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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1.01.03 움오름 주일 설교 -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1-7)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9일









요한계시록 21:1~7

1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5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6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7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설교문


1.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예배순서지 <움이 트는 생각>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글을 실었습니다. 같이 살펴 보시겠습니다.


두 천사가 여행을 하던 도중, 어느 부잣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거만한 부잣집 사람들은 저택에 있는 수많은 객실 대신 차가운 지하실의 비좁은 공간을 내주었습니다. 딱딱하고 차가운 마룻바닥에 누워 잠자리에 들 무렵, 나이든 천사가 벽에 구멍이 난 것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메워주었습니다. 젊은 천사는 의아했습니다.


"아니, 우리에게 이렇게 대우하는 자들에게 그런 선의를 베풀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자 나이든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네."


그 다음날 밤 두 천사는 아주 가난한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농부인 남편과 아내는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자신들이 먹기에도 부족한 음식을 나누었을 뿐 아니라, 침대까지 내주어 두 천사가 편히 잠잘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았습니다. 그런데 농부 내외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유인즉, 그들이 우유를 짜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소득원인 하나밖에 없는 소가 들판에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젊은 천사가 화가 나서 나이든 천사에게 따졌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둘 수 있습니까? 부잣집 사람은 모든 걸 가졌는데도 도와주었으면서, 궁핍한 살림에도 자신들이 가진 전부를 나누려 했던 이들의 귀중한 암소를 어떻게 죽게 놔둘 수 있습니까?”


그러자 나이든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부잣집 저택 지하실에서 잘 때, 난 벽 속에 금덩어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네. 나는 벽에 난 구멍을 막아서 그가 금을 찾지 못 하게 했다네. 어젯밤 우리가 농부의 침대에서 잘 때는 죽음의 천사가 그의 아내를 데려가려고 왔었네. 그래서 대신 암소를 데려가라고 했다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 사는 시대가 그러합니다. 하지만 때론 보이는 것들이 모순일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과 그 이면의 것이 정반대일 수 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닙니다”. 때로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소망을 가집니다. 보이는 것 그 이면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밤에 무거운 몸을 누일 수 있고, 다음날 새벽 일어날 수 있습니다.



2. 또 내가 보니


오늘 신년예배를 준비하며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2021년 표어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약속, 그리고 계획하심을 믿고 힘내어 걸어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과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어떤 약속과 계획의 터 위에서 올해를 살아가야 할지, 우리의 시선과 삶의 방향은 어디를 향해야 할지 살펴보겠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볼때, 성경 전체에서 가장 가슴을 뛰게 하는 소망의 메시지가 바로 오늘 분문 계 21:1 이하의 말씀입니다. 천지창조로 시작한 구약성경은 인간의 타락과 실낙원을 거쳐 하나님과의 분리라는 인간타락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셔 구원의 길을 여셨지만, 영접보다는 배척과 배반으로 반응한 흑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인간구원이 영구히 실현될 하나님 나라의 공간적 배경인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비전이 신약성경의 마지막 요한계시록 가운데 선포가 됩니다. 긴 시간 주님을 기다리는 동안에 외롭고 지칠 때마다 붙들어 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때로 엄습해 오는 환난과 역경 앞에서도 엎드러 지지 않고 일어서도록 힘이 되어 준 말씀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핵심은 현세계 종말의 전개과정을 보여주는 묵시입니다. 동시에 그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서야할지를 알려주십니다. 계 1:19의 ‘장차 될 일’로 표현된 대환난은 계시록 4장 - 18장 사이에 묘사됩니다. 이어 19장 - 20장의 예수님 재림으로 인해 사단을 비롯한 모든 악에 대한 최종적이고도 완전한 심판이 성취됩니다. 마지막으로 계시록 21장 - 22장의 새로운 창조로 마무리 됩니다. 이른바 새로운 창세기의 서술입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이 성경의 마지막 책일 뿐 아니라, 인간 구원의 최종적 실현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 구원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 장엄한 구원역사의 첫부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계 21:1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장엄하고도 감격스런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는 ‘또 내가 … 보니’라는 설명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본다는 의미도 있지만, 앞선 계 19:11에서 시작된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결과로 나타난 현상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단의 세력간의 종말론적인 대전쟁의 끝, 바로 그 결과를 관찰해 보니 하나님의 새창조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했다는 선포입니다.


긴 환난과 고통을 겪는 가운데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었고, 납득되지 않았던 것들이 해소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하시나?’ ‘왜 이런 악과 고통을 그대로 두시나?’라고 했던 의문과 섭섭함들이 해결되는 때입니다.


