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1.05.30 움오름 주일 설교 -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삼상 7:3-8:22)

6월 2일 업데이트됨








삼상 7:3~8:22

7장

3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4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5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6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7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8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9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10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11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12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13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14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15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16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17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8장

1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2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3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4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5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6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7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8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9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10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말하여11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12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13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14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15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16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17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18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19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20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21사무엘이 백성의 말을 다 듣고 여호와께 아뢰매22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하니라



설교문


1. 간략한 본문 조망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부분은 사사, 선지자, 제사장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이끄는 사무엘의 활약입니다. 다른 한 부분은 나이 든 사무엘을 대신해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입니다. 이 각각의 부분들을 조명하며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2. 벧세메스와 기럇여아림 사람들


먼저 지난시간을 잠시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호기심과 오락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엄격히 금했던 손으로 만짐으로써 그들의 수중에 소유하려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그 일에 가담한 70명이 죽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징벌에 벧세메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돌아보고 수정하기 보다는 가장 손 쉬운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만만한 이웃,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법궤를 떠넘기는 일이었습니다. 부탁한 것도 아니고, 그냥 와서 가져가라고 명령하며 떠넘겼습니다.


근데, 왜 굳이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그것도 당연하다는듯이 가져가라고 명령했을까요? 여호수아 9장에 보면, 그 답의 실마리가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먼 땅에서 온 것처럼 속임수를 써서 살아남은 원주민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기브온 족속입니다. 그 기브온 사람들이 살던 네 성읍 중의 하나가 바로 기럇여아림입니다. 이 사람들은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성급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해서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바람에 죽음은 면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속인 대가로 대대로 노예가 되어서 여호와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등 허드렛 일꾼으로 살았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보기에 3백년 이상을 자기들 밑에서 종살이했던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제일 만만했던 겁니다. 그래서 부탁도 아닌, 당당하게 가져가라고 명령했고, 기럇여아림은 아무 말하지 않고 그냥 법궤를 모셔와서 보관했던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참 묘한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레위인들까지 있던 벧세메스에서 단 하루도 머물지 못했던 법궤가 기럇여아림에 와서는 20년이나 머물렀습니다. 보잘 것 없고, 하찮게 여김받던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궤가 안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천박하고 무시당하던 사람들이 사는 기럇여아림에서 아주 편히 쉬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지식과 율법을 내세우던 벧세메스의 레위 사람들도 법궤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한 순간에 70명이나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그 언약궤를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힘없고 미천한 백성들 사이에서 안식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세련되고 뭔가 지식 있는 것같고, 전문가 냄새나는 그런 교회를 선호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늘 계신 것 같이 느낍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즐겨 머무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보잘 것 없고, 하찮아 보이더라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 속에 계십니다. 하나님에 대해 뭘 좀 안다고 허세를 부리는 종교인들 속이 아니라,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던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벧세메스 사람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기럇여아림 사람들의 길을 따라 걷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드립니다.




3. 미스바와 에벤에셀


1) 떠나라, 섬기라

갑자기 법궤를 맡게 된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아비나답의 집에 위탁했고, 그 집 아들 엘르아살이 책임을 다해 거룩하게 봉사했습니다. 이런 시간이 20년이 지난 어느날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상 7:3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임시로 법궤를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 뒀던 시간이 20년이 지났습니다. 잠시라고 생각했던 시간이 이렇게 갈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엘리 제사장과 아들들까지 모두 사망해서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동안 마음만 간절했습니다. 더 다가가고 싶어도 겁이 나서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애가 탔겠습니까!


사람이 마음이 간절해지면, 기도가 간절해 집니다. 표현과 다짐이 절박해집니다. 사무엘 앞에서 얼마나 화려한 미사여구로 과장되게 신앙을 이야기했는지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말을 살펴보면, 그들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호와 신앙을 이야기 하면서도 문제는 여전히 바알과 아세라를 믿고 있는 양다리 신앙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주변이 좀 조용해지면 읽으려고 책상 위에 올려둔 케이 아더(KAY ARTHUR)의 책이 있습니다. 책 제목이 <Lord, I’m Torn Between Two Masters>라는 책입니다. 번역하자면, “주님, 저는 두 주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찢어지고 있습니다)”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인정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도 늘 경계선에서 이쪽 저쪽을 기웃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본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와 세상 사이에 서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두 주인을 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어정쩡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그 둘의 경계선에 서 있다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위해, 교회와 세상의 경계선에서 해 낸다는 말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교적인 레토릭(rhetoric)만 쏟아내지 말고, 실제적인 믿음의 행위를 보이라고 했습니다. 그 구체적인 행위는 “제거하라”라는 소극적인 행위와 더불어 “섬기라”는 적극적인 행위로 이어지는 회개였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주도와 행위 아래 거하라고 요청했습니다. 신앙은 종교적인 미사어구로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행위로 발현되고 증명되는 실제 삶입니다. 그 삶은 내가 주인된 삶의 자리에서 내려와 주님께 주도권을 드리는 삶입니다. 이것이 말이 아니라, 삶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2) 미스바

사무엘은 이 결단과 맹세의 의미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스바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근데, 사무엘은 왜 많은 장소 중에 미스바를 선택했을까요? 미스바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2km 떨어진 중앙고원지대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망대’라는 이름처럼 사방주변을 모두 살피고, 전망할 수 있는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또한 예루살렘과 가까왔던 지정학적 이유로 인해 많은 전쟁을 겪었습니다.


