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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사순절 27일 움오름 묵상


묵상의 말씀
  • 단 5:22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 단 5:23 도리어 자신을 하늘의 주재보다 높이며 그의 성전 그릇을 왕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구리, 쇠와 나무, 돌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 단 5:24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성경 속으로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악!!! …”하는 사람들의 외마디 비명이 연회장에 울렸습니다. 소리나는 쪽을 보니 왕이 있는 곳. 혹 왕에게 무슨 변고라도 있는지 연회에 참석한 1천여명의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왕이 있는 곳을 향했습니다.


“뭐야? 저것 뭐야?” … 사람들의 비명은 금방 의문으로 바뀌었습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모두가 왕이 있는 뒷벽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몸체 없는 사람의 손만이 벽 위에 글씨를 새겨가고 있었습니다. 술을 과하게 마신 탓에 보이는 환각일까 눈을 비벼도 보지만, 틀림없는 사람의 손이었습니다. 때는 벨사살, 바벨론의 마지막 왕의 통치시기였습니다. 왜? 그 손은 벨사살의 연회장에 나타났을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앞선 역사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벨사살이 왕 위에 오르기 까지 바벨론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기원전 605년 일어났던 갈그미스 전쟁으로 인해 앗수르(앗시리아)는 역사에서 사라졌고, 애굽(이집트)은 약소국가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신흥세력으로 부상한 바벨론이 주변의 제국들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약소국 남 유다왕국의 다니엘을 비롯한 수많은 귀족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이때가 1차 포로시기입니다.


기원전 597년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이 다시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여호야긴 왕을 비롯한 나라의 유력한 인사 1천여 명을 바벨론으로 잡아갔습니다. 이것이 2차 포로입니다. 그후 시드기야왕 9년(기원전 588년)에 느브갓네살의 3번째 침략이 있었습니다.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은 2년 동안 버티다 끝내 함락되었습니다. 그때가 시드기야 11년, 기원전 586년이었습니다. 유다왕국은 멸망당했고, 예루살렘 성전은 불탔으며, 성전의 기명들은 모두 바벨론에 의해 약탈을 당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빠진채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여기서 부터 이스라엘의 본격적인 바벨로 유수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다니엘과 세 친구 이야기,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이야기(페르시아 제국 때) 등이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 다니엘서 5장의 이야기는 바벨론 느부갓네살의 3차 예루살렘 침공 이후 본격적인 바벨론 시대 이후, 바벨론 제국의 끝부분 때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근동지역의 판도는 급격히 바뀌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이 자리하던 그 자리를 신흥 페르시아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한 때 그런 전조가 미리 보이기도 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제국의 영광을 자랑하다 한순간 왕좌에서 쫓겨나 7년여를 들짐승처럼 지내다가 복권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때부터 바벨론 제국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바벨론을 압박하기 시작해 금방이라도 삼킬듯이 진격해 있었습니다.


이런 풍전등화 같은 시기 벨사살은 아무 염려와 근심이 없다는 듯 1천여명을 불러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술이 한창 오를 때 돌연 왕은 느부갓네살 왕 시절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해 온 금, 은 그릇들을 가지고 오라고 명했습니다. 왕이 귀족들, 왕후들 및 후궁들과 그 그릇에 술을 담아 붓고 마시며 즐거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벨사살은 과거 선대 왕 느부갓네살 때 탈취한 성전기명들을 사용해 술을 마셨을까요? 어느 때이건 제국의 연회는 얼마나 자신들이 위대한지를 자랑하는 자리였습니다. 더군다나 느부갓네살 때는 앗시리아 제국과 애굽 제국마저 초토화시켰던 화려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때 전리품으로 챙겼던 것이 예루살렘 성전의 기명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 앞에 바쳤던 기명들을 꺼내와 술을 마신다는 것은 신을 섬겼던 성배를 술잔 취급하듯이, 해당 신을 하찮은 존재로 여긴다는 표시였습니다.


거기에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각종 신들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이 신들에 대한 찬양이지 그것은 만신(다신)주의자들의 광란의 파티였습니다. 여호와를 향한 철저한 무시와 모욕의 자리였습니다. 벨사살 그 자신이 여호와를 이기고 그 위에 군림하는 신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몸의 형체가 없는 손이 나타났습니다. 벽에 이상한 언어의 문자를 새겨갔습니다.


מנא מנא תקל ופרסין


이 문장의 마지막 자가 기록되는 순간의 모습을 렘브란트는 그의 그림에 담고 있습니다. 그는 생의 어떤 시기에, 왜 벨사살의 이야기를 화폭으로 옮겼을까요? 그가 성경을 묵상하며 무엇을 보았으며, 이 그림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요?



