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1.01.10 움오름 주일 설교 -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 21:1-6)

최종 수정일: 1월 16일










요한복음 21:1~6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4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5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6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설교문


1. 다시 세워가야 할 것들


1) 무너져 가는 나라


지난 주중 2가지 사건이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는 미국현지시간으로 6일 발생한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회난입 폭력시위였습니다. 그들은 국민투표를 통해 선출된 바이든을 인정할 수 없고, 그 투표는 부정선거의 결과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을 폭력으로 강변했습니다. 의사당 진입 과정에 유리창을 깨부수고, 공성전 하듯 담벼락을 기어오르고, 의사당 안에서 경찰과 스트리트 파이트 하듯 주먹질을 하는 장면은 모든 사람이 느끼듯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 과정에 4명이 사망했고, 52명이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14명의 경찰관이 폭력시위자들에 의해 부상을 당했습니다.


숨진 시위대 여성 중 한명(애슐리 배빗)은 미 공군에서 14년 복역하며 네 차례 해외파병 근무를 수행한 이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나름 국가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봉사했던 사람입니다. 어쩌면 그녀를 비롯한 시위대 다수가 국가를 바로 세우고 구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시위는 테러가 되었으며, 민주주의를 선도한다던 슈퍼파워 미국의 민낯을 드러내며 전세계적인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전염병(코로나19) 시기에 미국은 세계 최악의 국가로 주저앉더니 대통령선거에서 가장 밑바닥을 찍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미국 내에서는 미국의사당 점거를 지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이코노미스트지(Economist)에 의하면, 공화당 지지자들 중 거의 반 가까이(43%)가 의사당 점거를 지지한다고 했고, 60% 정도는 평화적 시위였다고 생각합니다. 점거사태 주도 인물들은 방송에 나와서 버젓이 ”우린 잘못한 것 없다. 의사당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갔을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부터 불리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American Peace)는 21세기에 이렇게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그 몰락의 원인은 다름아닌 그들이 쌓아올린 ‘부의 불균형’과 그로인한 ‘분열’ 때문이었습니다.


부로 인한 계급의 차이가 차별을 유발하면서 결국 극단의 분열을 초래했고, 붕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미국의 몰락 뒤엔 분열을 막지 못하고, 분열을 이용한 사악한 리더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년초부터 먼나라 미국의 사건을 말씀드리겠습니까? 묘하게 미국 사회의 분열과 그 분열을 이용하는 세력의 모습이 우리나라와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숱한 목회자들의 설교 속의 예화는 미국에서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그게 모범이었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표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나쁜 선례와 탈피해야 할 모습이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과거에 좋았던 나라라고 해서 끝까지 좋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하여 식민지통치와 민족전쟁을 겪고 어렵사리 세워왔던 이 나라를 어떻게 다듬고, 보듬으며 미래를 만들어 갈지 우리 모두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때입니다.



2) 무너져 가는 기독교


두번째로 충격적이었던 사건은 이른바 ‘정인이 사건’으로 불리는 아동학대 사망사건입니다. 아동학대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번이 더더욱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입양부모들 뿐만 아니라, 양쪽 집안 모두가 기독교 집안이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게다가 단순 기독교집안이 아니라, 양가 모두 그 지역에서 이름만 말하면 알만한 목사 집안이었습니다. 학대부모 또한 이름난 기독대학에서 공부하고 기독교 방송(CBS)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 왔습니다.


목사 집안끼리 만나 결혼한 젊은 그리스도인 부부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엽기적 유아 학대를 일삼아 입양된 아이가 2년도 못 살고 죽었습니다. 전북대 법의학교실 이호 교수의 소견에 의하면, 아이의 복부에 피가 가득했습니다. 그 이유는 췌장, 소장, 대장, 장간막들이 지속적인 학대와 구타로 찢어져 있었는데 사망 당일에 다시 이어진 구타로 크게 찢어져서 장간막 파열이 온 것이라고 합니다.


목사 부모에게 교육받고 기독대학에서 공부하고 기독교 방송국에서 근무하고, 기독 대학에서 상담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악마가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2021년 한국교회의 현 상태이고, 실력이라고 하면, 어떻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한국에 있고, 세계 10대 교회 중의 몇개가 우리나라 교회이고…” 이런 식의 자랑을 일삼던 한국교회의 현실이 이렇습니다.


