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1.27 움오름 주일 설교 - "이스라엘"(창 32:19-31)

2019년 3월 11일 업데이트됨




창세기 32:19-31

19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20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21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설교문


이스라엘

수퍼히어로 만화 시장의 양대 산맥은 ‘마블코믹스’와 ‘DC코믹스’입니다. 1930년대부터 만화로 출간되어 전 세계 만화 팬들을 사로잡았으며, 1978년 ‘수퍼맨’이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스크린에 수퍼히어로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무슨 유치한 만화이야기냐 라고 하시면 이미 쉰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들어 극장가를 흔들고 있는 흥행작들이 바로 이 두 회사에서 제작하는 수퍼히어로 블랙버스터들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독특한 세계관과 그 속에 숨어있는 나름의 의미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수퍼히어로 영화에서는 엄청난 힘을 가진 악당이 등장하고 이에 대응하는 영웅이 나타나서 세상을 구합니다. 강력한 두 힘의 충돌이 이야기의 기본 기둥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악당과 영웅의 힘의 균형이 깨지고 나면 더 이상 이야기를 끌어갈 동력을 상실하고 종결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영웅이 악을 징벌하고 나면 더 강한 악당이 나타나야 하고 이에 대응하는 영웅의 힘도 더 강해져야 하는 반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야기가 이렇게 힘의 충돌에만 끝없이 집중하게 된다면 결국은 단순하고 유치한 이야기로만 머물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영웅들에게서 그들의 힘의 상징을 오히려 제거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던 능력과 힘이 사라졌을 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역설을 이야기 속에 배치합니다. 영화에서는 영웅들의 능력이 충만해지는 순간만큼 그들의 능력이 사라지는 순간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이 영웅들의 각성과 성장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됩니다. 힘의 증폭으로 강해지는 외적인 성장이 아니라 힘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내적인 성장.. 영화는 더 이상 단순한 파워게임이 아니라 영웅들의 고뇌와 자각 그리고 새로운 변화로 이어지는 내적인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시도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영웅을 꿈꿉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열망의 이면에는 그만큼 한계와 그로인한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들의 삶의 깊은 곳을 들여다 볼 수만 있다면 그곳엔 무엇이 있을까요? 불안, 두려움, 우울, 상실감, 외로움, 단절, 분노, 거절감, 위축 등과 같은 삶의 생채기들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행에는 흥미로운 현상이 있습니다. 여행을 잘하는 전문가와 초보자의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확연히 드러나는 차이는 그가 가진 ‘짐’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진정한 여행의 전문가는 짐 없이 가볍게 떠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여행 초보자들은 짐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두렵기 때문입니다. 낯선 여행지에서 나를 지켜 주는 유일한 것일지도 모르는 이 짐들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단 말입니까? 못합니다. 그 모든 짐들이 나를 책임질 것이고 낯선 곳에서 만나는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행을 많이 해 본 사람들의 차림은 다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행지에서 모든 것을 어떻게 현지 조달할 수 있는지를 압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벼운 차림으로 여행지의 풍물과 문화를 여유롭고 풍성하게 즐깁니다.


우리 인생도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긴 여정을 가지는 여행입니다. 사람들은 그 여행에서 무거운 짐을 짊어집니다. 그리고 그 짐을 담을 수많은 가방을 준비합니다. 가죽으로 만든 여행용 가방이 아니라 고통으로 만든 가방입니다. 죄책으로 가득 찬 가방, 불만의 보따리들, 한쪽 어깨에는 권태를 메고, 다른 쪽엔 슬픔의 가방을 걸칩니다. 등에도 의심의 배낭과 외로움의 침낭을 짊어집니다. 그리고 두려움의 트렁크를 끌고 갑니다. 혹 이것이 오늘 나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양손에 잔뜩 짐을 들고서야 어떻게 상대방을 안아 줄 수 있겠습니까? 죄책감의 짐을 잔뜩 지고 있다면 어떻게 은혜를 나눠줄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낙심하고 있는 터에 어떻게 남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양팔 가득 자기 짐을 들고 있다면 어떻게 가까운 이의 짐을 나눠 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야곱이라는 사람의 인생의 한 대목 이야기입니다. 그의 전기를 읽으면 시원하지 않고 뭔가 항상 답답합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삶은 이러한 짐을 내려놓지 못했던 삶의 반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 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야곱의 생애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는 쌍둥이를 임신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생 야곱이 선택되어 크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장면을 사도바울은 로마서 9:13에서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인용하면서 이 사건을 ‘신자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되었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고 선택한 것은 그가 태속에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태아가 어떻게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착한지 못 된지 알 수 있습니까? 모릅니다. 태아는 뱃속에 있기 때문에 아직 선택받을 만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선택을 받았다면 그것은 선택한 사람이 그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선택의 이유입니다.


