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1.12.05 움오름 주일 설교 - "될크될"(누가복음 8장 1~15절)

최종 수정일: 2021년 12월 17일




누가복음 8장 1~15절

1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2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3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4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5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6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7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9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10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1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12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13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14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15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설교문


1. Enchanté de vous rencontrer


이곳에 계신 더하트하우스 교우님들, 그리고 유튜브 중계로 함께하고 계신 교우님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생명이 움트는 언덕, 움오름교회 유경호입니다.

오늘 더하트하우스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엔 움오름교회의 교우분들이 함께 하고 계습니다. 우리 잠깐 주변을 둘러보며 낯설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과 인사나눠 보실까요? 고개만 돌리지 말고, 허리를 돌리며, 입에 한껏 웃음을 머금은 채 이렇게 인사 나누시겠습니다. “반갑습니다~”

2009년도에 창립한 더하트하우스교회보다 6살 어린 움오름교회는 지난 5년간 양재시민의 숲이 보이는 곳에 자리해 있었습니다. 그러다 지난 주중 5년 동안 사용하던 곳을 나왔습니다. 짐 둘 곳도 갈 곳도 마땅치 않은 저희를 따뜻하게 맞아주신 더하트하우스의 홍목사님을 비롯한 목회자분들과 교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2. Invitation à la parole


저는 시골교회에서 성장했지만, 서울 어디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명품주일학교’ 신앙교육을 받았습니다. 명품주일학교라고 표현한 것은 그만큼 헌신된 선생님들이 계셨다는 뜻입니다. 보통 이 맘때가 되면 준비하는 성탄절 발표회를 위해 선생님은 차가운 겨울 밤바람을 뚫고 읍내에서 4km 떨어진 시골 제 집까지 자전거로 저를 데리러 오시고, 또 데려다 주시곤 했습니다. 차가운 겨울 맞바람을 피하기 위해 선생님의 등 뒤에 바짝 붙어가던 기억이 납니다. 토요일 밤 연습이 너무 늦게 끝날 때면 선생님 집에서 같이 자다 새벽녘 연탄불이 꺼져 달달 떨던 저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던 그때 선생님의 품이 아직도 생각이 납니다. 지금은 장로님으로 교회를 섬기고 계신 그분을 통해 믿음을 배웠고, 사랑을 만났습니다. 믿음의 언어와 사랑의 언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야말로 명품주일학교였습니다.

그 시절 즐겨 부르던 주일학교의 찬양 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복음을 심었습니다. 복음이 싹이 났네요. 복음이 자랐습니다. 삼십배 맺었습니다.

사랑을 심었습니다. 사랑이 싹이 났네요. 사랑이 자랐습니다. 육십배 맺었습니다.

믿음을 심었습니다. 믿음이 싹이 났네요. 믿음이 자랐습니다. 백배 맺었습니다.


30배, 60배, 100배로 열매 맺는다는 내용의 이 찬양의 뿌리가 되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성경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말씀은 누가복음 8장에만 나오지 않고 마태복음 13장, 마가복음 4장에도 공통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3. 갈릴리인가? 예루살렘인가?


본문을 말씀하신 장소를 누가복음은 따로 언급하지 않으나, 마태와 마가는 ‘바닷가’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다는 진짜 바다가 아니고, 갈릴리 호수를 말합니다. 남북으로 21 km, 동서로 11 km, 둘레는 약 53km에 이르다 보니 워낙 넓고 커서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배를 띄워놓고 그 위에서 호숫가에 앉은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드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를 비롯해, 빈들 등에서 가르치셨을까요? …

눅 8:1을 보니 ‘예수님께서는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눅 8:4을 보니 그 동네 안에서 가르치신게 아니라,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이 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태인들의 교훈과 가르침의 중심지는 ‘회당’이었습니다. 근데도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지 않고, 집 밖에서, 그것도 호숫가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막 3:1-6을 보니,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이를 고쳐주신 이후 회당의 권력자들인 바리새인들과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 갈등으로 인해 더 이상 회당에서 활동하실 수 없게 되셔서 산과 들과 호숫가에서 가르치게 되신 겁니다. 물론 모이는 인원이 많아서 회당이 수용불가였던 점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단연 기존 종교세력으로부터의 배척이었습니다.

