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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1.04.11 움오름 주일 설교 -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룻 1:1-22)

최종 수정일: 2021년 4월 12일










룻기 1:1~22

1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2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3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4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5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6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7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8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9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10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11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12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13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14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15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18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19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20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21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22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설교문


1. 룻기 소개


1) 모압여성이 주인공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66권 중에 여성의 이름이 그 책 제목인 것은 몇 권일까요? … 2권입니다. 어디와 어디일까요? 룻기와 에스더입니다. 근데, 에스더보다도 룻기가 더 대단한 것은 룻기의 주인공이 이스라엘 여인이 아니라, 이방나라 모압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모압이 어떤 곳입니까?


창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이후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두 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정신을 어지럽게 한 후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그 결과 그들 사이에 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중 큰 딸이 낳은 아들이 모압 자손의 조상이 되었고, 둘째 딸이 낳은 아들이 암몬 자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창 19:37-38).


이런 혈연관계에 있었기에 하나님께선 모세에게 모압과의 전투를 피하라고 하셨습니다(신 2:9). 하지만, 모압은 암몬과 더불어 여호와의 총회에는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신 23:3). 이런 모압사람이 이스라엘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다윗왕의 조상이라고 밝힐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이 성경제목이 된 것은 가히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부터 총 4주 동안 룻기를 살펴보려 합니다. 6년 동안 진행했던 요한복음강해와는 다른 방식으로 한 주에 1장씩 읽고 전체줄거리와 함께 주요부분을 조명하려 합니다. 이전보다는 훨씬 설교시간이 길어짐에도 불구하고 상세하게 다룰 수 없기에 궁금한 것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때엔 움오름단체톡방이나 메일 등으로 문의해 주시면 설명을 드리거나 같이 풀어가 보겠습니다.


2) 룻기의 구조

룻기는 서론, 본론, 결론이라는 간결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본론 안에는 5개의 이야기가 내포해 있습니다. 좀 더 설명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론>

1:1-5, 나오미의 상실


<본론>

1:6-18, 모압을 떠남

1:19-22, 베들레헴 도착

2:1-23, 보아스의 등장

3:1-18, 룻의 인애

4:1-12, 보아스의 인애


<결론>

4:13-22, 나오미의 회복

룻기는 85절로 구성된 짧은 책인데, 그중에 45절이 대화체입니다. 이토록 대화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이야기가 희극적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는 것과 같이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3) 룻기의 신학

룻기는 불과 4장밖에 안되는 비교적 간략하고 평이해 보이는 성경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신학적 깊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Abma)는 룻기를 일컬어 ‘사사기와 사무엘서라는 딱딱한 조개껍질 속에 들어있는 작은 진주’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또 다른 어떤 신학자(류호준)는 룻기를 음악에 견주어 장엄한 오케스트라가 멈추고 갑자기 실내악 모드로 전환된 것 같이 매우 서정적이고 적막한 음이 흐른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룻기는 실내악 같은 교향곡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마치 시벨리우스의 6번 교향곡과 같은 느낌이라고 하면 음악을 전공하신 분들은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 정통적 오케스트라를 벗어나 튜바도 없고 베이스 클라리넷 정도만 추가한 단촐한 구성으로 연주하는 시벨리우스 6번 교향곡과 닮은 것 같습니다.

제가 굳이 실내악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단촐한 교향곡 같다고 말씀드린 이유는 룻기가 가진 묵직한 신학 때문입니다. 언뜻보면, 소설의 형식을 빌린 룻기는 신학적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비칩니다. 하지만, 최소의 악기구성 같은 룻기의 이야기 속에는 마치 바흐 음악의 경건함과 교향곡의 묵직함 같은 3가지 신학이 내재해 있기 때문입니다.불안과 분노의 급류를 건너 고요의 숲으로 가는 공포, 그리고 평화와 고요와 숭고함이 교향곡 같지 않은 교향곡 룻기가 연주하고 있습니다. 그 묵직한 3가지의 신학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입니다.

