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1.10.31 움오름 주일 설교 -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요나 4장)




요나서 4장

4장

1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2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3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5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6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7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8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9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1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11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설교문


1. 반전의 4장


은퇴 후 줄곧 평창에서 생활하시는 이원태 목사님은 당신이 개척하고, 평생 목회하셨던 교회같이 움오름교회를 생각하십니다. 매주 교회 홈페이지에 들러 설교와 묵상찬송(meditation)을 들으신 후 “아, 참 좋더라, 마음에 위로가 되고 감동이 되더라…”며 격려해 주십니다. 지난 주일 오후엔 요나서 3장 설교를 들으신 후 전화통화에선 제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을 질문으로 저를 깨우치기도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요나를 선택하셨을까? 왜 꼭 요나를 찝어서 니느웨로 보내셨을까?”

질문 속에 목사님의 유연성이 보였습니다.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여전히 새로운 것에 대한 궁금증과 굳어있지 않음에 경탄했습니다. 움오름가족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요나를 선택해 보내셨다고 생각합니까? 이 목사님의 묵상의 결론은 ‘당시 이스라엘 안에서 요나만큼 니느웨의 상황에 대해 알고 있고, 그 나라의 말에 능통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요나는 욥바에서 승선했던 배에서 만난 외국 선원들과도 의사소통이 자유로웠습니다. 홀로 수백킬로 떨어진 니느웨를 찾아가서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셨던 말씀을 정확히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 목사님의 말씀대로 당시 요나만큼 그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요나를 선택하셨던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요나가 선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니느웨로 가라고 했더니 스페인 다시스로 도망가고자 했습니다. 그 과정에 같은 배에 탔던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위협을 받았고, 많은 물질적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물론 그 일들을 통한 긍정적 효과도 있었습니다. 선원들이 자신들이 믿던 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지내는 동안 요나가 자신 속에 깊이 자리해 있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진심 따르겠다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요나의 외침을 들은 니느웨 왕을 비롯한 온 성읍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역시 하나님이시다는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요나같이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을 선지자로 부르셔서 마침내 원하셨던 사람들을 회개토록 하시니 말입니다. 요나서 3장이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딱 이렇게 마치면 얼마나 해피앤딩이겠습니까? 모두가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요나서는 아직 반전의 4장이 남아 있습니다. 4장에 나타나는 요나의 언행은 도저히 선지자라고 보기도 어려울 만큼 우리를 당혹케 만듭니다.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에 대해 되려 불쾌하게 여기며 분노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서의 이런 반전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싶으신 걸까요? 4장을 살펴보며 그 메시지에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2. 요나의 분노


1) 하나님께 화를 내다

요나서 4:1은 니느웨의 회개와 하나님의 돌이키심에 대한 요나의 반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이 구절을 원문에 충실하게 재번역해 보면, 요나의 반응이 더 실감있게 다가옵니다.

요나가 싫어하여 매우 불쾌하여 성내며(וַיֵּ֥רַע אֶל־יֹונָ֖ה רָעָ֣ה גְדֹולָ֑ה וַיִּ֖חַר לֹֽו)

이 짧은 구절 속에 요나의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가 3개나 들어 있습니다. “싫어하다, 불쾌하다, 성내다”. 사람이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러나 솟아나는 모든 감정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때론 난데없고, 부자연스러운 감정이 폭발함으로써 원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감정은 최대한 다스리고 순화한 언어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싫어하고, 매우 불쾌해 하여 성내기에 이른 요나는 감정조절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꼭 요나만의 모습은 아닙니다. 얼마 전 어떤 유명정치인은 생방송 중 감정을 가누지 못한 채 말다툼을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습니다. 해외에서는 TV 생방송 중 서로 주먹다짐하는 사례들이 나라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꼭 신앙 밖의 일이냐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교회 모임에서도 자주 일어납니다. 정치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노회나 총회 같은데서는 더욱 빈번합니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향동네 옆에는 오래 전부터 조계사 소속의 비구승들이 거주하는 사찰이 있습니다. 또래 친구가 부모없이 그곳에서 자랐기에 자주 절을 방문하곤 했습니다. 어느날 그곳 주지스님과 동네 신도회장 간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둘 다 감정이 격해져 입에 담지 못할 욕설들 날리며 싸웠습니다. 지켜보던 분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주지승이나 신도회장이나 도대체 수도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요나는 왜 이토록 화를 내고 있습니까? 왜 분노를 쏟고 있습니까? 자기 뜻대로 안됐기 때문입니다. 근데, 자기 뜻대로 안되면 화내는 것이 마땅합니까? 자기 혼자 사는 세상도 아닌데, 모든 것이 자기 뜻, 자기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는 법이 있습니까?

