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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0.04.26 움오름 주일 설교 - "진리에 속한 자"(요 18:33-38)

최종 수정일: 2020년 4월 28일







요한복음 18:33~38

33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35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3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7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38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설교문


1. 승자의 뇌


자기 분야에서 높은 명성과 존경을 받던 어떤 분이 회의석상에서 추곡수매와 관련한 사람판별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분 메시지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추곡수매시 사용하는 채집칼을 갖고 몇 군데만 쿡쿡 찔러 보면 추수한 벼의 등급을 금방 알 수 있는데, 사람도 질문 몇개만 던져보면 그 사람의 내면,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왜 저런 말씀하시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론인즉, 당신은 아랫 사람들의 실력과 상태를 잘 알고 있으니, 더 잘 하라는 의미였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비평적 시각에서 추곡수매 등급 매기는 이야기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날 그분은 몇 가지 자기오류를 인식하지 못한 채 확신에 찬 이야기를 했습니다. 첫째, 벼와 사람을 동일시했습니다. : 추곡수매시 등급심판관은 높게 쌓여있는 모든 가마니를 일일이 확인할 수 없기에 농가별 몇 가마니만 채집칼로 찔러 샘플을 모읍니다. 그리고 곡물 수분측정기를 통해 건조시 수분 함량이 13-15%를 유지하고 있는지 점검하여 등급도장을 찍습니다. 벼를 검사하듯이 사람을 단시간에 어떤 사람인지, 그 실력과 인품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사람은 어떤 분야에선 못하지만, 다른 분야에선 매우 특별하게 잘 할 수 있습니다. 고로 몇 가지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했다 해서 그 사람이 형편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벼와 사람을 동일하게 취급했습니다. 둘째, 사람은 등급매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 벼 가마니에 찍는 도장은 벼에 등급을 매깁니다. “특등, 1등, 2등…”, 그렇게 가마니에 찍힌 등급은 곧 가격이 되고, 상품의 범주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처럼 등급화 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한다면, 그것은 신라시대 성골과 진골을 나누고, 그 아래 6두품을 나누는 것과 같은 또 다른 신분제로의 회귀일 뿐입니다. 몇 가지 질문으로 사람의 내면을 모두 파악하고, 그 사람의 됨됨이를 다 알 수 있는 그런 질문은 없습니다. 또한 그런 능력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그런 능력자라고 생각하는 한 그와 함께 하는 사람은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동료요, 동역자가 아니라, 등급과 직급을 매겨 부리는 종업원(*종업원은 이렇게 대해야 한다는 뜻이 아님)일 따름입니다. 식민지의 총독으로서 빌라도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왔으며, 또 수많은 재판을 집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몇 가지 질문만 던지면 상대방을 금방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출처가 모호한 그런 자신감을 갖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예수님께 내던졌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내가 유대인이냐?”,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가 왕이 아니냐?”, “진리가 무엇이냐?” 보통 높은 지위와 과거 성공의 경험이 만나면 우리 뇌는 스스로를 속이게 된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거둔 눈부신 성공이 태어나면서부터 지닌 천재성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모두가 자기가 잘나서 이룬 것들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승자의 곡선’이론을 주창한 신경심리학자 한스-게오르크 호이젤(Hans-Georg Häusel)은 이렇게 지속적인 성공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테스토스테론과 세로토닌의 혈중농도가 일반인들에 비해 많이 높아진다고 했습니다. 남성호르몬으로 불리는 테스토스테론은 지배욕, 공격욕, 성욕을 고양시키는 호르몬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영장류 뿐 아니라, 사람을 상대로 한 연구를 보면,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은 경우에 사회적 서열이 높고, 공격적이며, 성적 접촉이 늘어나는데 비해 ‘사회적 지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대신 이 과정에서는 행복감과 안정감을 주는 세로토닌이 과도해지면서 자기중심적 사고를 부채질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을 좀 더 쉽게 표현하면, ‘사회적으로 성공하면 그 성공에 취해서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만 보려 한다’는 것입니다. 한스-게오르크 호이젤(Hans-Georg Häusel)은 이런 것을 ‘승자의 뇌’라고 불렀습니다. 이를 좀 더 우리 사회적인 언어로 바꾸면, ‘갑의 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갑의 뇌는 승자의 뇌보다 훨씬 극단적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물건’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잊을 만하면 사회면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서 막말을 일삼고, 주위 사람을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주변의 사람들을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 보지 않고, 하나같이 장기판의 졸로 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을 자기 맘대로 대해도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 속에서 사람의 온기를 찾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2. 진리를 오해한 이들


