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1.02.21 움오름 주일 설교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

3일 전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21:15~17

15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16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17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설교문


1. 밥상머리


밥상의 한쪽 언저리나 그 가까이를 ‘밥상머리’라고 합니다. 그 밥상머리에서 온 가족이 함께 밥을 먹을 때 이루어지는 인성, 예절 등에 대한 교육을 일컬어 ‘밥상머리교육’이라고 합니다. 예부터 자녀의 올바른 교육은 바로 밥상머리 대화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가족이 둘러앉은 밥상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덕목을 가르쳤습니다. 밥상머리는 이런 예절 뿐 아니라, 용서하고 격려하며 화해하는, 삶의 철학이 대물림되는 자리였습니다.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 예절, 언행을 처음 배우는 곳이 가정이었기에, 밥상머리는 사람으로서의 기본을 배우고 익히는 훈련의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의 삶을 보내기 전에 저는 우리나라만 예부터 이런 교육을 해왔는줄 알았는데, 겪어보니 서양사람들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특히 독일부모들 같은 경우 <나이든 어른이 먼저 첫술을 뜰 때까지 기다리기, 음식을 먹을 때 입을 벌리지 말기, 소리내며 먹지 말기, 레스토랑을 비롯한 공공장소에서 소리내며 뛰지 말기…> 등 엄격한 식사예절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우리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유아기에 그런 교육을 받고 자녀들이 성장한 이후의 식사자리는 우리보다 훨씬 더 유쾌하고 흥겨운 자리라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이탈리아 가정에 초대받아 나누었던 저녁식사 자리는 한마디로 흥겨운 여흥의 자리였습니다. 얼마나 그분들이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지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밥상머리였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이런 밥상머리가 떠오릅니다.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세워 주시며, 용서하고 격려하며 화해케 하는 은혜가 촉촉히 스며드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인 15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아침밥을 먹고 난 뒤의 일어난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아침밥 먹던 장면인 15절 이전 구절들을 가만히 살펴보았습니다. 밥상머리 분위기가 좀 이상합니다. 주님이 손수 아침정찬을 차려 주셨는데도 어느 누구 하나 감사히 잘 먹겠다고 인사한 사람이 없습니다. 먹으라고 하시는데도 제자들이 나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셔 구운 빵과 생선을 건네주셨는데도 그 다음 아무런 말들이 없습니다. 마치 ‘음소거’(mute) 기능을 누른 것만 같습니다.


분명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화기애애할 것도 같은데, 아무런 대화가 없습니다. 제자들은 그렇다치더라도 주님께서 무언가 호통을 치시든가, 교육을 하시든가 그러셔야 할 것 같은데, 주님마저 아무런 말씀이 없습니다. 그저 갈릴리 호숫가에 출렁이는 물소리와 숯불의 붉은 하품소리만 고요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이런 것 아닐까요? 하고 싶은 말 많지만, 다 하지 않는 것!, 일일이 잘잘못을 따지기 보다는 그냥 안고 가는 것!, 상대의 연약함을 알기에 꾸중하기 보다는 따뜻한 밥으로 채워주는 것!… 그날 갈릴리 호숫가는 이렇게 또 다른 형태의 밥상머리였습니다. 말로 교육하고, 가르친 밥상머리가 아니라, 사랑으로 제자들을 품으신 주님의 밥상머리였습니다.



2. 요한의 아들 시몬아


제자들은 아무 말없이 아침을 들었습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때로 목이 메인 채 빵을 뜯고, 생선을 삼키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주님도 그저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식사가 어느덧 마쳤을 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 사용하신 호칭은 ‘요한의 아들 시몬’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family name)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성이 없이 이름만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동명이인들을 구분하기 위해 아버지의 이름을 먼저 붙여서 ‘아무개의 아들 ㅇㅇ’라고 부르거나, 출신지역명을 넣어서 ‘어느 지방사람 ㅇㅇ’라고 호칭했습니다.


이런 전통과 호칭방식을 감안한다면,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신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호칭은 전혀 어색지 않습니다. 하지만, 평소 주님은 베드로를 이렇게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시몬아’(눅 7:40, 막 14:37)라고 부르시거나 ‘베드로야’(눅 22:34)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유대전통을 따라 베드로를 호칭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에게 예의를 갖추어 그를 부르셨습니다.


이전에 주님께서 베드로를 오늘 본문과 같이 호칭하신 적이 한번 더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의 상황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베드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마 16:16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님을 향한 정확하고도 위대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에게 예의를 다해 호칭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그때와 오늘 본문의 상황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주님은 베드로가 신앙고백 할 때 단 1번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속에서는 연이어 3번이나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무엇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일까요? 주님의 이 호칭 속에는 어떤 의도가 깃들여 있을까요?


이것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이 3년전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던 상황의 재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아실 수 있습니다. <밤새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함, 동이 터올 무렵 예수님의 등장, 그물을 어느 곳에 던지라고 명하심, 수많은 물고기를 잡음>, 여기에다가 대제사장의 집 뜨락 모닥불을 떠올리게 하는 숯불 등을 주님은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향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고 물으셨습니다.


