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1.04.18 움오름 주일 설교 -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23)

4월 24일 업데이트됨










룻기 2:1~23

1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2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3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4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5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6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7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8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9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10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11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12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13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14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15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16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17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18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19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20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21모압 여인 룻이 이르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하니22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23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




설교문


1. 룻기 2장을 그리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말 중에 성경구절같이 여기는 경구 몇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전쟁의 기술 중에 '기습원칙’과 관계가 있습니다. 일명 ‘선빵’을 날리는 겁니다. 최소한의 힘으로 적에게 최대의 피해를 입히기 위해선 기습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공격하는 자의 입장에서 최대한 기습하려고 상대방의 경계 허점를 노립니다. 방어하는 입장에선 기습을 당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경계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룻기 2장을 시작하며 왜 난데없는 군대 이야기로 시작했을까요? 룻기의 배경이 되는 사사시대가 완전히 영적경계에 실패해 어둠에 잠식당한 때였기 때문입니다. 칠흑같은 밤을 밝히며 기도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신앙인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사람들 투성이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어야 할 제사장과 레위인들마저 잠에 골아 떨어져 아무도 경계를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상태가 이렇다보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밖에서 한 여인을 이끄셔서 신앙의 역사를 새롭게 해 가셨습니다. 절망적이던 상황도 그 여인이 모압을 떠나 나오미와 함께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것을 통해 반전이 일어납니다. 아시다시피 룻기는 눈에 보이는 기적이 없습니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상실과 아픔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룻기의 묘미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과 아주 가까운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가 실현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룻기는 가난하고 가련한 여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됩니다. 룻의 인생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넘어 오늘 평범한 우리 삶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헤세드의 이야기가 됩니다.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모압에서 다시 베들레헴으로 이어지는 룻기 1장의 주요무대는 ‘길’이었습니다. 우리 생의 길 위에서 선택과 그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상실과 슬픔을 속으로 삭히며 살아가야 할 삶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속에서 빛나는 것은 룻이라는 젊은 모압 여인이 홀로된 시어머니에게 보여준 헤세드였습니다. 평균을 뛰어넘어 과하다 할만큼, 아니 자기 인생 최악의 선택을 하면서까지 보여준 인애, 헤세드의 이야기였습니다.

룻기 2장의 이야기는 그 배경이 베들레헴의 밭으로 바뀝니다. 우연히 찾아간 그 밭의 주인과의 만남, 그리고 그 주인 보아스가 베푸는 평균 이상의 인애, 헤세드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것은 짐작하시겠지만, 하나님의 헤세드가 나타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음의 3부분으로 나눠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부분: 룻 2:1-7

둘째부분: 룻 2:8-16

셋째부분: 룻 2:17-23



2. 첫째부분 - ‘우연’이라고 쓰고, ‘필연’으로 읽다(룻 2:1-7)


룻기 2장의 첫째부분은 남의 밭에 나가서 일하기를 룻이 나오미에게 청하는 장면과 보아스라는 밭주인이 등장하는 두 장면으로 다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신앙의 관점에서 조명해 보겠습니다. 시어머니를 따라 룻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지만,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종잣돈이 있어야 뭘해도 할 것인데, 당장 먹고 살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시어머니와 거할 단칸방은 마련했는데, 양식이 문제였습니다. 아무리 당시 베들레헴 사회가 풍요로왔다고 해도 개인의 삶도 덩달아 부유로왔던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룻이 할 수 있는 일은 남의 밭에 가서 이삭줍는 일을 해서 시어머니와 먹고 살 양식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주일 룻 1:22을 읽으며, 그 앞뒤 전후로 이런 말씀을 드렸던 것을 기억하시는 지요?

