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1.10.03 움오름 주일 설교 - "이야기, 사람, 시 2"(삼하 23장~24장)




삼하 21장~22장

23장

1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5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6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7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살리리로다 하니라8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지휘관의 두목이라 그가 단번에 팔백 명을 쳐죽였더라9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다윗과 함께 한 세 용사중의 한 사람이라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거기에 모이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간지라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고10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11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기가 올라 거기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되12그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13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14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15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16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17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18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이니 그는 그 세 사람의 우두머리라 그가 그의 창을 들어 삼백 명을 죽이고 세 사람 중에 이름을 얻었으니19그는 세 사람 중에 가장 존귀한 자가 아니냐 그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그러나 첫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20또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이니 그는 용맹스런 일을 행한 자라 일찍이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또 눈이 올 때에 구덩이에 내려가서 사자 한 마리를 쳐죽였으며21또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의 손에 창이 있어도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그를 죽였더라22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행하였으므로 세 용사 중에 이름을 얻고23삼십 명보다 존귀하나 그러나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다윗이 그를 세워 시위대 대장을 삼았더라24요압의 아우 아사헬은 삼십 명 중의 하나요 또 베들레헴 도도의 아들 엘하난과25하롯 사람 삼훗과 하롯 사람 엘리가와26발디 사람 헬레스와 드고아 사람 익게스의 아들 이라와27아나돗 사람 아비에셀과 후사 사람 므분내와28아호아 사람 살몬과 느도바 사람 마하래와29느도바 사람 바아나의 아들 헬렙과 베냐민 자손에 속한 기브아 사람 리배의 아들 잇대와30비라돈 사람 브나야와 가아스 시냇가에 사는 힛대와31아르바 사람 아비알본과 바르훔 사람 아스마웻과32사알본 사람 엘리아바와 야센의 아들 요나단과33하랄 사람 삼마와 아랄 사람 사랄의 아들 아히암과34마아가 사람의 손자 아하스배의 아들 엘리벨렛과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과35갈멜 사람 헤스래와 아랍 사람 바아래와36소바 사람 나단의 아들 이갈과 갓 사람 바니와37암몬 사람 셀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무기를 잡은 자 브에롯 사람 나하래와38이델 사람 이라와 이델 사람 가렙과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24장

1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2이에 왕이 그 곁에 있는 군사령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이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백성의 수를 내게 보고하라 하니3요압이 왕께 아뢰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4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 사령관들을 재촉한지라 요압과 사령관들이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 앞에서 물러나5요단을 건너 갓 골짜기 가운데 성읍 아로엘 오른쪽 곧 야셀 맞은쪽에 이르러 장막을 치고6길르앗에 이르고 닷딤홋시 땅에 이르고 또 다냐안에 이르러서는 시돈으로 돌아7두로 견고한 성에 이르고 히위 사람과 가나안 사람의 모든 성읍에 이르고 유다 남쪽으로 나와 브엘세바에 이르니라8그들 무리가 국내를 두루 돌아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9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10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11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이르시되12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를 위하여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13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아뢰어 이르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은 왕이 왕의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은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무엇을 대답하게 하소서 하는지라14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15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16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17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18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아뢰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소서 하매19다윗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20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의 부하들이 자기를 향하여 건너옴을 보고 나가서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21이르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하니 다윗이 이르되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라 하는지라22아라우나가 다윗에게 아뢰되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 하는 도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23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아뢰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24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25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설교문


1. 지난주일 설교 보충 설명


오늘 본문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지난주일 설교 중 ‘사울이 기브온 거민을 집단학살한 이유’에 대해 잠시 보충설명드리려 합니다.

