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1.02.28 움오름 주일 설교 -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18-23)

최종 수정일: 3월 6일










요한복음 21:18~23

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9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20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21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2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23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설교문


1. 배신자에서 고귀한 목양자로


예수님은 3년 전과 같은 장소, 동일한 시간을 비롯해 유사한 상황을 만드신 후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때로는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는 직접 경험하고 스스로 깨닫는 것이 훨씬 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수백마디 말로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 한번 그 사랑을 직접 체험하는 것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놀라고, 반갑왔지만, 미안하고 죄스러웠기에 마음을 쉬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이 만드신 아침 정찬을 차마 받아들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일일이 한명, 한명에게 구운 빵과 생선을 건네 주셨습니다. 말없이 받아든 제자들은 북받쳐 오는 마음에 눈물과 함께 아침밥을 삼켰습니다. 그러고보니 그날 제자들이 먹은 것은 그냥 일상의 한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평생에 잊지 못할 사랑의 밥상, 섬김과 화해의 밥상이었습니다.


식사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주님을 사랑하는지 3번이나 물으셨습니다. 그 물음은 베드로에게 거듭 하신 질문이었지만, 그 한 사람만을 특정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주위에 둘러 선 제자들 뿐 아니라, 주님을 믿는 모든 이들을 향한 물음이었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는 주님의 물음은 제자들끼리 도토리 키재기 시키는 그런 비교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가치있게 여기고, 우선순위를 뒀던 그 어떤 것들보다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나아가 그것은 앞으로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겠느냐는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3번의 거듭된 주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동일한 대답 이후 주님은 동일하게 “내 양을 먹이라”는 당부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초기교회를 책임질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당부였습니다. 동시에 그가 지난 과오로 인해 떠안게 된 ‘배신자’라는 낙인에서부터 자유롭게 하시려는 주님의 배려였습니다.


신학교 시절 그런 교수가 있었습니다. 수업시간에 툭하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은 당겨주고 끌어줄 힘은 없지만, 끌어내릴 힘은 충분히 있다. 그러니 나한테 찍히지 마라. 잘 해라!”


처음엔 웃기려고 하는 농담인줄 알았는데, 한 학기 동안 몇번 반복해서 듣다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100% 리얼 진심이었습니다. 그 이후 그 사람을 단 한번도 선생이요, 스승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신학교에서 평생 선생님으로 모시고 따를 존경하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심지어 총장님(서정운)도 제가 무척 좋아해서 “교장선생님~”하고 부르다가 다른 교수님께 버릇없다고 당시 혼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분은 채플설교 때 그 이야기를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입생 중에 저를 ‘교장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럼, 교장선생님으로서 여러분들께 3가지 당부의 말을 하겠습니다. 첫째, 잘난 척 하지 마세요! 둘째, 아는 척 하지 마세요! 셋째, 있는 척 하지 마세요! 여러분 평생에 이 3가지 척을 하지 마세요”


앞선 교수와 얼마나 상반됩니까! 무릇 스승이요, 선생님이라면 이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에게 얼마나 잘 하는지를 보고, 소위 찍고, 끌어내리겠다고 공갈협박하는 사람은 학생에게 굴레를 씌우는 공갈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적어도 스승이라면, 학생을 사랑하는 선생님이라면, 교우들을 아끼는 목회자라면, 씌워진 굴레마저도 벗겨드리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갈릴리 호숫가가 바로 이런 해방의 자리였습니다. 무너졌던 사람이 사랑 안에서 다시 세워지는 은혜의 자리였습니다.


무너지셨습니까? 부숴지셨습니까? 그래서 아직도 아픔이 있고, 슬픔이 가시지 않습니까? 2천년 전 새벽 갈릴리 호수로 오셨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힘든 굴레를 안고 어찌할지를 몰라하는 우릴 위해 친히 짐을 벗겨주십니다. ‘배신자’로, ‘실패자’로 더 이상 살지 말라 하십니다. 주홍글씨에서 벗어나 ‘주님의 양’을 먹이라 하십니다. 주님의 양을 먹이는 고귀한 사람으로 이 땅을 아름답게 살라 하십니다.



2. 젊어서는…, 늙어서는…


3번째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상한 예언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18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는 말은 원문으로 표현하면, ‘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σοι(아멘, 아멘, 레고 소이)’입니다. 직역하면, ‘확실히 확실히 너에게 말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말씀하시는 그 일의 중요성과 더불어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쓰신 표현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들으며 베드로는 어쩌면 뜨끔했을지도 모릅니다. 요 13장의 상황이 떠오르며 긴장했는지도 모릅니다. 이 장면을 살펴보시겠습니다. 요 13:38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σοι(아멘, 아멘, 레고 소이)’입니다. 오늘 본문 18절과 동일한 ‘확실히 확실히 너에게 말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주님이 ‘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σοι(아멘, 아멘, 레고 소이)’라고 하실 때 베드로는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이렇게 호언장담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5)


그 말을 한지 불과 몇시간도 지나지 않아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저주까지 했습니다. 동일한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베드로는 자신의 과오가 생각났을 겁니다. 이를 기억하던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다는 확신과 두려움을 갖고 그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베드로를 긴장하게 했던 주님의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런 뜻입니다.