무너졌던 베드로, 실패했고, 절망했던 그를 다시 일으켜 주시고, 세워 주시기 위함입니다. 베드로에게 다시 주님을 사랑할 기회를, 주님을 위해 살아갈 마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그날 아침 갈릴리 호숫가는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하던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용서와 용납의 밥상머리였습니다. 실패한 배신자 베드로를 예의를 다해 부르시며 다시 수제자로 세워시는 사랑의 자리였습니다. 주님의 용서에 힘입어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하던 베드로가 다시 일어서는 부활의 자리였습니다.


베드로에게 갈릴리 호숫가가 용서와 부활의 체험장이었다면, 13번째 사도인 바울에겐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이 그런 자리였습니다. 도저히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부끄럽고 참혹한 과거의 잘못 앞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있을 때, 주님은 아나니아의 기도를 통해 사울의 두 눈에 비늘이 벗겨지게 하셨습니다(행 9:17-18).


그것은 스스로 큰 자로 여기던 사울이 주님 안에서 작은 자 바울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바울을 해방(롬 8:2)시키던 순간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때의 기쁨과 감격을 기억하며 고린도교회의 교우들에게 이렇게 전했습니다. 고후 5:17 유진 피터슨의 the message 번역본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누구든지 메시아와 연합하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고, 새롭게 창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옛 삶이 지나가고, 새로운 삶이 싹트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새로운 출발이 있습니다.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마다 새로워지고, 새롭게 일어서는 이 생명의 역사가 우리 삶 속에서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드립니다.



3.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다음으로 요 21장에서 가장 정점을 이루는 부분인 예수님의 3번의 물음과 베드로의 3번의 대답을 살펴 보겠습니다. 워낙 유명한 부분이다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설교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들었던 설교 중에서 가장 지성적이면서도 감동적이었던 것은 ‘아가페’와 ‘필레오’의 구분이었고, ‘내 어린 양’(15절), ‘내 양’(16절, 17절)에 대한 분류와 적용이었습니다. 매우 지성적이고도 언어학적인 설교였습니다.

간략하게 풀어드리면, 이런 내용입니다. 요 21:15에서 주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사용한 ‘사랑’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였습니다. 이 물음에 베드로는 친구간의 사랑인 ‘필레오’로 대답했습니다. 자신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절대적인 사랑으로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겸허한 고백이었다는 해석입니다.


이에 주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며, ‘어린 양’에 해당하는 ἀρνίον(아르니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사랑과 섬김의 대상을 여리고 작은 어린 양에서부터 시작하라는 당부라고 본 것입니다.


16절에서 예수님은 첫번째 질문과 동일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아가페’로 물으셨고, 베드로는 여전히 ‘필레오’로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며, πρόβατον(프로바톤), 다 자란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른 양들도 목양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마지막인 세번째에 주님은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가셔서 ‘필레오’로 사랑하는지를 물으셨고, 베드로는 ‘필레오’로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주님은 두번째 때와 같이 πρόβατον(프로바톤), 다 자란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와같은 헬라어 단어의 해석이 당시 제겐 매우 신선하고도 지성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도 이 본문을 설교하거나 성경공부할 때에 자주 이런 접근과 해석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쭉 살펴보다 마지막 장인 21장에 이른 지금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과연 주님께서 그런 의도로 말씀하셨을까?’라는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분명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실 때 헬라어로 말씀하지 않고, 아람어로 말씀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주님이 사용하신 아람어에 헬라어적인 사랑의 구분이 없는데, 굳이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을까라는 의구심이 일어난 겁니다. 또한 신약성경 안에서도 아가페와 필레오가 구분되지 않고 혼용되어 동의어로 자주 사용되었기에 굳이 오늘 본문에서 나눌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을 바탕에 두고 생각해 볼 때, 오늘 본문인 요 21:15-17의 초점은 헬라어적인 해석이 아니라, 다음의 두 부분에 맞추는 것이 보다 합당합니다.


첫째, ‘다른 사람들보다 더’라는 구절입니다.

: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먼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전에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고 단언했습니다.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다시 물으셨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성품상 다른 사람과 비교해 가며 더 사랑하는지를 물으시는 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 답은 ‘다른 사람들’이라고 해석된 헬라어 τούτων (투톤)에 있습니다. 이것의 본래 뜻은 ‘이것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주변에 있던 ‘이것들’을 가리키며 그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지를 물으신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신 ‘이것들’은 무엇입니까? 당시 주님과 베드로의 주변에 있던 것들입니다. 그것은 갈릴리 호수였으며, 베드로가 노저었던 배였으며, 밤새 던졌던 그물이었으며, 아침에 잡아올린 물고기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지를 물으신게 아닙니다. 그때까지 베드로가 가치있게 생각하고, 중요하게 여겼던 그 모든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지를 물으신 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도 이와 동일합니다. 우리가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지, 어디에 우리의 인생 핵심을 두고 매일을 사는지를 보십니다. 주님은 한번 뿐인 우리의 인생의 가치와 핵심을 주님께 두고 살아가기를 요구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 관심과 가치를 두고 살고 있습니까?