사울이 기브온을 죽인 이유는 ‘그들이 다윗에게 우호적이었던 까닭’이라고 지난주일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 설교를 듣거나 읽었던 분들은 그게 성경 어디에 나오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셨을 수 있습니다. 대답부터 말씀드리면, 우선 직접적으로 그랬기 때문에 죽였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근거로 그 이유 때문에 사울이 기브온을 학살했다고 말씀드렸던 걸까요? 사무엘하 21:2을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

이 내용을 간단히 풀어 드리겠습니다. 기브온은 가나안의 원주민이었던 일곱족속 중의 하나였는데, 여호수아 정복 당시 조약을 맺음으로써 살아 남았습니다. 그 계약 때문에 건드리면 안되었는데 사울이 그들을 학살했습니다. 좀 전에 읽었던 구절을 보면, 그 이유가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한 열심’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근데, 그 열심은 어떤 열심입니까? 대부분의 성서학자들과 주석가들은 그것을 ‘순수 유대주의’, 또는 ‘이스라엘 순혈주의’라고 설명합니다. 비유하자면, 히틀러가 우생학에 의거해 유대인들을 집단학살했듯이, 사울이 유대지역 내의 이방인들을 ‘인종청소’했다고 설명합니다.

근데, 저는 이러한 설명이 3가지 때문에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사무엘서 전체를 보더라도 사울이 유대 순혈주의를 고수했다는 부분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다는 거입니다. 다른 하나는 당시 이스라엘 전역에 기브온 거민 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이 함께 섞여 살았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블레셋 가드사람 ‘오벧에돔’ 집안도 그렇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부스 사람 ‘아리우나’집안도 그러합니다. 이 밖에도 다윗의 신하들 속에도 헷 족속(힛타이트) 우리아를 비롯해 블레셋 가드사람 잇대 등이 주요직책을 맡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유대순혈주의를 고수했다면 굳이 기브온 사람들만 죽일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 인종청소를 했어야 할 정도로 이미 유대사회는 다민족, 다문화 사회였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왜 굳이 기브온 거민을 꼭 집어서 집단학살 했을까요? 저는 앞서 읽었던 사무엘하 21:2의 말씀 중에 이 부분에서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 구절의 원문을 재번역해 보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에 질투해서 기브온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우리말 성경에 ‘열심’으로 번역된 단어의 원래 뜻은 ‘질투, 시기’라는 뜻을 지녔을 뿐 아니라, 원문에는 ‘위하여’라는 보조동사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에 질투해서 기브온을 죽이고자 하였더라.’는 번역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에 왜, 무엇 때문에 질투했을까요? 사무엘서를 보면, 사울이 질투한 대상은 단 한명 밖에 없습니다. 다윗입니다. 그가 자신의 왕위를 뺏을 자라는 인식 때문에 왕으로 재위하는 동안 대부분의 에너지를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데 쏟았습니다.

일례로 다윗에게 음식을 제공했다는 이유만으로 놉의 제사장 85명을 집단학살할 정도로 그는 다윗을 시기했고, 질투했습니다. 그러니 골리앗을 이겼던 다윗을 그리워하는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이 못내 못마땅했던 겁니다. 그런 가운데 유다지파와 경계선을 맞대고 살았던(수 9:17) 기브온이 유다지파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눈에 가시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놉의 제사장들을 학살했던 것처럼 기브온을 본보기로 처단하여 사람들을 단속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비록 여호수아와 조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브온 거민을 학살했습니다.