한편 우리말 성경에 번역되지 않았으나 원문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라는 문장에 이어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γάρ(가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를 반영해 재번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봅니다. 왜냐하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과거에 우리 눈을 현혹하고 어지럽혔던 세상이 완전히 떠나가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처음 하늘’은 사단이 땅으로 떨어지기 이전에 있던 장소이며(계 12:7-9), ‘처음 땅’은 둘째 짐승이 올라온 장소이며(계 13:11), ‘바다’는 첫째 짐승이 올라온 악의 근원지였으며 사단세력의 거점이었습니다. 이것들이 사라진 그 자리에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다는 예언입니다.


2절을 보니, 1절과 동일하게 ‘또 내가 보니’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 소유의 ‘새 예루살렘’은 하늘에 존재하여 하나님의 완벽한 보호를 받던 것입니다. 기존에 인간세상에 존재하던 불완전한 평화, 공포와 불안을 안고 있던 예루살렘성을 대체하는 완벽한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새 예루살렘의 모습이 ‘단장한 신부’와 같다고 표현한 회화적 묘사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위해 예비된 신부, 다시말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예비되고 단장됨이 모두 ‘수동태’의 문장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교회를 예비시키고, 그리스도인들을 단장시키는 주체가 따로 있으시다는 겁니다. 그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상징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완벽히 보호하시고, 예비시키신다는 책임과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3. 내가 들으니


1절과 2절의 연속되는 ‘보다’라는 지각동사에 이어 3절에서는 ‘듣다’라는 지각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3절을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의 환상을 목격했던 사도요한은 이제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큰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은 요한계시록에 요한이 들었던 총 20번의 큰 음성 중에 마지막 큰 음성이었습니다. 그 음성의 내용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 약속의 최종적인 성취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가 렘 31:33을 통해 다음과 같이 미리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새롭게 도래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본질이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이며, 하나님과 백성들간의 친밀한 관계임을 설명하는 겁니다. 이 부분은 뒤이은 4절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4절을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이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는 것입니다. 왜 그 많은 것 중에 눈물 닦아주시는 것을 가장 먼저 하실까요? 눈물이라는 것이 기뻐서 흘리는 눈물도 있지만, 대부분이 인간존재로가 갖는 한계로서의 절감이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과 죽음이라는 운명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행위가 눈물이지 않습니까?


암 투병 중인 이어령 선생님이 마루에 쪼그려 앉아 발톱을 깎다가 눈물 한 방울을 툭,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멍들고 이지러져 사라지다시피 한 새끼발톱, 그 가여운 발가락을 보고 있자니 밀려오는 회한에 이렇게 자문했다고 합니다.


“이 무겁고 미련한 몸뚱이를 짊어지고 80년을 달려오느라 니가 얼마나 힘들었느냐? 나는 왜 이제야 너의 존재를 발견한 것이냐?”


살아갈 날, 아니 견딜 수 있는 날들이 6개월에서 3개월, 다시 1개월로 줄어들 수 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선생님이 새해 시제(詩題)로 삼은 것은 다름아닌 ‘눈물 한 방울’이었습니다. 그것은 병상 위에서 사위어가는 한 노인의 푸념, 넋두리가 아니라, 바이러스로 온 인류가 절망과 공포에 휩싸여 있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화두가 ‘눈물 한 방울’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어령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눈물 한 방울’은 박애(fraternity)의 눈물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담긴 눈물이 병들고 아파하고 신음하는 인류를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오늘의 재앙을 끝내는 길, 몸과 더불어 영혼도 치유할 수 있는 분의 긍휼을 구하는 피조물의 가슴시린 간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요한은 인간의 이 시린 눈물을 하나님께서 닦아주신다고 합니다. 그때에는 에덴동산의 범죄와 실낙원 이래 줄곧 인간을 괴롭히고 짓눌러 왔던 죽음과 사망이 사라지고 다 지나갈 것이라고 합니다. 죄로 인해 초래된 옛 질서와 그와 함께 한 오랜 비통이 새롭고 완전한 질서에 의해 무너지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합니다.



4.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앞선 ‘큰 소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천사가 대언하던 것에 비해 5절 말씀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언의 말씀입니다. 5절을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하나님은 존재하던 모든 것을 새롭게 바꾸십니다. 과거의 것을 약간 수정하거나 포장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 새로운 존재로 변모케 하십니다. 물리적 변화를 넘어서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화학적 변화를 만들어 내십니다. 이러한 대변화의 역사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가 일찌기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사 65:17입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인간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그 출발점을 꼽으라면, 바로 이것입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 하는 하나님의 선언,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빛이신 주님께서 무덤 속 죽음 가운데 있던 나사로를 불러내신 것과 같이 어둠 가운데 있는 영혼들을 향해 그분께 나오라고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을 듣고 나온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했듯이,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는 음성에 반응하는 사람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을 걷게 됩니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는 부분을 NIV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I am making everything new”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는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완성과 완결이 되겠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현재 진행형임을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도구요, 동역자가 되어 살아갈 때 우리 자신이 새로운 존재로 세워져 갑니다. 더불어 그런 우리로 인해 우리의 주변도 새로워진다는 회복의 메시지입니다.