2) 상처와 우상이 만든 분노

상담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분노라는 감정은 내 자신의 상처와 관련있다고 합니다. 기독교 상담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내 내면에 자리한 우상과 연관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조차도 거침없이 싫어하고, 매우 불쾌해 하며, 성내기까지 하던 요나의 분노는 어떤 상처, 어떤 우상과 관련있는 것일까요? 요나서 4:2을 이어 읽으시겠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라고 하지만, 화가 나서 쏟아내는 요나의 기도를 보면 2가지 생각이 듭니다. 하나는 ‘요나를 하나님과 친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버릇없다고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헷갈립니다.하나님께 요나처럼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1,888명(대한성서공회 인물사전)을 통틀어 보더라도 이런 사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에 하나님을 대하는 것에 있어 가장 큰 변화는 호칭의 변화입니다. 예수님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냥 ‘야훼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전능하신 하나님, 엘샤다이를 비롯해 여호와 닛시, 승리의 하나님이셨고, 여호와 라파, 고치시는 야훼이셨습니다. 호칭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우리의 부족함을 감싸고 해결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인간과는 거리가 느껴지기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당연 경외함(두려움과 공경)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멀게만 느끼던 하나님을 매우 친밀하게 표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바 아버지’(막 14:36)였습니다. 번역하면, “아빠 아버지”였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과 친근하면, 다 큰 분이 “아빠~”하고 불렀겠습니까? 그만큼 다정하고 친근하게 하나님과 지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그 친근함 이상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고, 그 뜻대로 순종하셨던 것은 따로 말씀드리지 않더라도 아실 겁니다.

문제는 지난 2천년 동안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친근하게 여긴다는 것은 좋은데, 그런 나머지 마땅히 가져야 할 ‘경외심’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너무 막 대합니다. 내 인생의 시간과 물질과 선택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지 않습니다. 먼저 구별하지 않고, 쓰다 남는 것으로 드리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이러하다면, 우리가 진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맞을까요? 이토록 무례한 요나가 우리랑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요나의 말을 보며 드는 또 다른 하나는 요나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알고 있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마치 자신 생각 속에 ‘하나님은 이러해야 한다’라는 굳은 이미지가 있는 사람 같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앞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체결하며 십계명이라는 기준을 주셨습니다. 그중 두 번째 계명이 다음과 같습니다. 출애굽기 20:4-5입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서 말하는 우상을 다른 신의 형상을 의미하는 줄 압니다. 그렇지만, 두 번째 계명을 정확히 읽어보면, 우상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을 위해’ 만드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이 말을 풀이하면, 설혹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하나님이라고 만든 형상 역시도 우상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 때의 형상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물체일 수도 있고, 동시에 우리 마음에 새긴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 성경이 보여주고, 말씀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임의대로, 우리의 편의대로 생각하고 섬기는 하나님 역시도 우상이 될 수도 있다는 이 엄중함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요나는 선지자이면서, 특별히 하나님께 선택되어 니느웨로 보냄받은 대표선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지 않았습니다. 가까운 듯 하면서도 무례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아는 듯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마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기고, 그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깊이 뿌리내린 그 우상과 실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불일치하자 그는 싫어했고, 몹시 불쾌해 하며 화를 내었습니다. 과거 니느웨로부터 그와 가족과 민족이 받았던 피해와 희생과 상처를 도저히 덮고 갈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이방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우리 맘 속에는 어떤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 있습니까? 아는 것과 실제 삶이 이토록 박리된 요나의 모습 속에 일그러진 그리스도인,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3.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니느웨의 회개는 선지자로서는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한편으론 일어날 수 없는 영화같은 일입니다. 성경 속 선지자 중에 이토록 혁혁한 결과를 만들어 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심지어 많은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외면받고 학대받기까지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기원전 627-585년에 활동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근 40년 동안 전했어도 회개의 열매를 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구덩이에 던져져 갇히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사흘 길을 걸을 니느웨에 하루만 전했는데도 이런 국가적 회개가 일어났다는 것에 얼마나 환호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알다시피 사람이 변한다는게 쉽지 않습니다. 특히 나이가 들어갈수록 본인이 습득한 지식과 경험이 어우러져 더 견고해 집니다. 자기 생각과 비슷하면 은혜로운 말씀이라고 받아들이지만, 조금이라도 다르면 냉소적이 됩니다. 차갑게 거절합니다. 이것이 사람이고, 우리입니다.

