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1.06.27 움오름 주일 설교 - "인간의 눈 vs 하나님의 눈"(삼상 16장)

7월 7일 업데이트됨








삼상 15장

16장

1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2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3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4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이르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5이르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성결하게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6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7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8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9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10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11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12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13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14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15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왕을 번뇌하게 하온즉16원하건대 우리 주께서는 당신 앞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하는지라17사울이 신하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잘 타는 사람을 구하여 내게로 데려오라 하니18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하더라19사울이 이에 전령들을 이새에게 보내어 이르되 양 치는 네 아들 다윗을 내게로 보내라 하매20이새가 떡과 한 가죽부대의 포도주와 염소 새끼를 나귀에 실리고 그의 아들 다윗을 시켜 사울에게 보내니21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무기를 드는 자로 삼고22또 사울이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원하건대 다윗을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하니라23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



설교문


1. 사무엘의 슬픔


삼상 16장의 앞부분은 ‘슬픔과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어렵사리 도입한 왕정체제가 무녀져 가는 것을 보는 사무엘의 마음은 아팠습니다. 믿었고, 괜찮게 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이 무너지고 타락해 가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이 어찌 괜찮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런 사무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울왕은 점점 신앙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물론 대다수 사람들이 보기에 왕정체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사울왕은 주변의 그 어떤 왕들보다도 잘 하고 있었습니다. 서쪽의 암몬, 동쪽 강대국 블레셋에다 남쪽의 아말렉에 이르기까지 지난 수십년 동안 사울은 그 어떤 사사들보다도 더 혁혁한 전과를 이루어 왔습니다. 그러니 사무엘의 슬픔을 알아 줄 그 어떤 이들이 사무엘 주변에 있을리 만무했습니다. 사무엘은 밤새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마치 죽은 사람을 애도하듯이 폐위 선고를 받은 사울과 이스라엘을 위해 슬퍼했습니다.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데, 실은 그때가 가장 무너져 가는 슬픈 상황이라니 말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나오던 무지한 인간의 한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미하일 천사가 세화공 시몬의 집에 온지 1년이 지난 어느 겨울날 멋진 모피 외투를 걸친 신사가 시몬의 구둣방을 찾아왔습니다.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키가 크고, 풍채도 큰 사람이었습니다. 거드름을 피우며 아주 비싼 가죽을 내놓던 그는 1년을 신어도 뜯어지지 않고 모양도 절대 변하지 않는 장화를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만약 1년 안에 장화가 뜯어지거나 모양이 변하면 미하일을 감옥에 넣겠다며 협박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미하일은 신사를 쳐다보지도 않고 마치 누가 있기라도 한 듯 신사의 뒤쪽 구석만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한참 있더니 갑자기 얼굴을 환히 밝히며 빙긋 미소를 지었습니다. 미하일은 작업대에 가죽을 펴고 반으로 접은 뒤 칼로 재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사가 건네 준 가죽으로 만든 것은 장화가 아니라, 슬리퍼였습니다.


시몬이 그 사실을 알고 앞이 캄캄해져 탄식할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장화를 만들어 달라고 한 신사를 따라왔던 하인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나와 집으로 가던 중 마차 안에서 주인이 급사했다고 합니다. 장화는 필요 없게 되었으니 죽은 사람에게 신길 슬리퍼를 빨리 만들어오라고 죽은 주인의 부인이 말했다는 겁니다.


미하일은 이미 완성해 둔 슬리퍼와 남은 가죽 뭉치를 하인에게 건넸습니다. 사람에게 무엇이 허락되지 않았는지가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날이 저물기 전에 죽을 거라는 것도 모르고 1년 뒤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전도서 7:14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장래 일을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겸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잘 나갈 때, 사람들로부터 박수 받을 때에라도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아니, 어쩌면 잘 될때에 더더욱 돌아봐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삶의 자리가 어떤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왕은 주변의 박수와 찬사에 매몰되어 정작 자신이 함몰되어 가는 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무엘은 슬프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 울지 말고 일하라


밤을 새워 애통하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책망하듯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언제까지 사울을 위해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1절). 이 말씀은 수도원에 들어온 신참 수사가 그리움에 시도 때도 없이 눈물짓고 있을 때 선배 수사가 다가가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울지 말고 일하라!(travailler sans pleurer)”. 슬픔 가운데 주저앉지 말고, 너의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때로 슬픔이 우리를 붙잡습니다. 아픔이 우리를 주저앉게 합니다. 감정을 가진 사람이니 당연합니다. 그럴 수 있는게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우리 실정이고, 실력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자리에 주저앉지 말라고 하십니다. 넘어질 수는 있지만, 엎드러져 있지 말라 하십니다. 일어나 앞으로 다시 나아가라 하십니다. 행여 아픔 가운데 있으시다면, 긴 슬픔의 자리에 묶여 계시다면 이제 일어나 멈췄던 걸음을 옮길 때입니다.