“젊을 때는 니 맘대로 살았지? 나이들어서는 남이 시키는대로 살 것이다”


‘뭐, 젊을 때 자기 맘대로 살지 않는 사람 어디 있어? 다 자기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지 않아? 그러다 나이들고, 철들면 달라지지. 자기보다 가족 먼저 생각하고, 다른 사람 생각하면서 살지. 이게 인생 아니야? 다 그런거지’ …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도 그렇게 이해하면 될까요? 요한은 이러한 오해를 미리 방지하기라도 하듯 이렇게 각주같은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19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


“젊어서는 이러이러하겠고 늙어서는 이러할 것이다”는 주님의 말씀은 일반적인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젊을 때 자기 하고 싶은대로 살았던 베드로가 삶을 돌이켜 어떻게 살다가 죽게 되는지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죽음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죽음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거룩한 순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전통적인 해석으로는 ‘네 팔을 벌리리니’라는 부분을 십자가에 달리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이런 순교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대부분의 죽음은 죽음이라는 한 점 자체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살았던 선으로서의 결과로 죽음을 평가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죽음을 여러 각도에서 정의하고 바라볼 수 있겠지만, 신앙의 입장에서 본다면, 결국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결정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젊을 때 혈기 때문에 맘대로 살았지만, 나이 들어서는 ‘남’이라고 기술된 성령님께 이끌리어 살았습니다. 그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지를 가리키심’이라고 한 것은 결국 베드로가 이후 어떤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지를 가리키심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문득문득 철없던 젊은시절이 생각나 부끄러우십니까? 맘대로 살았던 그 삶이 후회되십니까? 괜찮습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비록 되돌릴 수는 없지만, 지금이라도 우리 팔을 벌려 성령님께 맡기고 그분이 이끄시는대로 걸음을 옮기신다면 괜찮습니다. 이전까지 비뚤었던 우리 삶의 선조차 성령님께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의 선으로 새롭게 그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너는 나를 따르라


주님은 베드로의 죽음을 예언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의 선으로서의 결과였습니다. 주님은 이어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19절). 요한은 이 말씀을 헬라어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ἀκολούθει μοι(아콜루데이 모이). 이 말씀은 일찌기 예수님께서 요 1:43에서 빌립에게도 하셨던 말씀입니다. “나를 좇으라”, “나를 따르라” 동일한 말씀입니다. 무릇 제자의 삶이란? 스승을 따라 가는 걸음이기에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다음 장면을 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연이은 베드로의 2가지 행동 때문입니다.


첫째, ‘이해력 부족’을 드러낸 행동입니다.

: 주님께서 베드로의 삶과 그 결과로서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며 “나를 따르라”(19절)라고 하시자 그것을 제자로서의 상징적인 따름이라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본문 속 정황으로 보건데, 그는 다른 제자들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께로 더 다가갔던 것 같습니다. 자신과 더불어 한적한 곳에서 따로 하실 말씀이 있는 것으로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으로 말씀드릴 두번째 그의 행동에서 더 드러납니다.


둘째, 비교의식에 절어있는 베드로의 행동입니다.

: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일어나 주님 곁으로 다가가던 베드로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뒤에 있던 요한도 벌떡 일어나 주님 곁으로 더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보자면, 베드로 뿐 아니라, 요한도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주님 곁으로 더 오라는 말로 착각한 것 같습니다.


자신만 주님을 따르는 것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의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인식하던 요한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본 베드로가 갑자기 주님께 물었습니다. 21절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심각한 상황에서도 베드로는 요한을 의식했습니다. 요한은 어떻게 살지, 어떻게 죽을지 궁금했습니다.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진지하고도 심각한 상황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은 베드로가 평소 요한과 자신을 얼마나 비교하며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가 어느 만큼이나 요한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질문을 들으며 예수님은 또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그는 그대로 귀한 존재이고, 요한은 요한대로 소중한 존재인데, 비교한 나머지 자신의 존귀함을 상실한 채 묻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에 주님은 베드로의 질문을 무시하듯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2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주님은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계획과 요한에 대한 계획이 다르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자신이 걸어갈 길에만 집중하며 주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남과 비교하다, 정작 자기 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상실하게 됩니다.



4. 행복한 살리에르


가상적인 이야기가 많이 가미되어 본래 인물의 성격과는 거리가 있다고 하지만, 나름 깊은 메시지를 던져 준 영화가 있습니다. 1984년에 제작되어 아카데미상 8개를 석권한 《아마데우스》(Amadeus)입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천재적 재능을 시기한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1823년 눈보라치는 밤,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정신병원에 수감된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가 그를 찾아온 신부에게 자신의 음악가로서의 인생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며 고해합니다.


