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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사순절 19일 움오름 묵상

최종 수정일: 2019년 4월 3일


묵상의 말씀
  • 마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1. 배경 설명


마 18:15은 1만 달란트 빚진 자와 100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의 결론 말씀입니다. 이 부분을 살펴보기 전에 주님께서 왜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 18:21 - 22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유대 율법과 관습 하에선 3번 용서를 하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7번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물으며, 얼마나 스스로 대견하고 뿌듯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 18:22)


산술적으로만 하더라도 7 x 70 = 490번입니다. 이건 베드로가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한 횟수였습니다. 게다가 7이라는 숫자가 완전 수의 개념을 갖고 있었기에 자신은 가장 완벽하게 용서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완전 수에다 열배를 더한 수를 곱한 수를 말씀하시니 이건 도저히 불가능한 횟수였습니다.


그런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은 대답에 이어 비유 하나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비유가 일만 달란트 빚진 이의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금 일만 달란트를 임금에게 빚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금 한 달란트의 무게는 34kg입니다.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로마시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고로 한 달란트는 주일을 뺀 약 20년 동안의 품삯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20만년 동안 일을 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6조원 정도).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자는 도저히 자기의 힘으로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진것입니다.


이 사람은 국가에 엄청난 피해를 안긴 악한 자임이 분명하지만 임금이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제 그는 임금에게 돈이 아니라, 사랑에 빚진자가 된 것입니다. 그가 해야 할일은 임금에게 받은 은혜와 사랑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흘러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1천만 원) 빚진 이를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임금은 대단히 진노하며 그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임금이 자신을 불쌍히 여김같이 자신도 동료를 그렇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본문 내용


베드로의 질문과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를 마음에 담습니다.


첫째, 천국은 마치 종들과 결산하는 임금과 같습니다.

: 비유를 시작하며 주님은 ‘천국은 마치 종들과 결산하는 임금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 결산은 다름 아닌, 우리의 삶에 대한 결산입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든, 아니면 우리 개인의 종말이든지 간에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 우리의 모든 삶에 대해 철저하게 결산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오늘 생명 있는 동안 그 결산의 날을 준비하며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둘째, 용서받음 이후는?

: 도저히 탕감받기 힘든 일만 달란트를 용서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믿는 복음이 능력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이후의 삶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용서받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용서한 우리의 이야기에 대해 다시 묻고 있습니다.



셋째, 용서는 우리의 권한이 아닙니다.

: 비유의 마지막 부분인 마 18:32-33은 이런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주인이 일만 달란트 빚진 이에게 말한 것처럼 용서는 우리의 권한이 아닙니다.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용서 받았기 때문에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부분에 대해 해야 할 당연한 도리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이 여김이 마땅하다!!!”



3. 맺는 말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는 용서의 의미를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타인을 용서할 자격이 없으며, 하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 <밀양>처럼,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나보다 먼저 용서할 수가 있어요? 그게 말이 되나요?"


용서하지 못하는 삶, 아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삶, 그리고 견뎌야 하는 生… 그래서 우리의 생은 아픕니다. 소중한 것들을 잃고, 상처 받고, 생채기 나 움푹 들어간 옹이같이 안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의 수준과 실력이 이 정도입니다. 주님도 아십니다. 그러기에 그것이 우리의 실력과 능력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헤아릴 수 없는 큰 것,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것을 받았기에 너도 흉내라도 내며 살아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듯 ‘용서'를 구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는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한 것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를 되집어 보면,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지 않았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말아 달라는 기도가 됩니다. 그러니 이 기도는 용서하고 싶지 않을 때에라도 하나님께 받을 우리의 용서를 생각하며 어쩔 수 없이라도 용서하며 살게 해달라는 기도가 됩니다.


네, 압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생각해 볼 때, 누군가를 용서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란 것을… 그렇기에 마음에 분이 가득하여 기도를 드릴 때마다 기도는 우리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게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게 합니다. 복수는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사순절 아침,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내 죄를 사하시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을 묵상합니다. 그 주님께 받은 은혜와 용서에 깊이 감사함과 더불어 ‘내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누군가의 죄와 잘못’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 기도가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드려지기를 구해 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이들을 용서함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소의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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