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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0.05.17 움오름 주일 설교 - "채찍질하더라 1"(요 19:1-3)

최종 수정일: 2020년 5월 24일







요한복음 19:1~3

1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2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3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설교문


1. 설교와 질문


지난주일 설교 후의 질문과 토론에 대한 부탁을 드렸습니다. 감사하게도 윤ㅇㅇ 집사님께서 ‘예수 바라바 이름의 교훈적 목적’에 대한 질문을 제기해 주셨습니다. 설교시간이 제한적인데다 여러가지 이론을 다 말씀드리기엔 다소 지루해 질 수도 있는 관계로 핵심만 말씀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설교 후 윤집사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질문을 제기해 주시면 다른 부분들을 살펴봄으로써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진심을 담아 부탁드리는 것은 앞으로 더 많은 분들께서 설교 후 의견과 질문을 제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와 관련해 16년 전 저의 에피소드와 더불어 최근 일어난 일을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1) 00교회 이야기 16년 전, 인천에 있는 한 교회의 교육국 목사로 부임해 고등학교 1-2학년을 담당하면서 교회학교 전반적인 교육을 진행했습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날 첫 설교하러 나갈 때의 일입니다. 학생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고, 발을 구르며 환호성을 지르는데 제가 별세상에 온듯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교회 전체적인 분위기가 목회자에 대해 매우 우호적일 뿐 아니라, 제 앞서 있었던 선배목사가 굉장히 카리스마가 있는 분이었습니다. 일명 청중을 쥐락펴락, 들었다 놓았다, 웃겼다 울렸다 하는 스타목사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보는 제게도 그렇게 환호했던 겁니다. 이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부임 후 몇 주만에 겨울수련회를 갔는데, 강사방 따로, 냉장고엔 갖가지 과일과 음료수로 가득했습니다. 아이들과 같이 방을 쓰겠다고 했는데, 말씀준비하려면 이 방 써야 한다는 겁니다. 일단 수용했습니다. 그리고 과일과 음료수는 선생님들 모임에 돌렸습니다. 그런데, 부장 집사님이 갑자기 봉투를 꺼내서 주십니다. 놀래서 무엇이냐고 여쭸더니 강사비라는 겁니다. 제가 너무 당황되고 이해되지 않아 되물었습니다. “아니, 자기 부서 수련회 진행하는데 무슨 강사비입니까?” 그랬더니,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으니 받아야 한다고 자꾸 강권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 주시는 맘은 감사한데, 계속 이러시면 수련회 안하고 가겠다고 말씀드려 겨우 해결했습니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제 아내에게 했더니, 아내가 이렇게 권했습니다. “여보, 그 교회 너무 오래 있어서는 안되겠네요” … 무조건 추종은 아니다 하더라도 목회자 우선주의와 그런 대접을 너무 받다보면 사람이 타락할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목회자를 생각해 주시는 맘은 감사하나, 이런 것들이 반복되다 보면, 도를 넘어 계급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목회자나 교우들이나 모두에게 해가 됩니다. 2) 빛과00교회 이야기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지난 5월 초부터 알려지기 시작한 동대문구 전농동에 위치한 한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교인 2천명 규모의 교회라고 하는데, 설교영상을 보니 청년들이 대다수입니다. 청년들이 이 정도 모인다는 것, 그것도 동대문구 전농동까지 모여든다는 것은 해당목사가 굉장히 매력과 카리스마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가 설교하는대로, 제자훈련 시키는대로 아무런 질문도, 이견도 제시하지 않고 따랐습니다.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말씀의 적용을 교묘히 치환했는데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마 15:27). 이것은 자식을 고쳐달라며 예수님의 긍휼을 구했던 가나안(두로, Tyres지역) 여인의 말이었습니다. 이 믿음의 행위를 담임목사가 바닥에 던져주는 고기를 주워 먹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그것을 믿음의 행위로 여겼습니다. 나아가 절대순종이라는 이름 하에 인분조차도 먹었습니다. 황당하시지요? 어떻게 21세기, 그것도 문명화된 사회, 한 나라의 수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것도 젊고 명석한 청년들이 어떻게 그런 걸 따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드시지요? … 그런데, 안타깝고 슬프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소위 믿음 좋고 열심있다는 교인들 안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이 사건들이 알려지고 난 뒤에 그 교회나 그 교회가 소속된 교단이 영적, 정신적, 신체적 상해를 입은 피해자에 대한 진심어린 어떤 연민의 모습이나 행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고 피해본 이들을 감싸야 할 그 교단소속 목회자들이 되려 '제 식구 감싸기'라는 불의한 우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무조건 추종할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또 생각함으로써 말씀을 보고 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상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질문해야 하고 토론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건강하고 건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이것이 설교 후 의견과 질문을 나누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드리니까 저는 앞선 목사처럼 안그럴 사람 같지요? 아닙니다. 누구나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별히 카리스마 있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하고, 서로를 지켜줘야 합니다. 다시 한번 더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가져 주십시오. 그 뜨거움으로 이것이 맞는지, 왜 그런지 생각하며 질문해 주십시오. 베뢰아 사람으로 서 주십시오.



