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1.06.20 움오름 주일 설교 - "2개의 죄와 2개의 난제"(삼상 15장)

6월 21일 업데이트됨








삼상 15장

15장

1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2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3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4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세어 보니 보병이 이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만 명이라5사울이 아말렉 성에 이르러 골짜기에 복병시키니라6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 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7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8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9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10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11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12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13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14사무엘이 이르되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라15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16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말씀하소서17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18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19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20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21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22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23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24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25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26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27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28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29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30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31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32사무엘이 이르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이르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33사무엘이 이르되 네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34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가니라35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설교문


1. 생의 반복되는 주제


왕이 된 사울의 삶은 갈수록 망가져 갔습니다. 매우 종교적으로 보였지만, 그의 행위는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전쟁에서 이기고, 대중들의 지지를 받고 싶었던 그의 마음이 우리와 다르지 않기에 그저 안쓰러울 따름이었습니다.


전환의 시기, 변혁기에 외부의 적들과 싸워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시대에도 그는 더 신앙적인 것, 영적인 것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부분에 치중함으로써 점점 더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애로 채워갔습니다. 내면은 말라갔고,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세속 왕이 되어 갔습니다.


즉위 초 사울은 동쪽, 암몬과의 싸움부터 시작해서, 서쪽, 블레셋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했습니다. 이렇게 승리하는 동안 대중은 더더욱 그에게 열광했습니다. 삼상 14:52이 밝히는 바와 같이 그는 삶을 온통 주변 적과의 싸움으로 채웠습니다.


이렇게 전쟁하다 삼상 15장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남쪽 광야에 있는 아말렉과 전투를 하게 되었습니다. 14장에 이어 별다른 설명이 없이 15장이 되니 금방 진행한 전쟁인 것 같지만, 다음 주에 살펴볼 16장에 십대의 다윗에게 사무엘이 기름을 붇는 것을 보면 적어도 2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을 통해 사울이 책망을 받고 난 뒤 시간이 20년 이상 흐른 뒤 오늘 살펴볼 15장이 시작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삼상 15:1에 보면, 긴 시간이 흐른 뒤 사울을 찾아가서 말하는 사무엘의 첫 마디는 “들으라!”는 동사 샤마으(שָׁמַע)였습니다. 사울의 삶을 추적해 가면서 반복되는 하나의 주제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사울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한데, 바로 자기 생각이 너무 강하다는 겁니다. 자기 의견, 자기 경험에 너무 의존해서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자기 식으로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말씀, 다른 사람 의견을 안 듣는다는 겁니다.


훗날 사울의 이런 삶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을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 왕위에 올랐을 때였습니다. 밤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솔로몬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이전 개역성경을 보면, 솔로몬이 “지혜로운 마음을 주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지혜로운 마음’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를 지금의 개역개정판은 원문의 뜻을 보다 정확하게 잘 번역해 ‘듣는 마음”라고 했습니다. ‘듣는 마음’, 샤마으 렙(שָׁמַע לֵב)이 곧 하나님의 지혜요, 복을 담는 그릇입니다. 이사야 55:2-3을 통해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절: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절: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하나님 앞에서 ‘듣는 마음’으로 설때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기름진 것으로 우리 삶을 즐겁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듣는 마음’으로 살때 우리 영혼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말하는 것을 배우기 까지는 2년이면 족하지만, 듣는 것을 배우기까지는 80년이 걸린다"


시편 90:10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하신 말씀에 비춰보면 듣는 것은 인생 80년 평생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때로 가장 귀를 기울여야 할 가까운 이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목소리에, 자녀가 부모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말을, 아내가 남편의 말을 경청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골이 깊어지고 문제가 쌓여갑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않고, 경청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신앙은 병들어 갑니다. 사울의 삶이 망가진 이유가 여기에 있었고, 훗날 잘 나가던 솔로몬이 타락한 이유 또한 경청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말하는 것이 지식이라면, 듣는 것은 지혜”입니다. 듣는 연습, 귀담아 경청하는 것에 우리 삶의 승리가 있음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2. 아말렉을 진멸하라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오늘 제목에 2가지 난제라고 했는데, 그 난제 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한 민족을 완전히 다 쓸어 없애라”고 명하실 수 있습니까? 매우 거북한 명령으로 들립니다. 무자비한 하나님의 모습이며, 이는 도덕적인 문제로 직결합니다.


