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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1.03.14 움오름 주일 설교 -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2-38)

최종 수정일: 2021년 3월 21일










누가복음 23:32~38

32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33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34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35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36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37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38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설교문


사순절 넷째 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인간들을 사랑하시어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를 담당하셨습니다. 이 사랑과 희생을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우리 또한 나의 죄를 회개하고 신앙 성장을 위해 영적 수련을 하는 시기입니다.


이 거룩한 희생과 사랑의 절기에 우리 움오름 교회가 창립 6주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누구보다 먼저 오늘까지 움오름 교회를 3일 길 앞서 인도하신 우리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까지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서로 주님을 배워가며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를 해오신 것에 진심으로 치하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미 한 일에 감사하며 앞으로도 남은 부르심의 길을 더욱더 달려가야겠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동굴 마굿간에 태어나셨고 거친 나무 십자가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생을 마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기에 흠모할게 아무 것도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서 온 인류를 구원내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는 그 한 가지 길을 걸으시므로 온 인류를 구원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삶과 죽음 모두가 우리에게 선물이셨습니다. 움오름 교회가 외적으로 화려한 교회, 많은 성도 수, 많은 헌금을 자랑하는 교회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길을 끊임없이 묵상하며 본받아 걸어가는 교회, 어떻게 하면 우리 통해 예수님께서 드러나실까 그것만 궁리해서 오직 예수님만 보이는 진짜 교회, 세상에 선물이 되는 교회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길을 걷기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타협하지 마십시오! 저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앞으로 남은 3주의 사순절 기간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와 기도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드리신 기도에 집중해서 그 뜻을 묵상하고 그 뜻을 우리가 어떻게 일상 속에서 받들고 지속할 수 있을지 상고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실천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기도자료들도 함께 나누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자로 빌라도에게 넘겨지셨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이들에 의해 선동된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거세게 요구했습니다. 빌라도는 그들의 소리를 이기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에 넘겨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넘겨받은 로마 군인들은 십자가 처형 전에 예수님을 관정 안에 있는 뜰 브라이도리온으로 끌고 갔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날카로운 짐승의 뼈조각이 달린 채찍으로 예수님을 채찍질 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왕이심을 조롱하려고 그 옷을 벗기고 자주색의 옷을 입혔습니다. 왕이니까 왕관을 씌워준다며 가시를 엮어 가시관을 머리에 씌웠습니다. 왕은 지팡이를 들어야 한다며 갈대를 오른손에 쥐어 주고 조롱삼아 무릎을 끓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하라 희롱했습니다. 다시 그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리고 더러운 침을 그 얼굴에 뱉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부드러운 살을 가지시고 뜨거운 피를 가지신 한 사람, 감정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예수님은 이 모든 채찍질과 수모와 희롱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처형장소인 골고다로 끌려가셨습니다.

33절, “해골이라는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골고다에 도착하자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십자가 처형 과정을 보면, ‘십자가’로 옮긴 헬라 낱말 ‘스타우로스’는 본래 땅에 수직으로 고정해놓은 말뚝을 뜻합니다. 처형당할 사람이 가로지르는 나무를 처형장소로 가져갑니다. 그러면 로마 군인들은 수직으로 고정해놓은 말뚝에다가 가로지르는 나무를 달아서 거기에 처형 대상자의 손을 먼저 묶고 못을 박습니다. 그런 다음에 발을 말뚝에 묶거나 못으로 단단히 박았습니다.(독일성서공회판 용어해설 중). 또 십자가형은 처형 전에 죄수들에게 큰 수치심을 주기 위해 그 입은 겉옷과 속옷을 모두 벗겼습니다. 그리고 이 벗긴 죄수의 옷은 형을 집행한 자들이 가져도 되었습니다(요19:23-24).


로마 군인들이 처형 관례대로 예수님의 옷을 모두 벗겼습니다. 채찍질로 상하고 찢기고 패인 맨몸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실 때는 추운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집으로 끌려가셨을 때 그곳에 모여 있던 이들이 모닥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심한 채찍질과 머리의 가시관으로 인해 이미 많은 피를 흘리셨고 몸의 체온이 많이 떨어진 상태셨습니다. 여기에다가 추운 날씨에 발가벗겨지고 찢겨진 상처에 파고 드는 추위가 얼마나 칼처럼 아프고 시리셨을까요? 아무 죄없이 그 모든 고통을 홀로 받으시며 아무에게도 그 고통을 이해받지 못하실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로마 군인들이 상처투성이의 벌거벗은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가로막대 위에 두 팔을 벌리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을 밧줄로 묶었습니다. 그 손에다 대못을 박았습니다. 못은 살을 꿰뚫고 들어갔고 그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못 박히심에 대해서 아주 간결하게 기록했습니다.