그림 속으로


렘브란트가 고향을 떠나 암스텔담에 이주한 1630년대엔 정치, 종교적인 이유와 전쟁 등으로 수많은 유대인들이 암스텔담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국제 무역항이었던 암스텔담은 엄격한 장로교 신앙(깔뱅주의)을 신봉하는 지도자들이 다스리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종교행위에 있어선 비교적 관대했기 때문입니다. 렘브란트는 이런 유대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의 지난 역사인 구약성경의 사건들을 더 상세하고도 현실감 있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므낫세 벤 이스라엘(Menasseh ben Israel, 1604 – 1657)이라는 랍비로부터 히브리어와 유대 문화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갔습니다.


이런 환경과 분위기 속에서 렘브란트의 마음은 자연스레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을 화폭 위에 옮겨 놓았습니다. 렘브란트가 <벨사살의 연회>를 그린 것은 결혼한 지 1년이 될 무렵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28세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린 <벨사살의 연회>는 술에 익고,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는 흥겨움의 자리가 아닙니다. 마치 누군가 영상화면의 잠시멈춤(PAUSE) 버튼을 누른듯 모든 것이 정지해 있습니다.


왕의 오른쪽 뒷 벽면에 나타난 손은 흥에 겹던 연회장을 뒤엎고 난장판이 되게 했습니다. 온갖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왕은 동공에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경악하는 주변 신하들을 보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아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순간 튀어나온 왕의 배를 덮고 있던 웃옷의 단추 하나가 떨어져 갔습니니다. 길게 늘어져 있던 보석 박힌 목걸이가 출렁거리며 짙은 그림자를 배 위에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도 얼마나 놀랐던지 들고 있던 성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의 손을 떠난 잔은 왼편으로 기울어진채 담고 있던 술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그의 눈동자도 어느덧 최대치의 흰자위를 드러낸 채 벽면의 손을 향해 고정되어 있습니다.


술시중을 들던 여자는 놀라서 엉거주춤 뒤로 쓰러질 듯한 자세로 거의 그릇을 떨어뜨릴 태세입니다. 왼편에 있는 귀족과 궁녀도 공포에 휩싸인 채 눈과 입을 벌린 채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두 사람이 전혀 의외의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왼쪽 하단에 있는 여인입니다. 그녀는 벽에 나타난 손을 보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놀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왕의 손에서 떨어지고 있는 성배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둘째 사람은 술잔을 응시하는 여인이 쓴 모자의 깃털이 닿은 윗부분에 있는 악사입니다. 그는 어두운 공간 속에서 그저 입에 피리를 문 채 연주를 계속 해 가고 있습니다. 놀람도 당황함도 없는 그의 내공의 출처는 어디일까요?


난장판이 된 연회장에서도 여전히 피리를 연주하는 악사를 보니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실재 인물이기도 했던 윌리스 하틀리의 악단이 탈출을 포기한 채 남아있는 승객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던 장면이었습니다. 배가 가라앉는 3시간 동안 음악을 연주하며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던 그들이 연주하던 그 선율이 벨사살의 연회에서 느껴진다는 것은 바벨론호 역시 곧 침몰할 것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보니 악사의 피리소리는 연회를 위한 가락이 아니라, 벨사살과 바벨론을 위한 조가였습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의 옷을 보니 연회복이라기 보다는 상복에 가까운 검은색이라는 것도 그 느낌을 더해 주는 것 같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벨사살의 연회>를 살펴보다 또 한 가지 신기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허공 속에 나타난 손이 벽면에 새겨놓은 글씨였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는 새겨놓았다기 보다는 펄펄 끓는 쇳물을 주조된 글씨 위에 부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이 글씨조차 빛을 발하며 끓고 있습니다.


מנא מנא תקל ופרסין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 히브리어는 지금도 우측에서 좌측으로 읽어가고 써가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렘브란트는 위에서 아래로 써 내려가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기록해 간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나라도 한때 글씨를 위에서 아래로 써내려 갔듯이, 렘브란트 역시 당시 유대인의 글쓰는 풍습에 맞게 그렇게 그려넣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글씨를 가만히 그 모양을 응시하다보니 한 가지 잘못 적힌 글씨가 있습니다. 그것은 맨 마지막의 철자 ‘ן’(눈)입니다. 렘브란트는 이 철자 대신 ז (자인)을 적어 두었습니다. ‘ן’(눈)은 히브리어 알파벳 22개 중에 14번째, ז (자인)은 7번째 철자입니다. 그는 히브리어 성구를 화폭에 옮기다 살짝 잘못 그린 것일까요? 아니면, 의도적으로 바꾸어 그려놓은 것일까요?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확하게 의문이 풀리지는 않지만, 세밀한 것 하나까지도 정밀하게 묘사하는 화가가 잘못 기록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무언가 그만의 비밀코드, 읽는 이로 하여금 상상케 하도록 장치를 마련해 둔 것일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차후 더 시간을 갖고 렘브란트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삶 속으로


1) 저울에 다신다면?

흥겹던 연회를 한 순간에 뒤집어 버린 손이 써내려 갔던 그 글씨는 바벨론 왕궁의 그 어떤 박사들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제국이 이미 오래 전 짓밟았던 유대 땅에서 잡혀 왔던 히브리 노예출신 다니엘에 의해 해석되고 풀이 되었습니다.