세상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악이 득세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절망하지 않고 믿음을 붙들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오늘의 말씀 속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승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 덕분이었습니다.


삶의 고난과 문제 속에서 희망이라는 희망은 죄다 사라지고 눈물이 우리의 앞을 가립니다. 도대체 뭘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버틸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 완전히 뒤바꾸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의 약속을 붙잡고, 힘을 내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시는 2021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드립니다.



5. 소금인형이 되어


인도의 영성 안내자이자 정신치료사였 앤소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의 책 <바다로 간 소금인형> 속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금으로 만들어진 인형이 있었습니다. 인형은 어느 날 자신이 누구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곳’을 향해 무작정 길을 떠났던 소금 인형은 수천킬로를 걸어 마침내 아무도 없는 바다에 도착했습니다. 눈앞에는 오직 바다만 보였기에 바다에게 물었습니다. “바다야,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아니?”

소금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다가 말했습니다. “말로 너를 설명하기는 곤란해. 직접 네가 내 안에 들어와 보면 알 수 있어.” 그 말에 '소금인형'은 살며시 왼쪽 발을 바닷물에 담궈 보았습니다. 그러자 왼쪽 발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깜짝 놀라 도망가려는 소금인형에게 바다가 말렸습니다. “겁먹지 말고 조금만 더 들어와 봐! 그러면 정말 네가 누군지 알 수 있어” '소금 인형'은 겁이 났지만 바다의 말을 믿고 오른쪽 발도 집어넣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오른쪽 발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바다에 닿는 즉시 자신의 형체가 없어져 버린 '소금 인형'은 두발을 잃어 도망칠 수 없게 되자 용기를 내어 돌이켰습니다. 바다가 일러 준대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오른팔과 왼팔을, 그리고 자신의 얼굴까지 바다 속으로 집어넣었습니다. 소금인형은 마침내 아주 작은 알갱이 하나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 작은 알갱이 하나마저 사라지려고 하는 순간 '소금 인형'은 환희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 이제 알겠어. 나는 바다였어, 내가 이제야 바다가 되었구나!” 소금인형은 그렇게 처음 자신이 태어났던 바다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소금인형’ 이야기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우리들의 여정을 소개해 주는 비유입니다. 소금인형은 자기와 같은 본질을 가진 바다에서 녹는 순간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이라는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소금인형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녹고, 하나님과 내가 하나 되는 완전한 연합을 경험할 때에 진짜 우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제 속에 있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이 창조의 목적을 완전하게 경험하는 하나님과의 연합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의 모든 고통과 아픔은 사라지게 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바다되시는 하나님 안에 완전히 녹아질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우리의 애통과 아픔을 제하여 주십니다. 사망은 사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 속에서 새 창조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신학자 톰 라이트(Nicholas Thomas Wright)는 이것을 완전한 회복(the Great Recovery)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완전한 회복의 약속이 이렇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미’!!!



6. 하나님의 조력자가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마무리 되는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나타날 특징들과 더불어 중요한 한 가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우리 생애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바이러스를 겪으며 전세계적으로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계십니다.


물론 이게 무슨 일인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왜 이대로 두시나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우리 머리로 이해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하십시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진실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이면에 숨어 있는 경우가 더 허다합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보다도 더 이 세상이 아름답게 회복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마지막 날에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리며 오늘도 우리와 더불어 만물을 새롭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이 세상의 만물이 본래의 창조 목적대로 완전하게 회복될 그날을 꿈꾸며 2021년도도 일해 가실 겁니다.


1월 1일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박동현 교수)께서 직접 부르신 찬송을 녹음해서 보내주셨습니다. 그 찬송의 가사를 우리의 다짐과 각오로 삼아 함께 기도드렸으면 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종소리크게울려라 [A. Tennyson 작사, J. B. Calkin 작곡]

: 영국의 테니슨이 1850년 친구의 죽음을 애도한 장편시 중에서 발췌한 가사입니다. 사회정의와 형제애로 가득 찬 희망의 새해가 되기를 바라는 아름다운 시에 영국의 칼킨이 작곡하였습니다.

1절

종소리 크게 울려라 저 묵은 해가 가는데

옛것은 울려 보내고 새 것을 맞아들이자

2절

시기와 분쟁 옛생각 모두 다 울려 보내고

순결한 삶과 새 맘을 다 함께 맞아들이자

3절

그 흉한 질병 고통과 또 한이 없는 탐욕과

전쟁은 울려 보내고 평화를 맞아들이자

4절

기쁨과 넓은 사랑과 참 자유 행복 누리게

이 땅의 어둠 보내고 주 예수 맞아들이자 아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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