23:33,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체와 감정을 한 인간이십니다. 이러하신 분께서 십자가에 못이 박히셨을 때 그 육체의 고통과 그 내면 안에서 일어났던 두려움, 고뇌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결코 그 고통과 고뇌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이 우리 위해 고통받게 하신 것과 같이 우리 역시 예수님의 고통에 내적으로 참여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체험에 초점을 맞추고 그 십자가에 못 박하심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과 고뇌와 눈물에 나도 함께 참여케 해주시기를 청할 때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체험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통을 우리가 내적으로 체험케 해주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바로 나를 위해서 고통받으셨음을, 부정할 수 없는 체험으로 강화시키고 깊게 해주십니다.


제가 예전에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할 때였습니다. 본문을 따라 기도 안에서 상상으로 예수님께서 곧 십자가에 못이 박히시려는 장면을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처형을 담당한 로마군인이 예수님의 손에 못을 박기 위해 못과 망치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손 위에 못 박을 위치를 잡고는 망치를 그대로 내려쳤습니다. 그 순간 그것을 보고 있던 제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습니다. 실제로 제 몸이 굳어버렸는지, 아니면 제가 내적으로 그렇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실제로도 몸을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제 육체의 기능도 멈추었습니다. 제 숨이 멎었고, 신음도 안으로 먹혔습니다. 손가락, 발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고 저의 모든 것이 멈추어 버렸습니다. 그 순간 세상도 정지했습니다. 그 어떤 미세한 움직임도 있으면 안된다고 느꼈습니다. 눈꺼풀 조차 움직여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런 움직임 조차도 육체에 폭풍같은 진동을 일으켜 몸이 산산이 흩어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온 세상이 멈춘 그 고통의 한 가운데서 예수님의 다른 한 손에 두 번째 못이 내려쳐졌습니다. 또 세 번째 못이 발에 박혔습니다. 아- 그 고통은 세상이 정지되는 고통… 어떻게 더 표현하고 싶지만 저는 다른 말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말씀 기도가 끝난 후에 저는 이 체험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체험이 뭐지? 이런 기도 체험은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만들어 낼 수 없는 체험이었습니다. 기도후 지도 교수님께 이 경험을 말씀드렸더니, 예수님의 수난의 고통이 내적으로 제게 전달된 것이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수난 체험 안으로 저를 참여시켜주신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 기도 체험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저를 위해 어떤 아픔과 슬픔을 당하셨는지, 어떠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셨는지 더 깊이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 예수님을 더욱더 사랑하고 가까이 따를 마음을 불러 일으켜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시고 그 못에 온 몸을 지탱하여 십자가에 달려 계셨습니다. 그 가운데서 기도하셨습니다.

34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 박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사53: 12절 중반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사람이 어떤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으면 다른 것을 돌아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다른 것에 눈 돌릴 수 있다면 그것이 내 고통보다 더 크거나 중요하다고 여길 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기도하시지 않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들을 용서해주옵소서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 오히려 신성모독이라는 죄를 씌워 십자가게 넘겨준 자들, 그리고 채찍질하고 온갖 희롱하며 못 박은 자들, 이런 이들의 죄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이 처절한 고통을 겪으시면도 예수님은 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을까요? 기도하셔야만 하셨을까요?

나는 원수도 사랑한다. 나를 원수를 용서한다. 나는 나를 미워하고 모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이것을 우리에게 본으로 보여주시기 위해서 였을까요? 네. 예수님은 진실로 이런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완전한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분이시기에 그들을 용서하셨고 오늘 우리도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유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토록 힘든 고통을 겪고 계시면서도 그 못 박은 이들의 사죄를 위해 기도하신 것은 자신의 십자가의 고통보다 저들의 죄가 더 아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죄가 자신의 십자가보다 예수님을 더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 시간 모든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을 죽으시지만 죄를 지으며, 또 죄를 짓고도 죄인 줄도 깨닫지 못하는 저들의 죄가 예수님은 더 아프셨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당하는 고통 중에 최고는 십자가의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는 그보다 더한 고통이 우리의 죄였습니다. 죄를 짓고, 또 죄를 지으면서 죄인 줄 모르는 우리의 죄에 대한 둔감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면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아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 자백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지성이며 복음주의 신학자요 설교자인 존 스토트 목사님은 “네 죄를 고백하라”라는 책에서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을 둘러싼 가장 큰 덫은 바로 죄에 익숙해져 가는 경향이다. 오늘의 교회는 죄 고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상실했기에 회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현대교회는 죄 고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상실했다고 지적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왜 자꾸 죄에 대해 기도하라고 해서 마음 불편하고 힘들게 해요? 성경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하지 않았나요?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다 하셨는데 굳이 우리 죄를 들추어서 왜 힘들게 회개해야 해요?