מנא מנא תקל ופרסין(“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 말은 아람어구의 음역으로 “세고 세었으며, 무게를 달고 나누었다”는 말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설명에 의하면, 메네는 ‘세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벨사살 시대를 세어서 끝나게 하셨다는 뜻이며, 데겔은 ‘무게를 달다’라는 뜻으로 벨사살 왕이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 부족하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바르신은 ‘페레스’의 복수형으로 벨사살의 나라가 나뉘어 진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철저하게 한 사람과 한 나라와 한 시대를 평가하고 심판하신다는 것은 섬뜩함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생의 무게와 질을 저울에 다신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나올까요? … 우리 생은 시간을 소진하는 만큼 분명 무언가를 축적하며 살아갈텐데, 지난 날 우리 영혼의 무게 달아본다면 하나님의 저울은 무어라고 말할까요?


벨사살은 온갖 보석으로 치장하고 가장 화려한 옷으로 차려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함량미달 판정 받았습니다. 그의 오만함과 방탕함이 자신에게 허락된 것을 온당하게 사용할 수 없도록 오용하고 전용케 한 결과였습니다. 토끼 눈뜨듯이 놀란 채 멈춰 있는 그의 모습이 안쓰럽고 애잖해 보입니다. 어쩌면 그와 우리와의 간극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직감하기 때문일 겁니다.


언젠가 미국 드리마 SUITS를 리메이크한 한국 드라마의 한 대사 중에 정확한 인용은 아닌데, 이런 의미의 말이 있었습니다. “절실함이요, 내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떨어져 봤기에, 그 고통과 아픔을 알기에 나에겐 성공해야 할 절실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벨사살은 그의 아버지 세대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멸망의 길을 갔는지를 다 보고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맘 속엔 절실함이 없었습니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그 길을 따랐습니다. 그렇기에 다니엘은 벨사살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였다(단 5:22) …


실패했던 지난 과거로 돌아가 바꾸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은 충분히 바꿀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해 나가는 그 일이 바로 그것을 바꾸어 갈 것입니다.



2) 하나의 다른 만찬

유독 크게 빙빙 두른 터번 위의 왕관이 애처로워 보이기 까지 합니다. 벨사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원사전을 찾아보니 신기게도 ‘TURBAN(터번)’- ‘TULIP(튤립)’이 어원학적으로 쌍둥이라고 설명해 줍니다. 특히, 페르시아어에서는 터번과 튤립이 동일어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렘브란트는 혹시 네덜란드의 튤립을 형상화 하여 벨사살의 터번을 그렸던 것일까요?


렘브란트가 <벨사살의 연회>를 그리던 1635년 이 시기엔 2017년 비트코인 광풍처럼 ‘튤립 열풍’이 한창이었습니다. 특이한 품종의 튤립의 경우 거의 집 한 채에 가까운 금액으로 거래가 됨으로써 ‘묻지마 투자’가 성행했습니다. 온 나라가 현재의 대한민국처럼 정당한 노동의 댓가가 아닌 ‘투기’로 한몫하려는 한탕주의가 판을 쳤습니다. 벨사살이 성배에 술을 부어 거룩한 예배와 신앙을 짓밟고 모멸했듯이, 투기에 바탕을 둔 천민자본주의가 건강한 노동을 조롱하던 때였습니다.


렘브란트는 바로 그 시대를 하나님의 저울에 달았습니다. 오만과 방탕의 시대가 끝이 나고 건강한 노동이 인정받는 건강한 사회를 화폭 너머에 새겼습니다. 렘브란트 그가 살았던 17세기는 무론하고 오늘도 그가 소망하던 그런 세상을 꿈꾸며 온 힘을 다해 새벽을 열고, 아침을 밝혀가는 분들이 계십니다. ‘6411 시내버스’에 타신 분들처럼…


<벨사살의 연회>를 다시 바라봅니다. 그 그림은 뒤집힌 연회, 망쳐진 잔치의 형상화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한 서막이었습니다.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하시는 분들이 살만한 세상, 희망을 놓지 않고, 내일을 꿈꿀 수 있는 세상의 도래에 대한 기도였습니다. 그의 기도처럼 오늘도 땀 흘리는 일터 위에, 하시는 그 일 위에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더해 지시길 기원드립니다.


사순절 아침, <벨사살의 연회>를 묵상하다 보니, 그와는 비교되지 않는 초라했던 한 연회가 떠오릅니다. 유월절을 앞둔 저녁, 어린 양을 잡는 대신 친히 당신이 찢어지는 빵이 되고, 흘리는 포도주 되신 ‘최후의 만찬’… 초라했지만, 소박했지만,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넉넉함과 포근함으로 적셔주신 유월절의 만찬… 그것 또한 새로운 양식으로 새로운 시대를 살아감을 알리는 서막이었습니다.



소의 걸음



<렘브란트, 벨사살의 연회, 1635, 유화, 168 x 209 cm National Gallery, London, Eng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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