미스바는 숱한 전쟁의 슬픈 사연들 이외에도 여러 에피소드를 간직한 장소입니다. 사사들 중 전쟁에 나가기 전 하나님 앞에 했던 약속 때문에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쳐야만 했던 입다가 미스바 출신이었습니다(삿 11장). 삿 19장에 보면 한 레위 사람이 첩과 더불어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다가 기브아 베냐민 사람들이 밤에 레위인을 위협하며 첩을 욕보여 죽게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여 맹세하며 베냐민 지파를 상대로 내전을 시작했습니다.


아마 이때부터 민족의 마음을 모으는 일에 미스바가 각인되었을 것이고, 사무엘도 자연스레 미스바를 회합의 장소로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원근각지에 흩어져 있는 여러 지파들이 모이기도 가장 적당한 지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들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이 물을 길어와 여호와 앞에 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비슷한 경우가 엘리야가 갈멜산 위에서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전 물을 붓던 정도입니다. 하지만, 성경 속에서 물은 정결의식을 의미하는바 회개를 위한 의식과 관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회개는 곧 금식과 더불어 이런 고백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삼상 8:6)


제가 공부했던 신학교 채플실 앞 광장의 이름이 미스바였습니다. 회개와 금식을 통해 자기변혁, 사회변혁을 이루었던 사무엘 때처럼 자신을 수정하겠다는 결단과 사람들이 모이고, 만나는 장소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무슨 일이 있다하면, 기독교 계통에선 ‘미스바 대성회’, ‘미스바 구국기도회’ ‘미스바 금식기도회’ 등으로 명명하고선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주도한 미스바 기도회는 그것들과는 결이 다릅니다. 미스바에서 중요한 것은 백성들의 금식과 기도가 아닙니다. 보다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사무엘입니다.


그 당시 하나님께서 듣고 응답하신 기도는 미스바에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기도를 듣고, 블레셋을 물리치고 그 땅에 평화가 임하도록 하신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백성들의 기도가 필요없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백성들의 금식과 회개보다 더 중요한 기도는 다른 한 사람의 기도였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것은 당시 그리스도의 그림자였고, 그 시대의 중보자로 세워졌던 사무엘의 기도였습니다. 그렇기에 미스바 집회를 주최했던 사무엘은 삼상 7:5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겁니다.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그러므로 상황에 맞지도 않게 ‘미스바’라는 이름을 붙여 대각성을 운운하면서 부흥과 영적 각성을 위한 중보기도회를 열자는 말에 동조하거나 현혹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무엘의 미스바는 인간이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이겠다는 ‘하나님 조종하는 것을 배우는 기술의 장’이 아닙니다. 미스바는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철저히 엎드려지는 시간입니다. 하늘의 은혜없이는 살 수 없음을 구하며 영원하신 중보자 앞에, 하나님의 자비 앞에 서는 시간입니다.


3) 에벤에셀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규모로 미스바에 모였다는 정보를 듣자, 블레셋은 그 모임이 하나님께 금식하며 신앙으로 새로워지는 모임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곧 자신들을 향해 전쟁을 벌리기 위해 모였다고 판단해 선빵을 날리려 쳐들어 왔습니다. 블레셋의 침략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려워서 떨었습니다. 지난 번에도 4만 3천명이 전사했던 쓰라린 패전경험이 있었을 뿐 아니라, 철기문명을 앞세운 그들을 당해내기란 역부족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포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처럼 여호와의 법궤를 기럇여아림에서 옮겨오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법궤의 힘을 이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무엘에게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삼상 7:8입니다.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백성들은 자신들의 기도보다 사무엘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더 특별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평생을 하나님 앞에 드린 사무엘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이었습니다. 이는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손을 들고 중보했던 모세를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은 중보자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셨듯이, 사무엘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이길 수 없던 블레셋과의 전투를 사무엘의 기도로 큰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사무엘로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케 하셨을까요? 왜 사무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에 승리케 하셨을까요? 이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리스도 모형론적 해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중보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사함과 구원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지 않고 구원에 이르는 길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유대계 독일 철학자 칼 뢰비트(Karl Löwith, 1897-1973)는 기독교의 구세주는 신기한 구세주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신들은 명령을 하고 하늘에서 무언가를 하는데, 기독교의 메시아는 자신이 직접 내려와서 사람들을 섬기고 자신을 희생해서 사람들을 직접 구원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되는 종교입니다.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주님은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비십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중보를 성령 하나님께서 또한 맡아 하십니다. 이 부분을 사도바울은 롬 8:26을 통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있습니까? 탄식이 있습니까? 성령님께선 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힘을 내셨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시 아말렉과의 전투에서는 큰 우박을 내려 승리케 하셨습니다(출 17장). 블레셋과의 전투에서는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혼미케 하셔서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이 승리 후 사무엘은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 곧 ‘도움의 돌’이라고 불렀습니다. 구약에서 '돌을 취하여 세우는 일'은 특별한 사건을 후대에까지 기념 혹은 기억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무엘도 그 승리가 한 때의 찬란한 기억이 아니라, 믿음의 유산으로 전해지기를 바라는 맘으로 세웠습니다. 이스라엘을 승리케 하셨던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 우리를 도우시고,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는 한때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에벤에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영원까지 우리 곁에서 도움이 되십니다. 힘들 때, 버거울 때, 그때마다 다가오셔서 “괜찮다!!!” “잘 될꺼야!!!”라고 위로하시고, 힘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4. 왕을 허락하소서