나오미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울면서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발견하지 못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뜻하는 헤세드(חֶסֶד)입니다. 4장의 룻기 속에 무려 7번이나 등장하는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복선이 룻 1:22에 이렇게 깔려 있습니다. … 하나님의 섭리는 나오미와 룻이 고향 땅에 도착할 시기를 보리 추수 시기로 정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음에 이어질 반전상황의 틀을 제공해 줍니다. 마라와 같은 쓴물의 인생이 어떻게 기쁘고 감사한 인생으로 뒤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서막이 조용히 울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헤세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개입과 인도하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현실은 어떻습니까? 당장 먹고 살 양식을 걱정해야 합니다. 이걸 보고 하나님이 내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느냐고 항변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척박한 땅을 일구며 씨앗을 뿌리고, 땀을 흘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중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사는 사람인지는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게 우리 일이 되면 이것이 안보인다는 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불안정한 형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과 동시에 최선을 다해 준비해 가고 개척해 가는 삶의 조화를 잘 이루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감이 뚝 떨어지는 은혜를 구하면서도 감나무에 올라가거나 사다리를 놓고 감을 따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는데 맹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가 그 약속을 믿고 성실하게 준비해 갈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남의 밭에 나가 이삭이라도 줍겠다는 룻의 태도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실 토대가 되었습니다.

룻기 2:1은 하나님께서 보아스라는 사람을 통해 일하실 것임을 은근히 내비치며, 그를 ‘유력한 자’라고 소개합니다. 유력한 사람, 보아스가 누구인지를 마태복음 1:5이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보아스는 여리고성 공격 때에 이스라엘 편이 됨으로써 구원받은 가나안 사람 라합의 아들이었습니다. 유대전승에 의하면 라합의 남편 살몬은 유다지파의 족장 나손의 아들이었고, 여리고성에 들어갔던 두 정탐꾼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고보면, 구원역사를 이뤄가는 하나님의 섭리는 참 오묘합니다. 비록 정복해야 할 가나안 땅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출애굽의 역사를 듣고 믿은 라합이라는 여인을 통해 보아스를 낳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보아스를 모압에서 건너온 룻이라는 여인을 통해 다윗에 이르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도록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위대하고도 장엄한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그 첫발을 내딛었을까요? 룻 2:3-4에 2개의 부사 속에 그 계획이 나타나 있습니다. 같이 봉독하시겠습니다.

3절: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4절: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어떤 부사인지 감 잡으셨지요? ‘우연히’와 ‘마침’입니다. 룻이 이삭을 주우러 밭으로 갔는데, 그곳이 우연하게도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마침 그때 보아스가 밭을 방문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고대 유대사회 속에 3가지의 사회안전망이 있었습니다. 첫째가 십일조였는데, 용도가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생계를 위한 것(신 14:23-27), 구제사업용(신 14:28-29; 26:12-15), 그리고 성전유지와 보수를 위한 것(출 36, 대하 35, 스 1:4)이었습니다. 둘째가 ‘고엘’이라는 것이 포함된 계대결혼이라는 형사취수제였습니다(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남편이 죽고 홀로 남은 여인을 위해 동생이나 친척이 잃어버린 땅을 회복시켜주고, 자손을 이어가도록 결혼하는 제도였습니다. 셋째가 이삭줍기였습니다. 자기 토지나 산업이 없는 사회 극빈자들이 끼니는 챙길 수 있도록 배려한 안전장치였습니다. 방금 읽은 룻 2:2-3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셋째제도인 이삭줍기를 하러 갔는데, 둘째제도인 계대결혼이 ‘우연히’와 ‘마침’이라는 부사 속에서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것이 룻과 보아스에게는 우연이었지라도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둘의 만남은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가기로 결단하던 그때 부터 하나님께서 준비해 오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룻과 보아스의 만남을 ‘우연’이라고 쓰고, ‘필연’으로 읽습니다. 나아가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만남 또한 ‘우연’이라고 쓰고, 믿음으로 ‘필연’이라 읽습니다. 때마침 만난 사람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일하고 계심을 확인합니다.

룻 2:4에서는 밭주인 보아스의 인물됨과 성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일꾼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전형적인 인사말로 보면 별 감흥이 없지만, 그 시대가 사사시대임을 보면 확연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보아스나 일꾼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사합니다. 서로의 삶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바라며, 그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가 인사말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들이 나눈 인사 속에서 고용주가 얼마나 고용인들을 인격적으로 존대하는지, 고용인들이 사장을 얼마나 존경하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예배당 안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일터 속에서도 이렇게 묻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일터가 직급과 직위로 구분되고, 피아식별이 된 계층구조를 넘어서 목적한 바를 같이 이루어가는 동역자로 여긴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기업문화가 형성되지 않겠습니까?

