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1.01.17 움오름 주일 설교 -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 21:1-6)

1월 23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21:1~6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4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5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6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설교문


1. 허탕, 헛수고, 허무 그리고 선동


계속되는 전염병 시기를 힘겹게 보내는 업종이나 사람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특히 그날 벌어서 그날 생활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의 상황은 폭설과 한파로 얼어붙었던 날씨만큼이나 매섭고 힘겹습니다.


매일 인력시장에 나와도 2, 3일에 한 번 일거리가 생길까 말까인데도 추운 날씨에 새벽 인력사무소를 향하는 일용직 노동자의 일상이 남일 같지 않습니다. 저 또한 20대 중후반에 새벽 첫차를 타고 인력사무소를 찾던 기억이 새롭기 때문입니다.


꼭 노동이 아니더라도 어떤 일을 했는데 아무런 소득이나 이익이 없이 일이 끝났을 때 그것을 ‘허탕’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허탕과 헛수고가 반복되고 지속되다 보면 사람이 허무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런 3허(허탕, 헛수고, 허무)에 눌리다 보면 아무리 건강했던 사람도 비관적, 염세적인 색조를 띄지 않기가 쉽지 않습니다.


갈릴리로 되돌아 갔던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아니었습니다. 가족, 친지를 비롯한 고향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이었습니다. 뭐라도 될 것 같이 나사렛 예수를 추종하다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온 자신들을 향해 한마디 툭 던지는 말 하나하나가 가시가 되고 비수가 되어 꽂혔을 겁니다. 아무리 예수님은 부활하셨다고 해도 어떻게 그 사람들이 믿어주었겠습니까? 정작 예루살렘 마가의 집에서 모두가 모인 가운데 예수님을 마주했던 제자들도 믿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갈릴리로 오신다던 예수님이 얼른 짠하고 나타나셔서 일거에 사람들의 불신을 불식시키고 자신들을 향한 호의가 급상승하기를 얼마나 기대하고 바랬겠습니까! 하지만 야속한 예수님은 그들의 바램과 기대대로 오시지도 나타나지도 않으셨습니다.


지난시간에 말씀드렸지만,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을 향해 툭 던진 말 “나는 물고기 잡으로 가노라”는 말은 단순히 낚시나 그물질을 하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기다림과 주변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이의 허탄한 넋두리였습니다. 다른 이들을 향한 허무의 선동이었습니다.


오늘 예배순서지 <움이 트는 생각>엔 “반란선동(Incitement of Insurrection)”에 관한 글을 나누었습니다.


미국 하원이 제45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2번째 탄핵 소추안을 다음과 같이 통과시켰습니다. <찬성 232, 반대 197, 기권 4>. 물론 실제 탄핵여부는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의 취임 이후에 열릴 상원에서 2/3이상의 탄핵 가결 여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탄핵의 이유는 알려진 바와 같이 반란선동(Incitement of Insurrection)입니다. 세계 최고권력을 갖고 있다는 미국 대통령이 반란을 선동하다니 참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꼭 정치나 반란선동이 아니더라도 대중의 시선을 한곳으로 몰아가게 하는 이런 류의 선동은 4년 연속 언론신뢰도 40개국 중 40위인 우리 사회에서 흔하게 마주합니다. ‘영끌 부동산’, ‘영끌 주식’… 신뢰도 꼴찌 언론에서 부추기기까지 하는 이러한 선동 속에서 우리 사회는 제대로 된 곳을 향해 가고 있는 걸까요?


몰아치는 선동 속에서 시류를 좇아, 시류에 편승해 끝자락이라도 붙들고 돈의 길, 권력의 길, 기득권의 삶을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니 일찌기 그리스도인들도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caused trouble all world, 행 17:6)’이라는 호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선동방식은 부동산도 주식도 아니었습니다(부동산과 주식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에 발붙이고 살되 다른 나라의 법을 따라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자신의 것을 나누는 바보스런 선동이었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세상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선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권력과 기득권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들이 정한 천하의 법칙을 어지럽히고 위협하는 골치아픈 선동이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모습이 얼마나 있을까요? 혹 우리를 포함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일까요? 그런데 그것이 하늘의 법칙이 아니라, 아파트이고, 주식으로 대표되는 세속적 이익에만 몰입해 있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언젠가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도 탄핵받지 않을까요?



