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1.01.31 움오름 주일 설교 - "겉옷을 두른 후에"(요 21:7-11)

1월 31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21:7~11

7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8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9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10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11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설교문


1. 기다림 그 참된 모습은?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며, 그곳에서 만나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제자들은 갈릴리로 갔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몇날이 지나도 보이지 않는 주님을 더 기다리지 못한 채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일면 합리적이고 타당한 선택처럼 보입니다. 무력하게 기다리지 않고 무언가 행동을 취한다는 것은 결단력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과단성 있게 보이는 그들의 ‘물고기 잡이’는 단순한 어업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기는 행위였습니다. 스스로 기한을 정해 놓고, 그것을 벗어나면 일방적으로 믿음을 접어버리는 행위였습니다. 그것을 배교행위라고 까지는 하기 어려우나 쉽사리 동의되지가 않습니다.


제자들의 행위에 납득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가만히 저를 돌아봅니다. 한편으로는 같은 성정을 지닌 인간으로서 저들의 행위가 이해되어야 하는데, 너무 멀치감치에서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봅니다. 분명 저들의 모습과 저를 비롯한 우리의 모습이 별반 차이가 없을텐데 마치 “주여, 나는 아니지요?”(마 26:22)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제자들의 모습 속에 우리가 있다면, 분명 그 기다림의 잘못된 시범은 우리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기다림은 늘 우리의 감정이 우선이었고, 우리 상황이 기준점이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정해놓은 범위를 넘어서면 더 기다리지 못하곤 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기다림이 이와같았다면, 주님에 대한 예를 다하는 진정한 기다림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주로 대림절 때에 자주 생각나는 시이지만, 기다림의 바른 모습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함석헌 선생의 <님이 오신다>입니다. 시의 일부분을 제가 낭송해 드리겠습니다.


< 님이 오신다 >

-함석헌

높은 것 낮추고

우므러진 것 돋우고

굽은 길을 곧게 하고

지저분한 것을 다 치워

님이 바로 오시도록 하자


세례요한이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마 3:3)며 이사야서를 인용했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서 ‘길'이란 것이 우리 삶을 은유한다고 볼 때 공의가 사라지고 불의가 득세하는 현실을 개혁하고 치유해야 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는 것은 높은 자리에서 남들 위에 군림하는 이들은 낮추고, 눌려 지내는 이들은 북돋워 인간됨의 보편성과 형평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양의 창자처럼 이리저리 뒤틀리고 구부러진 불의와 거짓의 세상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오실 길을 닦는 마음입니다. 기다림은 막연히 앉아서 기다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등불의 기름을 준비하고 불을 밝힌 채 기다리듯 우리 삶의 자리를 밝히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런 것은 우리의 마음 뿐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신경 쓸 것이 많다는 핑계로, 먹고 살기에도 힘들다는 이유로 우리는 기다림을 잊고 살았습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면서도 자기 강화를 위한 욕망에 쉽게 굴종했습니다. 그 결과 수족관의 물고기처럼 의욕과 활기를 잃어버린 채 나른하고 몽롱하게 살았지는 않습니까? 불의에 저항하지도 않았고, 유린당하는 약자들 편에 서는 것을 꺼려했지는 않습니까?


지난주중 어떤 사람이 현실의 부조리와 불의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는 제 동기목사(김종현)의 글에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목회자들은 좌도 우도 말고, 하나님의 말씀만 바로 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일면 양비론자 같기도 하고, 일면 바른 말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굽어지고 치우치고 기울어져 곤고해진 세상에 어디 중간에 서서 그것이 고쳐집니까? 바꾸어집니까? 믿음의 삶을 산다는 것은 심산유곡에 떨어져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온갖 진흙과 먼지가 난무한 길바닥을 거닐며 치우며 쓸며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중간을 지켜 가능한 것입니까? 기울어진 것을 바로 세우기 위해 그 끝자락에서 온 힘을 쏟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내신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함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 삶을 함석헌 선생은 이어지는 시 속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쓸자, 닦자, 고치자

물을 뿌리자

묵고묵고 앉고앉고

이 먼지를 다 어찌하노?

언제 이것을 아름다이 하노?


쫓기듯 사느라 더러워진 줄도 몰랐던 우리 삶의 공간을 닦고, 쓸고 고치는 2021년이 되었으면 합니다. 황폐하게 변해버린 사람과의 사이, 관계의 길도 먼지를 털어내고 새로이 닦는 회복의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기다림이 이런 기다림이었으면 합니다.



2. “주님이시라”


그토록 기다리던 주님이 나타나셨는데도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요 21:4). 심지어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 21:5),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요 21:6)고 주님이 직접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음성조차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을 단순히 날씨나 환경 탓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것들 때문에 알아 듣지 못하고, 알아 보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아닙니다! 그들은 이처럼 어두웠습니다.