2. 다윗의 마지막 말


지난 주일 설교를 읽은 외부의 분이 질문해 오셨길래 대답했던 부분을 움오름가족님들께도 설명드렸습니다. 바라기는 우리교회 분들도 설교 후 질문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본문의 시작인 사무엘하 23:1의 앞부분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어느 누가 했든지간에 ‘마지막 말’은 중요합니다. 마지막 말에는 한 사람의 생이 걸어 온 무게가 실려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유로 심지어 죄수라 하더라도 ‘최후진술’의 기회를 주고, 그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형 집행을 합니다. 근데, 오늘 다윗의 마지막 말은 말이라기 보다는 한편의 시 같습니다. 지난 주일 사무엘하 21장 - 24장의 구조를 설명드릴 때 언급드렸던 것처럼 이것은 ‘이야기, 사람, 시’라고 하는 삼중구조를 구성하는 시편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시, 또는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연극에서 조명이 꺼지고, 막이 닫히기 전 마지막으로 부르는 그의 노래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무엘하 23:1-7에 기록된 다윗의 마지막 말, 그의 노래는 앞선 22장의 노래와는 차이와 구분이 있습니다. 22장이 다윗 통치 초기의 노래인 반면, 23장의 노래는 그의 인생 마지막을 앞둔 것입니다. 22장의 시가 지난날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감사인데 반해, 23장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대망과 예언이 들어 있습니다. 23장의 노래를 시작하며 다윗은 자신을 ‘이새의 아들 다윗’이라고 지칭했습니다. 성이 없이 이름으로 불리던 사회였기에 아버지의 이름을 앞에 넣거나 출신지를 넣어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통용된 사회였기에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를 들어 ‘에이브라함 링컨’이라고 하지 않고, ‘링컨’이라고 하면, 그 링컨이 미국의 16대 대통령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듯이, 성경 속 인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다윗은 굳이 ‘이새의 아들 다윗’이라든가, ‘베들레헴 출신 다윗’이라고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일국의 왕이 자신을 그렇게 설명하듯이 부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안에서 다윗을 일컬을 때 ‘이새의 아들 다윗’이라는 호칭을 썼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사울입니다. 그는 다윗을 ‘이새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비하했고, 멸시했습니다. 다윗은 현재 그 표현을 쓰며 하나님 앞에 노래합니다. 비천하게 취급받던 존재, 아버지에게 조차 인정받지 못하던 8형제 중의 막내를 들어 사용하신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나아갔던 겁니다.

이외에도 다윗은 자신을 노래 속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 자기 정체성을 일컫는 이 모든 말에는 하나의 공통적인 요소가 바탕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과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잘 나서 왕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높여서 왕으로 삼아주신 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자신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는 그 하나님께 자신의 맘을 담아 노래합니다. 이런 뜻이 다윗이 스스로를 지칭한 정체성 속에 내포해 있습니다.

23장 2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해 이 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3절 이하를 보면, 그 내용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다스리는 사람은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없는 아침 같다고 말합니다(4절). 다윗이 맘 속으로 그리고 있는 평안한 삶, 평화로운 삶의 모습입니다. 이 복을 누리며 공평과 정의로 통치하는 이는 ‘비 내린 후의 광선과 움이 돋는 새 풀’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그와 함께 하는 이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존재입니다. 이런 지도자를 사람들이 존경하고 기뻐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을 비롯해 지난 역사, 아니 오늘날 역사 속에서도 일반적으로 통치자란 어떤 모습입니까? 억압자입니다. 착취자입니다. 연일 언론을 도배하고 있는 제 2판교라고 하는 대장동 개발건에 개입된 사람들의 면면을 보십시오. 하나같이 법과 언론과 돈을 갖고 지도자로 군림하던 자들 아닙니까? 이런 군상들이 특별한 소수입니까? 아닙니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모습들입니다. 겉으론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고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일확천금을 벌 수 있는가를 찾고, 설계하며 먹잇감을 찾아 다니던 자들입니다. 수십년을, 많게는 조상 대대로 그 땅에 살던 원주민들을 푼돈을 쥐어 주고 내 쫓은 뒤 천문학적인 숫자로 돈놀음하던 자들입니다. 이런 속에 무슨 공평이 있고, 정의가 있겠습니까?

다윗은 이런 자들을 5절에서 ‘사악한 자’라고 하며 ‘가시나무’처럼 아무 데도 쓸모없어 빠른 시일에 불살라질 것을 이야기합니다. 수백만원, 수천만원 투자해서 수백억, 수천억을 긁어 모아 돈 잔치하던 자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합니다. 다윗은 자신과 자신의 집안은 이런 사악한 시류를 좇아 살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는 5절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언급하며, 그 언약 안에서 살아갈 것을 천명합니다.

