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1.04.04 움오름 주일 설교 - "부활신앙으로 살아갑시다"(마 28:1-10)

4월 5일 업데이트됨










마태복음 28:1~10

1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2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3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4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5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6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7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8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9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10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설교문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길고 힘들었던 사순절이 지나고 드디어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부활절을 맞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게 되어 너무 기쁘고 좋으시지요? 이 기쁘고 영광스런 예수님 부활의 아침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예수님 부활의 사건이 오늘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나누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금요일이 지나고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이 지났습니다. 안식일 다음날이 되자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예수님 사역을 도왔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 무덤을 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멀리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라도 예수님 시신을 보고 그 몸에 향품을 발라드리고 싶었습니다. 무덤을 향하면서 이들은 그토록 선하시고 능력 많으셨던 예수님께서 왜 죄인으로 몰리셨고 아무 힘없이 죽임을 당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더 이상 그들 곁에 없다는 것을 슬퍼하며 무덤을 향해 갔습니다. 두 여인이 무덤에 가보니 그들의 걱정과 달리 놀랍게도 무덤을 막고 있던 돌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무덤 곁에는 눈같이 흰옷을 입은 한 사람, 천사가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너무 놀라고 무서웠습니다. 놀라고 두려워하는 여인들에게 천사가 말했습니다.

5절,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여인들은 천사의 말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죽으셔서 베옷으로 칭칭 온 몸을 감싸신 채 무덤 안에 누워 계실 예수님을 보려고 왔습니다. 이들을 보고 천사가 말합니다.

6절,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천사가 하는 말은 너무 놀라웠습니다. “예수님은 여기 안계세요.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습니다. 와서 그 누우셨던데를 보세요.” 정말 예수님께서 누우신데를 보니 그 자리에는 예수님의 몸을 감쌌던 베옷들만 놓여 있고 예수님은 없으셨습니다. 천사의 말대로 예수님께서 진실로 죽으셨다가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본래 죽음을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생명 자체이십니다. 만물에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이러하신 예수님께서 죽으셨던 것은 오직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죄값을 대신하신 그 죽음을 이기시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살아나셨다“ 단어는 에게이로έγείρω인데 이 의미는 깨우다, 일어나다, 회복하다, 대항하다,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다입니다. 단어가 가진 의미처럼 예수님께서 죽음을 박차시고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묶고 있던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셨습니다. 죽음을 부활의 기쁨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로써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죽음의 구덩이에서 건져올리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음 생명으로 바꾸셨습니다. 사도바울은 기쁨으로 외쳤습니다.

유진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고전 15:55-56으로 보면,

생명이 죽음을 삼키고 승리를 거두었다! 오 죽음아, 누가 최종 결정권을 쥐었느냐? 오 죽음아, 이제 누가 너를 두려워하겠느냐?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예수님 부활의 기쁨이 새로워졌습니다. 아 그렇구나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죄책을 짊어지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시어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셨구나! 예수님 안에서 나의 죽음도 생명으로 바뀌는구나! 말씀으로 확인하며 기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평소 제 안에 있던 죽음에 대한 생각을 건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을 가지고 있는게 합당한가? 라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저는 가끔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면 두려워지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면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연약한 인간이니까, 한번도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했으니 그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지는 거겠지 생각하며 지나갔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저처럼 문득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두려움을 느끼시나요?

웰링턴: ”나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해 본 적이 없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겁쟁이거나 거짓말쟁 이임이 분명하다.

인간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은 본성적입니다. 이 두려움은 죄에서 왔습니다. 죄가 죽음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어디있어? 라고 말하는 이들도 사실 그 영혼은, 속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신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그 책임들을 다 감당하시고 부활하시어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죽음에서 자유케 해주셨음을 믿는 우리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 걸까요? 우리가 계속 죽음을 두려워하며 사는게 성경적일까요? 문제가 있는 걸까요?


성경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히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한평생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을까봐 위축되어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을 이 죽음의 두려움에서 놓아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속 뜻은 그러니 너희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이미 너희를 이미 죽음에서 자유케 했으니 지금부터 영원히 죽음을 두려워지 말라는 하시는 것입니다.

이럼에도 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죽음에서 자유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걸까요? 두 가지로 생각해보면, 하나는 믿음의 부족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영원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나를 위한 것이다 이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나를 위해 부활하셨다 이것을 개인적 의미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나의 죄의 문제는 해결받지 못했고 본성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1도 의심없이 확실히 마음으로 믿는데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저를 살펴보니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자유케 하신 은혜를 지금 여기서부터 적용하지 않는데 있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죽음하니까 지금이 아니라 언젠가의 일로 여기고 이 은혜는 그 죽음의 자리에서만 필요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현재의 삶과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게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염려가 있을때만 적용하는게 아니라 매일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라는 말씀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서 이미 죽음에서 자유케 하는 삶을 이루어 놓으셨고 이 삶을 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온전해지지 못한게 됩니다. 죽음에서 자유케 되는 은혜는 지금 여기서부터 누리는 은혜입니다. 그러면 죽음은 어느 때고 두려워할 것이 못되는 존재입니다.


