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1.10.10 움오름 주일 설교 -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요나 1장)

최종 수정일: 10월 10일




요나서 1장

1장

1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2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3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4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5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6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7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8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9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10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11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12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13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14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15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16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17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설교문


1. 요나서의 이중성


<요나서>는 ‘요나’라는 선지자와 관련한 구약성서입니다. 분량이 4장, 그것도 모두 합쳐서 겨우 48절 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성경 속 인물에 비해 매우 유명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요나’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큰물고기’입니다. 성경엔 ‘큰물고기’가 어떤 종인지 밝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당연히 ‘고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는 바다 생물 중에 가장 큰 종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처럼 잘 알려진 선지자요, 선지서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중요하게 그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요나서가 전해 주고자 하는 메시지보다도 요나서의 역사성과 현실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설화이며, 허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들 생각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3일을 살 수 있어?’ ‘요나서는 일종의 비유이지, 실제 일어난 일은 아니지 않아?’

다시 말해, 요나서를 물고기 뱃 속에서 살아남은 남자에 관한 고대 신화의 일종으로 여깁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요나서는 이런 이중성을 가집니다. 유명하면서도 잘 알지 못합니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잘 모릅니다. 그러기에 이번에 요나서를 함께 나눔으로써 이런 이중성을 통합할 뿐 아니라, 현실성과 역사성이라는 것을 넘어 요나서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2. 요나의 실재성


사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요나의 역사성과 실제에 대해서는 이 2가지만 보면 납득이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하실 때 요나가 3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살아난 것을 인용하셨다는 겁니다(마 12:40). 또 다른 하나는 이어진 예수님의 말씀에 드러납니다. 마 12:41입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만약 요나라는 인물이 실재하지 않았고, 그의 선포를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한 일이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회개의 모범사례로 니느웨를 말씀하셨을리가 없습니다. 나아가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과 비교하여 내려지는 회개하지 않음에 대한 모든 심판은 부당한 것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고로 예수님께서 당신이 선포하시는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던 당시 사람들을 향해 선지자 요나와 니느웨 사람들의 이야기를 비교 예로 드셨다는 것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요나와 요나서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역사 중 어느 시대의 선지자였을까요? 열왕기하 14:25에 의하면, 요나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진 뒤 쇠약했던 북이스라엘이 다윗시대처럼 전성기를 누렸던 BC 780-760년경에 활동했습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가 아모스와 호세아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 2세였습니다.


그때 고대 근동지역의 신흥강자로 부상하고 있던 것이 앗수르(앗시리아)였습니다. 비록 여로보암 2세 당시엔 제국이 혼란을 겪으며 다소 주춤한 상태였으나 그후 40년 뒤인 BC 722년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잠정적 위험국가였습니다. 바로 그 수도가 티그리스강 상류 동쪽 연안에 위치한 니느웨였는데, 하나님께서 요나를 가라고 명하신 곳입니다.




3.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요나서는 북이스라엘의 가장 전성기를 살아가던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말씀을 하나님의 직접화법으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나서 1:2입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신흥제국 앗수르의 포악함과 잔인함으로 인한 부르짖음이 당신께 상달될 정도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요나에게 3개의 동사로 명하셨습니다. “일어나라, 가라, 외치라” 하나님의 명령은 간결했고, 선명했습니다. 니느웨의 회개촉구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곧 하나님이 심판에 의해 망하게 될 것이기에 그 전에 돌아서게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요나는 이런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동족도 물질적 부유 속에서 바닥이 보이지 않는 구렁텅이에 빠져들고 있는데, 적국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가라고 하시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요나가 두려워 한 것은 미션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었습니다. 행여나 자신의 회개사역으로 인해 앗수르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게 될까봐 그것이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앗수르에 어떤 구원의 기회도 주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일어나, 가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완강히 저항하며 자신의 소명에서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선지자 요나는 기존의 선지자들과는 너무나 다른 독특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대놓고 거부했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봐도 이런 류의 선지자는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대신 땅 끝으로 알려진 다시스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습니다. 당시 항해기술이 오늘날과 같지 않기에 욥바(텔아비브 해안 항구)에서 스페인까지는 근 1년이 걸리는 항해였다고 합니다. 크루즈 여행도 아닌 목선이었지만, 비용도 만만찮았고, 1년 동안 좁은 배에서 생활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은 명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비싼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다시스로 가고자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나서 1:3은 그 이유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요나는 자신이 살던 이스라엘을 떠나면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신관이었으니, 일반 사람들이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겁니다.