둘째,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 지금까지 가치있게 여기던 그 수많은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는 물음에 베드로가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대답을 하자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것이 어린 양인가, 큰 양인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또 ‘양을 치라’, 또는 양을 ‘먹이라’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치든 먹이든 중요한 것은 초점이 ‘목양’(양을 돌보는 것)에 맞춰 있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양을 얼마나 마음을 다해 먹이는지, 목양하는지 여기에 주님의 관심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일찌기 솔로몬은 잠언 27:23을 통해 이렇게 목자들에게 권면했습니다.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


여기서 목양은 목회자에게 한정된 명령이 아닙니다. 무릇 주님께서 내게 만나게 하시고, 인연을 갖게 하신 숱한 사람들이 우리가 돌 볼 어린 양이고, 양입니다. 그분들을 생명의 꼴, 복음으로 먹이고, 주님께로 인도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은 반드시 우리 주변의 사람을 돌보고 먹이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마음에 새겼으면 합니다.



4.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예수님께서 3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근심했다고 합니다. ‘근심하다’라고 번역된 λυπέω(뤼페오)는 ‘가슴 찢어지게 고통을 느끼다’, ‘비탄에 빠지다’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같은 말을 자꾸 물으시니 나를 믿지 못해 그런가 하며 가슴에 고통을 느끼기도 하고 혹은 내가 부족한가 하며 비탄에 빠지기도 했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17절에 보시면, ‘세 번째’ 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베드로가 근심할 정도로 3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신 걸까요? 베드로에게서 무엇을 확인하고자 집요하게 물으신 걸까요? 그것은 앞 뒤 정황으로 볼 때 이런 이유와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베드로에게 과거를 떠올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 불과 얼마전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저주까지 하며 모르는 사람임을 강조했습니다. 그 주변에 요한을 제외하고 다른 제자들은 없었지만,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어떤 사람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3번의 실수만큼 동일한 수의 질문을 받자 베드로는 근심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근심은 베드로를 좌절케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되려 쓰려진 베드로를 다시 세워주시려는 주님의 배려였습니다.


이러한 근심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후 7:10을 통해 이렇게 구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둘째, 베드로에게 초대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입니다.

: 요 21장을 처음 나눌 때도 말씀드렸지만, 요 21장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잇는 다리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요 21장이 없더라도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은 충분히 달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록과도 같은 요 21장이 있음으로 인해 배신자 베드로가 어떻게 사도행전 속에서 초대교회의 기둥같은 지도자가 될 수 있었는지가 설명이 됩니다. 또한 그 설명은 베드로의 리더십에 정당성을 부여해 줍니다.


주님은 흔들리는 모래알 같았던 베드로가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나 새롭게 새워질 교회를 위한 디딤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3번이나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어 주님의 양을 먹이라고, 양을 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5. 먹이는 교회와 그리스도인


오늘은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묵상하며 따라가는 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의 시작인 지난 17일, 재의 수요일부터 매일 정해진 묵상과 신약성경을 읽어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읽어가던 중에 두 곳에서 ‘근심’에 마음이 쿵했습니다. 마 7:21-23입니다.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구원받는게 아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되려 그런 자들을 일컬어 주님은 “모른다”고 하시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주님의 이름을 차용해서 대단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는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고, 대단한 성과를 이루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주님과 친밀함을 갖고 살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가슴 찢어지게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두 번째 근심으로 내려앉게 했던 말씀은 마 25:31-45의 말씀입니다. 이 부분은 마지막 때에 한쪽에는 양과 같은 사람을, 다른 한쪽엔 염소와 같은 사람을 나누어 심판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양에 분류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5:35-36입니다.


35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절: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염소에 분류된 사람들에게는 이와 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않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지도 않았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지도 않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지도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염소에 속했던 자들이 발끈했습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따졌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 25:45입니다.


“…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고귀한 정신적 행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실제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행위입니다. 고난당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을 먹이고, 그들을 입히고, 돌보고, 위로하는 구체적인 행위 속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라고 말들합니다. 사랑은 다가가고, 찾아가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같이 웃고, 같이 우는 겁니다. 같이 느끼고, 공감하는 겁니다.


이러한 사랑에 대해 무디 성경학교 교장이었던 조지 스위팅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이 위대하지만 사랑은 더 위대하다. 믿음은 우선적인 것이나, 사랑은 초우선적이다. 믿음은 시작이나, 사랑은 완성이다. 믿음은 하나님과 사람을 교통하게 해주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사랑 안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수단이나, 사랑 없는 믿음은 우리를 파산시킨다.


사순절은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묵상함으로 그분을 더 깊이 믿게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믿습니다”라는 말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가족들을,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윗쪽 동네에 있는 분들을, 외국인들을 더 아끼고, 배려하고, 돕는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대한 우리의 대답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하나님~

우리 생의 가치와 목적 속에 주님보다 앞선 것이 없기를 구합니다. 우리 평생의 소원, 기쁨이 주님이길 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을 기뻐하기에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더 품고, 더 사랑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오늘도 물으시는 주님의 물음 앞에서 우리 삶으로 대답하고,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 사랑의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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