여러분은 이 물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다 해결해 놓으셨으니 죄를 지어도 되고, 죄를 지으면 그냥 은혜로 덮어도 된다는 의미일까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는 그 십자가 위에서 굳이, 왜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 안에는 우리만이 아니라 분명 저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의 희생이 죄에 대한 회개를 약화시키거나 폐기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은 우리가 지은 죄를 성급하게 은혜로 덮고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가 아니라 너희의 죄 값을 내가 담당했으니 내 죽음과 피를 근거로 하나님께 너희 죄를 자백하고 죄사함의 은혜를 얻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실 때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눅24: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두 명의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 중 예수님은 오직 회개한 강도에게만 낙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의 기도에는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사도 베드로도 회개와 죄사함을 설교했습니다.

행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계2:5,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예수님과 성경은 일관되게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 회개하고 돌이켜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새롭게 된다.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

복음의 정중앙에 “죄의 고백”이 있습니다. 존 스토트는 죄를 자백하는 것은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요일 1:8-9.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죄와 죄 사함의 연결 고리는 죄의 고백입니다. 죄를 고백하는 곳에 죄사함이 있습니다. 인간의 죄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사죄가 불가능한 것처럼 죄사함은 죄의 자백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성경은 선언하십니다.

유경호 목사님께서 예전에 “제자와 무리”라는 설교하셨을 때 어느 성도분이 이런 말을 하셨다고 하지요. “우리에게 제자로 살아라 하는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일주일 내내 힘들게 살다 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해주는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 혹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싶은 분이 계실까요?

“우리한테 죄를 자백하라 회개하라 말씀은 마세요.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부담주는 말은 하지 마세요. 그저 교회만 다니면 예수님 믿는 것이고 그러면 구원얻을 수 있다고 말해주세요. 편하게 예수님 믿게 해주세요.“

이런 생각과 태도들은 복음을 우리 인간의 편리에 맞추는 것이지 우리를 복음에 맞추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8-9).

그러면 어떤 분의 마음 속에는 끝까지 이런 의문이 들 것입니다.

그럼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죄사함의 은혜가 없다는 말씀인가요?

사람 사이의 예로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어떤 두 사람이 나에게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나는 많은 피해를 보고 엄청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나의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두 사람 모두 들었습니다. A는 내가 자기의 죄를 모두 용서했다는 말을 믿었고 나를 고맙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B는 나를 찾아와 용서를 구했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당신이 저 때문에 얼마나 힘든 고초를 겪었는줄 다 압니다. 용서해주세요. 나에게 머리를 숙이며 울면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이미 당신의 죄를 모두 용서했습니다. 이제 그 죄에서 놓여 평안하십시오.” B는 나의 용서를 귀로 들었던 것에서 이제 온 몸으로 경험하고 아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A와 B중, 어떤 사람에게서 내가 그 때문에 당한 고통과 용서가 헛되지 않았다고 느끼겠습니까? 그리고 누구랑 죄 때문에 멀어졌던 관계도 다시 회복하겠습니까? B죠.

그러나 B와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는 A는 어떨까요? 그는 나로부터 직접 용서받고, 직접적으로 화해한 체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용서받았다는 느낌도 없고 문득 문득 용서받았다는 믿음이 흔들리고 의지적으로 용서받았음을 믿으려고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나로부터 용서를 받았지만 나와 친밀해지지도 않고 계속 멀찍이 떨어져 있을것입니다.

A의 믿음은 어떤 때는 하나님의 용서가 믿어졌다가 어떤 때는 의심되고, 어떤 때는 천국에 갈 것 같다가 어떤 때는 못 갈 것 같은, 왔다 갔다 하는 믿음, 흔들리는 믿음이지요. 이런 믿음을 가진 이가 나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진정 삶이 변화되고 거듭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구원 얻을만한 믿음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믿음은 반드시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끌어 갑니다. 내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 앞에서 철저히 나의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청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가 단순히 머리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온 존재로 경험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회개를 통해 더욱 강화되고 새롭게 됩니다. 거듭난 믿음이 되게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진정한 회개의 눈물 한방울이 어떤 치료약보다 뛰어나서 나를 치유하고 나와 공동체를 건강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통 중에서 자신을 못박은 이들의 죄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는 그들의 둔감함을 십자가 고통보다 더 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죄도 아파하는 것을 아니?

죄를 짓고, 죄를 지어도 진정한 죄 고백 없이 성급하게 은혜로 모든 것을 덮으려는 우리의 피상성을 슬퍼하십니다. 점점 죄에 익숙해져 가는 우리의 둔감함을 마음 아파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A와 B중 누구와 가깝습니까?