보통은 사람과 사람이 함께 무언가를 하려면 ‘계약’을 맺습니다. 서로 주고, 받고, 나눌 부분을 정해 놓습니다. 이해충돌이나 이익충돌이 있을 때에 문제해결을 위해 경계선을 그어 놓습니다. 그 선 안에서 ‘오징어 게임’을 하든, 땅 따먹기를 하든 하라는 겁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계약이 아닌 ‘언약’으로 사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 삶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고, 지속하시고, 보증해 주시는 삶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계약적인 관계가 주관한 삶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시작했고, 보증된 삶이었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의 삶은 믿음 밖의 눈으로 보면, 자유가 구속 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일이 하나님 앞에 물으며 허락받는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한자유를 꿈꾸는 세대에겐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줄을 끊은 연이 무한 자유로울 것 같지만, 머지않은 시간에 땅에 추락할 수 밖에 없듯이, 인간의 자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법과 율례와 인도하심이라는 줄이 곧 우리를 온전케 합니다. 우리를 진정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다윗이 말하는 진정한 생명의 길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의 바탕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어떤 나라와 지도자이든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않으면 그 길은 곧 패망의 길입니다. 이것은 150편의 시편을 여는 첫 장인 시편 1편의 결론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편 1:6입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3. 다윗의 사람들


사무엘하 23:8 이하엔 다윗과 왕국을 위해 충성을 다한 다윗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8절 - 12절엔 용사들 중에 가장 뛰어났던 첫 삼대천황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13절 - 39절엔 두번째 삼대천황과 용사들을 소개합니다. 이 용사들의 명단을 보며 저는 다음의 3가지에 주목했습니다.

먼저는 13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두번째 삼대용사들의 무용담입니다.

: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블레셋 진영 하에 있던 베들레헴으로 들어가 우물 물을 길어 왔습니다. 그들은 향수에 젖은 다윗이 그냥 내뱉은 말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위험한 적진으로 잠입해 들어갔습니다. 생명을 걸고 다윗 고향 우물을 구해 왔습니다. 이들의 헌신과 충성을 보며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았고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용사들의 핏값이요, 희생예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 물을 여호와 앞에 드렸다는 것은 회개와 희생의 제사를 의미합니다. 자신의 무분별한 한 마디가 누군가의 생명을 뺏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지도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하급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까? 그 피의 물을 받아 마시며 개인적 욕망을 채우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우리의 한 마디로 인해 혹 누군가의 생명이 상하지 않도록 무게를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두번째는 23장 마지막 절(39절)에 기록되어 있는 용사의 이름입니다.

: 다윗은 자신과 함께 했던 용감하고 충성되었던 용사의 이름의 마지막에 ‘헷 사람 우리아’를 기록케 했습니다. 여기엔 2가지의 의미가 내포해 있습니다. 하나는 다윗에게 충성을 다하다 희생된 우리아를 기록케 함으로써 우리아의 명예를 회복케 해 줌과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잊지 않는 행위입니다. 다른 하나는 다윗의 과거 행적을 고상하게 만들거나 도덕적인 인물로 둔갑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늘 ‘헷 사람 우리아’라는 이름을 기억하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동일한 실수와 악행이 반복되는 세상 속에서도 두번 다시 그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세번째는 다윗의 용사 명단에 빠진 이름입니다.

: 다윗 통치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용사를 한명 들라고 한다면, 단연 ‘요압’입니다. 요압을 빼고는 전장과 승리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과 더불어 왕국을 이룬 빛나는 용사들의 명단에 요압을 허락치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법과 율례의 테두리를 벗어나 불같은 성격으로 자기 권력을 구축했던 요압 없이도 다윗 왕국이 가능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의식하지 않으면 생각지도 못할 요압의 제외를 바라보며 우리의 생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기뻐하심이 아니라, 자기 욕망에 기반했다면, 우리 또한 조용히 그 명단에서 제외되지 않겠습니까? 사라진 요압의 이름을 보며, 우리 생이, 우리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는 소중한 삶이기를 기도해 봅니다.