마을과 회당이라는 안정적인 곳에서 쫓겨나 산과 들과 호숫가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그래서 소외 당하고 배척 당한 이들을 향한 격려와 희망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시작인 팔복이 이렇게 시작하지 않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의 the message 번역으로 옮겨 보면, 느낌이 더 다가옵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3절)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기본적으로 기존의 권력집단과 중심으로부터 배척당한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서 표현해 보면, ‘예수님의 메시지, 그 말씀을 따른다는 것은 중심을 향하는게 아니라, 변두리를 지향하는 겁니다.

수년 전 어느 주일 오후였습니다. 동기 목사가 부교역자로 섬기고 있던 교회 예배에 알리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그 시간 후배 목사가 자기 교구 헌신예배에 열정을 다해 설교했습니다. 그날 설교 제목 “갈릴리로 가라”처럼 메시지는 복음의 중심성은 예루살림이 아니라, 갈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갈릴리의 삶을 살자”고 권면했습니다.

무난한 설교였습니다. 근데 문제는 설교 후 광고시간에 일어났습니다. 은퇴를 앞둔 담임목사가 설교단에 서더니 갑자기 주먹을 쥐고 교우들에게 따라하라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변두리가 아니라, 중심을 삽시다!!!” … 그렇게 외치며 교인들을 따라하도록 강제한 담임목사는 우리 교단의 총회장을 지냈던 목사였고, 그 이후에도 교단의 중심적인 일을 맡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당신이 믿고 따른다는 예수 그리스도와는 전혀 다른 삶의 지향점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걸음을 좇아 가는 겁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고, 그분께서 지향하신 것을 따라 사는 겁니다. 그렇다면, 현재 기독교와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선명해 집니다. 말과 발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말은 갈릴리로 간다고 하는데, 발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놀라운 포장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얼마나 ‘세속적’인 성공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한국교회가 이런 놀라운 기술을 갖고 있다는 것은 결국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가 그렇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말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발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입니다.

주일예배를 위해 아침 교회를 향할 때 차 안에서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웬지 모를 눈물이 흐르곤 합니다.

“주를 위한 이곳에 예배 하는 자들 중에 그가 찾는 이 없어 주님께서 슬퍼하시네…”

우리의 수많은 말 잔치 속에서 아파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느껴지시요? 말을 넘어 우리의 걸음이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삶으로 예배드리는 그 예배자이길, 삶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이길 주님이 얼마나 바라시는지 느껴지시지요?



4. 네 종류의 밭


이제 오늘의 본문의 중심인 씨뿌리는 비유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문의 구조는 단순하고, 내용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예수님은 4종류의 밭, 길가, 바위(돌밭), 가시밭, 좋은 밭을 말씀하셨는데, 크게 분류해 보면, 단 2종류의 밭이 존재합니다. 열매를 맺는 밭과 맺지 못하는 밭입니다. 이 구분은 기계식으로 2:2로 나눠지지 않고, 좋은밭과 그렇지 못한 다른 3개의 밭이라는 1:3으로 편향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또 다른 1:3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아예 열매와 상관없는 밭 아닌 것과 밭이나 밭과 비슷한 것으로 구분됩니다. 다시말해 완전 밭이 아닌 길가와 그래도 열매와 관계가 조금이라도 있는 3가지 밭, 바위(돌밭), 가시밭, 좋은밭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그렇지는 않지만, 이 비유는 알레고리적(우화)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그렇게 해석해 주셨는데, 이 비유에서 등장하는 밭은 곧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즉, 밭의 종류와 상태가 다른 것은 마음의 상태가 다른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럼, 간략하게 이 밭들에 대해 살펴 보시겠습니다.

첫번째, 길가입니다.

: 이것은 씨앗이 떨어짐과 동시에 새들이 날아와서 물고 가버립니다. 새먹이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새를 마귀로 해석하시며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말씀과 구원의 관계성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지요. 근데, 분명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함으로써 주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순간성과 지속성입니다.

