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1.10.17 움오름 주일 설교 -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요나 2장)

최종 수정일: 2021년 10월 23일




요나서 2장

2장

1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2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3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4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5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6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7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8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9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10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설교문


1.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매일 06시가 되면 제 은사께서 제자들 8명으로 구성된 <현들의 울림>이라는 단체방에 직접 부른 찬송을 올려 주십니다. 지난 토요일 찬송이 <예수 나를 오라 하네>였습니다. 그 곡을 듣는데, 가사가 무거움과 이르지 못한 곳을 향한 향수로 다가왔습니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주님이 가라하시는 곳에 가지 않고, 이르지도 못한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주일부터 만나고 있는 선지자 요나와 별 차이는 제 모습이 비췄습니다.

요나는 육로로 1000km가 되는 니느웨로 가는 대신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배를 타고 무려 4000km나 떨어진 스페인 다시스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싶지 않았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요나의 모습은 수천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도 그와 꼭 닮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가벼이 여기기에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성과 경험에 의거해 판단하고 처리하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지 않으려 합니다. 왠지 그 길은 손해 보고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길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중 요나서 1장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지난 설교를 준비하며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것은 폭풍의 원인으로 제비뽑힌 요나가 선원들에게 했던 말입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욘 1:12)

요나는 모든 이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그 폭풍의 원인이 하나님을 거역한 자신인 줄 알았습니다. 나아가 자신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결코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길에서 돌아섰어야지요. 요나와 동시대에 예언했던 호세아 선지자는 그의 선지서 6:1-2을 통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안타깝게도 요나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보다는 자기 길을 고집했습니다. 죽기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더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회개 대신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근데, 제가 새롭게 주목한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정말 선원들을 살리고자 했다면, 그냥 자신이 바다에 뛰어들면 될텐데도 요나는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자기 대신 선원들이 결정을 내리도록 떠밀었습니다. 결국 자신의 불순종으로 인해 다른 이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선원들로 하여금 자기 살기 위해 요나를 바다에 던졌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삶을 살아오면서 혹이나 요나처럼 우리의 잘못된 판단과 고집스런 결정으로 다른 분들에게 피해가 된 적은 없습니까? 그로 인해 상처를 입힌 적은 없습니까? 모든 것을 바로 잡는 것이 늘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용기가 필요합니다. 고집스럽고 교만한 맘을 내려놓고 방향을 돌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때에서야 날뛰는 두려움의 바다, 엉망이 된 우리 삶은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남에게 나를 결정하도록 떠밀지 말고,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야 합니다.



2. 극한 지점에서 드린 기도


요나서 1장의 마지막 절인 17절은 하나님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읽는 사람들은 바다에 빠진 요나를 금방 삼키케 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근데, 2장에 있는 요나의 기도를 살펴보면, 시차의 간극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쉽게 설명드리자면, 바다에 빠지자 말자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바닷물 엄청 마시고 정신없이 물 속으로 빠져 들어 ‘아, 이렇게 죽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거의 죽은 단계까지 갔을 때였습니다. 그때 절박한 상황만큼이나 절박한 기도가 있은 뒤에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눈으로, 코로, 입으로 온통 바닷물을 마시며 요나는 점점 차가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도저히 살아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기도할 정신이 있겠습니까? 숨 쉬기도 어려운데, 그 바닷 속에서 누구에게 살려달라고 하겠습니까?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소멸해 갈 뿐이었습니다. 근데, 이때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요나를 잘 알고 계셨던 하나님은 그 방법이 아니고서는 요나가 기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가장 극한 지점까지 몰고 가셨습니다. 혹시 요즘 기도가 되지 않습니까? 아니 기도하기 힘듭니까? 아니면, 기도를 잊고 사십니까? … 만약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삶이 살만하다는 겁니다. 힘들면, 삶이 절박하면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신앙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어려움이 오기 전에, 직면하기 전에 평소에 기도하는 것이지 않을까요?




3. 참호신앙


이제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드렸던 절박한 기도를 살펴 보겠습니다.

요나서 2:1-2을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이 구절들은 댓구로 이뤄져 있습니다. < 내가 아뢰었더니 - 내가 부르짖었더니, 고난 - 스올의 뱃속, 주께서 대답하셨고 - 주께서 들으셨나이다 > 등입니다. 이런 댓구들을 통해 요나는 자신의 기도와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 하나 드립니다. < 고난, 스올의 뱃속 >이라고 표현된 곳이 어디겠습니까? … 쉽게 4지 선다형으로 드립니다.