그러면서도 극우 바이러스에 물들어 배교적 발언을 수시로 내뱉는 자들을 신실한 선지자라고 추종하고 있습니다. 탈진한 신자들 중에 나름 의식있는 사람들은 의미 있고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해 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지역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대신 다른 곳에서 자신의 영적 필요를 채우고자 ‘가나안 교인’되기를 선택해 왔습니다. 이게 바로 한국교회의 현 주소입니다. 이 안타까운 현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2. 다시 세워지는 제자들


1) 다시 갈릴리로


오늘 본문이 자리한 요 21장은 그것이 신앙이든, 관계이든 무너졌던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회복하는지, 다시 세워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실제적으로 요한복음은 20장까지만 하더라도 본연의 목적(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 것 &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는 것)을 다 담았습니다. 그럼에도 에필로그와 같은 21장을 추가로 기록한 것은 위와 같은 회복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만약 요 21장이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사도행전으로 이어졌다면 지금껏 많은 이들이 의아했을 겁니다. 어떻게 배신자요, 비겁자였던 이들이 다시 제자로 세워지고,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는지가 설명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면에서 요 21장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잇는 교량이 될 뿐 아니라, 무너진 교회와 신앙이 누구와 무엇으로 다시 세워져야 할지를 보여주는 지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 21:1이 이렇게 그 첫절을 열고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간은 ‘그 후’, 장소는 ‘디베랴(갈릴리) 호수’, 대상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사건이 요 21장 입니다. 요 21:14을 보니, 이것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찾아오신 세번째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후’라는 시간은 두번째로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을 찾아오신 사건 그 이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있지 않고, 그곳에서 186km 떨어진 갈릴리(가버나움 추정)에 가 있었을까요? … 이 부분에 대한 답을 막 14:27-28이 다음과 같이 들려줍니다.


27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28절: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십자가를 앞에 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반과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시며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 계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라는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전달토록 하셨습니다. 막 16:7입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이 부분들을 종합해 보면, 예루살렘에 있던 제자들이 갈릴리로 되돌아간 이유를 이렇게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도마없이, 그리고 도마와 더불어 2번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더 기다렸지만,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과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전해들은 말씀을 기억하고 갈릴리로 되돌아 갔습니다.


2) 왜 갈릴리?


그렇다면, 왜 주님은 제자들을 다시 갈릴리로 부르시며 그곳에서 만나자고 하셨을까요? 어떤 이들은 ‘반지, 고리, 원’이라는 뜻을 지닌 갈릴리의 의미를 들어 설명하려 합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다시 주님과 연결고리가 되게 하려는 뜻’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보다 궁극적인 의도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을 처음 만난 장소가 갈릴리 호수였을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의 대부분이 갈릴리 호수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남북 길이 22km, 동서 길이 14km, 둘레가 53km의 호수인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베드로, 안드레, 아고보, 요한, 이 네 제자를 부르셨습니다(마 4:18).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신 24회의 이적 가운데 무려 18회를 갈릴리에서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갈릴리는 단순한 호수, 그냥 그런 정도의 장소가 아닙니다. 그곳의 나무 한 그루, 돌 하나하나엔 예수님과의 추억과 나누었던 사건이 녹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주님은 제자들을 바로 그 특별한 장소에서 다시 만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갈릴리 호수였습니다.



3. 데자뷰(프랑스어: Déjà Vu 데자뷔)


그렇다면, 관계가 나빠지고, 신앙에서 멀어진 제자들을 단순히 예전의 장소에서 만나면 회복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아주 특별한 사건을 설정하셨습니다. 그것이 요 21장의 사건입니다.


옛생활의 터전인 갈릴리로 되돌아온 제자들은 예수님을 곧장 만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겁니다. 하지만,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어느날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주변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3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누군가를 기다리고,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기다림을 두고 힘이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단연 기다림을 믿음의 고귀한 행위라고 여깁니다.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이 기다림입니다. 그리고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이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수없는 소극적 행위가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믿음이 있기에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사 30:18이 하나님의 기다리심과 그를 믿는 이들의 기다림의 결과에 대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서 힘이 없어 기다리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가장 적합한 때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때가 이르렀을 때에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려 일어나십니다. 일어나신다는 것은 구체적인 구원의 행위를 하신다는 뜻입니다.


고로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믿음의 행위, 가장 적극적인 행위가 기다림이 됩니다. 이런 신앙의 사람이 받게되는 결론이 복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일과 상황 앞에서 믿음으로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해결하십니다. 이것이 사 30:18을 통해 말씀하시는 신앙의 행위 ‘기다림’입니다.


어떤 면에서 갈릴리에서 보자고 하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기다림을 바라셨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제자들의 얉은 신앙의 실력이 짧은 기다림을 통해 드러나기를 기대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처음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렀던 그때 그 사건과 아주 유사한 사건을 설정하셨습니다. 이른바 ‘물고기 사건’입니다.