사랑의 고백은 순간이지요. 고백의 순간을 통해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순도는 어떻습니까? 긴 시간을 같이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삶을 통해 증명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집니다.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지만, 그 믿음의 순도는 삶과 시간을 통해 입증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2:12을 통해 이렇게 구원을 위한 믿음의 삶을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은 이처럼 지속적인 말씀의 자람을 통해 이루어 가야 합니다. 길가는 그것이 안되는 겁니다. 아예 시작조차 못하는 거지요. 자, 그럼, 여기서 말하는 ‘길가’는 누구를 의미할까요? 이건 아주 명료합니다. 당시 예수님을 배격하고, 아예 말씀 자체를 거부한 종교권력자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제사장과 서기관들입니다. 이른바 당시 종교계의 전문가들입니다. 율법전문가들, 예배전문가들입니다. 사회에서 ‘어흠’이라고 소리 꽤나 내던 전문가들이 예수님을 배격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에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지폈다며 이단시하며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훼방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왜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딱딱한 길가와 같은 마음으로 묘사되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내가 전문가인데, 내가 아는데!’라고 생각하기에 다른 것이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다른 것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굳은 마음 앞에 영어 접두사 ‘un’을 놓아야 합니다. 이게 무슨 말씀이냐 하면요…

배웠던 것을 지우는 것, 의도적으로 잊는 것을 Unlearn이라고 합니다. 번역하자면, ‘반(反)학습’ 내지 ‘폐기학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삶, 또는 혁신의 출발점은 새 것을 배우는 학습(Learn)이 아닙니다. 낡은 것을 버리는 반학습 내지 폐기학습이라는 Unlearn이 우선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미 축적해 있어 패턴화되고, 루틴화된 경험을 넘어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힘들게 배우고, 쌓아온 것을 굳이 왜 버려야 하지?’라는 질문이 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바이러스의 대유행은 지금까지의 논리와 경험을 죄다 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더 이상 과거의 이론과 경험으로 현재와 미래를 살아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예전 것을 고집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과거의 것들 중에 본질은 relearn 하고, 비본질적인 것들은 Unlearn 하는 선별이 필요합니다.

두 차례 바로셀로나를 방문했을 때 빠짐없이 찾았던 곳 중의 하나가 피카소 박물관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느꼈던 2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피카소는 기본 데생부터 시작해서 미술의 기본기를 탄탄히 배운 화가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피카소는 과거에 배웠던 것을 하나하나씩 버림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아는 피카소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니, 평생을 일곱 살 아이처럼 그리려고 노력했다던 피카소가 즐겨 사용한 단어는 'naive(순진한)'나 'pure(순수한)'가 아니었습니다. 배운 것을 고의적으로 잊는 'Unlearn'이었습니다. Unlearn을 통해 Relearn하는 용기와 유연함이 있었기에 그는 피카소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이들어가며 ‘여성은 부드러움을 잃어가고, 남성은 너그러움을 잃어간다’고 하지요. 어떤 이들은 그게 모두 호르몬 탓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혹시 나이 들어가면서도 새롭게 배우지는 않은 채 기존의 배운 것들, 축적된 경험만을 붙들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것이 너무 확고하여, 구부릴 수 없는, 굳은 상태인 ‘Inflexible’이 된 것은 아닐까요? … 한 주간을 돌아 보십시다. 여러가지 일들로 얼마나 마음이 굳어지셨습니까? 그렇다면, 굳어진 마음 앞에 ‘Un’을 놓아둬야 합니다. 그래야 ‘길가’라는 마음밭으로 전락되지 않습니다.

둘째, 돌밭입니다.

: 여기서 부터 일단 카테고리가 밭에 속합니다. 근데, 얕은 흙 안에 커다란 돌덩어리들을 품고 있어 싹이 돋았지만, 더이상 자랄 수가 없어 시들어 말라버립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처음엔 기쁨으로 말씀을 듣지만,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흙이 얕다는 것은 결국 마음이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견디고 버틸 수 있는 힘이 적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이런 상태가 된 것의 이유 중 하나는 경제적 빈궁함이 원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30:7-9에 아굴은 이렇게 기도했던 겁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경제적인 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우리 믿음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지 않도록 재정을 잘 경영해 갈 필요가 있습니다. 자원과 시간이 무한정이면 경영할 필요가 없습니다. 쓰고 싶을 때 그냥 쓰면 됩니다. 그렇지만, 한정된 시간과 자원이기에 필요한 곳을 위해 다른 곳엔 절제할 줄 알아야 하고, 만일을 위해 예비할 필요도 있습니다. 모쪼록 많거나 없거나 간에 경제적인 부분이 우리 믿음의 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이 되지 않도록 관리해 가셨으면 합니다.

셋째, 가시밭입니다.

