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1.10.24 움오름 주일 설교 -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요나 3장)

최종 수정일: 10월 24일




요나서 3장

3장

1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2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3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4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5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6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7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8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9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10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설교문


1. 하나님의 마음 헤아리기


내 민족을 죽이고, 괴롭히던 나라, 이후엔 조국마저 무너뜨릴 적국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맘 속에 자리잡은 증오와 미움의 짙은 중력층을 뚫고 올라가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요나의 입장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서도 또 다른 면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보셨듯이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자기 맘대로인 요나를 선지자로 보낸다는 것이 여간 녹녹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만물들이 하나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명합니다. 바다의 풍랑이 그렇습니다. 불라고 명하시면 무섭게 솟아 올랐다가, 잠잠하라 하시면 곧 평온해 집니다. 이방신을 섬기던 선원들조차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바다의 물고기도 명령에 따릅니다. 그런데도 유독 한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선지자가 문제입니다. 슬쩍 도망을 가지를 않나, 죽어도 못하겠다고 호기를 부리기도 합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이 안타깝고, 또 아프셨겠습니까!

때가 늦으면 심판이 임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테인데도 선지자라는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돌아서기 보다는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과 고집스런 사람과 함께 일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는 기도나 설교, 찬송 중에 자주 ‘악한 세상 속에서 살때’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요나를 지켜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세상을 가장 악하게 흉흉하게 만드는 것이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닐까요?

하루를 살 때 문득문득 떠올라 흥얼거리는 찬양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아들을 제물로 삼으실 때

얼마나 아프실까 주님의 몸과 마음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제물되실 때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 가슴은

독생자 주셨건만 인간들 부족하다 원망할 때

얼마나 아프실까 주님의 심령은

자신을 주셨건만 사람들 부인하여 욕할 때

*찬양하는 사람들 1집 <얼마나 아프실까>

대개의 자녀들은 부모생각보다는 자기생각을 먼저 합니다. 그런 자녀가 언제부터인지 부모를 걱정합니다. 부모 생각합니다. 뭘 말하는 겁니까? 어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늘 아버지께 매번 “이것 주십시오!”, “저것 주십시오!”라고 떼씁니다. 자기 좀 봐달라고, 자기 생각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던 사람이 어느 때부터 하나님의 생각을 살피고,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려 합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신앙이 성장했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가 당장에 ‘주님의 기쁨’이 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얼마나 아프실지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고, 얼마나 아프실지 하나님 가슴을 헤아릴 줄 아는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가지 않을까요?



2. 고통과 고난이 준 선물


니느웨로 가기를 죽기보다 더 싫어하던 요나를 보며 묵상이 된 또 다른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요나에게 니느웨라는 지역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니느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나라일 수도 있고, 민족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이나 특정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기보다 더 하기 싫어하는 일들의 배후를 잘 따라가 보면, 거기에 우리의 오래된 상처와 내면의 우상이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셨던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에 나오는 4종류의 밭 중에서 돌맹이를 깊숙히 품은 돌밭처럼 말입니다. 아니면, 쓴 뿌리를 깊숙히 땅에 내리고 있는 가시덤불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영적성장과 신앙의 성숙을 방해합니다.

그렇다면, 영적성장을 방해하는 이런 것들은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농사짓는 것을 생각하면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논과 밭은 곡식을 심기 전에 땅을 기경합니다. 갈아엎는다는 말씀입니다. 위에 있는 것이 땅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땅 속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땅 속에 들어있던 것들을 꺼내서 버립니다. 땅 위에 흩어 뿌렸던 거름은 땅 속에 자리하게 합니다. 그런데 땅을 윤택하게 하고, 기름지게 만드는 이 방법은 실은 땅에 있어서 고통이고, 고난입니다. 맨 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으로 쟁기가 파고 듭니다. 곡갱이가 표면을 쪼아댑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 땅이 갖고 있던 성분이 바뀌고 비옥해 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끝내 포기하지 않던 것을 언제 내려놓습니까? 고난이 올 때입니다. 고통이 다가올 때입니다. 그때 땅에 스며드는 빗물마냥 우리 눈물이 딱딱하던 마음을 무너뜨립니다. 완악하던 심령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때 우리 속에 없어져야 할 것들, 하지만 소중히 갖고 있었던 것들을 내어놓습니다. 우리 안에 이렇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요나가 그러했습니다. 죽더라도 하지 않겠다던 고집은 차가운 바닷 속에 침몰해 들어가면서 후회로 바뀌었습니다. 입조차 열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다급히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처절한 죽음의 고통 속에서 그는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자신 안에 견고히 자리잡아 있던 우상이라는 존재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헌신을 맹약했습니다. 고난이, 고통이 가져다 준 신비였습니다. 그 때서야 하나님은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행여 우리 삶에 원치 않은 고통이 있습니까? 아니면, 말하기도 힘든 긴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그 고통에, 고난 속에 어떤 뜻이 있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아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고통 속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기에, 고통과 고난의 터널을 지나면 불순물이 제거된 정금으로 바뀔 것을 기대합니다. 현재 어려움 가운데 계신 가족님들은 이 소망을 갖고 잘 견뎌가시길 기원드립니다.