이번 주일 예배순서지 부름의 말씀을 적으며 마지막 구절이 마음에 확 다가왔습니다. 원래 이 말씀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연보를 권하는 것에 바탕해 있지만, 확장해서 보면, 오래토록 마음에 품었지만, 손으로 발로 옮기지 못하던 일들을 행하라는 말씀으로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울고 있는 우리를 향한 고린도후서 8:11의 권면입니다.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무엘은 베들레헴 이새의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두려웠습니다. 사울이 소식을 들으면 군사를 일으켜 목숨을 위협할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두렵다는 사무엘의 말에 하나님은 소를 끌고 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며 자연스레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고 비책을 알려 주셨습니다.


근데, 이 하나님의 비책이라는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습니다. 생각나십니까? … 사울이 즐겨 쓰던 방법, 이유였습니다. 사울은 아말렉과 전투에서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좋은 소와 양을 남겨 두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를 묻는 사무엘에게 ‘여호와께 제사드리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보다 앞서 사무엘이 늦게 전장에 오자 흩어지는 백성들을 규합하기 위해 자신이 제사를 직접 집례하며, 제사를 수단시했습니다.


사울이 수단시하고 이용했던 그 제사를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사울에게 의심받지 않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역설적 반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사를 이용해서 하나님을 기만했던 사울은 이제 제사를 통해 기만 당하게 되었습니다. 보이는 제사를 통해 사실 속에 숨겨진 이면적 진실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3.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사무엘이 소를 끌고 베들레헴에 나타나자 그 성읍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위대한 선지자요, 제사장이 작은 성읍에 친히 방문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혹시나 무슨 좋지 않은 메시지를 갖고 방문했을 수도 있기에 그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지만, ‘평강을 빌며 화목제를 드리기 위함’이라는 말에 안도의 숨을 쉬며 그들은 사무엘의 요청대로 이새와 그 아들들을 제사에 청했습니다.


사무엘의 등장에 떨며 두려워하던 베들레헴 장로들을 보니 사울로 인해 떨던 사무엘의 모습이 묘하게 겹쳐집니다. 아무리 대선지자라 해도, 아무리 한 성읍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유력한 장로들이라 해도 두려운 것은 두려운 것인가 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나누기 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기름 부으시기 전에 미리 그 전날 사울이 찾아올 것을 말씀해 주시며 그에게 기름부으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때는 가르쳐 주시지 않고, 그저 베들레헴 이새의 집으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왜 이렇게 번거롭게 하셨을까요? 단번에 가르쳐 주시며 저이에게 기름 부으라고 하시면 될 것을 왜 마치 스무고개 하듯이 더듬어 찾아가게 하신 걸까요?


그 이유가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 그 답은 의외로 이새의 아들 중에서 다윗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 과정을 찾아 하나님께서 왜 스무고개를 하셨는지 답을 생각해 보시겠습니다.


