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1.03.21 움오름 주일 설교 -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3-38)










마가복음 15:33~38

33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34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35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36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37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38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설교문


예수님은 금요일 제3시,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못 박하시기 전에 대제사장 무리들에 의해 밤새 심문 받으시고 새벽에 포승줄에 묶여 빌라도에게 끌려가셨습니다. 거기서도 심문받으셨습니다. 다시 헤롯에게로 넘겨지셨고 악한 헤롯의 무리들에 의해 또 온갖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에게 넘겨지셨고 채찍질과 가시관, 갈대로 머리를 맞고 얼굴에 침뱉음 당하셨습니다. 십자가 처형 날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중죄인이 되시어 이른 새벽부터 이리저리 끌려다시며 온갖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골고다로 끌려가셨습니다. 거기서 많은 구경꾼들이 지켜보는데서 발가벗겨지시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도 자신의 고통을 먼저 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 함께 못 박힌 강도를 구원해주셨고 아들을 잃게 될 어머니 마리아를 불쌍히 여기시며 제자 요한에게 네 어머니로 모셔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또 자신을 못박는 이들의 죄를 아파하시며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셨고 자신의 고통보다 다른 이의 고통을 먼저 헤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는 동안에 종교지도자들과 무리들은 예수님을 비웃으며 소리쳤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들의 희롱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동시에 구원하실 수는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 삼시, 오전9시에 못 박히시고 3시간 정도가 흘렀습니다. 제 6시, 정오 12시쯤이었습니다. 갑자기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태양이 가장 찬란하고 밝게 빛날 때였지만 해가 차츰 빛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온 땅이 흑암으로 덮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흑암에 휩싸이셨습니다. 흑암이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덮어버렸고 예수님은 흑암 가운데 던져지셨습니다. 그리고 이 어둠은 3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제 9시, 오후 3시경 쯤 흑암 가운데서 예수님이 크게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아람어 방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편 22:1)”

온 땅을 덮은 어둠 가운데서 예수님의 외침이 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외치신 것은 놀랍게도 십자가에 못 박힌 육체의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절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버림당하신 고통, 유기의 고통을 부르짖고 계셨습니다. 유기의 뜻은 내다 버림, 보호할 사람이 보호받을 사람을 보호하지 않는 상태로 두는 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나를 보호하지 않으신다고 외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이 기도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들을 버리셨을까요? 의문을 품으며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버리신 것이 이해가 안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들을 버리시겠어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 크셔서 하나님께 버림당한 것처럼 느끼신 것 뿐이예요.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치신 것이 진짜 버림받으심에 대한 것인가? 아니면 단지 예수님의 느낌이신가?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외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하신 절규는 단지 예수님의 느낌만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 크셔서 예수님께 그렇게 느끼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셨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 버림받은 경험의 상태를 표현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발견합니다. 십자가는 외적으로는 잔혹한 육체의 죽음이며 영적으로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유기당하는 것, 버림받는 것.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실제로 예수님이 유대인으로부터는 신성모독자로 버림받으셨고 로마인들에게서는 반란자로 처형을 당하셨으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정죄당하고 버림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들 예수님을 버리셨을까요? 또 예수님은 왜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셔야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부르시는 호칭에서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7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중 네 번은 제자 요한과 강도에게 하신 말씀과 스스로에 대하여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나머지 세 번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하신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 제외하면 두 번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눅23:34),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 46)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번의 기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만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닌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십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 커서 하나님께 실망하고 분노해서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이라 부르신 것일까요? 물론 이렇게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대한 호칭을 아버지에서 하나님으로 바꾸신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두 번의 기도처럼 아들로서 하나님을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죄인된 모든 인간,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하나님을 부르신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하시어 자신을 스스로 죄인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인 모든 인간을 대신하시어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인간을 대표하는 죄인으로서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로 하나님께 버림받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육신만 죽으셨다면 그는 육신의 구속자 밖에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분은 정죄받고 버림받은 인간의 무서운 고통을 그의 영혼까지 담당하시므로써 더 크고 엄청난 값을 치루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께 받아야 할 버림받음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려함에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대신 그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버림받으셨다는 것은 우리 죄의 궁극적 댓가는 하나님께 영원히 버림받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버림을 받아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했고 예수님께서 흑암중에 부르짖으신 기도는 곧 우리의 기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죄 값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영원히 버림당했을 때 그 고통 속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의해 어둠에 던져져 버림받으신 고통은 어떠한 것이었을까요?

그것이 어떠한 고통이기에 벌거벗은 몸을 파고드는 추위와 채찍질과 머리에 박힌 가시들, 못 박힌 손과 발의 고통을 받으시며 정신이 혼미하고 숨쉬기 조차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육체의 고통이 아닌 버림받으신 고통을 외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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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번 설교를 준비하기 위하여 본문을 묵상하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제 속으로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제 안에 깊은 절망감이 일어났습니다. 이 절망감은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절망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깊은 슬픔과 절망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슬픔과 절망이 제 안에 스며들었고 제 마음이 너무 묵직하고 아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육체의 고통을 겪으셨고 영적으로는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당한다는 것은 단순히 버림당했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고 하나님과 끊어지는 것, 철저히 하나님의 부재 가운데 놓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조금도 없으신 분이십니다(요일1:5), 이러하신 분께서 어둠에 둘러싸이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셨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예수님의 고통스런 기도를 묵상하며 예수님의 슬픔과 절망감을 느끼고 있을 때 이전의 저의 기도 체험과 연결되었습니다.

