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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사순절 36일 움오름 묵상

최종 수정일: 2019년 4월 22일


묵상의 말씀
  • 마 8: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 마 8: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성경 속으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목적은 잃어버린 이들을 찾아 구원하는 데 있습니다. 마 8:1-15에 보면, 각각 무언가를 잃어버린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째 등장인물은 자신의 건강으로 인해 사회적 관계마저 잃은 나병환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병 고침과 잃어버림을 위해 직접 예수님께 찾아와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중심을 보고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둘째 등장인물은 로마 백부장입니다. 그는 자신의 일이나 가족의 문제로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고, 자기 집 종이 건강을 잃은 일로 찾아왔습니다. 당시 하찮은 존재요, 소유로 취급받던 종의 문제를 그는 자신의 문제요, 아픔으로 여겼습니다. 종의 병고침을 위해 상전이 몸소 찾아온 것을 보신 주님은 직접 찾아가 치유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믿음 좋은 그는 예수님의 방문을 도저히 감당키 어렵겠다며 말씀으로만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이에 주님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시며 치유해 주셨습니다.


마지막 인물은 오늘 그림의 배경이 되는 베드로의 장모입니다. 그녀는 열병이 걸려 집 안에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고쳐달라고 예수님을 요청하거나, 베드로가 간청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무도 요청한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아시고 찾아가 고쳐주셨습니다. 이 장면이 기록된 본문(마 8:14-15)을 보면, 우리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3가지 방식을 발견합니다.


첫째, 찾아오시는 예수님입니다.

: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목자일 뿐 아니라, 찾아다니시는 주님이십니다. 때로 귀한 진주를 찾는 장사처럼, 때론 버림받은 이들의 친구가 되고, 때론 병든 이들의 위로자가 되어 그들을 찾아 치료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를 찾아 오셨습니다. 아뢰지도 요청하지도 않았으나, 그녀의 병든 것을 아시고 찾아 오셨습니다.


둘째, 손을 잡아 주시는 예수님입니다.

: 병든 이의 손을 만지신 것은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병명은 ‘열병’,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장티푸스나 A형 독감같은 1급 전염병입니다. 격리시키고 피해야 상책이건만, 주님은 상관치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아셨습니다. 사랑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셋째, 일으켜 주시는 예수님입니다.

: 베드로 장모는 열병에서 고침을 받자 마자 일어나 예수님과 일행들을 위해 상을 차리고 섬겼습니다. 병고침을 받자 말자 회복된 건강으로 이웃을 위하여 봉사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녀의 손을 잡았을 뿐 아니라, 그 손을 잡고 일으켜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2살난 야이로의 죽은 딸을 향해 “달리다쿰”,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라고 명하셨던 주님은 병든 베드로의 장모를 일으켜 주셨던 ‘달리다쿰’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림 속으로


1650년 펜과 잉크로 그린 렘브란트 작품의 제목은 <시몬의 장모를 고치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처럼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소묘, 드로윙(drawing), 또는 데생(dessin)으로 불리는 이 기법은 펜과 잉크로 형태와 명암을 위주로 표현했습니다. 간단한 듯 하면서도 매우 깊은 시선을 안겨줍니다. 그런데, 성경 속의 이 부분을 소재 삼아 그린 작품이 흔치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렘브란트는 다른 화가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부분에 마음을 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화가의 동일한 소재의 작품이 없기에 다양하게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11세기 작가를 알 수없는 채색삽화(18x13cm, 랜드서 도서관, 다름스타트, 독일)를 잠시 살펴볾으로써 렘브란트 작품이 얼마나 독특성과 가치를 지녔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11세기 작가미상 채색삽화, 18x13cm, 랜드서 도서관, 다름스타트, 독일>

이 작품은 성경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삽화입니다. 시몬 베드로 장모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은 후광을 달고 매우 권위있는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계십니다. 한쪽 손을 내밀어 여인의 손을 잡고 고쳐 주십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 앞에 매우 작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치 모든 것을 주님께 내맡기며 겸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는 시몬을 비롯한 제자들이 치유 현장을 목격하면서 손을 들어 찬양하고 있습니다(그림 참고).


