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12.27 움오름 주일 설교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요 20:30-31)









요한복음 20:30~31

1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2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설교문


1.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늘은 2020년의 마지막 주일이자 요 20장의 마지막 구절을 나누는 날입니다. 요한복음은 21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실제 마지막 장은 20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매듭을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21장은 무엇이라 하면 좋을까요? 부록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대부분의 학자들이 의견을 같이 합니다. 기록자인 사도요한은 요한복음 대단원의 마지막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30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이것을 통해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를 알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더 많은 일들을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 요 21:25에서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보다 명백하게 밝혔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요한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방대한 자료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들을 모두 지면에 담을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보관해 둘 곳이 없을 정도로 많다고 진술했습니다. 그 만큼 행하신 일들이 많다는 표현입니다.


이 부분에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토록 찾고 요구했던 것이 표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왜 요한은 그 많은 표적들을 다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요 12:37이 이미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기회가 될 때마다 말씀드리지만, 표적이 사람을 믿음으로 바꾸지 못합니다. 물론 계기는 됩니다. 그렇지만, 그 믿음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데는 당사자의 애씀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결코 저절로 되지는 않습니다.


이전 교회에 있을 때 한 청년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기도를 드리자 아픈 동생이 치유되는 은혜가 곧 임했습니다. 그 어머니를 비롯해 온 가족이 그 장면을 목격하며 모두가 놀랐습니다. 그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바로 다음 날 온 가족이 교회에 와서 등록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몇년이 지난 요즘 그 가족들은 무론하고 당사자도 신앙에 서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이게 우리들의 보편적 수준이고, 성향입니다. 눈으로 목격한 것의 충격이 가시면 그로 인한 믿음도 점점 퇴색되는 것 말입니다.


요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 가에 있던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후 다시 그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5:14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38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앓았던 그 지긋지긋한 병이 나았으면 얼마나 기쁘고 감격이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 생각엔 당연히 ‘잘 살겠지’, ‘더 선하게 살겠지’라고 추정합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존재가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그 사람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 첫 말씀이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겠습니까!



2.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표적을 구합니다. 하지만, 표적이 다가 아님을 요한은 말합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31절에서 밝힙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31절의 시작부분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30절의 뒷부분이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로 끝나고, 31절의 시작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이라고 이어 집니다. 이는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 수많은 이적과 표적의 기사들 중에 선별하여 기록했다는 의미입니다. 그 선별기준 2가지는 요한복음의 기록목적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다시 31절을 모두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 말씀과 믿음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은…

첫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 31절에서 ‘믿게 하려 함이요’라는 이 부분은 원문의 해석상 ‘믿음을 갖게 하려고’로도 해석가능하고, ‘믿음을 붙들도록’으로도 가능합니다. 첫째 해석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역사한다는 의미이고, 둘째 해석은 기존에 믿던 사람이 더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고, 함께 생활했던 1세대들은 대부분 별세했습니다. 그분들이 생존하는 동안만 해도 예수님에 대해 보고 들었던 내용들이 그들의 입을 통해 증거되고 전해졌습니다. 사람들은 1세대들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기존의 믿던 사람들은 더 믿음에 굳게 서서 박해의 시대를 견디며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1세대들로부터 더이상 들을 수 없는 때가 왔습니다. 이것을 절감한 사도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복음서를 통해 이 믿음이 전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경험했을 뿐 아니라, 보고 들었던 수많은 자료 중에 선별하고 엄선해서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설교시작부분에서 말씀드렸지만, 실제적인 요한복음이 오늘로서 마지막입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저는 제 자신이 나눈 요한복음을 심각하게 되돌아 보았습니다. ‘나는 요한복음을 목적에 맞게 설교했는가?’ ‘내가 나눈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졌는가?’, ‘나는 이 복음서를 설명하고 전하면서 먼저 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믿게 되었는가?’, ‘나 자신 다음으로 이 설교를 제일 많이 듣고 읽었을 청년들(설교문을 올리고, 영상을 편집)의 믿음은 얼마나 자랐을까?’


이 모든 질문들에 저 자신은 선명하게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저 뿐 아니라, 제가 나누는 말씀을 듣는 분들의 속에 유익이 되지 못했다면, 앞으로의 말씀나눔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유익이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것을 권면했습니다. 딤후 3:16-17 유진 피터슨의 the message 번역본입니다.