3. 두 번째 기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큰 물고기는 3일 동안 간직하고 있던 요나를 육지에 토해 냈습니다. 요나가 도달한 해안이 그가 출발했던 욥바인지, 아니면 니느웨로 가기에 가까운 현재 시리아 연안인지 성경은 거기에 대해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하튼 그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지만, 온통 물고기의 위액과 비린내로 범벅이 된 채 해안가에 도달했을 요나가 충분히 그려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도망갈 수 있다고 착각하고 도망가다 다시 잡혀 온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서 3:2입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이번에도 하나님의 명령은 3개의 동사로 간결했습니다. “일어나라, 가라, 선포하라”. 만약 육지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님의 처음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움직였다면 하나님께서 저리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요나가 그냥 주저 앉아 있으니 하신 말씀입니다. 요나는 육지에 도달해서도 자발적으로 니느웨로 갈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또 다시 말씀하신 겁니다. “일어나라, 가라, 선포하라”

하나님의 다시 부르심은 그 자체가 놀라운 복음입니다. 불순종으로 실패했던 사람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지니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 여기엔 사람의 기본적인 성향이나 행동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축적된 경험이 배여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치에 따라 ‘아니다’ 싶은 사람은 가차없이 내칩니다. 다시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혈기가 왕성하고, 선악의 판단이 날카롭던 때에 사도바울이 그러했습니다. 바나바와 함께 떠났던 1차 선교여행지에서 마가라는 청년이 중도포기하고 되돌아 갔습니다(행 13:13-14). 명확한 이유야 알 수는 없지만,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족함을 모르고 살았던 부잣집 도련님이 고된 선교 여정을 이어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한참 지난 후 2차 선교여행을 떠나려는 때였습니다.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와 1차 때 중도포기했던 사람을 다시 데려갈 수 없다는 바울 간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마가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바나바와 결별하기까지 했습니다.

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래 기존에 자랑으로 삼았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그런 단호한 사람이었기에 버린 것을 주섬주섬 다시 줍거나 가지 않은 길을 뒤돌아 보는 것을 결코 용납지 않았습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한 상태의 신앙인이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중도포기자 마가와 다시 동행하고 동역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복음을 살아갈 수록 그에게 더 깊이 자리잡는 것은 ‘천사의 말을 하는 영적고귀함이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그런 과단성’이 아니었습니다. 실패하고, 실수한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고, 다시 품는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그게 복음을 진정 사는 이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를 깨달은 노사도 바울은 인생의 끝자락에서 디모데에게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 4:6)라며 3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그 첫째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두고 온 겉옷을 가지고 와 달라는 것이고, 둘째가 가죽 종이에 쓴 책(성경)을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딤후 4:13).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탁한 것이 '마가'를 데리고 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딤후 4:11). 자신이 내쳤던 사람을 데리고 와 달라는 것은 마가의 실수와 연약함을 받아주지 못한 것에 대한 화해가 목적이었을 겁니다. 나아가 바울이 채 이루지 못한 사역을 부탁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바울은 마가를 '나(바울)의 일에 유익한 자'라고 말했습니다(딤후 4:11). 사도바울의 말처럼 마가는 비록 1차 선교여행에서 중도 포기했었지만, 이후 사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할 정도로 신실한 제자로 성장했습니다. 그 마가에 의해 기록된 마가복음이 기독교를 박해했던 로마인들이 읽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성경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하나님의 은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닙니까?” … 네, 세상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실패한 사람, 중도포기자, 불순종한 사람을 다시 부르십니다. 마치 부활하신 주님께서 배신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을 다시 찾아와 아침밥을 지어주시던 것처럼 밥먹고 힘내서 다시 가자고 하십니다. 실패하고, 무너지고, 배신자였던 인생에게 이것이 복음이 아니면, 무엇이 복음이겠습니까?



