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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0.03.29 움오름 주일 설교 -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요 18:33-38)

최종 수정일: 2020년 4월 5일








요한복음 18:33~38

33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35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3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7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38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설교문


1. 균형잃은 재판


대한민국 헌법 제12조는 신체의 자유, 적법절차의 원칙, 변호인 선임권, 영장제도 등을 규정한 조항으로서 모두 7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2조 1항 후문에서 는 적법절차의 원칙을 천명하고, 제27조에서는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형사소송법은 이를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칙을 기본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피고사건에 대한 실체심리가 공개된 법정에서 검사와 피고인 양 당사자의 공격⋅방어활동에 의하여 행해져야 한다는 당사자주의와 공판중심주의 원칙, 공소사실의 인정은 법관의 면전에서 직접 조사한 증거만을 기초로 해야 한다는 직접심리주의와 증거재판주의 등 입니다. 시대의 차이가 있고,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오늘날과는 다른 2천년 전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이 서신 법정은 어느 것 하나 허술하지 않고, 편향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보면, 겟세마네에서 잡히신 예수님은 모두 6번의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안나스의 뜨락(요18:12-14)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야바의 뜨락(마26:57-68), 그리고 같은 장소에서 산헤드린 공회(마27:1-2)의 심문을 받으며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이후 빌라도의 관정(요18:28-38)에서 심문을 받다가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빌라도가 헤롯(눅23:6-12)에게로 예수님을 보내어 심문받게 합니다. 헤롯은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확인 후 다시 빌라도에게 되돌려 보냅니다. 그리고 빌라도(요18:39-19:6) 역시 예수님이 무죄임을 확신함에도 불구하고 여론에 떠밀려 “십자가형”이라는 최종선고를 내리게 됩니다.



2. 빌라도의 질문 1


1) 인생을 사는 이유를 가진 자 오늘 본문은 총 6번의 심문과 재판과정 중 4번째에 해당하는 빌라도 관정에서의 재판입니다. 관정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려는 대제사장의 무리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새벽잠을 깬 빌라도는 밖에서 그들을 만나 원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예고도 없이 새벽에 찾아와 상식 밖의 기소를 하는 원고의 이야기에 별 신뢰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관정 안으로 들어와 체포된 예수님을 심문해서 사실관계를 파악하려 했습니다. 그가 제일 처음 이 질문을 했습니다. 요 18:33입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엔 2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른 새벽 대제사장 무리에게 체포되어 자신의 법정에까지 끌려온 청년 예수의 반역죄에 대해서 알아보려는 의도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조롱의 의미였습니다. 허름한 행색에 초라해 보이는 너 같은 사람이 어떻게 유대인의 왕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조롱이 내포된 질문이었습니다. 사람의 행색을 보고 그 사람됨을 평가하는 이런 문화는 저렴한 하급문화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대를 무론하고 애용되어 왔습니다. 이와 같은 평가문화는 차림새에서 그치지 않고, 나라, 인종의 문제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끊임없이 차별과 우월의식을 형성해 왔습니다. 빌라도 역시 점령국 로마인이라는 우월의식에 잡혀 있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그게 자리이건, 외모나 재산이건 간에 이런 우월의식에 잡혀 있는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운 것도 헛되고, 아름다운 것도 거짓처럼 사라지듯이’ 무너지고 사라질 날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과연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극작가 아서 밀러(( Arthur Asher Miller, 1915년 - 2005년)가 쓴 <비시에서의 사건(Incident at Vichy)>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비시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서쪽으로 299km 떨어진 프랑스의 도시입니다. 동시에 비시 프랑스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점령하에 있던 남부 프랑스를 1940년부터 1944년까지 통치한 정권이 위치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아서 밀러의 작품 <비시에서의 사건>은 당시 비시에 들어온 나치가 유태인을 색출하기 위해 사람들을 심문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본성, 죄의식, 공포, 그리고 삶의 의미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비시에 사는 부유하고 학식 많은 한 신사가 유태인을 색출하는 나치 앞에 섰습니다. 그는 자랑스럽게 나치에게 대학 졸업장, 유명인사로부터의 추천서 등 남이 부러워할 만한 서류를 내보였습니다. 그러자 심문하던 나치장교가 그를 힐끗 쳐다보면서 “이게 전부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자랑스럽게 자신이 일생 동안 매달려온 그 서류들을 보며, 그에게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나치는 그의 서류들을 책상 옆에 있는 휴지통에 쓸어버리며 이렇게 퉁명스레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알았지!” 어쩌면, 이게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나의 사람됨을 자꾸 졸업장과 상장, 재산내역서 등, 소유로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다른 사람의 존경과 인정으로 인생을 살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기대어 온 것들이 파괴되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날 앞에서 우리는 심히 당혹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33년이라는 짧은 삶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런 외형적인 것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철학자 니체가 “인생을 사는 이유를 가진 자는 인생의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다”고 했듯이, 주님이 삶을 살아간 이유와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구원이었고, 인간의 땅 위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삶의 존재 이유를 명확히 아셨기에 외적인 성공이나 실패를 초월할 수 있으셨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모멸의 재판자리에까지 서실 수 있었습니다. 2)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런데,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이 말은 실은 매우 의외의 질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눅 23:2을 보면, 대제사장 무리의 고발내용은 3가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첫째, 백성을 미혹했고, 둘째,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으며, 셋째, 스스로를 왕, 다시 말해 그리스도라고 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누군가의 죄를 열거할 때 가장 강력한 죄를 제일 먼저 언급합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피고가 고소한 첫째, 둘째 죄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세번째 기소 내용에 대해 물었던 겁니다. 이는 어떤 면에서 빌라도가 대제사장 무리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뉘앙스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의 첫째 관심이 예루살렘과 유대의 정치적 안정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정치가들이 여론조사와 지지도, 그리고 득표율에 제일 큰 관심이 있듯, 당시 로마총독의 제일되는 관심은 식민지의 혼란으로 인해 자기 정치생명이 위태하게 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은 그것이 빌라도 스스로가 하는 말인지, 아니면 대제사장 무리의 기소내용에 따라 하는 말인지를 되물었습니다. 같은 질문이더라도 누가 어떤 의도에 따라 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하신 반문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빌라도 스스로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생각해서 질문했다면, 그는 예수님을 정치적인 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이기에 주님은 “아니다”라고 대답하셨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대제사장 무리의 주장에 대한 확인이라면 정치적인 왕이 아닌, 메시야(그리스도)에 대한 확인이기에 “맞다”라고 하셨을 겁니다.