어둡던 제자들의 눈과 귀를 뜨이게 한 것은 새벽닭 회치는 소리같은 요한의 한마디였습니다. 7절 상반절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자 단번에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히자 가장 먼저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은 3년전 비슷하면서도 다른, 다르면서도 매우 유사한 그때 그 사건을 떠올렸던 게 분명합니다. 그때처럼 잡힌 수많은 물고기를 보며 그는 그 이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반복된 그 일 속에서 주님의 손길을 깨달았습니다.


조금은 비약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삶도 가만히 보면 어제의 되풀이, 반복의 연속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일터와 학교로 가고, 저녁, 또는 밤 늦게 들어와 몸을 누입니다. 또 내일 그것을 반복합니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 반복되고, 오늘과 똑같은 내일이 재현되다 보니 우리는 둔감했습니다.이러한 반복 속에서 우리는 기억하고, 느껴야 할 것들에 대해 무감각했졌습니다. 일상 속에, 작은 사건 속에 일어난 은총을 외면하며 우리 자신에 몰입했습니다.


“주님이시라”는 요한의 외침이 원문에는 정관사가 붙여진 상태의 주님, ‘호 퀴리오스(ὁ κύριός)’로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곁에 계신 그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은 겁니다. 잊고 있던 그 주님에 대한 망각을 깨뜨리고 알아차린 겁니다.


‘진리’를 뜻하는 헬라어 ἀλήθεια(알레데이아)는 λήθε(레테) 즉 망각을 없애고 깨뜨리는 것(ἀ)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당연 위로부터 임하는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화하는 생명이 알 속에서 밖으로 나오려는 치열한 노력을 하듯이 인간의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바깥에서 그 기미를 알아차리고 알을 쪼아주는 어미 새의 노력인 하늘의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은 이 오묘하고도 절묘한 어울림 속에서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 은혜를 우리 모두가 경험하였으면 합니다. 지난 시간 우리 삶의 언저리, 또는 그 내면의 깊은 곳에서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잊고 지내셨습니까? 그 주님에 대한 망각을 깨고 새생명으로 일어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셨으면 합니다. “주님이시라”



3. 겉옷을 두른 후에


“주님이시다”는 요한의 외침에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로 뛰어 들었습니다. 부활절 새벽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무덤에 먼저 도착한 것은 요한이었지만, 정작 그 무덤 안으로 먼저 들어간 사람은 베드로였던 것처럼 베드로는 주님을 향해 먼저 나아갔습니다.


배와 주님이 계신 곳과의 거리는 ‘오십간쯤’이라는 πηχῶν διακοσίων(페콘 디아코시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200규빗에 해당합니다. 1규빗이 45cm정도가 되니, 떨어진 거리는 90여m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90여m의 거리를 베드로는 배를 타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도 조급했지만, 그물을 끌어올려 어마어마하게 잡힌 물고기를 배에 담은 뒤에 노저어 가기까지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원어의 표현을 빌리면, ‘그 자신을 물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만큼 주님을 조금이라도 빨리 뵙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아스러운 것은 물에 뛰어들기 전 베드로가 했던 행동입니다. 7절 후반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물에 뛰어들기 전 베드로는 겉옷을 먼저 입었습니다. 밤새 그물질을 하던 중노동에 땀이 났을 뿐 아니라, 일하는데도 방해가 되었던 옷을 다시 챙겨 입고 물에 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베드로의 행동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보통 물에 들어갈 때는 입고 있던 옷을 벗습니다. 물에 젖은 옷은 무거울 뿐 아니라, 수영하는데도 무척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벗어 두었던 겉옷을 챙겨입고 물 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뵙는데 예의를 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겉옷을 두르다’고 할 때 쓰인 ‘두르다’라는 단어가 헬라어 διαζώννυμι(디아존뉘미)입니다. 이것이 쓰인 또 다른 곳이 요 13:4입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제자임에도,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예의를 다하시던 주님의 모습이 엿보입니다.



4. 무례한 기독교


인간에 대해 예를 다하고, 온맘을 다하는 주님의 모습은 다음 주에 나눌 말씀 가운데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주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예를 다해야 할지, 어떻게 하는 것이 예를 다하는 모습일지를 돌아보겠습니다.


그제 40여일 만에 이발을 하러 동네 미용실(블루클럽)을 갔습니다. 미용실 안에는 먼저 온 60대 남성분이 미용사와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발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용은 작금의 교회에 관한 일들이었습니다. 얼마나 격분했는지 미용사는 손님에게 연신 특정 방송사의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하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분이 가고 난 뒤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마스크를 한 채 자리에 앉은 저는 일절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괜히 교회에 대한 불편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입술을 닫고 말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미용사는 점점 목소리를 크게 해 갔습니다. 심지어 미용도구를 들고 있던 양손을 들어 격한 제스쳐를 자주 해 가며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계산하던 자리에서 제가 물었습니다.

“교회에 많이 화가 나셨나 봅니다.”