1번: 말 그대로 지옥이다 2번: 큰 물고기 뱃속이다 3번: 바닷 속이다 4: 모르겠다

몇 번 일 것 같습니까? 몇 번을 선택하셨습니까? 정답은… 2번… 같지만, 3번입니다. 1절을 다시 보시면,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를 시작하고 있지만, 요나는 자신이 받은 고난으로 하나님을 불렀더니 하나님께서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자신이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모두 물고기 뱃속보다 이전 일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물고기 뱃속 이전이 어디입니까? 죽음에 직면했던 바닷 속입니다.

요나서 2:3-4을 읽으시겠습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조금 전까지 숨이 끊어지던 그 순간을 회상하며 요나는 하나님이 자신을 바다 속에 던지셨다고 합니다. 이 구절을 보니 우습지 않습니까? 요나를 바다에 던진 이들이 누구입니까? 선원들입니다. 그리고 그 앞서 누가 요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까? 요나 자신입니다. 물론 불순종으로 폭풍을 유발한 원인자도 요나 자신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을 좋게 해석하면, 그 모든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금만 시선을 돌려 해석해 보면, 여전히 하나님에 대해 책임을 전가하는 선지자의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아직 정신을 다 차린 것은 아니지만, 요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드렸습니다.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4절)

바다에 던져진 상황을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상황이 되고 보니, 과거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드리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요나는 그때를 회상하며 다시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는 예배자가 되겠다는 다짐입니다. 죽음 앞에 서면 모두가 이렇게 되나 봅니다. 그래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미군군목 윌리엄 커밍스을 비롯해 맥아더 장군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참호 속에는 무신론자가 없다(there are no atheists in foxholes)”. 포탄이 떨어지고, 머리 위로 총탄이 오가는 참호 속에 있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말입니다. 전쟁터 참호는 아니라도 질병이나 실패 등 극도의 어려움에 직면할 때 사람들은 초월적인 신을 찾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 부르라”는 의미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늘 가까이 계시지만, 그걸 느끼는 때가 바로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와같은 위기 가운데서만 하나님을 찾는 ‘참호신앙’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참호를 벗어나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참호 속에서 목숨을 구해주신다면 있는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겠노라고 서원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참호 밖을 나오면 ‘놀라운 복원력’을 가집니다. 성경 속 대표적인 경우가 죽을 병이 걸렸다가 기도해서 낳았던 히스기야 왕입니다. 15년을 더 수명을 연장받고 난 뒤에 그가 한 것이라고는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유다 왕 중에서 가장 오랜시간인 55년을 통치했으면서도 가장 사악한 배교자로 자리한 므낫세를 낳고 그렇게 양육한 일입니다. 절박함이 사라진 참호신앙의 대표적인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요나의 기도 속에 그 모습이 보입니다.



4. 비극의 옷을 입은 구원


이어 요나는 5절 - 6절에서 그가 처했던 죽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바다풀이 머리를 감쌌다는 것과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는 것은 바다의 바닥까지 가라 앉았다는 뜻입니다. 고대 근동인들은 산의 뿌리가 바다에 닿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가 내러갈 수 있는 가장 깊은 끝까지 추락했다는 의미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 없는 바로 그 지경까지 이르렀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바로 죽음의 문턱 그 앞에서 하나님께서 요나의 생명을 건져주셨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순간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킨 겁니다.

죽음 앞에서 정신이 혼미해 갈 때에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큰 물고기를 보며 요나는 ‘아, 드디어 살았다’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아마 100% 아닐 겁니다. ‘아, 이렇게도 죽는구나’라고 생각했지 않을까요? … 근데,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했던 큰 물고기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방주요, 천연 잠수함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종종 우리 인생 가운데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와같은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가장 풍성한 하나님의 복이 슬프고도 아픈 비극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때 만약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은 비극의 옷을 입은 그 상황 속에서 우리를 새롭게 빚어가실 겁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우선순위가 바뀌고, 무의미하고 사소한 것을 넘어 영원한 하나님의 것을 사모하도록 만들어 가실 겁니다. 영적인 성장이 우리 안에서 굳건히 자리하게 하실 겁니다.