3. 빌라도의 질문 2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 그게 누구 생각인지를 되묻는 예수님의 질문에 빌라도는 이렇게 말하며 두번 째 질문을 이어갑니다. 요 18:35입니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내가 유대인이냐?”라는 빌라도의 대답을 “아니냐?”라는 뜻의 의문사 μήτι(메티)를 정확히 반영해 재번역해 보면, 이런 뜻이 됩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지 않느냐?” … 빌라도는 예수님이 제기한 질문을 요지를 파악한 뒤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므로 유대인들 사이에서 문제삼고 있는 메시야(그리스도)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예수님이 종교적이 아닌 실제 정치적인 반란을 도모할 유대인의 왕인지가 궁금했던 겁니다. 빌라도는 이어 같은 유대인인 예수님을 점령국 재판관에게 넘겨 사형을 언도해 줄 것을 요구하는 대제사장의 무리를 조소하듯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요 18:35 후반절입니다.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는 빌라도의 질문을 우리의 일상언어로 바꾸어 표현하자면 이런 말이 됩니다. “도대체 당신이 뭘 했길래 사람들이 너를 죽이려고 저 난리냐?”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는 빌라도의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디선가 낯익은 질문이지 않습니까? 그 질문은 예수님을 향한 빌라도의 질문 이전에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창 4:10입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가인은 자신이 드린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대신에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다는데 대해 분노했습니다. 그의 분노와 섭섭함은 그 당사자인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동생 아벨을 향했습니다. 왜 일까요? 가족이요, 사랑하는 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경쟁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럼, 정당하게 자신을 개혁하고 혁신하여 경쟁하면 될 테인데, 그는 그것보다는 훨씬 간단한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경쟁자(경쟁업체)를 소멸시키는 사악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가인은 인류최초의 존속살인죄를 범한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말의 죄의식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당시까지 죽음이란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실체를 본 사람이 없었는데, 그는 그 죽음을 눈 앞에서 만들어 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동생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이 분노하는 문제의 원인도 제거했다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앞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끔찍한 문제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가인은 동생에 대해 물으시는 하나님 앞에서조차 분하여 얼굴색이 변할 정도로 스스로를 정당하다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인을 향해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창 4:10입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 속에 사용된 아사(עָשָׂה) 라는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뜻은 ‘하다’라는 뜻 이외에 짓다, 행하다라는 뜻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사는 동안 끊임없이 무언가를 행하고, 만들어 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됨됨이는 그 사람이 무엇을 행하며 무엇을 만들어 왔는지에 따라 증명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신앙이 “이것 해라, 저것 해라”고 하는 ‘do와 do not의 종교’가 아니다는 것은 아실 겁니다. 우리 신앙은 그것을 넘어서 존재(being)의 종교입니다. 이것은 마치 같은 물을 마시는데도 독사가 먹으며 독이 되는데,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으신 하나님의 질문은 “네가 어떤 사람이냐?”는 존재론적 질문이었습니다. 다시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했던 질문으로 되돌아가겠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빌라도가 물었을 때, ‘하다’라는 동사 ποιέω(포이에오)는 앞서 창 4:10의 아사(עָשָׂה) 라는 단어처럼 ‘하다, 행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나아가 ‘맺다’, ’세우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는 질문은 “네가 무엇을 행했느냐?, 네가 어떤 삶의 열매를 맺었느냐? 네가 무엇을 세우며 살았느냐?”를 묻는 질문입니다. 나아가 아사(עָשָׂה)의 경우처럼 도대체 어떤 존재이길래 어떤 결과물을 만들며 살아왔는지에 대해 묻는 존재론적 질문이기도 합니다.