아말렉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이외에도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이런 류의 도덕적인 난관에 맞닥뜨리는 경우들이 자주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오늘날의 도덕적 잣대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최대한 그 말씀이 기록되었던 당시의 상황 속에서 이해하도록 시도해야 합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출애굽기 17:8-16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430년 만에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향하게 하실 때 였습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 행렬의 뒷편에 처지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괴롭혔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 무척 노하셔서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출 17:14),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출 17:16)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신명기 25:17-19에 보면, 아말렉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 그 이유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 근동지역의 신 개념은 민족적이고, 지역적인 개념이 짙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말렉과의 전쟁을 단순히 민족간의 대결과 도덕적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신들의 전쟁으로 봐야 할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인간의 문화나 도덕상황과 격리되어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이 보여주듯이, 제한되고 타락한 인간의 문화와 조건 속으로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는 도덕적 잣대로 이해하려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문화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3. 사울의 2가지 죄


사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즉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남쪽 광야지대를 배경으로 유목생활을 하던 아말렉 토벌작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아말렉 본거지를 공격하기 전 군대를 매복시킴과 더불어 아말렉 지역에 거주하던 겐 사람들에게 그곳을 떠날 것을 권하는 세밀함을 보였습니다. 사울이 왜 겐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했는지는 2가지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겐 사람들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할 때 광야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모세의 장인을 비롯해 처가 사람들이 겐 족속이었다는 혈연적 사실 때문입니다.


겐 사람들이 떠나자 사울과 그의 군대는 아말렉을 공격했고, 그들을 애굽의 동쪽 접경지까지 몰아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말렉을 거의 쓸어버렸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주 성공적인 전투였고, 혁혁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8절-9절을 보니 2가지를 남겨 두었습니다. 하나는 아말렉 왕 아각을 생포해 살려두었고, 다른 하나는 가장 좋은 양과 소를 남겨 두었습니다. 하찮은 것에 대해서는 진멸하라는 명령을 준행하면서도 자신이 보기에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열외로 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제외 시켰습니다.


이처럼 사울은 아예 대놓고 하나님을 거역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단지 본인이 판단하기에 예외라고 생각한 것, 그 몇 가지만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뜻대로 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조차도 나름 경건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그것을 ‘여호와께 제사드리기 위함’이다고 밝혔습니다. 나아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가 바로 백성들이 원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이처럼 매우 종교적이었고, 민심을 살피는 어진 왕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구차한 변명을 하는 사울을 향해 “가만히 계시오!”(16절)라고 꾸짖으며, 그의 근본적인 2가지 죄에 대해 밝혔습니다. 삼상 15:22-23입니다.


22절: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울의 첫번째 죄는 청종하지 않는 ‘거역’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불순종’이었습니다. 두번째 죄는 ‘완고함’이었습니다. 완고함이란? 마음이 너무 딱딱하고 고집스러워서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을 받아들일 여유나 공간이 조금도 없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길가 밭이나 돌 밭과 같은 마음 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저히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랄 수 있는 환경이 아닙니다. 생명이 일어나고, 재생산적인 구조가 될 수 없는 화석화된 마음입니다.


겔 36장은 성령님께서 오셔서 하시는 주요한 일이 바로 우리 속에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굳은 마음이 뒤집어 지고, 깨드려 져서 부드러워 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고, 그것으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겔 36:26-27입니다.


26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절: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앞서 사울은 왕이 되기 전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예언하는 등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 잡힐 때, 그분의 통치를 받을 때 자신이 어떤 존재로 변할 수 있는지, 살아갈 수 있는지를 이미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왕이 된 이후 거역하고, 완고한 마음으로 인해 자기 속에 다른 어떤 것도 용납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마저 거절한 불순종의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 악한 일을 구분하며, 악한 일을 선택하지 않으려 몸부림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한 일을 선택했다고 악하게 되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청종치 않을 때, 너무 강한 내 생각으로 버틸 때 우리 또한 사울의 길을 밟을 수 있다는 엄혹한 사실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4. 하나님의 후회


갈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완고해져 가는 사울을 보며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습니다(11절, 35절). 더이상 사울에게 기대하지 않고, 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앞서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도덕적인 난제를 만났는데, 여기 ‘후회하시는 하나님, 사울을 버리시는 하나님’에서는 2번째 난제를 만납니다.


