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사순절 31 일 움오름 묵상

최종 수정일: 2019년 4월 22일


묵상의 말씀
  •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 창 28: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성경 속으로


  • 창 27:13 얘야, 저주는 내가 받을테니 너는 가서 염소나 안고 오너라


야곱의 거짓말은 어머니의 이 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혹이나 탄로 나서 아버지로부터 축복은 커녕 저주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며 두려워 하던 아들 야곱을 어머니는 그렇게 거짓말 속으로 끌어 들였습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눈이 극도로 나쁜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마련한 촉각과 후각적 대비책이 기가 막히게 적중했습니다. 한평생을 이삭과 살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던 리브가는 둘째 아들 야곱의 성공을 위해 철저하게 그 지식들을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저주는 내가 받을테니…”라는 그녀의 목소리를 하늘이 기억이라도 한 듯 그녀는 살아 생전 다시는 그토록 아끼던 둘째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가족의 슬픔은 이렇게 아버지의 마지막 축복을 큰 아들 에서가 받느냐? 둘째 아들 야곱이 받느냐를 두고 일어났습니다.


자신에게로 돌아올 아버지의 축복이 동생에게 강탈 당했다는 사실에 에서는 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에게서 살해의도를 알아챈 리브가는 야곱을 자신의 오빠가 있는 고향 밧단아람으로 급히 떠나 보냈습니다. 족장시대에 가족의 울타리를 떠난다는 것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을 의미했기에 야곱은 두려웠습니다. 더군다나 밤에 급격하게 파고드는 추위에 파르르 떨리는 살을 어찌하기 힘들었습니다.


별별 생각이 가정법이 되어 줄을 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고단했던지 언제인지도 모르게 돌을 배게 삼아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야곱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하늘의 거룩한 장면을 꿈 속에서 목격합니다. 예로부터 땅을 살아가던 사람들은 하늘을 동경했습니다. 그리하여 높은 곳에 산당을 짓고, 평지에 탑(지구라트)을 쌓아 어떻게 해서든 하늘에 닿고자 했습니다. 하늘과의 연결과 연합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욕망의 탑을 쌓을지언정 거룩한 열망을 품었던 적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땅과 하늘을 잇닿은 사닥다리에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하늘로 드나들 수 있는 ‘하늘의 문’과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하나님의 집’(벧엘)이 하늘과 땅에 각각 세워지는 것을 목격하는 은총의 밤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며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아버지의 하나님, 할아버지의 하나님이셨던 분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셔서 친히 지키시고, 도우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이, 하늘에 계신 하나니과 땅에 있는 야곱이 연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니… 무엇보다도 거룩이 세속과 손을 잡을 뿐 아니라, 세속을 품는 자리였습니다.



그림 속으로


야곱의 꿈과 사닥다리는 이처럼 신기하고도 회화적인 장면으로 인해 뭇화가들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작가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던 각 작품들은 대부분의 그림이 비슷한 구도를 보이면서도 세밀한 표현에 있어서는 독특성을 지녔습니다. 이중 매우 독특한 것은 16, 17세기 프란체스코 브리지오(Francesco Brizio)는 야곱이 돌베개가 아니라 화려한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요셉 리베라(Jusepe de Ribera)의 그림에는 야곱이 중년 남성의 모습으로 팔꿈치에 의지해 누워 있는데, 사다리를 대신한 환한 빛만 하늘에서 비추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7세기 렘브란트는 야곱의 꿈을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렘브란트는 이 소재를 1644년 소묘로 사다리없이 잠들어 있는 <야곱을 찾아온 천사>라는 작품으로 남겼고, 1655년 에칭으로 천사와 사다리를 모두 그려놓은 <야곱의 꿈>이라는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10여년의 간극이 있는 두 작품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같은 소재를 두고 제작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 그림은 잠자는 야곱에게로 천사들이 찾아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을 찾아온 천사>보다 후기 작품인 <야곱의 꿈>은 정확한 외형의 묘사보다는 창세기 28장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담백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곤하게 잠든 야곱 뒤로 4명의 천사가 보입니다. 그중 제일 앞에 있는 천사는 잠이 든 야곱을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마치 잠자는 아기를 안고 내려다 보는 엄마의 미소같은 표정을 지으며, 때론 안쓰러워 보이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야곱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뒤로 신기한 외모를 한 천사가 어딘가를 맹하고 무뚝뚝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의 머리는 여타 천사의 머리카락과는 달리 짧고 숱이 거의 없는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한 천사가 마치 그를 달래기라도 하듯 그 천사의 어깨 위에 양손을 얹은 채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독 등을 돌린 한 천사가 사다리를 양 손으로 잡고 하늘을 향해 오르고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왜 천사들을 이렇게 표현했을까요? 성경을 바탕으로 한 대부분 성화들 속의 천사는 하나같이 우아하며, 또 거룩하게 보이는 아름다움을 지녔는데도 왜 그는 몇몇 천사를 마치 사람처럼 표현했을까요?