사람이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거나, 사람을 부리는 자리에 오래토록 있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호르몬의 변화로 인해 인식이 바뀌고, 사람이 달라진다면, 진리에 오래토록 속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달라지겠지요. 달라져야 하구요. 근데, 그 진리를 배우고, 진리를 믿는다고 하는 교회생활을 10년, 20년 해도 왜 사람이 그 모양일까요? 잘 믿는 사람 같다가도 왜 특정한 일이나, 돈 앞에서는 흥분해서 진리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을까요? …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진리’가 거짓된 진리여서 일까요? 그것이 아니라면, 진리인데도 우리가 그 진리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에 그런 것은 아닐까요? 지난주일 <진리가 무엇이냐? 2>를 나누며, 진리에 대한 정의를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간략히 설명드렸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진리’라고 하는 단어, ἀλήθεια(알레세이아)가 모두 109번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무려 1/2에 가까운 용례들이 요한복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만큼 사도요한이 진리에 대해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을 기록할 A.D 90년경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신앙을 오염시키고 위협했던 이단사상은 크게 2가지 흐름에 기인했습니다. 하나는 유대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헬라주의입니다. 유대주의의 대표적인 이단이 에비온파입니다. 이른바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교식으로 해석한 유대교적 율법주의입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음에도 전에 믿던 유대교적 요소를 버리지 못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유대교의 틀 안에서 견지한 것입니다. 그들은 분파를 형성하여 율법준수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율법과 유대인의 전통 위에 기독교를 이식시키려고 했습니다. 바울서신에 보면, 바울의 사도성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한 바울을 유대교를 져버린 배반자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바로 에비온파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함으로써 교회에 많은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초기 기독교 신앙을 위협했던 두 번째 이단은 헬라주의와 결합한 영지주의(Gnosticism)였습니다. 영지주의는 대략 1세기 말, 지중해 연안의 헬라 철학, 그리스-로마의 신비종교, 동양 종교들의 이론과 사상을 절충, 혼합한 이단사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물질과 육체를 죄악시하고 영을 높이 평가하는 종파였습니다. 그들은 물질적 창조를 악한 것으로 간주하고, 구원은 영적인 영역에만 국한된다고 여겼습니다. 신비한 영역에서 오는 신적 존재의 섬광(spark) 또는 씨앗(seed)들이 구원받기로 예정된 어떤 영적인 개인들의 몸 안에 주입된다고 여겼습니다. 인간이 육체라는 물질세계에 속박된 상태에서 해방되어 영혼이 빛의 세계, 곧 초월적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비밀한 지식이 요구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세상에 영적지식을 전하기 위해 오신 계시자 정도로만 여겼습니다. 또한 물질과 육체는 악하다는 신념에 따라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고난이나 죽음이나 부활은 실재적인 것이 아니다'는 가현설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을 일컬어 사도 요한은 거짓말하는 자들, '예수를 주로 시인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요일 2:22, 4:2-3). 사도요한 당시 이단들은 이렇게 진리를 오해했기에 진리를 잘못 살았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은 했지만, 그들은 결코 참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믿고 있는 진리는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요 18:37)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들의 삶은 그들이 믿는다는 진리와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진리에 속한 자