2번째 난제는 다름아닌 신학적인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후회하신다는 것은 지난 선택이나 실수에 대해 뉘우친다는 의미 아닙니까? 어떻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후회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삼상 15:29에 보면, 하나님은 결코 변개( 마음을 바꿈)하지 않으신다고 하면서 어떻게 당신이 세운 사람을 버리실 수 있단 말입니까?


민 23:19은 하나님의 후회없으심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이런 면에서 볼 때, 사무엘서가 이야기한 하나님의 후회는 이해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사울을 버리시는 모습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결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는 말씀은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비통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이 계산착오나 판단력부족으로 실수를 하셔서 그 일을 후회하셨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신 후 후회하실 정도로 지혜나 지식이 부족한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후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근심과 걱정의 다른 표현입니다. 청종하지 않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유감스럽고 서글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사람의 언어, 인간적 표현으로 실감나게 나타낸 것이 바로 ‘하나님의 후회’입니다.


이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C.S. Lewis가 이야기 했듯이, “우리 보기에 선하다고 해서 하나님 보시기에도 모두 좋은 것은 아닙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어 인간의 역사 속으로 오실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도 용납하기 어려운 죄인인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돌이키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 사랑으로 인한 하나님의 돌이키심 때문에 주어진 구원입니다. 이를 안다면, 하나님의 후회 앞에서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라는 항의보다는 그저 감사드릴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5. 또 다른 사울


창세기 6장엔, 사람 지은 것을 한탄하시며, 홍수로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이 나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한 사람, 노아는 그 심판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창세기 6:8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וְנֹ֕חַ מָ֥צָא חֵ֖ן בְּעֵינֵ֥י יְהוָֽה ׃ פ)


이 구절을 보다 원문에 충실하게 직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서 호의를 발견했다”


심판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눈 속을 보니 여전히 사람을 향한 사랑, 안타까움, 애절함이 있었습니다. 그걸 누가 보았느냐? 노아가 보았습니다. 유일하게! … 어떻게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는데, 노아가 그 호의를 보았을까요? … 지금 옆에 계신 분을 잠깐 마주 보십시오. 뭐가 보이십니까? 쑥스러우시겠지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시면 옆에 계신 분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호의를 보았다는 것은 노아가 그만큼 하나님과 가까이 지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동행’이라고 합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고, 가까이서 지켜보았기에 겉으로는 심판을 말씀하시지만, 방주를 짓는 120년 동안 심판을 늦추시면서까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고, 하나님께 은혜를 입을 수 있었습니다.


왜 노아의 방주엔 노아의 가족 8명 만이 탈 수 밖에 없었습니까? 120년 동안 방주를 지으면서 기다렸는데도 완고한 마음을 버리고 들어오는 사람이 노아 가족외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당신이 지으신 사람을 물로 심판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묻기 보다는 120년 동안이나 끝까지 거역했던 사람들의 완고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울을 세우신 것을 후회하고, 그를 버리시기로 한 하나님에 대해 원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보다는 경고 후 재위기간 40년 내내 기다려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거역으로 일관하다 악신의 도구로 전락했던 사울의 완고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사울과 비교해 볼 때 만만치 않은 우리의 내면과 실력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거역과 완고함에서 돌아서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사울왕처럼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등지고, 배반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 사울과 똑같은 베냐민 지파, 똑같은 이름의 사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앞잡이에서 돌아서서 일평생 주님의 뜻을 따랐던 바울과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길, 어떤 사울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신 하나님의 후회, 하나님의 눈물이라는 말 속에 담긴 하나님의 아픔과 안타까움을 봅니다. 끝까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사울은 진정 자신이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갈멜에 자신을 위해 돌 기념비를 세우면서도 정작 잊지 않기 위해 마음에 세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순종하는 것 같으면서도 슬쩍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끼워넣는 그의 행위 속엔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청종과 따름이 없었습니다. 거역함과 완고함으로 인해 그는 자신을 비우는 대신 늘 자신의 생각, 경험, 판단으로 채워갈 뿐이었습니다. 이런 사울의 모습이 우리와 멀지 않기에 우리 또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다마스크스로 가는 길 위에서 주님을 만난 사울이 완고함을 비워 바울로 살았던 것처럼 우리 또한 주님의 말씀에 경청하는 청종의 사람으로 서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눈 속에 있는 호의를 발견하고 방주를 지었던 위로의 사람, 노아로 우리 시대를 맑히고, 밝히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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