렘브란트,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는 그리스도, 1650년, 펜과 잉크에 의한 소묘

이제 렘브란트의 소묘 작품으로 눈을 돌려 보겠습니다. 그림은 간결하고 단백합니다. 가식이 없습니다. 열병으로 괴로워하는 베드로의 장모를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의 머리엔 후광을 비롯한 인위적인 거룩성이나 권위의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주저앉아 있는 그녀를 향해 두 손으로 굳게 잡아 일으키십니다. 주님이 내미신 손길을 통해 따뜻한 마음과 온기가 전해오는듯 합니다. 간단한 듯 검게 칠해진 그분의 눈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긍휼이 있고, 눈물이 있습니다. 상체를 숙여 일으켜 세우는 모습은 쓰러진 사람을 향한 적극적인 관심과 사랑이 묻어 있습니다. 찾아오시는 예수님, 손을 잡아 주시는 예수님, 일으켜 세워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한 장면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러한 장면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은 넘어져 보고 쓰러져 본 사람이어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가슴 저림과 삶의 애환을 눈물로 견뎌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결코 이처럼 울림 있는 모습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렘브란트 그만이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에게 오롯이 맡겨주신 과업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렘브란트가 흠이 없는 완전한 인격자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가 외쳤다고 전해지는 말입니다. “내 영혼을 풍요롭게 하려면 명예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찾아야 한다.” … 렘브란트는 자신의 철학과 신앙을 토대로 눈치보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다른 이들의 눈에는 괴팍하고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점차적으로 고객의 취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눈에 비추어 아름답고 진실한 이미지만을 찾아가는 작품활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그는 외롭고 좁은 길을 걸어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렘브란트가 성스럽고 완벽했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되려 그의 낭비벽과 출세욕, 그리고 무례한 언행은 우리가 그가 썩 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의 삶을 보며, 그의 작품을 들여다 볼 때마다 공감하고 깊이 빠져드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묘한 이중성 때문입니다. 렘브란트 그는 분명 허물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짊어진 채 하나님께로 나아간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와 우리를 더 밀접하게 묶어 주는 연결고리가 됩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상한 갈대’로 살았기에 약하고 상한 이들이 그의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남들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도 그는 결코 그냥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가슴에 담고 화폭에 새겼습니다. 그 결과 그의 작품 안에는 근엄하고 권위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후광을 배경 삼아 사람을 압도하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따뜻한 손의 예수님이 자리합니다. 고난을 알고 수많은 질고를 겪어 긍휼을 아는 주님이시기에, 그리고 렘브란트이기에…




삶 속으로


2019년은 렘브란트 서거 350주년을 기념하여 ‘렘브란트의 해’로 지정되어 다양한 방법으로 그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 백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렘브란트, 렘브란트”를 말하고, 왜 그의 작품은 여전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자아내고 있을까요? 다른 수많은 작품들에 그 이유가 담겨 있겠지만, 어쩌면, 여타 화가들이 눈길을 두지 않았던 이와 같은 작품 속에 그중 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는 그리스도’, 친히 찾아오시고,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시는 주님은 그 어떤 종교에서 만날 수 없는 전능자의 모습입니다. 넘어지고 부딪혀 좌절할 때, 두려움에 몸부림 칠 때 다시 일어설 용기와 힘이 되시는 주님이 침몰해 가던 배같은 렘브란트를 건져 주셨습니다. 그 주님은 렘브란트의 그림 속에서 우리를 향해 손을 내미십니다. 그 주님은 렘브란트의 그림 속에서 우리를 향해 손을 내미십니다. 켜켜이 쌓인 죄와 아픔의 먼지를 털고 우리 손을 꼭 잡고 일으켜 주십니다. 이런 주님의 모습을 렘브란트의 작품 속에서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직도 렘브란트를 찾는 그 이유 아닐까요?


……


오늘은 고난주간 화요일입니다. 2천년 전 오늘, 주님은 성전 연보궤 곁에 앉아 홀로 된 가나한 여인이 자신의 생활비 전체를 헌금하는 것을 보시며 그녀를 칭찬하셨습니다(눅 21:4). 그런데, 왜 주님은 고난의 정점을 향해 나아가는 긴박한 그 주간의 화요일에 굳이 성전 한켠에 앉아 부유한 이로부터 가난한 이에게 이르기까지 헌금하는 것을 보시며 평하셨을까요?


그것은 그 여인을 칭찬할 때 하셨던 말씀 속에 답이 있습니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눅 21:4 ). 사람들은 성전을 유지하게 하고 움직이는 것은 많은 돈을 헌금하는 부유한 이들에 의해서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주류에서 배제된 이들의 헌신에 의해서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 그곳에 자리하셨던 겁니다.


이렇듯 주님의 관심과 지향하시는 곳은 우리의 통념과 가치를 초월합니다. 주님의 시선은 흥겨운 혼인잔치 자리보다 울고 있는 장례식장을 향하시고, 주님의 발길은 건강한 이보다는 열병으로 누워있는 무력한 이를 향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참 인간이 되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파하는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공명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할 수 있습니다. 2019년 사순절을 걸으며 참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우리 주님을 마음에 담아 우리도 참 인간이 되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손을 잡아 일으키시는 주님 안에서 힘 내십시오~





소의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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