: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모든 것을 상실한 사람들이 보아스를 통해 회복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는 모형론적 묘사입니다. 더군다나 당시 구원의 범주 밖에 있던 여인을 통해 다윗이 태어나고, 그 혈통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사실은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 룻기는 얼핏보면, 나오미와 룻이라는 가엽고 힘없는 여성들에게 카메라가 향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주요인물들의 대사를 보면,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총 85구절 중에서 무려 23구절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3구절 중 2구절만이 해설자의 언급이며, 나머지 21구절이 등장인물의 대화 속에 나타납니다. 등장인물들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자신들의 인생사건을 인도해 가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렇게 될 것을 믿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룻기의 모든 사건 속에서 끊임없이 일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상실과 소멸로 끝날 것 같던 나오미와 룻의 인생을 채움과 또 다른 생명으로 일으키십니다.


셋째, 배후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 룻기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선택하고, 일을 진행합니다. 다른 성경의 주인공처럼 하나님께 묻고 구하는 것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나 인도하시는 손길은 그 어떤 성경보다 감추어져 있습니다.


룻기에서 직접적인 하나님 언급은 2번 밖에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역할이 없다기 보다는 배후에서 소리 없이 일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룻기의 저자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삼가합니다. 하지만, 독자는 누가 보더라도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수 있습니다. 룻기는 이런 미묘함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룻기를 살펴보는 가운데 해당 구절을 보며 말씀드리겠습니다.



2. 1장의 줄거리


오늘 본문 룻기1장의 줄거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흉년이 들자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이 아내와 아들 둘을 데리고 요단강 건너 모압 땅으로 이주합니다. 처음 의도는 흉년이 지날 때까지만 잠시 모압에 머물 예정이었는데, 변수가 생겼습니다. 가장 엘리멜렉이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그러자 부인 나오미가 두 아들을 모압여인과 혼인시켜 그곳에 정착하려 했는데, 거주한 지 10년 즈음에 두 아들마저 사망했습니다. 더이상 그곳에 있을 이유와 희망이 사라진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되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때 두 며느리가 시어미니를 따라나섰습니다. 하지만, 시어머니 나오미는 더이상 자신과 함께 할 의무가 없는 모압 며느리를 그들의 조국에서 새출발을 하도록 배려했습니다. 시어머니의 말에 한 며느리는 그 땅에 남고, 다른 한 며느리는 굳이 아무런 희망이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1장의 줄거리입니다. 그럼, 앞서 룻기를 나누었던 대로 1장 속의 주요부분들을 단락별로 살펴보겠습니다.



3. 나오미의 상실


룻 1:1-5은 룻기의 서론으로서 나오미의 상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첫 부분은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는 사사기를 가리킵니다. 그 시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가나안 점령에 성공한 여호수아가 12지파(므낫세 지파는 두 지파로 나뉨)에게 땅을 분배할 때 한 지파는 제외되었습니다. 그게 레위지파입니다. 땅을 분배받는 대신 레위지파는 12지파가 분배받은 48개 성읍에 흩어져 살게 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제사장과 율법교사로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말씀(율법)으로 가르치고 양육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도와 달리 레위인들이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레위시대가 타락하고 세속화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가나안 신을 섬기는 배교행위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범죄 - 심판 - 회개 - 구원 - 평화, 그리고 다시 범죄로 이어지는 사이클이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반복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 가운데서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사를 보내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약 350년 동안 7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시대가 바로 사사시대였습니다.


룻이 다윗의 증조모가 되는 것을 고려해 보면, 룻기의 배경은 대략 B.C 1200년 - 1100년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때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을 자연현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사기에서의 흉년은 특별히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흉년의 때엔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바짝 엎드려야지요. 하나님께 물어야지요. 회개해야지요. 근데, 그걸 깨달을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사사기 끝부분을 보시면 알겠지만, 그것을 알게 해주고, 가르쳐 줬어야 할 레위인이 완전 타락의 끝판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방나라고 뭐고 가리지 않습니다. 그저 밥이 최우선 순위에 자리합니다. 밥이, 직장이 우선이 되니 신앙은 뒷전입니다. “아니, 사람이 먹고 살아야지요”, “요즘같이 어려운 때에 직장을 구했다는 게 어딥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당장에 급한 것을 우선으로 추구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칩니다. 꼭 필요한 것은 놓치고 맙니다. 엘리멜렉의 집안이 그러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보십시오. 엘리멜렉(אֱלִימֶלֶךְ), ‘하나님이 왕이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왕이 없으므로 각자가 자기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던 시대에 얼마나 그 부모가 신실했으면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작명했겠습니까? 또 그렇게 살도록 양육했겠습니까? 근데도 그 아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묻지도 않은 채 자기소견에 옳은대로 모압으로 떠났습니다. 그것도 온 가족을 이끌고 말입니다.