“내가 오직 원했던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었소. 하느님은 내게 그 열망을 주셨지만, 날 또한 말 못하는 이로 만드셨소. 어째서? 말해 보시오. 하느님께서 내가 주님을 음악으로 찬미하는걸 원하지 않으셨다면 왜 내 몸을 좀먹는 그런 열망을 심으셨는지… 그러면서 왜 재능은 주시지 않으셨는지 말이오.”


표면적으로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드러내며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추적하는 영화로 보이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 보면 아무리 노력해도 결단코 천재를 따라잡을 수 없었던 평범한 사람의 고뇌와 좌절을 그려낸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나이 20대에 이 영화를 보며, 참 많이도 안타까왔습니다. 제게 왜 모짜르트와 같은 천재성이 없는지가 안타까왔던 것이 아니라, 살리에르가 자신만의 삶을 살지 못했던 것이 안타까왔습니다. 특별히 이 장면이 너무 가엽고 슬펐습니다.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처럼 뛰어난 음악을 만들고 싶은 간절함에 몸부림치며 모차르트의 악보를 분석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모차르트의 천재성만 거듭 확인할 뿐이었습니다. 절망한 살리에르가 하나님을 이렇게 원망합니다.


“신이여, 왜 내게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만 주시고 그것을 만드는 재능은 주지 않으셨습니까?”


질문이 잘못 되었습니다. 잘못된 질문이 살리에르를 불행으로 이끌고 갔습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사랑하며 살면 됩니다. 천재 모짜르트라고 다 행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을 감사하며 걸어가면 됩니다. 내게 없는 것에 집중하면 삶이 피곤해 집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고유한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을 신앙의 언어로 바꿔보면 이렇습니다. 부르심을 따라 살면 됩니다. 주신 자리에 감사하며 소명에 따라 살아가면 됩니다. 어디서 대단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또는 무엇에) 이끌리어 내 삶을 살아가는지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선을, 그리고 마지막 선의 종결점인 죽음을 하나님께 영광되게 만듭니다. 천재 모짜르트가 아니어도 행복한 살리에르로 살아가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5. 나를 따르라


신학교 시절부터 제가 따랐던 선생님(박동현 교수)의 학교 연구실엔 선생님의 선생님(서정운 총장)이 은퇴하시면서 물려주고 가신 본 회퍼 목사의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본 회퍼 목사의 이야기를 끝으로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히틀러와 나찌가 세상을 광란으로 몰아가던 때에 본 회퍼 목사는 "세상에서 타자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수행해야 할 제자직을 말하면서 동시에 이 세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성화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따르라』라는 저서에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두 단어로 요약했습니다. 하나는 ‘비범성’이고, 다른 하나는 ‘은밀성’입니다. 주님의 제자된 그리스도인은 분명 ‘비범성’을 살아내는 존재입니다. 팔복을 통해 강조되는 재물, 행복, 평화, 권리, 자기 의, 존엄성, 자기기준, 폭력을 포기함으로써 비범성은 시작합니다.


하지만,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비범성을 나열하는 동시에 비범성이 가진 역설적인 그림자를 설명합니다. 진정한 제자는 비범성의 그림자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비범성은 늘 자기교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범성이 신앙의 목적이 될 때, 비범성은 그리스도를 나타내기보다 자기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본회퍼는 ‘은밀성’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비범한 삶이 목적이 아닌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일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다른 이에게 내세우거나 자랑할 목적이 아닌 일상적으로 살아내고 감당하는 ‘자연스러운 삶’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비범성과 은밀성이 조화된 삶을 본 회퍼는 진정 주님을 따르는 삶이라고 강조합니다.


제자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15년전 어떤 교회에서 ‘제자와 무리’에 대한 설교를 마치고 교우들과 인사를 나눌 때 한 분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제자로 살아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 하지 마세요! 일주일 내내 힘들게 살다 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해 주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 말을 듣던 때나 지금이나 그분의 말씀을 생각하면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한평생 교회를 위해 열심히 섬겼으면서도 늘 인정받기를 원했고, 비교의식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그분의 삶이 너무 슬픕니다. 그 어떤 이보다도 똑똑하고 자기 분야에서 탁월했던 분이 자신에게 주신 자리와 분량의 소중함을 알고 사셨더라면 얼마나 더 행복했을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정해진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주신 그 자리가 꽃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맡기신 교회와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무를 다해 가는 것, 바로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곳이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자리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 꽃자리 >

-시: 구상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엮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하나님~

우리를 부르신 이 자리가 주님이 허락하신 꽃자리임을 깨달아 책무와 소명을 다 하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이제는 관람하는 객석에서 내려와 진리와 생명을 위해 뛰어가는 제자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 속에 담기를 주저치 않게 하시고, 이웃의 고난을 피하지 않고 같이 짊어지는 제자되게 하옵소서.


비교하며 갈등하며 괴로워하다 우리 생을 낭비치 않게 하시고, 각자에게 주어진 그 자리의 소중함을 깨달아 가시방석 같은 우리 자리를 꽃자리로 바꾸어 가는 우리 삶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언젠가 우리를 부르시는 삶의 마지막 점인 죽음에 이르렀을 때, 우리 죽음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했다는 주님의 평가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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