4. 돌아서다


모르긴 몰라도 요나가 수백킬로를 걸어서 니느웨에 도착했을 때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을 겁니다. 몰골도 말이 아니었겠지만, 그가 입고 있던 옷이나 말투가 니느웨 사람들이 보기엔 이국적이고 이색적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특히 3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위산에 거을린 피부를 한 채 외치는 그의 메시지는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렇지만, 생전 보도 듣도 못한 이상한 이가 와서 외치는 심판의 다섯 마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는 결코 기분 좋은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요나가 외치는 말은 영혼이 없는 외침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명하신 말을 그저 반복하며 경고했을 뿐 그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마지못해 외치는 의무적 외침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40일이라는 기한을 두신 이유는 그 안에 회개하고 돌아서라는 의미인데도, 그것을 외치는 선지자는 마치 ‘돌아서지 마라’고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요나서>는 선지서 중의 하나로 분류되고 있지만, 실은 선지서라고 하기가 좀 그렇습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선지자들 중에서도 가장 짧은 메시지를 선포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마지 못해 외친 메시지일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3일을 돌아야 전체를 다닐 정도로 넓은 도시 니느웨에서 요나가 겨우 하루만 돌며 외쳤을 뿐인데도 니느웨 전체가 들썩였습니다. 40일의 기한이 있다면 아직도 더 알아보고, 확인하고 행동해도 될텐데도 왕으로부터 가축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즉시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도시가 그 악에서 돌아서 선으로 돌이켰습니다.

행색이 변변찮고, 말씨 조차도 익숙지 않은 외국 선지자의 다섯 마디 말에 모든 이들이 즉각적인 회개를 했습니다. 이건 너무나도 대조됩니다. 선지자라는 사람은 더디고, 쉽게 바뀌지 않는데, 이방인들은 놀랄 정도로 곧 바로 돌아섰습니다. 요나는 바뀌는데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의 시간이 걸렸는데, 니느웨 사람들은 3일 길 중에 하루만 전해 들었는데도, 40일 중에 하루만 지났는데도 곧 바로 돌아섰습니다.

니느웨의 왕은 성 내의 모든 백성들에게 4가지를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금식, 베옷 착용, 하나님께 부르짖음과 악한 길에서 돌아서고 폭력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 기독교 신앙인의 눈으로 볼 때도 니느웨 왕은 회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크고 작건 간에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국가가 어떤 도덕적 기초 위에서 어떤 방향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인지를 올바르게 정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그 길을 걷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더불어 니느웨의 회개를 보며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나라의 본질적 위기는 물질적, 경제적 위기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표면적이고 가시적인 위기일 뿐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위기는 도덕과 윤리의 타락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한 나라가 심판에서 벗어나 진정 살아나는 길은 ‘악에서 떠나고, 폭력을 멈추는 것’입니다. 사회윤리의 회복입니다. 국가가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는 것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기업이 이윤을 절대시해 시민의 생명을 위협하고 책임지지 않던 악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교회가 진리를 왜곡하고 물질과 복을 동일시하던 번영신학에서 돌아서 진정한 복음을 살아야 합니다.



5. 돌이키다


니느웨 사람들의 즉각적이고도 적극적인 회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단순한 말이 아니라, 정말 악한 길에서 돌아선 그들의 결단에 하나님은 심판을 멈추셨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 속에서 진정성을 본 후 내리겠다던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거두고, 철회하신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변덕스러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섬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하신다면, 하나님의 비정함은 복음의 기본정신을 가리고 훼손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심판을 거두실 때 사용된 동사 나함(נָחַם)은 하나님을 주어로 사용될 때면 의미가 특별해 집니다. 그것은 ‘후회’라는 뜻과 더불어 내부적인 고통을 의미합니다. 심판을 계획하셨다가도 죄인이 돌아서면 당신이 그 죄인을 향해 책망하셨던 것에 대해 스스로 고통받으신다는 뜻입니다. 마치 죄인이 마땅히 치뤄야 할 죄의 대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의 죄의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마음을 잘 알았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본심을 알기를 바라며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3:33입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이어 선지자는 40절 말씀을 통해 우리의 결단을 이렇게 요구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하나님께는 당신의 명예나 신용보다는 죄인이 돌아서는 것을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말씀을 스스로 부정하면서까지 돌이키십니다. 심판을 거두십니다. 이 하나님의 인애와 사랑을 생각하며 우리도 나함(נָחַם), 하나님께로 돌아서십시다.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죄의 길에서 돌이키는 계절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 드립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함께 일하시기에 편하지 않던 우리 때문에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이기적이고, 제 멋대로인 우리 때문에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그럼에도 여전히 불러 주시고, 또 다시 “같이 하자”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그저 목이 매입니다. 바라기는 우리도 이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존중하는 좀 자란 자녀이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닮아 우리도 누군가를 품고, 기다리며, 다시 손잡는 그리스도인이길 구합니다.

자신의 명예보다도 우리의 돌아섬을 더 귀히 보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가을되게 하옵소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동역하시기에 좀 더 편한 사람, 하나님이 믿고 맡기시는 순명의 사람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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