혹시 A와 같으시다면 B와 같은 경험을 하셔야 합니다. 내 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그리스도 앞에서 나라는 존재와 나의 죄를 보고 그 뿌리를 찾고 깊이 통회하며 정화시키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나의 죄를 돌아보며 자백하고 그리스도의 용서를 체험하지 못한 A와 같은 분들이 계시다면 이번 사순절 동안 죄묵상을 권해드립니다. 남은 사순절 3주 동안 아니 이후에도 하루 1시간씩 시간을 내어 내 삶을 돌아보며 그 가운데서 죄를 찾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먼저 내 삶을 10, 20대, 30대…현재까지 나누고 예수님과 함께 각 시기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께서 보게 해주시는 실제적인 죄들을 보며 죄를 아파하고 또 자백하며 용서룰 구합니다. 아니면 나 자신을 곰곰이 돌아보고 미리 죄 목록을 만들어 놓고 한 가지씩 기도하셔도 됩니다. 구체적인 기도자료를 따로 드리겠습니다. 이미 자신의 삶에 대해 죄묵상을 하신 분들은 자신의 죄된 성향이나 기질에 대해 기도하실 수 있습니다.


죄묵상을 하실 때 중요한 것은 첫째, 나의 죄를 그리스도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적 시각이나 세상적 가치관, 윤리적, 도덕적 기준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적 시각에 너무 젖어 살아왔기 때문에 나의 죄조차도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고 죄다 아니다 판단합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알아듣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죄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알아듣고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됩니다. 감동이 있고 그 감동에 터잡은 알아들음으로 존재를 변화시키게 됩니다.

둘째는 과도한 죄의식보다 새로운 생명과 성장에로 나간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죄를 돌아보는 힘든 작업입니다. 나도 별로 죄지은 것도 없고 크게 지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생각했다가 기도가 깊어지면 너무 슬프고 부끄러워서 자기 절망감이 일어납니다. 기도를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강해집니다. 이때 절대 포기하시면 안됩니다. 이것은 기도가 제대로 되고 있다는 증거이니 감사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과도한 죄의식이 죄묵상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죄의식을 가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을 통해 새로운 생명과 성장을 이뤄낼 것을 믿는 것입니다. 반대로 죄를 돌아보는데도 아무 부끄러움이나 슬픔도 일어나지 않고 맹숭맹숭하고 내가 지은 죄 목록만 쭉 훑고 있다면 이것은 기도가 잘 안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때는 혹시 내가 들춰내기 두려워서 의식적으로 누르고 있는 죄가 있는지 살펴봅니다. 또 진정으로 성령님께 내 죄에 대해 진정하고도 큰 아픔과 눈물을 청합니다.


셋째는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일에서 유익한 것은 이것저것 많은 것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것을 깊이 맛보는 것입니다. 대충 죄를 흝어보고 죄 목록을 나열해서 성급하게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두, 세번 반복하여 기도합니다. 죄를 깊이 인식하고 그것이 혐오스러워질 때까지 기도합니다. 이때 자기 행위가 얼마나 무질서했는지 알게 되고 죄짓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를 반복하는 목적입니다.

또 내가 그 사건(상황)에 대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해석들을 넘어서 새로운 측면을 알아들을 때까지, 그것이 내 영혼에 위로와 힘이 될 때까지 반복해서 기도합니다.

사순절이 끝난 후에 죄묵상을 하신 분들 중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나누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죄를 바라보는 태도, 죄에 대한 인식의 변화, 정직하게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바라본다는 것의 느낌, 내 안에서 경험된 감정들, 죄의 경향들, 감추어진 동기들 등.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자신을 못 박은 이들의 죄를 아파하고 슬퍼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빌어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을 못박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죄사함의 은혜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내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가장 하나님 자녀다운 체험이요,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체험입니다. 이것은 행3:19절의 사도 베드로의 말처럼 존재가 새롭게 창조되는 구원 체험이요, 주님과 더욱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는 화해의 체험입니다.

이 사순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가서 나의 죄를 돌아보고 자백하고 죄사함의 은혜를 체험해보시지 않겠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이신 주님, 주님은 우리를 주님께로 부르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저희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저희들의 삶을 가지런히 하지 못했던 지난 날을 슬퍼합니다.

주 예수님, 저희의 죄를 보고 아파하시는 그 마음을 저희에게 나누어주소서

저희가 타인들에게 준 아픔과 상처에 대해 참회하도록 가르치소서

세상 안에 살되 세상에 중심을 두지 아니하고 주님을 향해야 함에도

세상의 부귀와 허영에 시선을 두었던 저희의 죄들을 슬퍼합니다.

이 모든 것들로 주님께서 상처받으셨음을 알고 슬퍼합니다.

이제 주님을 향하고자 합니다. 주님, 저를 당신에게로 이끌어주십시오.

주님의 빛으로 저희 영혼을 비추시어 저희 죄를 똑바로 보고 죄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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