이새의 아들들이 제사에 등장했습니다. 첫째 아들 엘리압의 모습을 보며 사무엘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의 빼어난 외모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한 마디로 “이 사람이구나!”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사울을 대체할 왕다운 자태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이런 엘리압의 모습을 보니, 왕이 되기 전 사울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사울도 처음부터 왕처럼 보였지 않습니까?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 더 큰 키에 용모가 빼어났습니다. 하지만, 왕이 된지 얼마 있지 않아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사울의 이런 모습을 보며 아파하고, 슬퍼했던 사무엘이었는데, 다음 왕을 고르는데, 여전히 같은 기준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적어도 왕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라는 그런 기준이 있었나 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무엘을 향해 하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6:7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말은 사람의 인격과 그 영혼의 됨됨이를 보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겉만 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 보신다는 뜻입니다. 그런 불꽃같은 눈으로 하나님께서 보시니 엘리압은 멋진 외모와 달리 속과 인격은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일찌감치 엘리압을 버렸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압을 향해 “아니다!”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사무엘은 “아차!”했을 겁니다. 자신이 어느새 또 외모에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른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린 사무엘은 둘째 아비나답을 보는데 하나님은 그 역시 아니다고 하십니다. 셋째 삼마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일곱 형제를 모두 보았는데,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다”라고 하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듯 사무엘이 아들이 더 없는지를 물었습니다. 그제서야 이새는 막내가 있기는 한데 현재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의 요청에 의해 들판에서 호출되어 다윗이 나타났습니다. 양치기의 행색이 좋을리가 없었습니다. 근데 12절에 보니 “다윗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왔다”며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얼른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다윗의 나이는 겨우 15세 전후였습니다. 어른스러움과 위엄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바깥에서 양을 치느라 피부는 햇볕에 그을려 있었을텐데 얼굴빛은 붉고, 눈이 빛났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용모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합니다. 앞선 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는데, 왜 또 다시 외적 특징을 언급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보통 외모와 얼굴 생김새를 이야기할 때 두 가지면에서 말을 합니다. 하나는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외형 생김새, 외모이고, 다른 하나는 인상입니다. 마치 호롱불이 켜진 옛 한옥 창호지 문에 안에 책 읽는 사람의 모습이 비치는 것처럼 속사람의 인상이 드러난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다윗을 말씀하시며 맘에 들어하시는 것은 바로 다윗의 인상입니다. 내면이 드러난 인상을 보신 겁니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원리를 하나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시는 기준은 사람의 그것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외모와 외형적 조건을 중심으로 인물을 평가합니다. 평가한다는 것은 등급을 매기는 겁니다. 반면, 하나님은 그런 것들보다 영원한 가치인 마음을 더욱 중요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서 그것을 보셨고, 비록 그가 15세 소년에 불과했지만 미리 왕으로 선택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여호와의 신으로 감동되게 하셔 날마다 하나님과 소통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더더욱 아름다운 내면을 가진 사람으로 세워져 가게 하셨습니다.



4. 악한 영에 사로잡힌 사울


삼상 16장은 묘한 대조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13절에 기름부음을 받으면서 다윗이 여호와의 영으로 감동이 됩니다. 이어지는 14절에는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악령이 그를 괴롭힙니다. 두 사람의 상황이 반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악령을 그냥 악령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귀신을 시켜 사울을 괴롭게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해도 될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이 부분은 이렇게 보시는 게 더 합당합니다.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한 영’이라는 말은 그 악한 영마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의미의 표현일 뿐입니다. 거라사의 군대귀신이 머물던 사람에게서 나와서는 예수님께 간청을 하며 주변의 돼지에게라도 들어가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그렇다면, 사울이 여호와의 영이 떠나자 악한 영이 들어와 괴롭힘을 받았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동안 악한 영이 사울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영이 보호하셨다고 보시면 됩니다. 지켜주시던 하나님의 영이 떠나니 악한 영이 쉽게 들어와 사울을 괴롭혔던 겁니다. 요한복음 13:2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는 부분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악한 영에게 사로잡힌 사울을 지켜 보던 신하들이 해결방안이라고 찾은 것은 수금타는 사람을 구해 사울 앞에서 연주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거 무슨 말도 안되는 주술적 행위야?’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실제 이런 현장을 겪어 보면 찬송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고 강력한지를 목격합니다. 오늘날 일반학문의 영역으로 표현하자면, 음악치료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2003년 TV에서 독일인이 제작한 <낙타의 눈물>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습니다. 모래바람 몰아치는 고비사막, 나이든 할아버지는 삭정이를 주워 땔감을 모으고 할머니는 게르 안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습니다. 젊은 며느리와 그의 남편은 출산의 진통을 하고 있는 어미낙타를 돌보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어미 낙타는 밤새 진통하느라 기진맥진해 있으나 새끼는 아직 나올 기미가 없습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온 가족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어미 낙타를 달래며 거꾸로 앉은 새끼를 겨우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새끼가 젖을 먹으려면 어미 낙타는 뒷발질을 하며 새끼가 곁에 오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얼마나 난산으로 고통스러웠으면 새끼가 곁에 오는 것까지 거부할까요? 며칠이 지나도록 새끼 낙타는 젖을 먹지 못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읍내로 보내 손자의 음악선생인 마두금 연주자를 모셔 왔습니다. 선생의 손에는 몽골의 전통악기인 마두금(해금과 비슷)이 들려있었습니다. 나무 의자에 앉아 마두금 연주자가 악기를 연주하고 젊은 며느리는 달래듯이 어미 낙타의 몸을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미 낙타는 처음에는 저항하더니 거친 마음을 풀은듯 그 맑고 큰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하염없이 눈물을 떨어뜨렸습니다. 잠시 후에 새끼 낙타를 어미곁에 데리고 가서 젖을 물리니 어미 낙타가 이제야 새끼를 받아들였습니다. 드디어 새끼 낙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미젖을 먹게 되었습니다.