잠이 들면 그 잠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꿈이 됩니다. 무의식적인 욕망이나 현실적인 욕구가 분출되고 과거의 일들이 재현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상징적인 의미를 띤 사건들이 펼쳐지거나 계시처럼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기도 합니다. 천사들의 의외의 모습들은 꿈의 이러한 역할들을 반영할 뿐 아니라, 또 야곱의 됨됨이를 천사를 통해 투영하고자 했던 의도가 아닐까요?


사실 야곱이라는 사람이 친구로 교제하기엔 참 버거운 사람입니다. 이기주의자요, 성공에 집착한 나머지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기꾼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꿈 속에 찾아오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 뿐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으로까지 불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야곱의 됨됨이와 하나님의 품으심을 표현이라도 하는듯 렘브란트는 하늘을 제외한 주변을 모두 검게 그렸습니다. 밤이니까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빛과 어두움을 이용해 회화적 표현의 유력한 수단으로 강조하던 렘브란트로서는 결코 당연하게 여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다리를 타고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빛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늘로부터 내려지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의도적인 배려였습니다.


  •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삶 속으로


<야곱의 꿈>은 그와 절친으로 지냈던 유대인 랍비 므낫세 벤 이스라엘(Menasseh ben Israel, 1604 – 1657)의 책 <영광의 돌>에 들어갈 삽화 중의 하나로 렘브란트가 그린 작품입니다. ‘영광의 돌’이란? 다니엘 2:31-35에 묘사된 대로 왕이 만든 큰 신상이 날아온 돌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던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랍비 므낫세에 의하면 이 돌은 야곱이 잠을 잘 때 베고 잔 돌이기도 합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의 한 부분이었던 바로 그 돌입니다. 또한 이 돌은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물맷돌이기도 합니다. 이와같은 영광의 돌은 새 이스라엘이 세워질 때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부분을 표현이라도 하려는 듯, 렘브란트는 <야곱의 꿈> 에칭의 처음 인쇄에서는 사다리가 야곱이 누워있는 곳에서 끝나지만, 둘째 이후의 프린트에서는 땅에 이어지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하늘이 중간에 누워있는 야곱을 거치며 땅과 연결되게 했습니다. 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보니, 죄인인 야곱(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케 하시고, 하늘과 땅을 잇닿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그러고 보니, 잠자는 야곱의 모습이 마치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 죽음의 돌배게를 베신 주님이 되십니다. 그 뒷편에 서서 가만히 손을 뻗어 안수하려는 천사는 주님을 깨워 부활의 아침을 열려는 손길로 다가옵니다.


꿈 속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보고, 음성을 들은 야곱은 자신이 베개 삼았던 돌을 세워 그 위에 기름을 부으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창 28:22). 하찮은 돌이 성전의 기둥이 되고, 돌무더기이던 곳이 하나님의 집이 되듯이, 죄 많은 한 인간이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성전이 되고, 하나님의 집이 되어 갑니다. 이 놀라운 꿈을 렘브란트의 <야곱의 꿈>에서 만납니다.


어둠처럼 냉기가 파고들고, 짐승의 울음소리는 두려움으로 엄습합니다. 메마르고 두려움으로 맞이하는 광야의 밤. 하지만, 그 밤에 찾아오신 하나님은 한 사람을 성전되게 해 가셨습니다. 거룩이 세속을 품듯이, 당신의 아들을 야곱으로 이 땅에 보내 하늘과 땅을 잇게 하셨습니다. 그렇듯 오늘도 우리 인생 속에 그분이 찾아오십니다. 지난 밤 우리가 베었던 딱딱하고도 차디찼던 그 돌이 영광의 돌이 되고, 부활의 돌이 됩니다. 그 기대와 소망으로 맞이하는 사순절 아침입니다.



소의 걸음



<렘브란트, ‘야곱의 꿈’, 동판화, 10.6x7cm, 1655>

조회수 38회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