부모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이 공부 잘할 때만 사랑하고 못하면 미워하고 증오하겠습니까. 심각한 문제가 있는 부모 말고는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이니까 덮어놓고 사랑합니다. 조건 때문에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절대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절대적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자기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자기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해 질 수 없습니다. 항상 무엇인가의 가면을 써야 합니다. 자신의 추함, 약함이 드러나면 사랑을 잃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폭력적이거나 조건적이고 율법적이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불안합니다. 투쟁적이거나 아니면 자포자기하며 자기를 비하는데 익숙합니다. ‘은혜’라는 의미의 깊이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두려움과 분노가 밑바닥에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조용하다가도 어느 순간에 통제할 수 없이 폭발합니다. 중독 성향에 빠지기 쉽습니다. 일중독, 알콜중독, 도박중독, 성적중독 등 온갖 중독에 빠지기 쉽습니다.


아무튼 야곱의 생명의 출발은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의 선택’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짐을 짊어지기 시작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맡긴다는 것.. 그것은 그에게 참 두려운 일입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투쟁합니다. 쌍둥이를 임신한 ‘리브가’는 출산 때 난산을 합니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격렬한 싸움이 일어납니다. 뱃속에서 동생 야곱이 먼저 나오겠다고 싸우면서 결국 야곱은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나옵니다. 시기심이 대단합니다.


이렇게 에서와 야곱, 형제가 자랍니다. 그런데 동생 야곱이 생각하기에,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었던 하나님이 자신을 선택하셨다는 약속은 성취될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왜소하고 약하기만 해 보입니다. 반면 형‘에서’는 건장하고 능숙한 사냥꾼이었습니다. 또한 아버지 이삭의 관심과 사랑까지 한눈에 받고 있습니다. 형을 편애하는 아버지를 원망했을 법 합니다. 아마 그는 형보다 못한 자신의 약점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거절 되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은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성공을 쟁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에게 돌아와야 할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얻어내기기 위해 형 ‘에서’의 약점을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에서’는 건장한 사람이었지만 자제력이 부족하고 다혈질이었습니다. 어느 날 밖에서 돌아온 형이 배고픈 것을 알아채고는 야곱은 형 앞에서 요리를 합니다. 음식냄새를 맡고 정신을 자제력을 잃은 형은 자신의 장자 권을 팥죽 한 그릇에 동생에게 팔아버립니다. 나중에는 늙어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의 약점을 이용해 자기를 ‘에서’인체 하며 음성까지 변조해 가면서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에게 내리는 축복을 받아 가로챕니다. 하나님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의 미래를 맡길 수 없었습니다.


이 일로 형 에서는 동생을 죽일 기회를 엿보며 복수를 다짐합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야곱은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홀로 쓸쓸히 수백 킬로 떨어진 하란 땅에 있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20여년이란 긴긴 세월을 망명생활을 합니다. 망명생활이란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은 잔꾀에 있어서 야곱보다 한 수 위였습니다. 삼촌에게 속아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지 못하고 첫사랑에 실패하여 사랑 없는 결혼을 합니다. 두 번을 결혼하고 갑절의 14년이라는 세월동안 노동을 합니다.


야곱은 속은 것에 격노했지만 자신이 한 수 더 위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철저히 재산을 모았던 야곱의 인생은 겉으론 성공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부인들의 시기와 질투로 서로 자기의 몸종을 남편에게 주면서 까지 남편 쟁탈 전쟁이 벌어집니다. 또한 4명의 부인으로부터 출생한 야곱의 자식들은 언제나 야곱에게 효도하지 않습니다. 장남 ‘르우벤’은 자기 서모(작은어머니)와 관계를 맺어서 야곱을 번민케 만듭니다. 서로 다른 어머니들 사이에서 태어난 이복형제들 사이의 다툼과 갈등... 그 결과 형들은 막내 동생 요셉을 노예로 팔아먹고, 짐승에게 찢겨져 죽었다고 아버지에게 속여 보고합니다. 이러한 야곱의 집은 스위트 홈이 아닙니다. 많은 재물을 모아 겉으론 성공 하는 듯 보였지만 실은 밖에 나가도 고달프고, 들어와도 고달픕니다. 이것이 야곱의 생애였습니다. 사랑 없는 결혼, 미움과 질투, 원망과 상처로 얼룩진 가정이야기 입니다.


