 고통을 담보로 한 제국


자신들이 가진 것들을 지키고, 이익을 보전코자 산해드린은 예수님을 결박한 채 빌라도의 관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때가 새벽이건 한 밤중이건 그들에겐 상관 없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나사렛 예수는 더이상 용납해선 안될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체제에 위험이 되는 청년 예수는 신속히 제거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가 존재하는 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보이는 종교권력은 사람들로부터 점점 외면 당하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이상한 하나님 나라를 고대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단체의 집단지성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혹이나 니고데모 같은 공회원이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요 7:51)며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제히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 7:52)고 묵살했습니다. 눈 앞의 적을 두고 딴 소리하는 것은 이적행위나 다름없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들은 빌라도의 판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무리를 선동해 여론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선동하다’고 하는 단어 ἀνασείω(아나세이오)는 <이리저리 흔들다, 자극하다, 감동시키다, 휘젓다, 교란시키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명, 선전과 선동입니다. 선전(propaganda)은 일반적인 광고, 운동, 포교, 선교, 전도 등 남에게 알리려는 것이 목적이지만, 선동(agitative)은 부채질하여 움직이게 한다는 의미 즉, 분위기를 조성하여 주변을 부추기는 행위를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독재정권이나 그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진실을 알리려는 사람들에게 선전선동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탄압했습니다.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무리의 함성은 분명 빌라도에게 또다시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빌라도는 여론에 결정권을 넘겼습니다. 일명 보수라고 지칭하는 언론의 선동을 그대로 따르는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사람들을 선동하고, 여론을 형성하여 한 목소리를 내는 대제사장의 무리가 빌라도에겐 여간 부담이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가 로마의 식민지 팔레스타인의 최고 권력자인 총독이었다 하더라도, 자기 뜻대로 결정했다가는 정치생명이 그것으로 끝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정치가로서의 더 큰 출세와 성공을 꿈꾸는 빌라도에게 옳고 그름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것은 우선순위가 될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피를 원하는 대중의 요구에 부합하고, 그들을 만족시키고자 애를 씁니다. 지난주일에 살펴보았듯이, 채찍질부터 시작하여, 가시관과 조롱과 모멸에 이르기까지 나사렛 예수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기에 이릅니다. 그것이 바로 대중을 만족시키고, 그들의 여론과 지지를 등에 업는 길이었습니다. 동시에 잠정적 위험요소가 될 수 있는 나사렛 예수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야망에 다가가는 길이었습니다.


이와같이 종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속 정치권력과 담합하는 곳에선 결코 온전한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약한 이들을 착취해 더 큰 부를 증식하고 상품화하는 한낱 제국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러한 제국에서 이른바 국민 또는 시민이라고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값싼 노동력만 존재할 따름입니다.



4. 구성원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가정


2주 전, 성지순례와 관련된 이런 유머를 하나 들었습니다.


나름 신실하다고 하는 교인 부부가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현지에서 남편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함께 순례 갔던 교우들이 슬퍼하면서 장례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의논했습니다. 알아보니, 현지에서 장례치르는 비용이 한국 돈으로 50만원인데, 시신을 한국으로 운구하는데만 드는 비용이 10배인 500만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남편이 그렇게도 오고 싶었던 예수님이 사셨던 성지에 묻히면 더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 교우들이 이스라엘 현지에서 장례를 치르자고 권했습니다.


하지만, 부인이 완강하게 거절했습니다. 비용을 10배로 치르더라도 남편의 시신을 한국으로 운구해 가야 한다는 겁니다. 부인의 뜻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와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담임목사가 부인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며 물었습니다.


“집사님, 비통하시겠지만 그래도 일단락 되었네요. 근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장례를 치루지 않고 이렇게 복잡하고 많은 비용을 지불하면서 꼭 한국에서 장례를 치르신 이유가 있습니까?”


그러자 부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엔 2천년 전에 죽었던 한 남자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났지 않습니까? 만약에 그곳에서 장례를 치렀다가 사흘 뒤에 남편이 다시 살아난다면 골치 아플 것 같아서요”


한참을 웃었습니다. 그러다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유머란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는지를… 겉으로 다정해 보이고, 아무 문제없이 보였지만, 어쩌면 그 집은 부인이 일방적 희생을 치르며 가정을 지켜왔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면, 남편의 죽음에 대해 부인이 저렇게 반응할리가 없었을 겁니다.


물론 움오름교회의 가족님들이야 이 정도에 이르는 분이 당연히 없겠지만, 우리의 가정이 한 사람의 일방적 희생으로 유지되고, 그것을 당연시 하는 곳이라면, 건강한 가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 결과 가족 구성원들이 ‘나’ 라는 존재없이 사는 것이 더 편해한다면 이것 정말 심각한 일 아니겠습니까?


어느 사회, 어느 가정이든지 간에 한 사람의 희생, 한 집단의 일방적인 희생을 담보로 존재하고, 유지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속에선 아무리 사랑이라는 말로 치장되고, 꾸민다 하더라도 그 곳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과 법칙이 작동하는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그곳이야 말로 질서유지를 명목으로 인간을 상품화 하고, 소외를 조장하는 제국일 따름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시대보다 더 교묘한 방식으로 제국의 질서가 작동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묻습니다. 제국의 질서와 통치 안에서 불의의 부스러기를 배급받기 위해 순응하며 살 것인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길을 따르며 맞서 살아갈 것인지?