불행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다행이라고 할까요? 성격 급한 베드로가 일어섰습니다. 그의 말에 책동된 제자들이 기다림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같이 물고기 잡으로 갔습니다.


인지하시겠지만, 그들이 물고기를 잡으로 갔다는 것은 단순히 어업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에라! 모르겠다. 다시 고기나 잡으며 살자!”라고 하는 자조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때는 밤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7명의 제자가 한 배에 타고 열심히 그물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3절 뒷부분이 기술했듯이 단 한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날 그 배에 같이 탓던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같이 갈릴리에서 잔뼈가 굵었던 어부들입니다. 갈릴리 호수와 물고기의 생태에 대해 낱낱이 알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어느 때, 어느 장소에 그물을 던지면 어떤 물고기가 잡히는지조차도 알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다같이 힘을 합쳐 밤을 세워 애썼는데도 단 한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께서 개입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왜 어떤 일은 너무나도 우리 자신의 전문분야이고, 이렇게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안봐도 아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혹시나 싶어 1안, 2안을 만들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3안까지 마련해 둡니다. 그런데도 아주 엉뚱한 일이 벌어집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합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께서 개입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날 밤, 갈릴리 호수 위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탁월한 전문가 7명이 힘을 합쳐서 밤을 새우며 일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는 허무한 실패의 밤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막으셨던 시간입니다. 보다 신앙의 적극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주님께서 실패의 길로 인도하셨던 밤입니다.



4. 정답을 넘어선 신앙으로


지난 한 해 열심히 기도하셨는데도 아무런 응답없이 2021년을 맞으셨습니까?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치도 못한 결과 앞에 새해를 보내고 계십니까? 그 결과 하나님을 기다리고,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힘이 들고 지치기 까지 하십니까?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제자들의 모습을 기억하십시다. 그들의 모습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들의 상황 속에 주님이 너무나 깊게 개입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을 새롭게 세우시기 위해 그들의 기다림을 흔드시고, 그들을 실패의 밤으로 이끄셨던 주님은 분명 제자들을 새로운 존재로 세우셨습니다. 그 과정이 요 21장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가 사도행전 속에 낱낱이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패의 자리, 어두운 밤으로 인해 낙심하지 마십시다. 낙망하지 마십시다. 주님께서 분명 살아 계시고, 먼저 그곳에서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을 우리가 믿고 신뢰한다면, 우리 신앙의 방향은 어디를 향해야 할까요? 우리는 무너진 우리 신앙의 기초를 어떻게 다시 세워가야 할까요? … 그 단초를 앤소니 드 멜로 (Anthony de Mello)의 글을 바탕으로 ‘움이 트는 생각’에 다음과 같이 나누었습니다. 같이 그 내용을 새겨 보시겠습니다.


“신앙은 정답을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복음서 속의 대화>

예수님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 :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정녕 복되구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오늘날의 대화>

예수님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크리스천 :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 훌륭하고 옳은 대답이다. 그러나 너는 불행하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그것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앤소니 드 멜로가 전하는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야 함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체험적인 신앙고백을 할 때까지 우리가 어떤 구도적인 삶을 살아야 할지를 앤소니 드 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미리 대답을 다 해주는 바람에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가르쳐주실 겨를이 없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시대 신앙의 위기, 한국의 기독교가 이토록 오염되고 무너진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기보다는 미리 답을 주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은 아닐까요? 때로 혼자서 처절하게 주님의 말씀 앞에 서고,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너무 쉽게 누군가가 전해주고, 던져주는 정답에 귀기울였기 때문은 아닐까요?


요 21:3의 뒷부분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시간 속에서 유례없는 ‘그 날 밤’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 것도 잡지 못하는 실패와 무너짐의 밤입니다. 허무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시각입니다. 우리의 관점이고, 우리의 평가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믿음으로 해석하면, 이 밤이야말로 주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빚으시고, 새롭게 세워가시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복된 밤입니다. 주님의 이 은혜와 더불어 새롭게, 더 단단한 믿음의 사람으로 ‘홀로’, 그리고 ‘더불어’ 일어서는 2021년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의 긴 밤 속에 함께 계신 하나님~

우리를 새롭게 빚으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감사드립니다. 비록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고, 계획한 결과 앞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뜻하심을 고백드립니다.


사람의 생각과 시각으로 바로보면, 처참한 실패와 잔해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무너진 흙더미와 상처 너머에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 겸허히 홀로 서는 2021년 되게 하옵소서.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끝까지 경청하며 기다리는 2021년 되게 하옵소서.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새롭게, 더 단단한 신앙의 사람으로 세워져 가는 2021년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 무엇보다도 우리의 몸부림, 혹독한 어둠의 밤 가운데 함께 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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