일찌기 다윗은 시편 139:7-10을 통해 하나님의 편재성(omnipresence)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편재성이란? 공간과 연관된 하나님의 불변성을 뜻합니다. 한 마디로 모든 공간과 장소의 제한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현존입니다. 물론 어떤 물체가 한 공간을 점거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어떤 장소에 계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어느 한 공간과 장소에 매이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깨달았던 솔로몬도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포용할 수 없음(왕상8:27)을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편재성을 알고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곳에 거하더라도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와 실재 속에 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 편재성은 결국 어느 곳에 있든지간에 그리스도인 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설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나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전하는 선지자였음에도 이런 하나님의 편재성을 알지도 못했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살고 있던 땅을 떠나기만 하면,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편재성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는 요나와 달리 내가 머무는 어느 곳에서나 실재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그 하나님 앞에서 나의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4.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달아나는 요나를 하나님은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사도바울이 탔던 배가 만났던 유라굴로같은 폭풍을 일으키셨습니다. 그 폭풍에 요나가 탄 배가 난파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모두들 살기 위해 난리였습니다. 근데, 참 천하태평하게도 요나는 배 밑 선실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사실 도망가는 사람이 맘이 조리고 불안해서 잠이 오겠습니까? 더군다나 큰 훼리를 타고 가더라도 배멀미가 나서 힘든데, 그에 비하면 작은 목선에서 폭풍우를 만났는데 어떻게 잠이 오겠습니까? 근데도 그는 잠이 들었습니다. 그것도 깊이.

폭풍을 잠재우기 위해 사공들이 자기들이 믿는 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선적했던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며 어떻게든 살아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갖은 방법을 다 해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선장이 배 밑까지 찾아와 자고 있던 요나를 깨우며 말했습니다. 요나서 1:6입니다.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사실 이 말은 좀 챙피한 말입니다. 한 공동체의 위기를 초래한 사람이 나 몰라라하며 자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살아보려고, 같이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데, 정작 하나님을 믿는다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습니다. 근데, 이것은 요나 때의 일만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시대의 일이지 않을까요? 오늘날도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위기의 원인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나 몰라라 하며 깊은 잠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비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든 국가를, 사회를 살려보려고 그들의 신에게 기도하는데도 정작 그리스도인인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조차 잊고 살지 않습니까?

제 은사께서 독일에서 유학생활하실 때 겪으셨던 한 독일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홀로 사셨던 아주머니의 주방엔 수많은 포스트잇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날 그날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던 전쟁과 분쟁과 질병과 아픔에 대한 뉴스들이었습니다. 아주머니는 라디오나 신문에서 소식을 접하는 대로 스크랩을 하거나 종이에 적어 주방 곳곳에 붙이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문화만 남아있다고 우리가 얕잡아 보던 독일의 경건한 기독교인들의 일상이었습니다.

지난 한 주 우리는 어떠했습니까? 세상의 환난과 사회의 아픈 뉴스들을 들으며 얼마나 기도하셨습니까? 얼마나 세상을 향해 슬퍼하며 눈물로 아뢰셨습니까? 혹이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는 요나를 향한 외침이 우리를 향한 책망같이 다가오지는 않습니까?



5. 당신은 누구요?


이 방법, 저 방법을 다 써봐도 폭풍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선원들은 무언가 희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분명 누군가가 신을 노엽게 해서 벌어진 일이라면 그 자를 찾아 신의 노여움을 달래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에 그들은 제비를 뽑아 원인자를 색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제비에 뽑혔습니다.

선원들이 요나에게 연이은 질문을 쏟아 내었습니다. 요나서 1:8입니다.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사람들의 이 말은 요나의 정체를 묻는 질문입니다. “도대체 당신 정체가 뭐요? 당신은 누구요?”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소명을 거부한 채 도망가던 선지자는 할 수 없이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나서 1:9-10입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한편으로는 정직한 자기고백인 것 같지만, 요나는 자기기만을 하든지, 자기신앙에 대해 무지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께서 바다와 육지를 모두 지으신 하나님임을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땅을 떠나 바다로 가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길이라고 여겼단 말입니까? 또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선지자가 어떻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까? 경외란? 말 그대로 공경하면서 두려워 하는 겁니다. 근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어떻게 불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논리적 모순입니다. 철저한 자기기만이요, 착각입니다.