20 년전 쯤에 제가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기도를 하면서 영적지도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 기도 주제 가운데 지옥에 대해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지옥에 관한 말씀을 본문으로 해서 여러 차레 지옥 묵상을 했는데 마지막 기도 때였습니다.

제가 기도 안에서 갑자기 무엇인가에 이끌려 깊은 어둠 가운데로 빨려 내려갔습니다. 끝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채 한없이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끌려 내려갔습니다.. 그것이 어찌 무서운지 제 안에서 쉼없이 비명이 터져나왔습니다. 그렇게 이끌려 내려가다가 어느 순간 제가 멈추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바닥에 닿고 멈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래도 없고 위도 없고 양 옆도 없는 허공 한가운데 였습니다. 분명 무언가 바닥에 닿는 곳도 없는데 제가 허공 한 가운데서 멈추어 앉았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를 감싼 어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어둠은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그런 어둠과는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나라는 존재가 있다라고 느낄 뿐, 나 조차 볼수 없었습니다. 그냥 어둠 자체인 어둠이었습니다. 그 완전한 어둠 속에 제가 던져졌고 홀로 있었습니다. 그렇게 어둠을 느끼다가 너무 무서워서 엉엉 울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너무 두렵고 너무 무서워서 엉엉 울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제 울음의 빛깔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나를 둘러싼 흑암이 무서워서 울었는데 지금은 무서워서 우는게 아니었습니다. 이 울음의 의미는 뭐지? 생각하는데 서러움이었습니다. 제가 서러움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내가 왜 서럽지? 생각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모르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을 모르신다“ 이것을 알고 서러움으로 울었던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 하나님께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기만 하면 나를 구해주실텐데. 구원해주실텐데. 내가 여기를 벗어날 소망이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르시는구나 이것이 너무 서러웠던 겁니다. 이 서러움과 절망과 슬픔이 뒤섞인 울음을 제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은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된 곳,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된 곳, 하나님께서 부재하신 곳, 하나님께서 안 계신 곳이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 어둠보다 더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흑암도 두려웠지만 이보다 더 두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안 계신 곳에 내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서럽게 울다가 기도를 마쳤습니다. 20년 정도가 지났지만 지금도 하나님께서 안 계셨던 곳에 있었던 그 두려움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저는 기도후 기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옥 기도를 하는데 이런 어둠은 뭐지? 왜 내가 이런 어둠에 떨어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옥하면 예수님께서 마13:40-42절에서 말씀하신 풀무불이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곳(막9:47-49) 계시록 20:15 불 못, 불구덩이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지도해주신 지도자와 이 기도에 대해 함께 나누었지만 그 분도 별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그 후 10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서 이 기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순절 새벽기도 설교를 준비할 때였습니다.