4. 격동하시는 하나님


다윗 이야기의 마지막이 기록된 곳은 사무엘하 24장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윗이 행한 인구조사와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와 회복에 관한 내용입니다. 근데, 이 이야기는 시작부터가 쉽지 않습니다. 사무엘하 24:1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를 처리하는 하나님의 방식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는 2가지 의문을 가집니다. 첫째는 ‘왜 백성들의 죄를 벌하기 위해 다윗을 이용하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다윗을 격동하다’라는 부분입니다. ‘격동하다’를 쉽게 풀이하면, ‘부추기다, 꼬드기다’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사람이 죄를 짓도록 부추길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첫번째 의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백성과 지도자와의 관계를 따로 보시는게 아니고, 같은 범주에서 보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국가와 사회에서 흐르는 신앙적이고 도덕적인 흐름은 결코 지도자와 별개일 수가 없습니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도 희생시켰다는데, 우리가 뭐 100만 200만 땡크로 밀어버린다고 뭐 큰일이라도 나겠어요?”라고 했던 차지철의 발언은 당시 유신정권의 광적인 정신상태와 그 최후가 임박했다는 징조를 보여 주는 시금석이었습니다. 이런 지도자들이 국가의 방향을 정하던 시기에 국가정신이 올바로 간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그 말을 했던 사람이 서울 장안에 유명한 교회의 독실한 교인이었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그런 신자를 길러낸 교회의 정신 또한 온전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런 인과성이 있기에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진노하셨던 것을 다윗을 통해 구체적인 범죄행위로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두번째 의문을 보면, 한편으로는 욥기에서 사탄을 통해 욥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비춰집니다. 그래서인지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역대상 21:1은 이를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보며, 우리는 하나님이 격동하셨든지, 사탄이 충동했든지 간에 어떻게 인간을 두고 이렇게 범죄 가운데로 내몰 수 있는지 반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반감이 이해는 되지만, 하나님은 욥기 38:2을 통해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죄를 짓도록 부추기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우리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 설명할 수 없어 난감하기도 합니다. 이런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와 이해의 범위를 넘어 섭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일 뿐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신데, 그 종착역이 고통이나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오늘도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잠잠히 하나님의 구원과 인도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5. 역병과 아라우나


인구조사가 왜 죄가 됩니까? 출애굽 후에 보면 하나님께서 2번이나 인구계수하도록 하신 내용이 민수기에 기록도 되어 있는데 이게 왜 죄가 됩니까? 이것은 형식과 행위 자체가 아니라, 의도와 내용의 문제라고 보시면 됩니다. 같은 행위라고 하더라도 동기가 다르면 이건 별개의 문제가 됩니다. 이를 깨달았던 다윗은 일찌기 시편 20:7을 통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국가를 경영하겠다고 다짐했던 다윗이 초심을 잃었습니다. 군대를 믿고 세금을 의지해서 운영하겠다는 그의 의도가 인구조사로 드러났습니다. 인구조사로 징집대상자를 파악하고, 세금을 징수할 근거를 마련하겠다는 것은 여호와 신앙으로 서야 할 다윗정부가 관료주의로 변질되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를 벌하시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흥미로운 것은 요압이 다윗을 만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인구조사를 강행하려는 다윗에게 이렇게 간했습니다. 사무엘하 24:3입니다.

요압이 왕께 아뢰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평소 신앙과는 관계없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든지 지금보다 100배나 더하게 하실 수도 있는데, 왜 신앙으로 살지 않고, 인간적인 잔뇌를 굴려서 살려고 합니까 라고 간합니다. 이 정도로 이야기를 들었으면 정신이 번쩍 들만도 한데도 마음이 책동된 다윗은 범죄의 길을 재촉했고, 그 결과 7만명이 역병에 죽기에 이르렀습니다.