룻이 우연히 찾아간 밭에서 일하고 있던 모습이 마침 그곳을 찾은 보아스의 눈에 띄었습니다. 보아스는 전체 일꾼들을 관장하는 사환에게 룻이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 이것도 참 신기하고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도 중동여인들을 거의 발바닥까지 내려오는 옷에다 얼굴을 천으로 온통 두르고 있어 누가 누군지 구분이 모호합니다.

지금도 이러한데, 고대 근동에서는 분명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룻의 모습이 이삭줍는 수많은 소녀들 중에서 보아스의 눈에 띄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미모가 출중해서 일까요? 앞서 온통 얼굴을 가렸을 것이라 말씀드렸는데, 미모가 보였겠습니까? 그럼,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 밭에 있던 그 어떤 이들보다 성실하게 일했기 때문입니다. 7절에 보아스에게 보고하던 사환의 말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침부터 보아스가 와서 보기 전까지 잠시 일꾼들이 쉬는 쉼터에서 숨을 고른 것 이외에 줄곧 허리를 굽혀 이삭을 줍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령도 부리지 않고, 꾀도 내지 않고, 그냥 우직하게 일하는 그 모습이 여러 사람들 속에서도 돋보였기 때문입니다.



3. 둘째부분 - 넘치는 보아스의 인애(룻 2:8-16)


일꾼들을 총괄하는 사환으로부터 룻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보아스가 룻에게 이삭 주우러 딴 밭에 가지 말고 자기 소유의 밭에서 계속 주우라고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꾼들에게는 룻을 괴롭히거나 방해하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목마르면 사환들이 마시는 물을 함께 마시라고 허락했습니다. 룻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여인이었고, 더군다나 남편이나 보호자도 없는 홀로된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약자, 소외계층을 대하는 보아스의 세밀하고도 신중한 배려가 드러납니다. 그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가던 때에 보아스는 모세의 율법을 마음을 다해 준행하고 있었습니다. 레 19:9-10입니다.

9절: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절: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기서 잠깐 제가 전송해 드린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쟝 프랑수아 밀레(Jean Fransois Millet)의 작품 <이삭줍기, Les glaneuses>를 보시겠습니다. 룻기의 이삭줍기와도 연관되는 밀레의 <이삭줍기>는 1857년 파리 외곽 바르비종 마을 농부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어떻게 추수의 풍요로움이 느껴지십니까? 그것보다는 추수가 끝난 빈들에서 생계를 위해 허리를 굽혀 이삭을 주워야 하는 여인들의 고단함이 보이지 않습니까? 여인들의 뒷편 원경에는 쌓고, 또 쌓은 뒤 꽁꽁 곡식단을 묶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시지요? 그 오른쪽엔 말을 타고 손을 뻗어 그들을 지휘하고 감시하는 주인이 보이시지요? 하나라도 흘리지 않고 깨끗하게 챙겨가려고 이삭단을 꽁꽁 묶는 인색함이 이삭줍는 여인들을 더 가혹한 가난으로 내모는 것 같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보아스는 이상하리만치 친절합니다. 그 친절을 받는 당사자인 룻도 이해가 되지 않아 물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때 보아스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11절입니다.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남편이 죽으면 결혼과 더불어 주어졌던 의무관계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그런데도 룻은 나이든 시어머니에게 지극정성을 다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모국을 떠나 시어머니의 나라로 와서까지 봉양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오늘날처럼 교통과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시대에 모압땅에서 있었던 일을 보아스가 어떻게 알았을까요? 또한 CCTV를 설치해 둔 것도 아닐 건데, 베들레헴에 와서 나오미에게 룻이 어찌어찌 했는지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 이건 분명합니다. 한 사람이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그 한사람이 시어머니 나오미지요. 그녀가 동네방네 다니며 자신의 며느리 룻이 자기에게 어떻게 했는지, 또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사람들에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이 보아스 귀에까지 들렸던 겁니다. 보아스는 비록 룻의 얼굴을 대면하여 본 적은 없지만, 소문을 통해 그 사람됨과 행위에 감동했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룻에게 인애를 표현했던 겁니다.