마22: 12-14,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예수님께서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라는 말씀이 제게 꽂혔습니다. 제 기도 체험에 대한 의문이 풀렸습니다. 제가 기도 중에 체험한 어둠이 바로 예수님께서 지옥을 설명하실 때 지칭하신 바깥 어둠이었습니다. 제가 그 바깥 어둠에 던져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둠 가운데 절망감으로 서럽게 울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깥 어둠을 말씀하신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예수님 모든 말씀들은 그저 하시는 말씀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지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알아듣지 못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하나님께 버림받으심은 우리의 죄의 최종적 형벌은 하나님께 버림받아 하나님과 영원히 끊어져 하나님이 안계시는 곳에 던져지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두려워하라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불못이나 바깥 어둠에 던져지는 것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받는 외적 형벌이고 내적인 형벌은 그곳에서 하나님과 단절된 채 영원히 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불못이나 바깥 어둠에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버림받아 하나님과 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 계신 곳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지옥이 아무리 뜨거운 불못이고 블랙홀 같은 깊은 어둠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만 한다면 소망이 있습니다. 구원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도 살아갈 수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손 끝을 적시는 물 한 방울만한 은혜를 주셔도 그것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하나님과 분리되면 어떤 소망도 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 계신 바깥 어둠, 불구덩이가 영원한 절망이요 영원한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블랙홀 같은 바깥 어둠에 떨어져서는 안되는 이유는 그 형벌이 두렵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거기는 하나님께서 안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안 계시는 곳이 바로 어둠이요 영원한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극심한 육체의 고통 가운데서도 그 고통보다 하나님께 버림받으시는 고통을 부르짖으신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을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기도는 본래 우리 죄인의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기도하여 주심으로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리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희생당하신 분이 과연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루셨는가? 나를 어떤 것에서 건져주셨는가? 과연 내가 어떤 곳에서 건짐받았는가? 이 사실 하나만 우리가 제대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의향과 행동과 노력이 오직 예수님의 영광과 예수님을 보다 잘 섬기는 것으로만 마련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할 것입니다(갈6:14).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떤 일이 일어날까봐 두렵습니까? 질병으로 겪는 육체의 고통일까요? 혹은 하는 일이 잘 안되어서 혹은 잘 안될까봐 두려울까요? 자녀들 문제로, 경제적 문제로, 인간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가 두려울까요? 죽음일까요? 연약한 우리에게는 이 모두가 사실 두려운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종종 만나고 만날 때마다 고통스럽고 두렵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죄가 없으시면서 죄인 되시고 사람들의 온갖 모멸을 받으시고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때 고통스러우셨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예수님께 최고의 고통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 그래서 하나님과 단절되고 하나님과 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안 계신 곳에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제일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과 분리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홀히 하며 사는 것, 하나님과 틈을 만들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이나 심지어 그 십자가에서도 아버지를 찾으시고, 아버지를 부르시고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와 한 순간도 끊어지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아들이신 자기를 버리시기 전까지요.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성경은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것보다 네 영혼이 잘되는 것이 먼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잘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영혼이 잘되면 혹 범사가 생각만큼 잘 안되어도 혹 강건하지 못해도 우리는 내적인 힘을 잃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쁨이 있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살아갑니다. 피할 길을 주시고 도우시는 주님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매일 매일 하나님과의 규칙적인 교제가 없다면 하는 일이 잘되고 강건한 것이 오히려 우리를 쏘는 독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에 맛들이게 하는 독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매일 어떻게 흘러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끊어지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실 때 어떻다고 여기실까요? 어느 날 제가 거실에 앉아 있는데 기도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기 싫었습니다. 마음은 불편한데도 순종하지 않고 버티고 밍그적 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 등 뒤에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제 마음에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니 부담이니?” 순간 충격이었습니다. 입으로는 주님, 주님 하면서 주님과 교제를 즐거워하지 않는 내 상태를 본 것과 그것이 주님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태도임을 주님께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만족하고 계세요? 하나님께서도 나와의 관계를 만족스럽게 여기신다고 느끼세요?


지금까지 신앙생활 해오면서 각자 나름대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관계 맺는 방법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 방법들이 만족스럽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장시키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되시면 그 방법을 계속 해나가시면 됩니다. 그러나 내가 굳어버린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느껴져 고민되시거나 혹은 지금보다 하나님과 더 친밀하고 깊게 교제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하시는 분들이 있으시면 한 가지 기도 방법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일상 속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하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기도입니다. ”예수 기도“( The Jesus Prayer)입니다. 이 기도는 4~5세기 사막의 교부들이 시작했고 14세기 경에 오늘날과 같은 기도형태로 전해졌다고 하는데요.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있는 기도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에 큰 영향을 끼치는 기도입니다. 이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래전부터 사랑하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신 사도바울의 권고를 실천하는 기도 방법입니다. 우리 사람에게서 24시간, 1초도 쉬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호흡입니다. 이 호흡, 즉 들숨과 날숨에 맞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눅19장에 맹인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했던 말을 기도문으로 삼았습니다. 호흡에 맞추어 예수님의 이름을 반복하는 중에 예수님의 이름은 내 입술에서 내 마음에 자리 잡게 되고 기도를 꾸준히 수련하면 예수님의 이름이 내 호흡에 얹혀지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호흡하는 한 기도를 쉬지않고 하게 됩니다(아가5:2). 기도문은 단순합니다.

”기도문: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또는 아주 단순하게 줄여서 “주님” 또는 “그리스도님” 예수님 등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하루 15-20분 정도 하고 이후에 간구 기도나 말씀 묵상을 하면 휠씬 도움이 됩니다. 또 예수 기도는 때와 장소 상관없이 언제든 할 수 있습니다. 길을 가거나 차를 타서도 일하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함께 기도해도 좋습니다. (기도자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육체의 고통보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을 더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분리, 하나님과의 끊어짐, 하나님과의 단절은 죽음 후에만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이 경험하는 일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매일 하나님과 규칙적으로, 습관을 따라 교제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분리요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요 영적 어둠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깥 어둠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현실의 어둠, 일상 속의 영적 어둠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버림받아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자리에서 건져주신 것은 장차를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우리 삶에 하나님을 받아드리며 하나님과 연합하는 삶울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뜻을 우리가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뜻을 실천해 나갈 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아 주셨음을 내가 진정으로 깨달았음을 예수님께 보여드리고 증거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시되,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셔서

그 육체와 영혼까지 바쳐 하나님께 대신 버림받아 주신 그 은혜를 다시 깨닫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어찌 감당할지요

또 그 희생으로써 우리를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하나님과 사귐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주님의 그 사랑과 수고가 우리 가운데서 헛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언제나 마리아처럼 주님 발치에 앉아 주님과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주님의 성품에 점점 깊이 참여하게 하시고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주님을 더 닮아가는 자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버림받으신 참뜻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대신 버림당하여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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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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