이화선이라는 연예인이 계신데 그 여동생이 2년 전에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언니이신 이화선 자매가 동생의 죽음에 대해서 간증했는데 그 동생이 마지막 즈음에는 마치 산송장 같다고 할만큼 육체적으로 힘든 때를 보냈는데 어느 날 신기한 일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이른 아침에 동생의 병실로 아침 햇살이 비춰들어 오고 이것을 보면서 동생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언니, 나 요즘 매일 아침 너무너무 행복하다. 이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야. 이거는 그동안 내가 살면서 하고 싶었던 일에서 얻는 성취감에서 오는 그런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워지는 엄청나게 큰 기쁨이야. 언니가 이 기쁨을 살면서 한 번은 꼭 느껴봤으면 좋겠어. 언니, 하나님이 내 옆에 계셔.”

예수님 안에서 죽은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었습니다. 세상에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기쁨, 충만한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음은 무서운 것이나 나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죽음에는 기쁨이 베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기쁨, 또 다른 생명을 얻는 충만한 기쁨이 베어있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확실히 깨닫고 붙잡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사탄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혹 사탄이 우리에게 죽음의 두려움을 일으키는 깃발을 흔들어대면 우리도 웃으면서 맞짱뜨면 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을 맞대어 흔드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의 깃발을 보며 내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줄 알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부터 죽음에서 두려움이 아니라 생명과 기쁨을 볼 때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의 참 뜻이 내게 이루질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죽음에서 자유한 삶을 살아갑시다.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신앙으로 살아갑시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한 천사가 여인들에게 말했습니다.

7절, 또 빨리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시서 너희를 뵈오리라 하라

여인들은 천사의 말을 듣고 제자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말이 잘 믿어지지 않았고 무섭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생각하면 다시 살아나실 수 있으셨을 것 같고 또 사랑하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에 크게 기뻤습니다. 의심 반, 기쁨 반의 마음으로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이들이 달려갈 때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9절,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여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모습이셨고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나타나시자 너무 놀랐고 무섭고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기뻐하며얼른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엎드려서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습니다. 여인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그 발을 붙잡게 되었는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 발을 붙잡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여인들은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습니다. 그때 여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손에 예수님의 몸이 느껴지면서 “아 ~ 예수님께서 정말 살아나셨네! 예수님 유령이 아니야! 예수님께서 정말 살아나셨어!” 여인들은 그 발을 붙잡아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것을 실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들의 생각을 읽으셨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여인들은 예수님의 발을 붙잡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더 믿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녀가 선생님 하면서 예수님을 만지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다” 하셨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잡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제자 도마도 그랬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그 옆구리에 넣어보아야 믿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직접 그렇게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7). 무슨 말씀일까요? “도마야 너는 보고 만져야 믿는구나. 그래 그렇지만 그 믿음에 머물지 말고 그것을 넘어가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두 여인과 도마와 같을 때가 많습니다.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고 원하는 것을 얻을 때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예수님은 나를 사랑한다는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사랑한다는 것에 의심이 듭니다. 예수님의 존재까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그 믿음을 넘어서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예수님이 그들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잡히는 분으로 계시지 않았지만 이것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기 전에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안계시자 두려워 숨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신앙은 보이냐? 안보이냐? 만져지냐? 안 만져지냐? 얻느냐? 못 얻느냐?에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만 내게 계시면 됩니다.


며칠 전 산책하고 내려오는 길에 할아버지와 초등학교 2-3년 정도 되는 손자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손자가 무엇을 먹고 싶다고 사달라고 하니까 할아버지께서 “나 돈없는데 그거 사주려면 할아버지 팔아야 돼. 할아버지 사가세요 해야 돼” 그러자 손자가 “나 할아버지 안팔아요. 그럼 할아버지 못 보잖아요!” 할아버지께서 손자의 말이 기특하고 원하는 거 못 사주는게 맘에 걸리셨는지 “아니야 내가 너 원하는 거 다 사줄거야” 하셨습니다. 그러자 손자가 “아니예요. 나 할아버지 안팔아요.” 했습니다. 손자의 말은 “할아버지, 다 필요없어 나는 할아버지만 있으면 돼” 였습니다. 초등학교 1-2학년 정도면 과자를 정말 좋아하고 내가 원하는 거 할아버지가 사줄 때 그걸 먹으면서 할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느낄 나이예요. 그런데도 먹고 싶은 과자를 손에 들고 먹는 것보다 할아버지를 선택한 그 어린이의 마음이 너무 감동스러웠습니다. 마치 한편의 아름다운 동화처럼, 한편으로는 예수님과 성숙한 신자의 이야기처럼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신앙은 무엇을 얻고 붙잡는 것으로 예수님을 믿고 경배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예수님께서 두 여인에게 부탁하셨습니다.