12절에 보면, 보아스는 자신의 행위가 인격이나 선의에서 베푼 시혜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답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여호와 신앙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모압여인 룻에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한다는 축복을 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보아스는 ‘보답하다’ 동사의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룻이 행한 모든 일에 대해 지금도 갚고 계시고, 앞으로도 분명히 보답하실 것임을 천명했습니다. 그런데 그 보답의 최종적 모습을 보아스는 ‘온전한 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부분을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과 연결지어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히 11:6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에녹은 하나님 나라로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증거를 받았는데, 그것이 곧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어떤 것이냐 하면, 6절을 보면 하나님의 살아계시다는 것과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었다는 겁니다. 이 둘을 믿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이 둘을 믿으면, 눈에 보이는 것이 다인줄 알고 살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휘둘리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견뎌가고, 굿굿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후에 그렇게 살았던 삶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분명 보상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보아스의 믿음이었습니다. 어두운 사사시대에 비록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이 세상이 다인 것처럼 살아갔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실재하심과 상주심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다른 이들과 다르게 구별되게 살 수 있었고, 룻에게도 하나님의 상에 대해 말할 수 있었습니다.

14절 - 16절에 보면, 룻에 대한 보아스의 선대는 그 격을 더해갑니다. 추수하는 일꾼들에게 일부러 곡식을 흘려서 룻이 풍성하게 이삭줍도록 합니다. 우리 생각에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럴거면 차라리 그 집으로 곡식 가마니를 보내면 되지, 왜 굳이 곡식을 떨어뜨려서 줍게 해?”

그렇게 갖다주면 적선인데, 룻이 직접 이삭을 주워 가면 그건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됩니다. 이 차이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면서도 그녀가 더 풍성하게 가져갈 수 있도록 조치한 겁니다. 많은 경우 있는 집 사람들을 보면, 무례하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남을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또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20대부터 알고 지냈던 소위 재벌집 사람이고, 또 이름난 분들은 하나같이 제가 다 미안할 정도로 겸손하고 섬기는 분들이었습니다. 없는 신학생이었던 제게 뭘 하나라도 더 챙겨주시려고 하시면서도 제 입장에서 저를 배려하시던 그 모습을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배려는 보아스처럼, 그분들처럼 철저히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마음 상치 않도록 해야 하는 거지요. 그게 하나님의 인애를 사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4. 셋째부분 -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


온종일 고된 이삭줍기를 마치고 룻이 주운 이삭을 떨어보니 한 에바나 되었습니다. 한 에바는 우리에게 익숙한 kg으로 환산해 보니, 26kg이나 되는 수확량이었습니다. 쌀보리 26kg면 여성 두명이 한달은 거뜬히 해결할 정도의 량입니다. 아니면, 돈으로 바꾸어 다른 생필품을 구입할 수도 있습니다. 보아스가 얼마나 룻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룻은 주운 곡식 뿐 아니라, 보아스가 줘서 배불리 먹고도 남은 음식을 시어머니께 가져갔습니다. 이고 지고가는 무게가 만만치 않았지만,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웠을지 짐작이 갑니다.

분명 아침에 나갈 때는 어디로 이삭 주우러 나갈지도 모르던 며느리였습니다. 근데 해질녘 잔뜩 곡식을 이고지고 귀가하니 나오미가 놀래서 도대체 어디서 이 많은 이삭을 주워 왔는지를 물으니 룻이 ‘보아스의 밭’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20절에 보는 바와 같이 나오미가 3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며 보아스를 축복했습니다.

: 이 말을 좀 더 직역해 보면,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을 받는다”입니다. 나오미의 이 말에는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지켜보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이는 보아스의 신앙과 닿아 있습니다.

둘째,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고 말했습니다.