마두금 연주를 들으며 어미 낙타는 난산으로 인한 상처가 치유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 후에 어미 낙타의 모성애가 회복되었습니다. 우리와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도 음악에 이처럼 반응한다면,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음악엔 영적인 부분이 들어있고, 그것엔 힘이 있습니다. 찬송이 그러합니다. 이를 우리가 생각한다면, 아무 음악이나 듣고, “뭐 뉴에이지 음악이면 어때?”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바탕 위에서 쿰아트의 선언문 같은 구호가 나왔습니다.


“Good Art Makes Person Good”

​좋은 예술이 사람을 좋게, 선하게 만들어 갑니다.



5. 세 가지 포인트


사무엘상 16장을 마무리하면서 3가지를 마음에 담아 두었으면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왜 스무고개하듯이 다윗을 발견하도록 하셨습니까?

: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둘째,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고 곧 바로 왕이 되지 않았습니다.

: 다윗은 평생 3번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BC 1025년경 그의 나이 약 15세때 사무엘에게 처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BC 1010년경 그의 나이 30세때, 그러니까 처음 기름부음을 받고 15년이 지난 뒤에 비로서 헤브론에서 유다지파의 왕이 되면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BC 1003년경 그의 나이 38세에 이를 때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면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처음 기름부음을 받은지 무려 23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다윗에게 처음 기름을 붓고 왕이 되게 하시지 않고 23년이 지난 뒤에서야 왕이 되게 하셨을까요? 이에 대한 답은 오늘 우리가 마음에 담아야 할 3번째 포인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셋째,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기름부음을 받고 다윗이 한 첫째 임무는 수금을 타는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 하나님의 계시를 갖고 베들레헴에 찾아온 대선지자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여호와의 신에 감동이 된 다윗이 첫번째로 한 일은 겨우 미친 왕 옆에서 수금타는 일이었습니다. 자괴감이 들 수 있습니다. 하찮게 여겨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바램과 달리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왕의 최 지근거리에 다윗을 세우심으로 사울을 통해 어떤 것은 배우게 하셨고, 다른 어떤 것들은 반면교사 삼게 하셨습니다. 사울이 국가의 일을 처리하는 것을 통해 국무를 경험케 했습니다. 그의 무기를 든 시종이 되게 하셔서 전쟁과 전술운용에 관해 알게 하셨습니다. 또한 수많은 인재와 교제케 하셨습니다. 언뜻보면, 수금이나 타는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하찮고 작은 일 속에 왕이 되는데 꼭 필요한 영양분을 넣어 두셨습니다.


또한 이후 10년 이상을 사울왕에게 쫓겨 다니며 광야에서 동가식 서가숙하는 고단한 삶을 통해 다윗 안에 내재해 있던 독소마저도 빠져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기름부음을 받고 난 뒤부터 다윗의 인생은 더 고단해졌고, 더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시간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왕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라고 보셨습니다.


오늘도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우리 눈에는 불필요하게 보이고, 너무 오래 걸린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고, 아끼시는 하나님은 우리와는 다른 계획을 갖고 다른 관점에서 우릴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며 힘 내셨으면 합니다. 2021년의 1/2이 지난 오늘, 더더욱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 내면을 채우셨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곁에, 우리 속에 즐거이 함께 하시는 한 주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드립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보는 눈과는 다른 하나님의 눈을 생각케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때로 우리 바램대로 되지 않고, 우리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는 일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심을 믿으며 견디며 기다려 가는 우리들 되게 하옵소서. 외모를 보지 않고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을 기억하며, 오늘도 우리 내면을 잘 가꾸어가는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여호와의 영으로 우리를 감동케 하셔서 악한 영의 출입으로부터 우리를 강건하게 지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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