그렇다면, ‘진리에 속한 자’란 어떤 사람, 어떤 모습을 일컫는 것일까요? … 이를 대표적으로 설명한 것이 우리가 이미 거쳐온 요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면 생존할 뿐 아니라, 생존을 넘어 열매맺는 생명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비결을 포도나무와 가지라는 평범한 일상에 비유해 설명한 것입니다. 기억을 떠올려 보시겠습니다. 요 15장의 비유에서 ‘깨끗하게 한다(가지치기)’는 동사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동사가 무엇이었습니까? … ‘거하다’입니다. 요 15:4–11 중에 ‘거하다’라는 동사가 무려 9번이나 등장합니다<4절(2번), 5절(1번), 6절(1번), 7절(2번), 9절(1번), 10절(2번)>. 예수님은 짧은 구절 속에 “거하라”는 동사를 무려 9번이나 사용하셔서 주님 안에, 진리 안에 거하는 삶의 중요성과 그 혜택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진리를 살아가고, 열매를 맺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 혼자서 할 수 있거나 단번에 이룰 수 있는 부분이 결코 아닙니다. 혹이나 우리가 그러한 삶을 지금까지 조금이라도 살아왔다면, 그것은 ‘승자의 뇌’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 자신의 천재성이나 노력만의 부산물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보다 근본적인 힘, 가지를 붙잡고 있는 포도나무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 바로 거함(상호연결)이 선재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가뭄에 콩나듯 볼 수 있지만, 90년대만 하더라도 자동차 뒷부분에 ΙΧΘΥΣ(익두스)라고 적힌 물고기 모양을 붙이고 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습니다. ΙΧΘΥΣ(익두스)란? 단어와 문양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물고기를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거기엔 초대교회 시절부터 박해를 피해 서로를 격려하고 지지하던 그리스도인의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ΙΧΘΥΣ(익두스), ‘Ιησούς Χριστός, Θεού Υιός, Σωτήρ’(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오늘날 우리 생각에 특별할 게 없는 것이라 여길 수 있는 이 신앙고백에 초기 그리스도인 선배들은 삶을 걸었습니다. 그들에게 ΙΧΘΥΣ(익두스)는 단순한 표식이 아니라, 온 인생과 자신을 비롯한 가족들의 생명이 걸린 결단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들에게 ΙΧΘΥΣ(익두스)는 주님을 이어 자신들이 지게 될 진리의 십자가였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의 증거였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3행으로 된 시를 기억하시지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시인은 말합니다. 온몸으로 사랑하고, 한덩이 연탄재로 쓸쓸히 남는게 두려워 우리는 연탄 한장되지 못하고 있다며 연탄재 함부로 발로차지 마라고 합니다. 시인이 연탄재를 보며 느꼈던 그 느낌과 감정을 저는 익투스를 보며 느끼곤 합니다. “너는 한번이라도 뜨겁게 주님을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한번이라도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려고 뜨겁게 몸부림 쳐 본 적이 있는가?”



4. 좀비 그리스도인


코로나19의 전세계적 창궐(pendemic)과 관련하여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한국 드라마 시리즈물 <킹덤>이 인기라는 기사를 보고 찾아서 시즌1부터 시작해서 시즌2까지 모두 섭렵해 보았습니다. 배경은 조선시대이며, 쟝르는 좀비 사극물입니다. 내용은 죽었던 왕이 생사초로 인해 되살아나 좀비가 되고, 그로 인해 백성들이 좀비로 변해갑니다. 순식간에 왕좌를 탐하는 역적으로 모함을 받고 도망자가 된 왕세자가 그 비밀을 파헤치며 해결해 가는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킹덤> 이전까지 저는 좀비물을 찾아서 시청하지 않았습니다. 인기있었다던 <부산행>도 영화 채널에서 나오는 것을 잠시 보다 채널을 돌릴 정도였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가끔 만화나 영화 같은데 보면, 무표정하며, 검회색 그림자같은 얼굴로 온갖 관절이 따로 노는듯이 걸어다니는 좀비가 많이 역겨웠기 때문입니다. 생각할 능력도 없고, 공감 능력도 없이 오로지 피에 주려 산 사람을 뜯어먹겠다는 원초적 본능에만 집중하는 좀비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움직일 뿐 살아있다고 볼 수 없는 시체, 본능적인 욕구만 발달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누군가를 물어 결국 순식간에 동종괴물로 변하게 만드는 무서운 존재가 좀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좀비가 만화나 영화 속에서만 등장하지 않고 실재한다는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많은 이들이 움직이는 시체처럼 비척대며 일주일을 살다 태양빛을 피해 숨어들어가는 좀비처럼 교회를 찾습니다. 피에 주려 원초적인 욕구만 좇아다니다 덜컥 다른 사람을 물어 또다른 좀비 하나를 탄생시켜 놓는 무늬만 기독교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만약, 만약에 이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의 이야기라면, 우리 또한 진리와 무관한 그리스도인 아니겠습니까? 그런 우리를 어찌 진리에 속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5. 감(感, SENSE)있는 그리스도인