집안의 가장이 영적으로 바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이전에 신앙생활을 같이 했던 한 집사님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리스도인 집안에는 명목상 가장과 영적인 가장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집사님 댁에서는 성경통독을 먼저 하는 사람이 영적가장이 되기로 정했습니다. 근데, 남편 집사님이 출근하고 난 뒤에 부인 집사님이 남편보다 먼저 성경통독을 하려고 성경을 찾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는 겁니다. 알고 봤더니 남편집사님이 영적 가장을 빼앗기지 않으려 출근 전에 집안의 성경을 모두 숨겨놓고 출근하셨다는 실화입니다.


다시 엘리멜렉 집안으로 돌아갑니다. 집안의 가장이 신앙의 기준이 없고, 영적 분별력이 흐릿하면 온가족이 모두 수렁으로 빠져듭니다. 그래서 적어도 집안의 한명은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합니다. 날씨의 변화를 감지하듯 시대의 변화와 움직임을 읽어야 합니다. 한 사건에 온 시선과 마음을 빼앗겨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움직이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며 가족들을 다독여야 합니다. 격려하고 중보해야 합니다. 이것을 엘리멜렉이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가 앞서 1장 줄거리에서 말씀드렸듯이, 잠시 머물다가 돌아오려 했던 모압에서 가장 엘리멜렉은 죽어 묻혔습니다. 의지할 남편이 사라진 부인 나오미는 영적가장이 되기를 포기한 채 두 아들을 얼른 모압여인과 결혼시켜 안정을 추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지금까지 우리 인생이 우리 계획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착착 진행 되었습니까? 생각한 대로, 원하는 대로 이루어 졌습니까?


아닙니다. 아마도 된 것보다 안된 것이 더 많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 방법을 고수하지 않습니까?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사람이 1번 시약을 넣었는데,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2번을 넣고, 2번을 넣어서 안되면 3번을 넣는 등 실험환경을 달리해서 결국 원하는 값에 이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께 묻고 답을 구하기 보다 여전히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고 결정해 버리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의 패착이 시작합니다. 아무리 건강하게 잘 살아도 100년 인생입니다. 이제까지 내 뜻대로 결정하고 사셨다면, 이제는 하나님께 좀 물으며, 그분께 맞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4. 모압을 떠나기로 함


룻기 서문인 룻 1:1-5을 보면, 3절과 5절에 ‘죽고’라는 동사에 마음이 갑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두 아들마저 먼저 보낸 여인의 아픔이 조금이나마 전해옵니다. 하지만, 중요한 단어는 ‘죽고’가 아닙니다. ‘죽다’라는 동사 뒤에 이어진 ’남았더라’는 동사입니다.

남편이 죽고 두 아들이 남았습니다. 두 아들이 죽고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남았습니다. 한 며느리가 떠났지만, 다른 한 며느리가 남았습니다. 그 남은 며느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인생은 마라의 쓴물같은 인생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내 인생의 결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남은 것, 남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셨습니다. 그 남은 사람을 통해 나오미의 인생을 역전시키셨습니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의 삶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남은 것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셨을 때에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출 4;2)고 물으셨습니다. 선지자 엘리사도 홀로 된 선지생도의 부인에게 “네 집에 무엇이 있느냐?”(왕하 4:2)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에 있던 지팡이로 출애굽의 대단원을 시작하셨고, 홀로된 가난한 여인의 집에 있던 기름 한병을 통해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상실이 찾아왔습니까? 홀로됨과 막막함이 겹겹이 두르고 있습니까? 빛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남은 것이 있습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그 남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십시다. 하늘의 긍휼을 구하며 엎드립시다. 하나님은 우리 선배들의 삶 속에서 그 남은 것을 통해 일하셨듯이, 우리 삶에서도 역사하실 겁니다.