삼상 7장의 뒷부분은 이스라엘을 순회하며 가르친 사무엘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사악하며 망각하기를 잘하던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일깨워 하나님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그도 나이들어 더이상 에너지 있게 활동할 수 없게 되었음을 삼상 8:1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최남단이며, 연간 강수량이 200mm에 겨우 달하는 브엘세바 지역에 자신의 두 아들(요엘, 아비야)을 대리자로 보내 직무를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온의 자식들처럼, 엘리의 자식들처럼 사무엘의 두 아들도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않는 망나니였습니다.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이토록 훌륭한 부모 밑에 이런 자식이 나올 수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의아스럽습니다. 하지만, 옛부터 호부견자(虎父犬子), 호랑이 아버지 밑에 강아지 자식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 사무엘의 경우 굳이 변명하자면, 날마다 이스라엘을 순회하며 말씀을 전하고 제사를 집례하다 보니 정작 자기 집안 자식 간수할 겨를이 없었거지요.


이런 상황을 예의주시해 오던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을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들이 생각한 해결방안을 수용해 달라는 요구였습니다. 그것은 더이상 사무엘과 같은 사사, 선지자, 제사장 체제가 아니라, 이웃나라들처럼 강력한 왕정체제로 바꿔달라는 말이었습니다. 이같은 장로들의 요구는 사무엘의 선지자적인 지도력과 하나님 중심의 리더십을 거절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장로들은 외세의 침입이나 민족의 쇠약이 그들의 정치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범죄와 타락에 따른 하나님의 징계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단지 제도를 바꾸면 부유한 나라가 될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의 입장에서 참 기운 빠지는 일이었습니다. 평생을 내 가정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며 이스라엘을 섬겼는데, 이제 좀 살만하니까 자기들 좋을대로, 하고 싶은 것을 요구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의가 들고,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사무엘의 이런 괴로움을 이해하신 하나님은 되려 그를 위로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래 줄곧 하나님을 저버렸음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원래 그런 사람들이잖아… 괜찮아. 네 잘못 아니야…”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라고 3차례(삼상 8:7, 9, 22)나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왕정을 허락하는 대신 하나님은 왕정제도가 가져올 해악에 대해 조목조목 알려주셨습니다(삼상 8:10-18).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왕을 요구했고, 8장의 마지막 절은 하나님께서 3번째로 허락해 주라고 말씀하시고, 백성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에 왕이 없다는 것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었습니다. 왕이 없었기 때문에 속박이 없었고, 자유가 있었습니다. 인권과 자율이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들이 부러워 하는 주변 나라보다 더 강력하지 못했고, 풍요롭지 못했고, 뭔가 지지부진한 게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왕정으로 인한 억압과 착취가 없다는 게 얼마나 복인지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없는 왕이 심각한 결핍이고, 채워야 할 부족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모자라기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없기에 더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다가간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시편 8:4-5은 우리를 부족하게 하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부족하기에 하나님 바라봄으로 점점 영화롭게 되어 갑니다. 결핍되기에 하나님 붙듦으로 점점 존귀로 관을 쓰게 됩니다. 현재 우리에겐 무엇이 부족합니까? 부족하지 않은 것보다 있는 것 말하는 게 쉽다고 생각지는 않습니까? … 정말 그렇다면, 그 부족함을 안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까이 나아가셨으면 합니다. 그 부족함 가운데, 모자람 속에서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는 한 주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시편기자는 145편을 통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1절). 우리도 하나님을 진정한 왕으로 모시고 송축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두 주인 사이에서 찢어지는 흔들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경계선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힘있게 나타내는 중인으로 살길 원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아픈 처지를 보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성령 하나님~

우리의 영원한 도움의 돌이 되어 주옵소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날마다 기억케 하는 에벤에셀이 되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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