: 여기서 복수로 표현된 ‘살아 있는자’는 당연히 룻과 나오미이며, ‘죽은 자’는 엘리멜렉과 두 아들입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말을 보니, 보아스의 인애로운 행위가 나오미와 룻에게만 베푼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도 베푼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해석에 따라서는 남편 살았을 때도 나오미 집안에 도움을 주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 그대로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남은 가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가족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고 죽은 이들에게도 은혜를 베푸는 행위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했던 말의 의미를 되새기다 보니, 중국고사의 ‘결초보은(結草報恩)’이 생각 났습니다. 결초보은이란? 옛날 중국 진(晋)나라에 위무자라는 사람이 죽으며 아들 위과에게 애첩을 순장시켜 달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의 서모를 개과시켜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 후 위과가 전쟁에 나갔는데, 매우 불리한 형세에 몰려 죽게 되었는데, 갑자기 적군들이 별 이유도 없이 말이 꼬꾸라져서 떨어져 죽더라는 겁니다. 원인을 살펴보니 누군지 모를 어떤 이가 풀을 촘촘히 묶어 두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물론 그날 밤 서모의 아버지의 혼이 나타나 자기 딸에게 선을 베풀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죽어서라도 풀을 묶어 은혜를 갚는다는 뜻에서 ‘결초보은’이라고 하는데, 룻기와 연관지어보면, 살아있는 이를 선대하는 것이 동시에 먼저 가신 이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과도 연결된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셋째, 나오미는 보아스를 일컬어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고 했습니다.

: ‘기업무를 자’란? 고엘을 의미합니다. 원래 ‘고엘’이라는 말은 ‘도로 사다’, ‘보복하다’는 뜻을 가진 말로서 친족이 흘린 피의 복수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이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남에게 팔린 땅을 되찾아 주어 가문을 보호해 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형사취수제도, 또는 계대 결혼(Levirate marriage)이라고 하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지만, 고대 당시엔 둘을 같이 결합해서 사용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오미의 말을 문자적으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그는 우리의 고엘이니라”(2:20).

나오미의 말 이후에 룻은 보아스가 추수가 마칠 때까지 자신 소유의 밭에서 이삭을 주우라고 했던 말을 전했습니다. 룻에 대한 보아스의 친절과 호의가 일회적이거나 우발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룻기의 이런 장면은 삿 19장-21장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과는 너무나 큰 대조를 보입니다. 룻기에는 힘없는 여성들에게 인애와 은혜가 넘쳐납니다. 그런데, 사사기엔 한 여성을 두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학대와 경멸과 능욕이 자리합니다. 힘없는 여성은 납치당하고, 죽은 시체는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묘하게도 그 두 이야기가 일어난 곳이 모두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같은 장소인데도 전혀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 졌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곳에 있느냐에 따라 이토록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5. 헤세드의 밭이 되게 하라


우리는 뭔 일이 생기거나, 생각과 다르게 흐르면 얼른 그 자리를 떠나려고, 벗어나려고 합니다. 일종의 기피이고, 회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인애와 자비가 흐르는 보아스의 밭이 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착취와 배제의 물감으로 경계선을 그어 놓은 밀레의 <이삭줍기>가 아니라, 보아스의 들판, 헤세드의 밭이 되게 하라 하십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로 산다는 건 저 들로 나아가는 것

이른 아침 들판에 내린 만나는 담듯이

허리를 숙여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

은혜로 산다는 건 내 밭을 인애로 채우는 것

착취와 배제의 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인애와 자비가 흐르는 들판이 되게 하는 것

은혜로 산다는 건 의무를 넘어서는 것

사람으로 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사람답게 사는 살만한 세상 만들어 가는 것

아, 은혜란 바로 이런 것. 사람이 사람되게 하고,

살만한 세상이 되어 잃어버린 낙원의 조각을 맞추어 가는 것

아버지의 맘으로 누군가를 품고, 아버지의 가슴으로 손잡아

아버지의 온전한 상을 다같이 누려가는 것

하나님~

이런 은혜의 삶을 우리로 살아내게 하옵소서.

우리 삶의 들판이 하나님의 헤세드로 채워진 추수자리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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