7절에서 요나는 자신의 의식이 혼미하고 희미해지던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음을 고백합니다. 근데, 그 응답이 무엇입니까? … 물고기 뱃속입니다. 가끔씩 생선 다듬을 때보면, 물고기 내장이 어떻습니까? 상상만 해도 미끌미끌하고 비릴 것 같지 않습니까? 컴컴한 그 속이 뭐가 좋고, 뭐가 편하겠습니까? 숨 쉬는 것조차 편하겠습니까? 당연히 육지에서 숨 쉬는 것보다 불편했을 겁니다. 답답했고, 사방이 구분이 가지 않았을 겁니다. 근데도 어디보다 더 좋습니까? 숨이 멈춰가던 바다 밑바닥보다 더 낫습니다. 그래도 숨 쉴 수 있으니 감사가 됩니다. 요나는 이것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은 8절 - 9절에서 요나는 그 은혜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큰 변화를 겪은 그는 고난 속에서 기쁨과 감사의 노래로 충만해졌습니다. 과거 신실하지 못했던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이전에 하나님께 드렸던 서원기도를 꼭 갚겠다고 약속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차라리 바다 속에 빠져 죽더라도 니느웨에 가서 전하라는 말씀은 하지 못하겠다던 고집스런 요나로서는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요나는 이런 구원을 체험하고, 회개와 기도를 드릴 때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물고기 뱃속이 끝이 아니라, 머지않은 때에 곧 육지에 다다를 수 있겠구나’. 그런 의미에서 요나는 자신이 했던 서원을 반드시 갚겠다고 맹세했을 겁니다. 삶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불과 조금 전까지 차라리 죽겠다고 호기를 부렸던 사람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5. 물고기 뱃속 기도가 주는 3가지 가르침


이렇게 짧은 기도를 끝으로 요나는 육지에 도달했습니다. 10절을 보니, 하나님께서 물고기에 명하시어 요나를 육지에 토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근데, 2박 3일 동안의 요나가 드린 기도가 이게 모두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겨우 숨만 쉴 수 있는 그 컴컴한 뱃속에서 얼마나 죽기 살기로 기도했겠습니까? 그렇다면, 기도는 더 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서는 9절로 기도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10절로 구성된 짧은 요나서 2장 안에 요나가 드린 2박 3일의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의 핵심과 결론이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 부분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3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산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 하나님은 요나가 물에 빠지기 전 미리 큰 물고기를 예비해 두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준비하심을 일컬어 ‘여호와 이레’라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산에서 겪었던 하나님의 예비하심에서 기원된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겪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하나님의 예비하심이란 많은 경우 상황의 막다른 골목에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의 예비하심도 처음부터 피할 길이 아니라, 몰리고 몰려 끝까지 갔을 때에 발견하는 구원의 길입니다. 마치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도록 하나님께서 두고 보시다 구원하신다는 느낌이 듭니다. 다급하고 절박한 상황의 끝자락에서 무엇을 선택하는지를 지켜 보시는 겁니다. 그때 나타나는 것이 여호와 이레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늘 기억하고 인지한다면, 우리는 어떤 신앙인으로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내 삶에서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합니까?

둘째, ‘참호신앙’을 넘어서입니다.

: 막다른 곳에서의 기도는 누구나 절박하고 진심을 담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이런 참호신앙으로 지속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참호 밖에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 신앙의 급수가 매겨집니다. 그러기에 참호신앙을 넘어 일상의 신앙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참호는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기는 하지만, 새로움을 지속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러기에 일상이 곧 영성의 기본이요, 실력입니다. 매일 같이 시작하는 아침과 일상을 신앙으로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셋째, 서원의 실현입니다.

: 죽음의 막다른 곳에서 구원받은 요나는 지금껏 의지했던 생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겠다고 했습니다. 나아가 잊고 있었던 하나님 앞에서의 서원을 갚으며 살겠다고 했습니다. 서원의 이행이요, 실현을 약속 드렸습니다. 2박 3일 동안의 요나가 드린 기도의 끝이 서원의 이행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도 주시는 의미가 매우 큽니다.

가만히 눈감고 뒤돌아 보면, 우리도 하나님 앞에 드린 서원이 있지 않습니까? 나아가 부부 사이에 드렸던 서약도 있지 않습니까? 자녀들과 했던 약속도 있지 않습니까? …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 약속들을 어떻게 이행하며 살고 있습니까? 이 약속들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움오름 교회를 정하실 때 하셨던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서약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을 담아 헌신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헌신 속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우리 서로간의 사이가 더 풍성히, 그리고 건강하게 세워집니다. 이 풍성함을 이 가을에 우리 모두가 누리기를 기원드립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극한 죽음의 문턱에서 요나가 드린 기도를 통해 오늘 우리의 신앙과 일상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고집과 교만이 꺾이기 위해선 때로 극한까지 가는 상황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얼른 되돌아 올 수 있는 용기와 빠른 회복을 가지고 살기를 원합니다. 남에게 나를 결정하도록 떠밀지 말고,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기를 원합니다. 때로 가장 풍성한 하나님의 복이 슬프고도 아픈 비극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오더라도 분별할 수 있는 눈과 지혜로 맞이하길 원합니다. 절박할 때의 참호신앙이 아닌 일상의 깊은 교제로 하나님 앞에 서는 우리의 계절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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