: 가시밭엔 흙은 풍부합니다. 싹도 내릴 수 있고, 자라기까지 합니다. 근데, 곡식보다 더 강력한 뿌리와 줄기를 갖고 먼저 그 자리를 차지 하고 있던 존재가 있습니다. 가시떨기입니다. 그것이 곡식으로 하여금 더이상 자리지 못하게 합니다. 결실치 못한 채 계절이 종료되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말씀은 듣지만, 지내는 중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결국 염려, 재물, 향락이라는 것들이 신앙을 위협하는 위험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3가지 시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고 보면, 신앙이 자라고, 성숙해 간다는 것은 필요와 욕심의 경계를 잘 관리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각인지, 염려인지 경계를 파악하고 경계를 관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필요한 재물인지, 과도한 욕심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의 기쁨을 위함인지, 정도를 넘어선 쾌락을 위한 것인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있어야 할 것과 없어도 될 것을 구분하고, 버릴 것과 버리지 말 것을 구분하게 됩니다.

2006년도에 개봉했던 영화 <플라이 대디>는 일본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 <플라이 대디 플라이>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권력과 힘의 논리에 무력했던 40대 아버지가 딸의 폭행사건을 계기로 자신을 단련함으로써 바뀌어 가는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인상적인 대사가 있습니다.

"기초가 뭐라고 생각해?"

"기초는 ‘필요없는 것을 버리거, 필요한 것만 가지는 것’이야”

“그 기초를 만들기 위해 우선 부수는 것부터 해야해. 왜?”

……

"부수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어. 새로운 근육을 만들기 위해선 오래된 근육부터 부숴야 해"

새로워지고 싶다고 하면서 옛 것을 그대로 가진 채 새로워 진 경우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신앙인으로 바뀌기 위해선 먼저 자신을 잘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독 자신을 넘어지게 하는 것, 자신이 약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어떤 이는 온갖 종류의 염려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재물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향락일 수 있습니다. 내가 자주 넘어지는 것, 그것이 내 맘 속의 가시덤불입니다. 그것이 나를 가시밭으로 머물게 합니다. 그것 해결하지 않으면 평생 가시밭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어느 새벽, 시간을 보니 4시가 좀 넘은 때였습니다. 전화가 울렸습니다. 30대 아기엄마가 울면서 전화를 했습니다. 남편이 술에 취해서 밤새 위협적이라는 겁니다. 의사가 왕진가방을 챙기듯 성경을 넣고 그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집의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가니 아직도 술에 취해 있는 남편이 저를 보더니 놀랍니다. 부부를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술기운이 가득한 남편과 울음으로 얼굴이 부은 부인과 더불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나눈 말씀이 베드로전서 4:3이었습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이 말씀을 읽고 간단히 이렇게 권했습니다. “ ’지나간 때로 족하다’는 것은 ‘많이 먹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집사님에게 이제 마실만큼 마셨으니, 그만 마시라고 하십니다”. 감사하게도 그날 술기운이 가득했던 남편은 그 말씀을 전심으로 받았고, 자신 속에 있던 향락의 가시를 제거했습니다.

귀하신 여러분~

여러분 안에는 어떤 가시가 있습니까? 그 어떤 가시가 나로 열매맺지 못하게 가로 막아 왔습니까? 이제 그 가시와 살았던 삶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하십니다.

넷째, 좋은 밭입니다.

: 좋은 밭은 열매가 30배, 60배, 100배가 맺히는 밭입니다. 크리스천이면 누구나가 선호하고,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밭입니다. 그러나 이 밭은 되고 싶다고 해서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근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 좋은 밭은 다음과 같은 사람만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될크될 구조’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에 있는 ‘될크될’은 ‘될 크리스천은 될 수 밖에 없다’인데, 왜 그럴까요? 그것은 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 구조로 자신을 변화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우리의 승부가 결정됩니다.

냄비밭을 잘 하는 사람은 늘 맛나게 잘 합니다. 근데, 설익은 밥을 만드는 사람은 늘 설익은 밥, 새까맣게 태운 밥을 만듭니다. 찌게를 아주 맛나게 끓이는 사람은 늘 맛나게 끓이는데, 짜고, 맵게 끓이는 사람은 늘 그렇게 끓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운이 좋거나 나빠서?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레시피, 구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인 누가복음 8:15은 좋은 밭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그 구조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좋은 밭은 그냥 가만히 있어서 좋은 밭이 되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은 것이 아닙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것, 그것을 지키는 것, 그리고 인내를 갖고서 과정을 겪어가고, 살아가는 것! 바로 이것이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이고, 바로 이런 구조가 30배, 60배, 100배 열매맺는 삶이라고 하십니다.