가끔 ‘자고 났더니 갑자기 유명해졌다!’는 말을 인용하며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된 사람을 조명하는 기사가 뜨곤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 이야기들을 추적해 보면, ‘자고 났더니 갑자기 유명해 진 사람은 없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세상에 아무런 애도 쓰지 않고, 힘들게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자고 났더니 다음 날 유명해져 있는 경우는 지금껏 단 한차례도 보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갑자기 신드룸을 일으키며 인기스타 반열에 올라간 한 중년 배우(김응수)가 인터뷰에서 장자의 말을 인용하며 "높은 곳엔 진리가 없어요, 낮은 곳에 있지”라는 말을 했습니다.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가 인용한 부분이 장자(莊子)의 ‘천도(天道)’에 있는 목수 ‘윤 편(扁)’ 일화입니다. 왕이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앞에서 수레바퀴를 깎던 목수가 왕에게 무슨 책을 읽고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왕이 옛 성현의 말씀이라 답했습니다. 그러자 목수가 “그것은 술 찌꺼기 같은 것입니다”라고 응수했습니다. 그러자 왕이 불같이 화를 내니까 목수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수레바퀴를 덜 깎으면 뻑뻑해서 굴대가 돌아가지 않고, 더 깎으면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합니다. 더도 덜도 아니게 정확하게 깎는 건 손의 감각이지, 성현의 말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장자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인터뷰하던 배우가 이 말로 마무리 했습니다. “연기도 똑같아요. 무한히 훈련하고, 고생하고, 실패도 하면서 감을 기르는겁니다. 그래서 1년에 한 편씩 연극을 합니다. 나를 심판하고 점검하려고… 높은 곳엔 진리가 없습니다. 진리란 낮은 곳에 있지요.” 보통 ’감(感, sense)’이라는 것은 대충, 얼릉뚱땅해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손맛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충 넣으니까 간이 딱 맞고, 맞있게 되지는 않습니다. 수없이 다른 량을 넣고, 실패하고, 또 시도한 오랜 결과로 얻어진 것이 바로 손맞입니다. 바로 오랜 연습과 숙련의 결과요, 눈 대중만 하더라도 될 수 있을 정도로 반복한 결과입니다. 진리 안에 거한다는 것,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 진리를 산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훈련하고, 고생하면서 다듬어 가는 겁니다. 때론 실패도 하면서 손의 감각을 길러 가는 겁니다. 유명한 강사의 강의를 듣거나 유명목사의 설교를 듣는다고 해서 내 실력이 저절로 상승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으로 나를 깎아가고, 다듬어 가는 겁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그 말씀을 살아내는 진리에 속한 그리스도인(요 18:37)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모른다 자기 마음대로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만 내 마음대로 네가 되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하다가 죽어야하는데 너를 사랑하기 위해 내가 죽어야하는 것이 사랑인 것을 알지 못한다 나를 살리는 것은 사랑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한다 너를 살리는 것이 사랑인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정호승,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중에서 하나님~ 우리는 사랑을 모르듯 진리를 모릅니다. 진리를 모르면서도 제 마음대로 이것이 진리다며 살아 왔습니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만을 진리라고 왜곡했습니다. 진리를 위해 죽어야하건만, 나를 위해 진리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진리에 속해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이제 그 지긋지긋한 무늬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벗어나 살고 싶습니다. 진리에 속하고 싶다면, 진리를 얻고 싶다면, 버려야 할 것도, 포기할 것도 많을텐데, 그 모든 것을 온통 짊어지고, 교묘히 숨긴 채 더이상 걷지 않고 싶습니다. 이제는 더 늦기 전에 원함과 실제가 박리된 가면의 삶, 엉터리를 정리하고 진짜로 용기내어 살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隨處作主 立處皆眞(수처작주 입처개진), 우리가 다다른 어느 곳이든, 정체성을 지키는 주인되며, 서 있는 곳이 어디든지 진리가 머물고, 진리가 다스리는 ‘진리의 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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