5. 사람의 온기가 있는 세상


제국의 공정함이라는 것은 철저한 계층화와 서열화를 특징으로 합니다. 그래서 안정과 통합은 처음부터 끝가지 권력을 지닌 지배세력의 사익에 부합하도록 작동합니다. 만약 누군가 이러한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있다면, 주저치 않고, 단호하게 철퇴를 내립니다. 이른바 ‘보복(retribution)적 정의’가 작동되는 겁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착취해서 자신의 재물을 축재하는 것은 한 마디로 자기기만적 정의에 불과합니다.


위와 같은 시스템이 작동하던 곳이 바로 애굽입니다. 억압과 착취의 전형적인 제국입니다. 이와 확연하게 대조되는 것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켰던 광야에서의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이 있는 그곳에선 벽돌 할당량을 만들지 못하면 매질당하고, 쉼 없이 일해야 하는 착취의 질서가 더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되려 출애굽 지도자 모세나, 천부장, 백부장, 또는 제사장들이나 일반 백성이나 구분이나 차별이 없이 매일 동일한 분량의 만나로 채움을 받습니다. 애굽의 파라오가 행하던 ‘보복적 정의’가 하나님의 '분배적 정의'로 대체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속에선 어느 누구도 부품이나 소모제가 아니라, 모두가 공존해 가는 하나님 나라의 지체로 여기며 환대받습니다.


저는 이런 향기나는 나라의 가능성을 스위스에 살때 잠시 경험했습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유럽생활을 하셨기에 잘 아시겠지만, 유럽의 마트 영업시간이 우리나라와 같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사는 집 주변만 하더라도 24시간 운영하는 대형마트가 있는데, 유럽은 대개 오전 8시에 영업을 시작해서 오후 7시 정도면 영업을 종료합니다.


언젠가 문 닫기 5분 전에 헐레벌떡 마트에 도착한 적이 있습니다. 다행이다 싶어 들어가려고 하는데, 직원이 막아서며 입장이 불가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안에서 쇼핑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아니, 저 안에 물건 사는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 그런데 왜 안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은 이미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능한데, 종료시간 전에 지금 들어가려는 너는 안된다는 겁니다.


아쉬움을 잔뜩 안고 그렇게 귀가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2010년 11월 28일 제가 살던 제네바 칸톤의 시민들이 마트 영업시간 연장을 두고 투표를 시행했습니다. 평일 영업종료시간을 오후 8시로, 그리고 주말은 오후 7시로 각각 1시간 연장하고, 성탄절 연휴 2주를 비롯해 1년에 3주는 주일에도 마트 문을 열자는 법안이었습니다. 매우 반가운 법안이었고, 당연 통과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의 선택은 저의 생각이나 기대와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1시간 더 여유롭게 시장을 볼 권리’보다는 마트 노동자들의 휴식을 선택했습니다. 노동자들이 각자의 가정에서 가족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위해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한 것입니다. 이른바 종교개혁의 후예라고 일컬어 지는 제네바 시민들은 비록 종교생활의 열심에는 우리보다 약해 보일 지 모르지만, 삶의 현장에선 달랐습니다. 그들은 제국의 논리와 방식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법칙을 살아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 삶의 장바구니엔 하나님 나라가 부재했습니다. 1주일에 1번 정도 장을 봤던 저로서는 될 수 있으면, 좀 더 저렴하고, 할인된 상품을 사기 위해 애썼습니다. 마트 영업시간을 늘려서라도 저의 편의성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나름 절약하는 생활이며, 그것이야 말로 효율적인 경제활동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곰곰히 되돌아 보니, 절약과 효율의 극대화를 요구하는 저가유통의 구조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공존하는 온기있는 사회,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더 많은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고, 누군가의 절약을 위해 다른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애굽, 제국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예수님의 고난당하시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살게 하고자 그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시는 숭고한 사랑을 만납니다. 동시에 자신들의 가진 것들을 지키기 위해 정치화 하고 이익을 극대화 하려는 제국의 종교인들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서도 철저하게 제국의 논리와 이념을 따라 그 부스러기를 나누는 타락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 해 오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장바구니 속엔 어떤 논리, 어떤 법칙이 담겨 있습니까? 우리의 사무실 책상은 어떤 원리에 의해 운영되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판단과 선택을 결정케 하는 것은 제국의 논리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이 사라지고, 결핍이 찾아올 때, 그때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고 여전히 신뢰하며 따르기를 원합니다. 무너지는 것에 정신이 쏠려 세워가야 할 것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삶이 제국의 법 위에 건설된 도시문명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누군가의 일방적 희생이 있어야 가능한 사회가 아니기를 원합니다. 힘들고, 냄새나고, 귀찮은 것들은 모두 돈으로 사서 외주하는 메마른 도시민으로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구획과 경계를 명확히 하여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관여하지도 않는 굳은 회색도시가 아니라, 서로에게 내 것을 나누는 온기나는 골목사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경계를 넘어 흘러가게 하셔서 통제되고, 획일화 된 곳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부와 안정을 누리는 사회, 가정, 교회가 아니라, 서로가 약한 부분을 끌어안고 함께 서 가는 따뜻한 삶의 터전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가 법으로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의해 공급되고 회복되듯이, 세계 곳곳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고통하는 전염병의 때에 우리를 통해 그 관계의 은혜가 더더욱 흘러가고 스며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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