10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보고 싶은 이들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스승을 부인하고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을 가장 먼저 보고 싶어하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찾아와도 안보고 싶을텐데, 예수님은 오히려 먼저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상대의 행동에 따라 그 사랑이 좌우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먼저 사랑하시고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자들을 찾아 갈릴리에 나타나셨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고기를 못잡은 제자들에게 고기를 많이 잡게 하시고 자신이 거기 계신 것을 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승이시면서도 배고픈 제자들을 위해 미리 떡과 생선을 손수 준비하시고 제자들의 허기를 채워주셨습니다. 식사가 다 끝나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의 대답은 좀 놀랍습니다. “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지 않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부끄럽지만 자기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줄 예수님께서 아신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도 아셨습니다. 베드로가 비록 스승인 자신을 부인했지만 그 마음 안에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주시며 그의 안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죄책감으로 눌러져 있던 그 사랑을 새롭게 깨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으시고 “네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게 하시면서 그의 죄책감을 씻어주시고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그의 사랑을 새롭게 하시고 깊게 해주셨습니다. 사랑의 고백을 들으시고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시면서 먼저 그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해주셨을까요? 사랑이 사명보다 우선되기 때문입니다. 사명은 오직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만 감당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사랑없이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원하는 자리에 서지만 원하지 않는 자리까지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내가 무엇이든지 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못하곗습니다. 다 해도 저것만은 안되곘습니다. 다 가도 거기만은 못가겠습니다. 할 수 있다 없다가 나에게 달렸습니다. 사랑할 때 한다 못한다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견딘 것은 단 한가지 우리에 대한 사랑이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도 부모의 사랑을 알고 철이 든 자식은 부모가 무엇을 해달라 말아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살펴서 해드립니다. 더 잘하지 못하는 것을 가슴 아파합니다. 무엇을 하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에 대한 사랑을 잘 알지 못하는 자녀는 부모가 시키면 그것을 합니다. 내가 하고 싶거나 할만한 것은 잘 합니다. 그러나 하기 싫은 일이나 하고 싶지 않을 때 투덜거리고 해서 좀 손해를 볼 것 같으면 안하려고 합니다. 부모가 무슨 일을 좀 시키려면 눈치를 살피고 설명하고 설득해야 합니다. 무엇을 좀 하면 내가 했다고 생색내고 자랑삼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기 전에 그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이나 고백하게 하시며 그 사랑을 확실케 하시고 새롭게 해주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많이 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일들을 하는 것보다 더 먼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큼 예수님의 뜻을 섬기느냐는 예수님을 얼마큼 사랑하느냐에 비례합니다.

그러면 내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성장시킬 수 있을까요? 막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더욱 알고 경험하는 가장 좋은 길, 최고의 방법은 성경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로 가득차 있습니다. 단순히 눈으로 읽는 것을 넘어서 말씀 한마디, 한마디, 한 단어, 한 단어에 주의를 기울이고 묵상합니다. 내가 말씀에 마음을 열면 말씀도 내게 열립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이런 분이야, 예수님의 사랑은 이런거야! 라고 내가 기존에 알고 고정되었던 예수님과는 다른 예수님, 새로운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러면서 예수님이 점점 좋아지게 되고 친밀해집니다. 영적 공허함도 사라집니다. 이 사랑이 깊어지면 이 사랑이 나를 이끌어 베드로처럼 원하지 아니하는 곳에도 서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갈릴리”는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일깨우고 새롭게 하는 자리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이런 자리가 있으세요? 규칙적으로 나를 위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는 자리를 가지세요? 제자들을 위해 떡과 생선을 준비하시고 기다리신 예수님은 오늘은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나를 배불리시기 위해 먼저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신앙은 내가 아는 예수님과 그 사랑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늘 새롭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도 나를 위한 것이고 부활도 나를 위한 것임을 확고하게 믿는 신앙은 이렇게 살아갑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었음을 알고 지금 여기서부터 생명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손에 붙잡히는 것으로 예수님께 감사하고 경배하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그 목숨까지 내어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만 내게 있으면 되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언제나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고 끝없는 인내로 사랑해주시는 예수님, 이 예수님께서 기다리시는 나의 골방, 갈릴리를 찾아가기를 기뻐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내 삶의 곳곳에서 실제로 나와 함께 하시는 부활의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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