요나를 향한 선원들의 질문과 요나의 답변을 보면 우리의 정체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당신 누구요?”라고 묻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누구라고,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SNS로 연결되어 있는 한 의사(일산병원 건강증진센터소장 이상현)의 글이 제 맘에 무거운 돌로 눌러 왔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당신의 말이 궁금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행위도 궁금하지 않습니다. 단지 당신의 습관이 궁금합니다. 말과 행위는 다를 수 있지요. 그 행위는 그저 어쩌다 한 번 한 것일 수도 있고요.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나는 당신의 습관이 궁금합니다. 반복적으로 하는 행위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반복적인 행동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습관이다.’

-아리스토텔레스

결국에는 그 습관이 지금의 그를 만들지요. 그가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이 그가 누구인지를 설명하지요. 그 많은 습관 중 무엇을 봐야 하냐고 물으신다면, 하루 중 가장 먼저 하는 걸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말하겠어요. 그의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하루의 처음을 열면서 글을 쓰고 있다면 그는 작가이고, 운동하고 있다면 운동선수이지요. 하루의 시작을 명상으로 시작한다면 명상가이고, 기도로 시작한다면 종교인일 테고. 그의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하루의 시작에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이 직업란에 작가라 쓰더라도 그는 작가가 아니고, 하루의 시작을 기도로 시작하지 않는다면 그는 직업만 종교인이겠지요.

그런데 나는 무엇을 하루를 열면서 하고 있을까. 나는 무엇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을까. 당신은요?



6. “요것이 나다!”


정체를 밝히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던 일을 듣던 사람들이 요나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어쩌자고 그렇게 했느냐?”(욘 1:10) 이교도들이 보기에도 요나의 행위는 납득이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가끔은 다른 사람들의 말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 것 같아 깜짝 놀라신 적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아마 요나도 자신을 둘러 싼 사람들의 물음 속에서 그걸 느꼈을 겁니다. 그래서 더욱 거세지는 풍랑 앞에서 어떻게 해야 저 바다가 잔잔해지겠는지를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요나서 1:12입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놀라운 반전입니다. 요나에게 이런 면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 배에 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라고 합니다. 자신으로 인한 위험과 피해에 대해 책임지겠다는 말입니다. 근데,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그게 최선입니까?”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까?”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요나가 그 자리에서 엎드려 불순종했던 자신의 행위를 고백하며 회개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중간 기착지에서 내려 니느웨로 가겠다며 하나님께 아뢰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 어쩌면 이것이 보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인 다운 모습 아닐까요? 근데,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이것은 한편으론 책임을 지는 것 같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죽을지언정 니느웨는 가지 않겠다는 여전한 불순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요나의 반응을 예견하셨던 하나님은 미리 준비한 큰 물고기로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여기까지가 요나서 1장의 내용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요나의 모습을 보시며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가끔 제가 농담삼아 드렸던 말씀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요나’는 이런 뜻입니다. “요것이 나다!” … 요나의 모습 속엔 우리가 보입니다. 그의 행위는 우리와 별 다르지 않습니다. 선지자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거역하던 그는 우리의 불순종을 보여줍니다. 한편으로는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지는 것 같으면서도 끝내 회개하지 않던 그는 우리의 고집스런 모습의 전형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요나서와 함께 하는 2021년 10월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바르게 알고, 올바르게 세워가는 은혜의 계절되기를 기원드립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요나를 통해 오늘의 우리를 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바쁜 일상을 살며 우리는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돌아봅니다. “일어나, 가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순종하고, 반응하고 있는지요? 우리의 정체는 말이 아니라, 반복되는 우리의 행위에 있음을 인정하며 우리의 습관을 돌아봅니다. 불순종을 반복하는 우리의 습관이 우리가 어떤 그리스도인인지를 말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며 자기 기만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한 해의 애씀과 수고가 열매로 거둬지는 이 가을, 우리 신앙의 들녘은 무엇을 거둘 수 있을까요? 행여 휑한 빈들이라면, 행여 깜깜한 물고기 뱃속이라면 이제 부터라도 기본부터 새로이 연습해 가고, 기초부터 쌓아가는 용기와 믿음을 가지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회 9회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