화를 내며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는 요나를 향해 하나님은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은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선지자를 향한 반문이었습니다. 네가 불쾌하게 생각하고, 기분 나빠하는 그 감정의 밑바탕에 무엇이 있는지를 좀 보라는 말씀입니다. 분노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것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4.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의 질문에 요나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요즘말로 “생깐다”고 하지요. 하나님의 질문을 아예 무시하고는 성읍 동쪽으로 가서 풀과 나무를 엮어서 임시거처를 마련했습니다. 선지자가 임무를 다했으면 떠나면 되지 왜 임시거처를 마련했을까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유는 니느웨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고자 해서입니다. 한마디로 ‘저것 망해야 하는데…’라며 인디안 기우제 지내며 지켜봤던 겁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나를 혼내시기 보다 박넝쿨이라는 교보재를 활용하셨습니다. 아무리 말로 해도 안될 사람이니 스스로 체험해서 깨닫기를 원하셨던 겁니다. 박 넝쿨이 자라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셨습니다. 서늘한 그늘에 요나는 금새 크게 기뻐했습니다. 아니, 조금 전까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 때문에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한 사람인데, 박넝쿨 하나 때문에 이렇게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이때다 싶어 다음날 벌레 한 마리를 보내셔서 그 박 넝쿨을 갉아먹게 하셨습니다. 해가 뜰때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동풍까지 보내셨습니다.

요나는 또 다시 성을 내며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요나는 이렇게 감정의 오르내림이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툭하면 화를 내고, 죽겠다고 하는 요나를 향해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박 넝쿨이 죽었다고 이렇게 화내는 것이 옳으냐?”(욘 4:9)

하나님의 이 질문에 요나는 힘주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성내다가 죽더라도 옳습니다”(욘 4:9)

철부지 선지자의 악쓰는 막무가내 대답에 하나님은 이렇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요나서 4:10-11입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선지자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미리 보는 사람입니다. 그 본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사람들의 걸음을 되돌리고, 새 삶을 살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요나는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 안에 견고하게 자리한 감정과 잘못된 우상으로 인해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박넝쿨 하나 조차도 누가 자라게 하고, 누가 거두시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수고와 무관하게 이 땅에 존재하는 박넝쿨에 대해서 무한 아까워 하면서도 정작 12만명이나 되는 사람과 수많은 짐승들을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에는 화를 냈습니다.

하나님이 ‘아끼시다’라는 말 ‘후스(חוּס)’는 동정심을 가진다는 뜻과 더불어 ‘누군가를 위해 눈물 흘리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요나에게 하신 마지막 질문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씀은 “제발 내 눈물을 좀 봐라”는 하나님의 간곡한 부탁인 셈입니다. 죽어가는 생명들에 대한 하나님의 눈물과 탄식을 외면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사소한 것은 크게 보면서도 관심 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눈길 조차 주지 않는 행위에서 돌아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5. 요나서가 들려주는 메시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는 하나님의 눈물 담긴 질문 앞에 요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대답도 없이 하나님의 질문으로 요나서는 마칩니다. 가족님들이 보시기에 요나는 왜 대답하지 않았을까요? 요나의 대답을 기록한다면, 어떤 말로 기록할 수 있을까요? 만일 가족님들이 요나라면, 하나님의 저 질문 앞에서 뭐라고 대답하셨을 것 같습니까?

지난 1달 동안 요나서를 살펴보며 느끼셨겠지만, 요나서는 여타의 선지서와 달리 선지자의 예언을 듣는 대상의 회개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요나서의 핵심은 ‘니느웨의 회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되려 요나서가 강조하는 것, 읽는 이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요나라는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실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라는 요나서의 마지막 구절은 우리에게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아낄만한 것이 없습니까? 정말 없으십니까? 하나님은 동산 위에 앉아 니느웨의 멸망을 기다리는 요나같은 우리를 향해 묻고 계십니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않겠느냐?” … 이제 이 질문 앞에 정직하게 우리가 대답할 때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지난 한달 동안 요나서를 통해 우리 자신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요것이 나다’고 말했지만, 이토록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요나가 우리인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머리로, 지식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려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귀로 들으려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가슴으로 느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툭 던지는 말은 날이 서 있었고, 차가운 심판의 메시지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향해서 물으십니다. “네가 화 내는 것이 합당하냐?”,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이제 하나님의 물음 앞에 우리 삶으로 대답하는 요나들 되게 하옵소서. 요나같은 우리로 인해서 한 생명이라도 살아나는 것이 삶의 기쁨이고, 보람인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특별히 종교개혁 504주년을 기념하는 오늘, 무엇을 개혁하는 것이 진정 교회의 개혁이고, 신앙의 개혁인지를 생각하게 하옵소서. 타락하고 자기 맘대로인 종교인들을 보며 비난하기 이전에 그들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이 된 우리 자신을 안으로부터 바꾸어 가는 개혁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과 상관없던 우리를 바꾸어가는 개혁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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