2. 채찍질, 가시관, 그리고 모멸


오늘 드디어 요 19장으로 넘어 왔습니다. 교회창립과 더불어 요한복음 나눔을 시작한지 무려 5년 2개월 만입니다. 이제 요한복음이 3장 남았는데, 오늘 본문부터 본격적인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합니다. 선동된 대중의 요구에 부합해 빌라도는 강도 바라바를 내어 주기로 합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대중을 만족시키려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형에 앞서 몇가지 행위(performance)를 지시합니다. 이른바 예수님의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짧은 오늘 본문 속에 예수님의 고난은 다음의 3가지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채찍질이었습니다(1절). : 채찍질은 영화를 비롯한 각종 미디어에서 고문을 다룰 때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형벌입니다. 하지만, 간단하게 보이는 타격방식과 달리 강한 타격력을 가진 치명적인 고문과 체벌도구였습니다. 로마의 신학자였고, 역사가였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AD 263년 - AD 339년)의 자료에 보면, 고대 로마에서는 십자가형을 하기 전에 우선 사형수에게 기절할 정도로 모진 채찍질을 가했습니다. 그림(아이패드)에 보시는 바와 같이 당시 로마에서 쓰던 형벌용 채찍은 수많은 가닥으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채찍은 땋은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그 속에는 쇠 구슬, 날카로운 뼛조각, 쇳조각, 가시 등의 치명적인 흉기 등이 박혀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거기다가 채찍 가죽을 하룻동안 물에 담가 불려 무게를 무겁게 만들어 공포와 아픔을 가중시켰습니다. 그래서 채찍질이 거듭될 수록 살갗, 근육 뿐 아니라, 뼈 까지도 골병들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당하신 첫번째의 고난, 채찍찔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몇 대 맞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죽음의 문턱에 도달할 정도로 혹독했습니다. 어깨에서 시작하여 등, 팔, 가슴, 복부,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정강이에 이르기까지 전신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며 찢어놓는 잔인한 형벌이요, 고문이었습니다. 두번째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가시관이었습니다(2절). : 고대시대의 못보다도 가시는 더 뾰족해서 살갗을 파고 찔렀습니다. 지금 보시는 이 가시(실물 제시)처럼 빌라도의 군사들은 날카로운 가시관을 만들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웠습니다. 작은 가시에 살짝 찔려도 “악” 소리가 나는데, 하물며 무수한 가시가 두피를 뚫고, 이마에 박히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주님이 당하신 두번째의 고난이었습니다. 세번째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모멸이었습니다(2절 - 3절). : 가시관을 씌우기 전 로마군사들이 예수님에게 입힌 겉옷은 자색옷이었습니다. 당시 자색은 그리스 시대로부터 로마시대, 그리고 비잔틴 제국에 이르기 까지 약 3천년 동안 강력하고 부유한 권력자 계급의 상징색이었습니다. 청색과 붉은색의 혼합에서 생기는 자색은 조개의 분비물에서 추출했는데, 그 염료 1g을 얻기 위해서 무려 조개 900개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이만큼 희소가치가 있다보니 가격도 비쌌을 뿐 아니라,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 때는 일반인들의 착용을 금지함으로써 보통사람들은 접하기도 어려웠던 색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6:14에 보면, 두아디라(Thyatira,터키어로 Akhisar)성의 루디아라 하는 여인이 나옵니다. 사도바울에게 세례를 받은 여인인데, 그녀의 하는 일이 자주색 옷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두아디라는 중국의 비단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무역로인 비단길(Silk Road)의 길목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지방 염색공업의 중심지로 유명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중국산 비단을 자주색으로 염색하여 유럽에 판매하던 여인이 자주장사 루디아였습니다. 일명 귀족과 왕족을 대상으로 하는 거상이었던 겁니다. 로마군인들은 빌라도에게서 받았는지, 아니면 어디서 구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 귀한 자색 천으로 예수님을 둘렀습니다. 그리고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시관을 씌웠습니다. 놀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손으로 예수님을 때리며 이렇게 조롱했습니다. 3절입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저는 제 어머니께 엄청 맞으며 자랐습니다. 제 동생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특별히 고집센 제가 더했습니다. 지난 주간 제 어머니와 통화하는데,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지난 시절 참 살기가 그렇고, 생활하기가 쉽지 않아서라고 하지만, 내가 참 많이 때렸지? TV 어느 드라마를 보니, 자식들이 그게 상처로 남는다고 하던데, 우리 아들하고, 딸 한테 내가 미안하다. 어떻게 그 상처를 씻을꼬…” 미안하다고 하시는 제 어머니께 제가 웃으며 장난스레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 마늘 짱아지 챙겨주시겠다는 말씀에 그 상처들 싹 씻겨없어졌거든요. 그러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 한때는 상처였지만,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어머니도 그때 삶이 몹시 힘겨우셨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들은 제게 더이상 상처가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받아 억울하게 맞았던 유년의 기억들, 손으로, 말로 받았던 그 모멸감은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수많은 군중들 앞에 세워 보란듯이 채찍질하고, 가시로 찍어눌렀던 것이 예수님의 육체에 가한 고난이었다면, 손으로 때리며 조롱하고 경멸하고 무시함으로써 주어진 모멸감은 예수님의 가슴에 꽂혔던 아픔이요, 고난이었습니다.