야곱의 생애를 보면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째서 저런 야곱 같은 인물을 그래도 선택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아마 하나님의 이렇게 대답하실 것 같습니다. “너를 선택하기 위해, 너를 사랑해야 되겠기에 그렇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성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귀향 - 벼량 끝에 선 야곱

야곱은 외삼촌 밑에서 처절한 씨름 끝에 모은 재산과 가족들을 거느리고 그렇게 꿈꾸던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가 올 때에는 형 에서가 자기를 좋은 낯으로 마중을 나올 것인가 아닐 것인가에 대해서 얼마나 고민을 하고 오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그의 귀향은 기쁨 넘치는 ‘금의환향’은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벼랑 끝에 서고 맙니다. 형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얼마나 겁났을까요? 야곱은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선물작전을 썹니다. 창세기 32장 13절에 보면 뇌물의 목록이 나옵니다.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암염소가 이백이요 수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수양이 이십이요 젖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가 열이라”


암놈이 철저히 많습니다. 형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최고의 좋은 선물을 준비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아직도 야곱은 그의 인생이 그의 손에 있는 줄로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뇌물로도 안심이 되지 않습니다. 더 안전하게 방도를 마련합니다. 얍복나루에 도착한 야곱은 자기의 식솔들을 각각 3대로 나눠 강 건너게 합니다. 가장 먼저 에서를 맞게 되는 1대는 종이었다가 부인이 된 이들과 그들의 자식을 먼저 강을 건너게 하고, 다음으로 2대는 외삼촌에게서 속아 결혼한 ‘레아’와 그녀의 자식들을 건너게 하고, 그 다음으로 3대는 사랑하는 ‘라헬’과 그 자식들을 건너게 합니다. 그들을 다 보내고 뒤에 자기는 강을 건너지 않고 홀로 얍복 나루에 남습니다. 참 이기적입니다. 나부터 살고 보자는 것이란 말입니까? 적어도 책임 있는 가장, 지도자라면 자신이 가장 먼저 건너가 형 앞에 무릎 꿇고 자신은 죽여도 좋으니 제발 가족들 많은 살려달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왜 위기의 순간에 그 본성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평안할 때는 누구나 호인일 수 있습니다. 거룩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 내가 커버할 상황을 넘어설 때 숨어있는 내 모습이 비로소 드러납니다.



얍복 - 씨름

이렇게 야곱은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형으로부터, 아버지로부터, 삼촌으로부터 도망 다닙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은 야곱을 다루십니다.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십니다. 씨름을 걸면서 들어오십니다. 씨름은 1:1로 붙는 것입니다. 샅바를 다잡아 쥐면 여기서는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기든지 지든지입니다. 이제 야곱은 더 이상 도망갈 수 없었습니다. 앞에서는 복수를 하려고 벼르는 형, 뒤에는 자신을 추적하며 진을 치고 있는 삼촌의 군대가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으로 끝장을 내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이 상황을 본문 24절은 한 마디로 요약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창32:24) 하나님은 야곱을 만나시기 전에 야곱을 홀로 남게 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삶에서 홀로 남겨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홀로 남은 시간, 그 시간은 바로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시간일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간섭하는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 파묻혀 살아갈 때, 여러 곳에서 나를 찾고 세상이 내게 박수와 갈채를 보내고 있을 때에, 그 때는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자신을 가장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박수소리가 떠났을 때, 그토록 관심을 보이던 이들이 외면할 때, 문이 막혔을 때, 계획이 좌절되고 기회가 비켜갈 때 홀로 있는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그 시간은 나의 실체를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남기십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광야를 허락하십니다.


그렇게 얍복강가에 홀로 남은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24-25)


여기서 우리는 세밀히 살펴보아야 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두 절에서 씨름을 시작한 주어는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씨름의 주어는 야곱이 아니라 ‘어떤 사람’ 즉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이 먼저 야곱에게 찾아오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상처로, 실패로, 죄악으로 인해 자리 잡은 견고해진 이를 찾아오시며 씨름하며 도전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만든 상황 속으로 찾아오셔서 삶의 주권을 요구하시며 나를 고치시겠다고 하십니다.


야곱이 벌거벗어 홀로 하나님을 대면한 자리가 바로 얍복강 나루터입니다. ‘얍복’이란 말은 ‘비운다, 몽땅 털어버린다. 쏟아버린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얍복 나루터는 말 그대로 지금까지 쌓아왔던 자기 인생을 철저히 비우는 장소입니다. 벗어야 입을 수 있고, 비워야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얍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야곱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기 전까지 가게하지 않겠습니다.” 이 장면을 호세아서는 울며 간구하였다고 해석합니다.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호12:4)


자신의 상처와 아픔 때문에 울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정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실패와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드러내어 애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단독자로, 홀로 하나님을 직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평가자요 비판자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요 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씨름이며 또한 기도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의 가면은 벗겨지고 삶에 자유가 찾아오며 변화가 시작됩니다.