4. “네 정체가 무엇이냐?”


조기은퇴를 하고 후임목사를 오OO으로 세웠던 고 옥OO 목사가 후임목사의 끊임없는 거짓과 일탈, 교만과 탐욕을 고통스럽게 지켜보다가 편지를 보내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네 정체가 무엇이냐?” 학력사칭, 논문표절, 재정남용, 불법호화건축, 불법안수로 한국교회에 파란을 일으킨 오OO의 어긋난 행동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거짓’이라고 비난합니다. 옥OO 목사를 선으로, 그리고 오OO 목사를 악으로 구분짓습니다. 하지만,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미안한 말씀이지만, 오OO은 옥OO의 쌍둥이 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이 정도 규모의 교회를 이어받아 운영하고 목회해 갈 사람으로 옥OO 목사의 눈에 가장 적합했던 인물이 오OO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자신과 가장 근접치에 이른 닮은 사람을 선택했던 겁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옥OO 속에 내재해 있었으나, 미처 발아되고 발현되지 않았던 외식이 오OO에게서 활짝 만개했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네 정체가 무엇이냐?”는 옥OO음 목사의 깊은 탄식과 회한은 오OO을 향하기 전에 그를 선택한 자신을 향한 질문이어야 했습니다. 감추고 꾸미며 살았지만, 오OO을 통해 드러난 자신의 외식을, 거짓된 자기 존재를 깊이 슬퍼했어야 옳았습니다. 한 분이 난세(亂世)라는 제목과 함께 어머니와 나눈 이야기가 담긴 글을 보내왔습니다. 내용인즉 이러합니다. 어느 날 TV 속 한 사람을 지켜보시던 어머니께서 조용한 음성으로 물으셨습니다. "난세에 영웅난다고 했지?” 딸이 대답하며 되물었습니다. ”네. 어려운 시기에 하늘이 인재를 내려준다는 뜻이지요?” 어려운 일들은 반드시 누군가가 해결해준다는 교훈은 있으나 비현실성도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딸은 자신은 그 말이 너무 상투적이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되돌아온 어머니의 답은 예상과 아주 달랐습니다. “아니! 난세가 아니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해" 어머니의 대답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미 존재했으나 우리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을 난세에 비로소 알아본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난세에 영웅난다.”는 말을 이렇게 바꾸어 말하고 싶습니다. “난세에 정체가 드러난다” 전세계 확진자수(누계)가 60만명에 육박한 코로나19사태는 난세 중의 난세임에 분명합니다. 고로 이런 난세에 정체가 드러납니다. 어떤 나라가 정말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선진국인가? 어떤 지도자가 정말 국가의 장래를 책임질 사람인가? 나아가 어떤 교회가 참된 주님의 몸이었는가? 어떤 교회가 종교 장사꾼이었는가? 어떤 이가 진짜 그리스도인이었는가? 아니면 종교중독자였는지가 판명되는 시기인 셈입니다. 몇몇 교회들에서 여전히 현장예배를 고집하며 방역당국과 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명서를 내고 “종교탄압이다, 신성모독이다”며 사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몇몇 교회와는 다르게 이 시기를 살아가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크지도 않은 몇 십명 모이는 교회들이 빈 예배당에 재봉틀을 마련해 마스크를 제작해 이웃과 나누고, 지역사회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종소리 대신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 어떤 경전 읽는 소리나 기도소리보다 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경건의 소리, 사랑의 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모든 교회가 기꺼이 함께 모이는 예배를 중단할 수 있는 것, 이웃을 위해 자신이 살 수 있는 마스크를 사지 않는 것, 재난당한 이웃에게 헌금을 보내는 것, 임대료를 깎아 주는 것, 손님 끊긴 단골 가게를 애써 찾아 주는 것 등은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가 정성으로 드린 그 어떤 예배보다도 더 참된 예배일지도 모릅니다. 감사하게도 움오름교회도 가족 여러분들께서 기꺼이 동의해 주셔서 지난주간 거리에서 생활하시는 분들을 위해 400개의 도시락을 나누었습니다. 창립예배 때부터 가끔씩 인용한 말씀이지만, 윌리엄 템플 대주교의 말처럼 “교회는 자신의 일원이 아닌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세상에서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라는 정체는 ‘안을 보는 사람의 모임’이 아니라, ‘밖을 보는 사람의 모임’인 겁니다. ‘교회가 밖을 본다는 것’은 관심과 에너지를 외부를 위해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름을 한 곳에 쌓아놓으면 썪는 냄새만 풍기지만, 땅에 골고루 흩어놓으면 밭을 비옥하게 해서 풍성한 소출을 얻게 하듯이, 교회는 자신이 아닌 이웃을 풍요롭게 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정체여야 합니다.