3. 고난에 대해 묻다


상상하기 힘들고, 감당하기 조차 버거운 고난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신사참배에 반대해 옥고를 거치다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이 남긴 기도에 보면, 고난에 대한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신앙의 위인도 고백했듯이, 한두 번의 아픔도 참기 어려운데, 계속된 고난은 참으로 견디기 힘듭니다. 그런데, 주님은 왜 그 모진 고난들을 견디며 참으셨을까요? … 히 12:2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주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참으셨고, 부끄러움과 모멸도 개의치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이 뭡니까? 십자가의 아픔과 고난 뒤에 올 영광, 부활입니다. 나아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과 죄인이 화해하고, 하나님과 죄인이 연결되고, 죄인이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 자체가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당신께 다가온 고난의 의미와 가치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에겐 더이상 그 고난은 멈춰야 하고, 벗어나야 할 고난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통로였습니다. 부활을 향한 발판이었으며, 기쁨을 위한 씨앗이었습니다. 바로 그 기쁨 때문에 그 모진 고난을 견디고 참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우리에게 닥쳐온 고난의 의미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생을 사는 동안 우리가 맞닥뜨리는 고난의 수가 잦을 뿐 아니라, 그 기간이 길다는데 있습니다. 물론 고난이 지나고 난 뒤에 그 고난의 의미를 뒤늦게 깨닫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고난의 한 가운데서는 알지 못하기에, 버겁고, 외로와 너무나 힘들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실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번 고난 앞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외칩니다. “왜? 왜? 왜입니까?” 그 의미라도, 그 이유라도 제발 좀 알려달라는 인간의 몸부림입니다.