앞서도 언급드렸지만, 사랑의 고백은 순간이지만, 사랑은 지속성을 통해 사랑임이 증명됩니다. 믿음의 고백도 순간이지만, 믿음은 지속된 삶 속에서 믿음임이 드러납니다. 열매는 씨앗을 심자마자 거두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여정을 거치며 만들어 가는 산물입니다. 그래서 좋은 밭으로 남기 위해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계속적인 관리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한 해 좋은 밭 되었다가 그 다음 해도 좋은 밭으로 남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한 해만 가꾸지 않아도 그곳이 논이었는지, 밭이었는지 그냥 풀밭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게 자연의 모습인데, 하물며 우리 마음은 예외이겠습니까? 끊임없이 뽑아내고, 갈아엎고, 돌봐야 합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 구조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5. 될크될 - 구조를 변혁하라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구조를 갖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계발서나 동기부여 강사들이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변화하라’는 주장입니다. 변화는 ‘익숙함’과 결별하는 그 경계에서 일어납니다. 근데 이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두려움’과 ‘게으름’입니다. 우리는 여러 부분에서 두려움과 게으름 때문에 변화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생사가 나눠지는 일에서 조차도 변화하길 주저합니다. 암환우들이 병과 싸우면서 신앙을 새롭게 하는 공동체에서 여러 암환우들을 만났습니다. 각종 부위의 암으로 고통하는 그분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암에 걸려서도 여전히 옛습관과 결별하지 못한 분들이 있는가 하면, 기존의 식습관부터 삶의 방식을 싹 버리고 완전 새롭게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누가 건강을 회복하겠습니까? 이건 삼척동자도 알 일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의 나를 바꾸지 않고서는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 내 안에 있는 딱딱한 길바닥 같은 완고함, 얇은 흙 아래 교묘하게 감추고 있는 돌덩어리들, 깊이 뿌리 내리고 얽히고 섥혀있는 가시들과 결별하지 않고서는 변화는 말잔치에 그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변화의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우리는 진실하고 성실한 농부처럼 되어야 합니다. 농부는 최선을 다해 농사짓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한해의 농사를 위해 적당한 비와 바람등 기후적 조건을 위해 하늘의 긍휼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내면의 변화와 영적성장에도 이러한 2가지 필수적입니다. 최선을 다해 나를 갈아엎지만, 동시에 이렇게 구하는 겁니다. “하나님, 저의 힘으로,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오직 저를 위해 피흘리신 주님의 십자가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벌써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주님의 오심을 기억하며,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둘째 주일이기도 합니다. 기다림의 두 번째 불을 우리 맘 속에 밝히며 우리 안에 오래된 우리의 구조를 변혁해 가십시다. 이 시기 불교계의 승려들은 스스로 밖을 향하는 문을 걸어 잠그고 3개월을 동안거합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며, 자기 속에 자라난 모순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참된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모순에 빠진 사람들의 모순됨을 보여주는 모순의 시그널이 되어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이 모순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정도를 넘어선 염려, 욕망과 향략에 익숙하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세상의 모순됨을 보여주는 표지판이 아니라, 모순의 덩어리로 한 평생을 살다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밭 같은데, 열매는 없는 유사 밭으로 스스로도 헷갈리며 살다 갈지 모릅니다.


주님을 믿는다면, 진정 그 진리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열매없는 우리 속의 모순을 제거하며, 모순에 빠진 세상을 일깨우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어둡고 혼탁해져 가는 이 시대는 온 힘을 다해 모순을 제거하며 살아가는 바보스런 우리 삶을 통해 모순은 깨어지며, ’다시 십자가, 다시 예수 그리스도’로 밝아지지 않겠습니까?

*이 시간 <주을 위한 이곳에>찬양을 함께 드리면서, “주님, 모순된 제 삶을 깨뜨려 주옵소서. 숨기고 있던 돌덩어리, 얽히고 섥혀 있던 가시들을 뽑아 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진정 삶으로 예배드리는 그 사람, 삶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 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의 결단을 이 찬양으로 올려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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