나오미는 인생의 심각한 상실과 아픔 앞에서 홀로 남아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녀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곳은 바로 그가 떠나왔던 고향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도심에서 나고 줄곧 그곳에서 자란 분들은 잘 감이 오지 않으시겠지만, 시골을 고향으로 둔 분들은 아실 겁니다. 외지로 떠났던 사람 중에 성공하면 고향으로 대개 돌아오지 않습니다. 성공한 그곳에서 편하게 살지 굳이 조그마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대개 외지로 나갔다가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 오는 사람은 나가서 사업에 실패하고, 다 털어 먹은 사람들이 돌아옵니다.


제 고향의 선배와 친구들이 그렀습니다. 외지에 나가 완전 망하고 경제적으로 기댈 것이 없던 어릴 적 친구들이 부모가 계신 고향으로 돌아와 새롭게 일어서고 있습니다. 성장기에 쳐다 보지도 않던 땅을 일구어 하우스를 짓고 작물을 가꾸며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자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진심으로 축복하며 새출발 할 것을 권했습니다. 13절을 보면, 며느리들을 “내 딸들아”라고 불렀습니다. 얼마나 며느리들을 마음으로 아끼고 위하는 마음에서 했던 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두 며느리가 소리 높여 우는 가운데 오르바는 나오미에게 입을 맞춘 후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5. 룻의 최악의 결정


이를 보며 나오미는 다른 며느리 룻에게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룻은 룻기하면 떠오르는 이 말을 한 뒤 시어머니를 끝까지 따랐습니다. 룻 1:16-17입니다.


16절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이 구절을 신학대학원 입학시험 필수암송구절에 들어있기도 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구절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또 설교하기도 합니다. 근데, 잘 살펴보십시오. 이건 룻의 인생으로 보자면, 뭘 몰라도 한참모르는 바보같은 생각이고, 최악의 선택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여인이 남편을 잃고 홀로 산다는 것은 보호막과 안전망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철저한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인 홀로 살아남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다가 경제적 능력도 없고, 연로하기까지 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것은 같이 죽겠다는 어리석은 결정입니다. 이런 최악의 결정을 며느리 룻이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을 참 아름다운 결정, 믿음의 선택이라고 합니다. 왜 입니까? 그 최악의 결정을 가장 아름다운 선택으로 만들어 주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겁니다. 근데, 참 아이러니 한 것은 이것을 아름답다고 칭송하는 우리는 이런 결정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선택을 피하려 합니다. 왜 입니까? 한 눈에 봐도 그건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 믿음이 머리로만 하는 신앙이고, 사변적일 뿐 아니라, 실제적이지 않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원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빌리자면,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가 됩니다. 믿음은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보고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보지 못하는 그것을 바라보며 선택하고 걷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의 결과는 눈에 그리던 그것을 실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 표본이 이방여인 룻이었습니다.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해 봅니다. 룻이 이런 최악의 선택을 기꺼이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 그건 시어머니 나오미의 사랑 때문입니다. 딸처럼 귀하게 여기고, 아껴 준 외국인 시어머니 나오미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기꺼이 시어머니와 함께 하려 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모압사람을 업신 여기는 이스라엘 땅 베들레헴으로 기꺼이 이주하려 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시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믿으려 했습니다.

힘이 사람을 바꾸지 않습니다. 말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만약 힘으로, 또는 말로 했는데도 사람이 바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굴복이요, 물리적인 변화이지 진정한 화학적 변화가 아닙니다.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되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마천의 《사기》 '손자오기열전'에 ‘오기’라는 장군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빛만큼이나 그림자가 짙은 인물). 오기는 장수가 되었지만, 신분이 낮은 병사들과 똑같이 옷을 입고 밥을 먹었습니다. 잠을 잘 때에도 자리를 깔지 못하게 했고, 행군할 때에도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고 자기가 먹을 식량은 직접 가지고 다니는 등 병사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었습니다.


한번은 종기 난 병사가 있었는데 오기가 그 병사를 위해 입으로 고름을 빨아 주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병사의 어머니가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의 어머니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전에 오기 장군이 우리 애 아버지의 종기를 빨아 준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용감히 싸우다가 적진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장군이 지금 또 제 자식의 종기를 빨아 주었으니 이 아이도 어느 때 어디서 죽게 될지 모릅니다.”