5.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오늘도 지난 주간 제 맘에 침투해 들어와 제 자신의 정체에 대해 질문했던 시 하나 나누며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복효근 시인의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복효근 어둠이 한기처럼 스며들고 배 속에 붕어 새끼 두어 마리 요동을 칠 때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을 지나는데 먼저 와 기다리던 선재가 내가 멘 책가방 지퍼가 열렸다며 닫아 주었다. 아무도 없는 집 썰렁한 내 방까지 붕어빵 냄새가 따라왔다. 학교에서 받은 우유 꺼내려 가방을 여는데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종이봉투에 붕어가 다섯 마리 내 열여섯 세상에 가장 따뜻했던 저녁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예배당 안에 찬송소리와 성경읽는 소리가 멈추진 시기에 이 땅의 교회는 어떤 소리로 채워가야 할지를 생각해 봅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는 하나님과 빌라도의 질문 속에서 오늘날 우리를 향해 “네 정체가 무엇이냐?”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과 대면합니다. 하나님~ 힘든 시기, 어떤 말로 표현해도 현재의 어려움을 말로 잘 설명할 수 없는 이 환난의 때에 우리의 우리됨(being)을 더욱더 올바르게 세워가는 교회되게 하옵소서. 혹이나 외식된 행위로 지탱해 왔다면, 신앙의 본질과 마주하는 시간되게 하시고, 삶의 목적을 알고 걸어가신 주님의 길과 만나는 기회되게 하옵소서. 친구의 가방에 말없이 붕어빵을 넣어둔 아이처럼 누군가의 저녁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이 되게 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오늘을 살게 하옵소서. 그런 하나님의 시선, 하나님의 마음으로 차가운 거리의 이웃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찬양: 따스한 성령님(부르신 곳에서) 설교 후 연주되는 찬양곡은 양재웅 형제님이 연주한 ‘따스한 성령님’(부르신 곳에서)입니다. 이 찬양 들으며 오늘도 우리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서로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하셨으면 합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따스한 성령님 마음으로 보네 내 몸을 감싸며 주어지는 평안함 만족함을 느끼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x2) 사랑과 진리의 한줄기 빛보네 내 몸을 감싸며 주어지는 평안함 그사랑을 느끼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x2) 내가 걸어 갈 때 길이 되고 살아갈 때 삶이 되는 그 곳에서 예배하네(x2)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x3)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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