2. 우리도 가겠다


물고기를 잡으로 가겠다는 베드로의 선동적 말을 들은 다른 6명의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자신들도 같이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하나 베드로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예루살렘에서 2번이나 부활하신 주님을 목전에서 직접 뵙고 몸의 상처까지 확인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의 숙명적 저주, 허무의 끝자락이라고 여기는 죽음까지도 이기고 살아나신 주님의 실체를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혹이나 ‘아니 그까짓 물고기 한번 잡으러 가는 것 가지고 그렇게까지 이야기 하느냐?’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문제는 그게 단순한 물고기 잡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루한 기다림 속에서 그들은 그 기다림의 의미를 새기지 못했습니다. 실패한 자신들의 지난 삶을 되돌아 보고, 복기하면서 어디서 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 때문에 실패했는지를 되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성찰의 시간을 통해 자신들을 바로 세워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지중해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태양이 토해놓은 붉은 기운이 갈릴리 호수 위에 엷게 드리울 때 제자들은 3년전 버려두었던 배와 그물을 다시 집어 들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는 예수님의 말씀에 가차없이 던져버렸던 것을 다시 주워 담았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무료한 기다림보다는 훨씬 정당하고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습니다.


7명 중의 7명이면 절대다수입니다. 다수가 선택했고, 집단지성이 작동했습니다. 그렇다해도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하고, 해야 하는 것이 ‘분별’입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 중에 고든 스미스의 책 <분별의 기술(Art of Discerning: Listening to God in times of choice)>이 생각납니다. 고든 스미스는 선택의 연속인 인생 속에서 오히려 선과 악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은 믿음이 있는 우리에게 고민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선과 선 중에서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가 바로 분별이 필요한 시기라는 말입니다.

얼핏 책의 번역 제목이 <분별의 기술>이다보니 이 책이 구체적인 습득 요령이라던가 어느 상황에나 들어맞는 정답을 가르쳐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류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고 하면서 행해왔던 오류들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오해나 편견들을 소개해 줍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피해 가야 할 길들에 이정표를 세워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책의 전체적인 줄기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고든 스미스가 책 속에서 확신을 갖고 이야기 하는 분별의 세가지 필수 단계를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선택의 가능성들과 그 장애물에 대해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둘째, 기도와 묵상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 결정에 대한 평가를 하고 다른 이들과 논의해야 합니다.


이 세가지를 풀어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을 사용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며,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해 믿는 동료들과, 또 선택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의견을 구하라는 말입니다. 이 세가지가 올바른 분별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인지하다시피 우리를 포함한 사람이라는 존재는 왜곡과 자기기만의 능력이 뛰어난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절대다수가 원하고, 확신이 있는 결정이라 하더라도 “나도 가겠노라”는 평면적 대답을 반복하는 한 우리 선택은 악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묻고, 선택해야 합니다. 그에 대해 책임지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분별의 연습을 통해 우리는 세상 속에 살되 세속의 풍습과 시류를 따르지 않고 변화를 만들어 내는 빛과 소금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3.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요 21:4은 제자들이 얼마나 분별력 없이 긴 밤을 보내었는지를, 그 상태가 어떤지를 다음과 같이 들려주고 있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날이 새어갈 무렵이었기에 아직 어두워서 예수님이신줄 알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정말 그랬다면, 사도요한은 굳이 지면을 활용해서 요 21장에 기록해 두지 않았을 겁니다. 그때, 그 현장에 있었던 한 사람으로서 보건데, 당시 자신들은 무지몽매했으며, 분별력 없이 아침을 맞고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아침이 밝아옮에도 여전히 물가에 서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5절 상반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제자들은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나 단 한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을 예수님께서 모르실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상황을 아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는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1차적으로는 한마리도 잡지 못한 현실상황을 인식토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어떤 이들은 안타깝게도 본인이 처한 상황인식을 하지 못하곤 합니다. 못 봐서 그런 것이 아니라, 회피입니다. 본인이 감당하지 못하니 피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질문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라는 질문은 바로 이런 의도였습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들이고 싶지 않은 상황 앞에 제자들을 서도록 하신 겁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의 2차적 의미는 주님께서 사용하신 단어 속에 들어 있습니다. 신약성경 안에서 물고기를 뜻하는 단어는 대부분 6절에 사용된 단어와 같은 ἰχθύς(익두스)입니다. 물론 앞서 3절의 베드로의 말 속에 ‘물고기 잡으러’간다고 했던 단어 ἁλιεύω(할리유오)는 조금 다릅니다. 이 단어는 우리말의 ‘낚시, 고기잡이’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요한복음에 담으면서 당시 물고기로 통용되던 ἰχθύς(익두스)라는 단어 대신 προσφάγιον(프로스파기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προσφάγιον(프로스파기온)은 신약성경 중에서 유일하게 여기(요 21:5)에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맛있는 것, 중요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좀 더 의미를 담아 설명드리자면, 예수님께서 그날 동틀 무렵 제자들을 향해 물으신 것은 단순히 물고기를 좀 잡았느냐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런 질문이었습니다. “너희가 귀한 것을 얻었느냐?” … 아무리 7명 모두가 동의했고, 전문가 7명이 힘을 합쳐 밤새도록 노력하고 애썼더라도 주님 없는 배 위의 삶은 인생의 귀한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7명의 제자들을 향해 물으셨던 주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옮겨 보겠습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 우리가 노젓고, 그물질 하는 생의 배 위엔 소중한 것이 있습니까? 우리 삶은 정말 중요한 것을 간직한 채 나아가고 있습니까?