죽어가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며, 다윗이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슬퍼하며 간곡히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생명책 속에 자신의 이름을 지우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려 달라고 하던 모세의 기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무엘하 24:17입니다.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인구조사처럼 다윗의 삶에는 크고 작은 실수와 잘못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하나님을 뜻을 다 이룬 사람’(행 13:22)이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을 생각하고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무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민감함으로써 얼른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아설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성정을 갖고 어찌 하나의 실수도 없이 하얀백지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그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실수할 때, 잘못할 때 우리의 눈물을 지우개 삼아 하나님 앞에서 지우면서 우리 삶을 정돈해 갈 수는 있습니다.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이런 다윗을 보시며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 앞에서 뜻을 돌이키셨던 것처럼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3일 동안 내리기로 하셨던 전염병을 그날 하루 만에 거두기로 하셨습니다(삼하 24:15 이하). 그리고 선지자 갓을 통해 다윗에게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을 찾아 하나님께 제단을 쌓도록 명하셨습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 위치한 예루살렘은 해발 780m의 산지였습니다. 740m에 달하는 도봉산 보다 조금 더 높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근데 그곳의 주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그곳에 살았던 원주민인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였습니다. 조금 이해되지는 않는게 그 땅은 다윗이 점령해서 수도로 삼았던 곳입니다. 이름도 여부스에서 예루살렘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땅 소유자는 여전히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였습니다. 성은 다윗이 점령했지만, 개별재산은 그대로 인정해 주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뿐만 아니라, 인종분리정책을 쓰지 않고 유대사회 속에 그대로 살고 있었던 것을 보면, 여호와 신앙으로 돌아선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의 터가 아닌 신실한 이방인의 타작마당에서 징계하던 천사의 칼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하셨습니다. 이런 영적장면을 숨어서 목격했던 아라우나는 자신의 토지를 기꺼이 그것도 무상으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시세대로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매입해서 하나님 앞에 속죄의 번제와 화목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사무엘서의 마지막 구절은 이 예배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던 재앙이 그쳤다’고 진술함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6. 성전이 되다


인구조사로 인한 전염병 사건은 극적으로 해결되면서도 매우 담백한 진술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것이 사무엘서의 결론부입니다. 그런데, 여기엔 세월이 흐른 뒤에 발견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라우나가 드리고, 다윗이 매입했던 그 땅에 훗날 솔로몬 때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고, 재앙이 그쳤던 예배의 자리가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성소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 기억했었을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한 후 드린 기도엔 그 은혜와 속죄의 기도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대하 6:28-30입니다.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전염병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들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거나를 막론하고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과 고통을 깨닫고, 이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며 사유하시되,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의 모든 행위대로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했을 때 그 자리가 하늘과 땅을 잇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성소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다윗의 이야기는 마지막까지 비록 범죄했지만, 순종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한 사람의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사람의 순종을 씨앗 삼아 거룩한 신앙의 이야기를 이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연결됩니다. 이것이 다윗의 이야기를 마치며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우리 눈에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끝내 그것을 가장 선하고 아름답게 바꾸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이라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적인 도전을 줍니다. 그래서 현실에 좌초되지 않고 종국엔 현실 너머에 계신 분을 보며 소망을 견지토록 하십니다. 저는 이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믿음으로 2021년의 가을을 담대하게, 그리고 새로운 걸음으로 걸어가 보려 합니다. 움오름의 가족님들도 이 믿음으로 함께 걸어가지 않으시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비록 우리처럼 크고 작은 실수를 하고, 허물이 있었음에도 끝내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생을 마쳤던 다윗을 22주에 걸쳐 만나보았습니다. 그의 이야기 안에는 한나로 시작해서 사무엘, 사울, 요나단을 비롯해 다윗과 함께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엮여 있었습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기도 했지만, 어떤 이들은 대적하는 자리에 서기도 했습니다. 다윗이라는 불세출의 왕의 자녀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때와 섭리보다는 인간적인 계획과 야망으로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망가뜨린 압살롬도 보았습니다.

또한 다윗과 함께 했던 수많은 용사들의 이름과 더불어 슬픔을 품고 하나님 앞에 6개월을 호소했던 여인 리스바도 있었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그 어떤 유대인보다도 더 신앙에 단단히 섰던 오벧에돔이나 아라우나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다윗이라는 사람이 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며 민감하게 서 갔던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도 오늘 우리와 함께 하게 하신 사람들과의 씨줄과 날줄이 엮이면서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이야기임을 고백드립니다. 부디 바라기는 우리의 삶도 마지막까지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이어가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노래로 마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믿음으로 순종한 우리의 이야기가 하나님을 전을 이루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 되고, 성소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생이 마지막까지 하나님 앞에서 드려지는 향기로운 제사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회 18회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