4. 아프지 않으면


지난 4월 5일 말씀을 나누며 저의 20대 청년시기 가장 많은 감명을 주었던 작가가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 1922년 - 1999년)였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끝이 없는 것 같은 긴 투병생활을 거쳤기에 그녀가 남긴 다음의 자기고백적 시는 현실을 무시하고 기계적으로 적용하려는 교조적인 것과 달리 그 자체로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의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아프지 않았다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믿지 못할 이적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다. 몸이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뵙지 못할 그분이 계시다.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수 조차 없다. 미우라 아야코도 한 때 그 긴 고난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해 원망했고, 낙망했고, 등돌렸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고통은 고난의 끝이 아니라, 그 중간에서 발견하고 만난 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해석이 되고 설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고통의 심연 가운데 있었지만, 그 속에서 발견한 것에 더 다가갔습니다. 그 결과 견딜 수 있었고, 버틸 수 있었고, 마침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왜 가끔 이런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삶이란? 사건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이다”라고요. 이것은 오늘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가 10%를 차지 한다면, 그 일어난 일에 대해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그 결과의 90%를 차지한다는 말과 대치가 가능합니다. 무작위로 발생하는 고난 앞에서 우리가 꺼내들 수 있는 유일한 책이 ‘속수무책’일 수 있습니다. 때로 부당해 보이는 삶의 방식 앞에서 ‘왜 나한테 이렇게 혹독하신가?’라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기에, 자욱하게 드리워진 안개 속에서 그저 막막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고난을 푸는 열쇠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5. 당근, 계란, 그리고 커피


끝으로 한 딸과 어머니의 이야기를 나눔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심각한 재정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딸이 있었습니다. 딸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어머니를 찾아가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사실 인생을 포기하고 싶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조용히 말을 들으시던 어머니는 갑자기 딸을 주방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냄비 3개를 가져와 무언가를 넣고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뒤 물이 끓자 어머니가 딸에게 말했습니다. “냄비 안에 뭐가 들었는지 한 번 보렴.” 딸이 냄비뚜껑을 열어 보고는 당근과, 계란과 커피라고 대답하자,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똑같이 끓는 물에 들어갔는데, 당근은 물러졌고, 계란은 단단하게 굳어졌지. 그리고 커피는 이렇게 좋은 향을 낸단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 같은 고난을 당해도 어떤 사람은 당근처럼 약해지고, 어떤 사람은 계란처럼 마음을 굳게 먹지,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 고난을 이겨내고 커피같이 향기로운 인생을 만들어낸단다.” 생의 고난 앞에서 우리는 위 3가지(당근, 계란, 커피)처럼 각기 다르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막연하게 보이고, 매우 불공정해 보이는 우리 인생의 장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 믿음으로, 그 신뢰함으로 이 시기에 드릴 수 밖에 없는 기도를 드리고, 믿지 못할 이적을 체험하고, 접근하지 못할 성소에 다가가며, 우러러 뵙지 못할 분을 만남으로써 끝내 향기나는 은총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려움으로 마음이 무너질 때, 하나님~ 우리의 눈이 여전히 하나님을 향하게 해 주십시오. 고통 중에라도 우리의 입이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게 해 주십시오. 아픔 중에라도 우리의 손이 여전히 주님의 손을 놓지 않게 해 주십시오. 고난 중에라도 우리의 무릎이 여전히 하나님 전에 서 있게 해 주십시오.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심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처럼 우리도 끝끝내 승리하도록 마음을 견인해 주십시오. 이를 위해 오늘 비록 눈물이 뺨을 적시더라도 심어야 할 씨앗을 심고, 돌아보아야 할 사람을 돌보며, 땀 흘려 소망의 길 만드는 그리스도인 되게 해 주십시오. 특별히 내일 40주년 광주민주화운동일을 맞이하여 40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때의 아픔과 슬픔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는 분들의 눈물을 닦아 주십시오. 아직도 말도 안되는 주장과 유언비어로 고통을 가하는 이들의 추악함과 잔인함이 멈춰지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땅이 다시는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과 고난의 희생자가 나오지 않는 나라되게 해 주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하나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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