4. 커튼을 걷고


오늘도 앤소니 드 멜로의 이야기를 나누자니 미안한 맘도 좀 있지만, 그의 책 <행복한 삶에로의 초대>에 수록된 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한 무리 관광객들이 봄 소풍을 떠났습니다. 버스는 호수와 산, 전원과 강이 어우러진 매우 아름다운 지방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버스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차창 밖으로 무엇이 지나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버스의 상석에, 좀 더 편안한 자리에 앉힐 것인가?’

‘누구를 더 중요한 사람으로 여길 것인가?’


바깥에는 황홀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엉뚱한 주제를 두고 말다툼하느라 여행의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런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쟁만 계속할 것입니다.

귀하신 움오름가족님들~

우리 삶의 버스 안은 어떻습니까? 멋진 풍경이 펼쳐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혹 우리가 탄 버스도 커튼을 두텁게 내린 채 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친 채 누구를 더 상석에 앉힐지 등 허탄하고도 허무한 일에 열정과 마음을 쏟고 있지는 않는지요?


CS 루이스는 일찌기 중요한 것을 잊고 살아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무엇에 마음과 자원을 쏟아야 할지를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교회는 오로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그들을 작은 예수로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만일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모든 교회와 성직자, 선교활동과 설교, 심지어 성경까지도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오직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종교학자들이 원시종교와 고등종교를 나누는 기준에 대해 여러가지를 제시하지만, 그들 종교와 기독교 신앙과의 특별한 차이를 한가지 들라면,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시종교를 포함한 대부분의 종교는 ‘희생’ 제물을 통해 신의 진노를 잠재우고 인간의 복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사람이든 짐승이든지간에 희생시켜 나의 안녕과 복을 구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진노를 억제하기 위해 사람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을 넘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예수로 세워져 가는 겁니다. 나를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보다 더 중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무엇이 중요한지 모른 채 시류를 좇아 질주하던 우리 삶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기다림의 의미를 새기며 우리 자신을 바르게 세워가기 보다는 조급함으로 예전의 배와 그물로 되돌아가던 회귀성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다수의 원칙과 집단지성을 맹신하여 분별력 없이 동조하고 따라갔던 몽매함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러므로 “너희에게 중요한 것이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없습니다”라는 말 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음을 고백드립니다. 이제 짙게 드리웠던 커튼을 열려합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에 목숨 걸듯 올인하던 어리석음을 멈추려 합니다. 허탄하고 허망한 배 위에서 내려 주님 계신 곳을 향해 나아가려 합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이제 우리 삶이 주님의 모습을 담은 그릇되어 의미없는 것들 속에서도 의미를 만들어 내고, 허무의 삶에서 조차도 생명의 시간으로 일구어 내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그런 2021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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