25절입니다. 씨름의 결과 ‘변화’가 일어납니다. 밤새도록 천사와 야곱이 씨름합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 앞에 인생의 주도권을 내려놓으라는 것,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요구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야곱의 의지의 충돌 같습니다. 이 씨름의 후반부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25절) .


하나님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십니다. 허벅지 관절-‘히프조인트’는 신체의 상.하체 연결 고리로 힘을 쓸 수 있는 중심 뼈입니다. 즉 사람이 힘을 쓸 수 있는 자리가 부셔져 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내 힘으로, 내 재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이 포기 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한다면 그것은 곧 내 허벅지관절이 무너져 내려야하는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허벅지 관절이 위골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하나님이 아니면 자신의 모든 것이 의미를 잃을 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나는 결코 당신을 가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나님을 붙듭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로 기도하는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야곱’이란 말은 그가 태어날 때 먼저 나오는 형을 시기하여 발뒤꿈치를 붙들고 나왔다는 데서 생긴 이름입니다. 발꿈치를 잡은 자, 속이는 자, 찬탈한 자라는 뜻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인생이었습니다. 자기가 무너지면 그것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그는 약탈자, 사기꾼, 강도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악물며 살아왔습니다. 남보란 듯이 증명하기 위해 자기 힘으로 움켜쥐며 사는 자였습니다. 얍복강가 그 캄캄한 밤에 야곱에게 던지셨던 그 질문을 우리게도 던지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직한 이름을 직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네 인생철학이 무엇이냐?, 네 성품이 무엇이냐?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무엇을 부끄러워하고 있느냐? 무엇에 좌절하며 무엇에 분노하느냐?”라는 질문 앞에서 말입니다. 삶의 내밀한 곳에서 자꾸만 삐거덕 거리는 소리... 우리 자신의 정직한 이름을 직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노, 위선, 거절감, 자기증명, 중독, 메마름, 외로움, 독선, 실패자, 나약함, 두려움, 열등감, 초라함.. 깊은 곳에서 삶을 지배해 왔던 나의 이름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름을 물으시는 것처럼 나의 이름을 물으신다면..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약탈자 야곱입니다! 내 힘으로 살던 자입니다! 내 속에 원망과 분노를 품고 가시처럼 찌르며 살던 자입니다! 아무리 감추려 했지만 삐걱 삐걱 소리 내며 깨어지며 살던 자입니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시면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 주십니다. ‘이스라엘’.. 그것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고 해석되어 왔는데 더 깊은 번역에 따르면 하나님과 더불어 힘을 얻어 강하게 된 자, 하나님께 굴복되어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얍복 강가의 그 긴긴 밤의 싸움이 끝나고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지관절로 말미암아 절었더라”(31절)고 성경을 말합니다. 그 때 야곱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생각해 보면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 못난 자아를 깨뜨리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마 그러지 안았을까요?



브니엘 – 하나님의 얼굴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새벽녘 간밤의 씨름으로 온 몸이 흟 과 먼지투성이로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고개를 들 때 멀리서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그날 아침의 태양은 어제 떠올랐던 태양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에서 그 아침 태양은 ‘브니엘’... 하나님 얼굴 같았습니다. 더 이상 두려움과 책망의 태양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야곱, 아니 이스라엘은 이렇게 찬양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 잘 치셨습니다! 저를 치지 않으셨으면 나는 평생 나를 붙들고 살았었을 것입니다! 잘 때리셨습니다! 잘 부숴 트리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아마 야곱은 일평생 절뚝거릴 때마다 얍복 강가에서 만났던 그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붙여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서있는 자리는 하나님을 이겼다는 능력의 증명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중심이 무너진 자리입니다. 힘의 증폭으로 강해지는 외적인 성장이 아니라 힘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내적인 성장을 이루는 신앙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라져 버릴 욕망과 힘을 추구하는 방법으로서의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야곱이라는 이름을 직면하는 신앙, 그리하여 우리를 얽어매는 결박을 끊어 참된 자유를 누리는 신앙을 사모해야 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시는 주님을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잃어버렸던 주님을 향한 순정의 기도를 다시 회복하고, ‘나는 야곱입니다 나를 긍휼히 여겨주소서’ 고백할 때 흐르는 눈물의 따뜻함과 위로와 그로인한 치유와 변화가 우리의 삶 속에서 다시 싹이 나는 2019년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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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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