교회 때문에 소상공인들이 말라 죽게 되었다며 자신도 한 때 열심히 교회 다녔던 사람인데, 너무 실망한 나머지 지금은 나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분께 “죄송합니다”라고 인사하며 나오는 걸음이 참 씁쓸했습니다. 아무리 90%의 교회들이 방역규칙을 지키고 이웃을 배려하더라도 10%의 교회들이 날뛰고 망쳐놓으면 어쩌겠습니까? 그 모든 오물과 재를 같이 뒤집어 쓴 채 아파하며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천지, 사랑제일교회, BTJ열방센터에 이어 이번에 IM선교회까지 코로나 고비 때마다 교회가 등장해서 시민들로서는 얼마나 답답하고 화가 나겠습니까? 좀 회복된다 싶으면 터지는 교회발 집단감염으로 인해 얼마나 분통이 터지겠습니까? 우리야 “그건 이단이고, 이단성이 짙은 곳이고…”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교회 밖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다같은 교회고, 매한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교회는 매우 이기적이고, 몰상식적이고, 파렴치한 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 IM선교회의 대표라고 하는 사람(마이클 조: 조재영)이 하는 말을 들으며 제 낯이 다 후끈거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과학적으로 우리를 지켜주신 겁니다”

“코로나 때문에 수지 맞았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코로나로 죽고, 코로나 때문에 망하고, 고통 가운데 있습니까? 그것을 안다면, 제 정신이라면 "코로나 때문에 수지 맞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참 예의가 없고, 염치가 없고, 인간의 도리도 모르는 ‘무례한 그리스도인’, ‘무례한 기독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는 화가 나지 않고,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플 따름입니다.


그들의 말 속엔 노동자들이 죽든 말든 돈을 위해서 밀어붙이는 탐욕이 겹쳐 보입니다. 말이 교회고 학교지, 비즈니스에 환장한 변종 전염병입니다. 이것은 더이상 이단이나 정통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들 중 소수의 문제도 아닙니다. 예수의 삶은 없고, 공허한 예수팔이만 추동하는 교회는 이미 그 자체가 전염병의 통로입니다. 사회를 치유하고 개선하기는 커녕 되려 타락케 만드는 오염원입니다.



5. 예의를 다한다는 것은?


사실 사회가 교회에 분노한다는 것은 그들이 그리는 교회의 참모습이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욕한다는 것은 그들이 바라는 교회다운 모습이 있다는 겁니다. 교회는 복음을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만큼 사회 속에서 마땅히 보여 주어야 할 모습이 있습니다. 이것이 부재한 기독교는 과격한 십자군식 승리주의로 치부될 수 밖에 없고, 자기들만 아는 무례한이라 취급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복음에 열정적이면서도 무례하지 않게 빛과 소금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무분별한 포용주의나 독선적 배타주의라는 양극단의 오류를 넘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확신과 예의를 아우르며 살 수 있을까요? 무질서 속에서 선한 이들은 확신을 잃고 악한 이들은 강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시대 속에서 어떻게 우리는 예수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주님 오실 길을 준비하며 살 수 있을까요?


예의가 바르다는 것은 사회 전체를 진심으로 배려하는 자세를 뜻합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이웃들을 존중하기에 그들의 안녕을 기꺼이 생각하고 도우며 이 사회 속에서 존재해 감을 의미합니다. 야고보서는 이것을 ‘경건’이라고 정의하며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약 1:27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고아와 과부를 돌보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예를 다하면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해 예를 다하는 것입니다. 예를 다한다는 것은 곧 책임을 다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입니다.


교사들의 교사라 일컬음 받는 파커 파머는 이것을 우리가 부름을 받은 위대한 일이라며 다음과 같은 마음 가짐으로 살 것을 당부했습니다.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일, 불의에 대항하는 일, 슬픈 자를 위로하는 일, 전쟁을 끝내는 일과 같은 것’ 말입니다. 이런 일에는 실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열심히 하겠다는 헌신의 마음뿐입니다(파커 J. 파머, <일과 창조의 영성>, p.140).


이 헌신의 맘을 갖고 이 전염병의 시대를 살았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1월 27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라틴 아메리카 주교들에게 보낸 영상메세지 중의 한 부분으로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교회는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모두와 함께 빵을 나누는 존재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다수가 교회에 분노하는 시대입니다. 예배, 자유, 복음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갈등을 양산하고, 교회 스스로를 게토화시키고 있습니다. 시대정신과 보편상식이라는 면에서 동떨어진 한국교회는 이렇게 사회로부터 추방당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만들어 내고, 우리가 양산한 우리의 문제에서 기인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도외시하던 우리의 잘못이 ‘신천지’라는 이단을 만들었으며, 근본주의적인 우리의 신앙이 ‘인터콥’이라는 극단주의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꾼다면서도 학력과 물질을 최우선시하던 우리의 모습이 IM선교회라는 변종을 양산했습니다.


하나님~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이런 어그러진 모습에서 벗어나 참 교회의 모습을 찾아가길 원합니다. 왜곡된 변종의 모습에서 탈피해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교회가 복음에 열정적이면서도 사회에 예와 책임을 다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교회 밖 이웃들을 진심으로 존중하기에 배려하고, 돌보며, 빵을 나누고 삶을 나누며 살기를 원합니다. 이 삶을 우리가 포기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이 시대 속에서 예와 책임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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