진실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살면서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해 보셨습니까? 이런 사랑을 받으셨습니까? 우리 삶은 이런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비록 그것이 최악의 결정이고, 손해보는 선택이더라도 그 안의 사랑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랑을 재료 삼아 최상의 선택으로 바꾸어 주실 겁니다. 나오미의 사랑과 룻의 선택이 바로 이것을 증거합니다.



6. 베들레헴 도착


오늘날 모압지역에서 베들레헴까지의 거리는 약 100Km 정도이지만, 과거 도로가 잘 닦여있지 않던 사사시대는 2배 이상이 걸릴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니 걸어가면, 1-2주가 소요될 거리를 두 여인이 국경을 넘어 이주한다는 것은 여간 위험하고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그 힘든 길을 걸어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행색이 초라하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을지 짐작이 됩니다. 아마도 나오미는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여겼고, 또 그러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10년 전에 떠난 나오미를 정확히 알아보고 맞이 했습니다. 19절에 보면, 온 성읍이 나오미와 룻을 보며 격하게 맞이했다고 합니다.


이에 나오미가 자신의 이름인 즐거움과는 반대말인 출애굽 때의 쓴물 ‘마라’를 인용하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룻 1:20-21입니다.


20절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절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나오미의 이 말은 네 가지 동사로 요약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

둘째, 여호와께서 나를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

셋째,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다.

넷째,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

나오미는 첫째와 넷째에는 힘과 능력을 상징하는 엘샤다이의 ‘샤다이’를 사용해 하나님을 호칭했습니다. 그리고 둘째와 셋째엔 출 3:14의 여호와 하나님을 호칭했습니다. 이 말은 자기 생애를 이렇게 이끄신 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셨다는 고백입니다. 그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받아 자신이 쓴물과 같은 마라의 인생이 되었다는 참회의 고백이었습니다. 나오미의 이 말을 우리는 비관적이고 회의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엔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경험적 고백과 인정이 담겨 있습니다. 나오미는 그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울면서 떨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발견하지 못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뜻하는 헤세드(חֶסֶד)입니다. 4장의 룻기 속에 무려 7번이나 등장하는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복선이 룻 1:22에 이렇게 깔려 있습니다.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하나님의 섭리는 나오미와 룻이 고향 땅에 도착할 시기를 보리 추수 시기로 정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음에 이어질 반전상황의 틀을 제공해 줍니다. 마라와 같은 쓴물의 인생이 어떻게 기쁘고 감사한 인생으로 뒤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서막이 조용히 울리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주에 이어서 나누겠습니다.



7. 룻기 1장을 정리하며


3200여년 전의 나오미와 룻이 당한 상실의 삶과 선택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출애굽의 감격도, 가나안의 승리도 망각한 채 반역의 역사를 반복하던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선택’하고 살았습니다. 모든 것들을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다들 그렇게 사니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되던 타락과 혼돈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때도 일하셨습니다. 자기 맘대로 살아가던 대다수의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 것이 아니라, 기가 막힌 상실과 아픔 앞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던 가여운 두 여인을 통해 새역사를 만들어 가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거기에 기대는 사람들을 통해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는 ‘죽고’, ‘죽고’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하나님은 ‘남은 것’에 주목하셨습니다. 그 결과 ‘사랑’ 때문에 누가보더라도 인생 최악의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되려 그것을 인생 최고의 결론으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비록 나오미의 눈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만 보였지만, 하나님의 헤세드는 보이지 않고, 깨닫지 못하는 속에서도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는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서도 변함없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기에 이번 한 주도 사랑으로 ‘최악의 선택’을 하는 믿음의 사람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드립니다. 그것으로 인해 ‘인생 최고의 반전’을 만끽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넘치도록 함께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상실이 찾아올 때, 아픔이 녹아들 때

주여, 우리로 이리 살게 하소서.

믿음이 있기에 보이지 않는 길 보게 하시고,

믿음이 있기에 남은 것 드리게 하소서

사랑하기에 손해되는 길 선택케 하시고,

사랑하기에 나를 드림으로 같이 살게 하소서


모든 이들이 어리석다 하여도

다른 이들이 인정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으며

전능자의 손을,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며

어둠을 밝혀가는 행복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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