성경의 모든 부분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어 모든 면에서 유익합니다.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주고, 우리의 반역을 드러내며, 우리의 실수를 바로잡아 주고, 우리를 훈련시켜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게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온전해지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일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앞선 부분이 말씀을 설명하고 전하는 제 입장에서 돌아보았다면, 움오름 가족님들의 입장에선 어떻습니까? 올 한해 동안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진리의 말씀에 기대셨습니까? 말씀 안에서 자신의 비뚤어진 반역을 보셨습니까? 말씀으로 자신의 실수를 바로 잡으셨습니까? 그리하여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며, 말씀을 통해 온전해져 가셨습니까?



2) 말씀과 생명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은…

둘째,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이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얻는다’는 말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사람 자체에겐 생명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니, 내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어떻게 생명이 없다는 말이냐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에 대한 정의와 의미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줄곧 말하는 ‘생명’은 한시적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꽃병에 꽂혀 곧 시들어 갈 생명이 아니라, 생명의 시내이신 하나님 안에서 뿌리 내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는 나무와 같은 생명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영원한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31절)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힘 입는다’는 것은 어떤 것을 뜻합니까? 그것은 공급을 받는다는 의미합니다. 거기서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더더욱 주의할 것은 ‘힘입는다’는 동사 뿐 아니라, 그 결과로 인한 ‘얻는다’라는 동사 역시 단회적인 행동이 아니라, 반복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형태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세례시 고백하는 단회적인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이름을 힘입어 산다는 것 또한 생명의 공급처이신 그분 안에 내 생각과 삶을 거하게 함으로써 반복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생명을 공급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때 신앙 안에서 말씀대로 살려고 열심이셨습니까? 훌륭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이 싸움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자기 욕심과 욕망대로 살려는 자아와 말씀과의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나를 이기고, 내 속에 자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이 자리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속의 이 싸움을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전 15:31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어떻게 ‘날마다 죽는 것’이 자랑이 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으로 인해 부활에 닿을 수 있고, 그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이 우리 속에 자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올 한 해 우리의 자랑은 무엇이었습니까?



3. 기독교 엑소더스


워싱턴포스트가 독자들에게 2020년을 설명해주는 단어나 문장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내왔는데, 그중 9살 짜리가 보내온 것이 특이했는지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양쪽을 모두 확인한 후에 길을 건너다가 잠수함에 치인 기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고, 일어나기도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 그야말로 맨붕이 왔다는 뜻입니다. 9살 아이의 상상력이 잘 드러난 설명이라고 하지만, 가만보면, 공감이 갈 정도로 우리 모두를 경악케 한 한 해였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교회와 기독교인이 보인 행태 또한 사회를 놀라게 했고, 실망케 했습니다. 차후 이 결과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심히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SNS로 자주 신학과 신앙의 방향에 대해 고민한 것을 나눠주는 선배 신학교수(차정식)가 있습니다. 그제 성탄절 전날 한 일간지(한겨레)에 실린 김병익 선생의 ‘기억으로서의 크리스마스’를 읽고 ‘지성인의 기독교 엑소더스’라는 글을 공유해 주었습니다.


내용인즉, <문학과 지성> 4인방으로 불리는 김현, 김병익, 김치수, 김주연 선생이 어떻게 기독교신앙에서 멀어졌고, 떠나갔는지를 기술했습니다. 그분들 뿐 아니라, 자신이 만났던 수많은 작가와 시인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를 떠났다는 겁니다. 그분들은 기독교 신앙의 태반에서 자라면서 근대의식에 눈뜨고 성경을 통해 인간 구원의 정신적 원형을 경험했음에도 그 뒤로 교회를 떠났습니다. 기독교신앙은 그분들 속에 그저 추억거리로 가끔 소환하는 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차정식 교수는 이 뼈아픈 현실을 직시하며 이렇게 자문했습니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교회들은 왜 지성인들에게 한시절 정신의 태반을 제공하고 품을 내주었다가 그들을 방출해버리는 기관이 되어버린 걸까? 떠난 이들이 특출하게 오만하거나 제 욕심에 끌려 집 떠난 탕자가 아니라면 교회의 품이 영원과 무한의 신은커녕 성경의 풍요하고 깊은 인간학을 담지도 못할 만큼 왜소해진 탓은 아닐까? 또 교회를 외면상 대표한다는 목사들의 지성이 이 세상을 향해 열려 있기보다 너무 폐쇄적이 되어버린 때문은 아닐까?


성탄절의 밤이 엉뚱한 계기로 암연히 수수롭다.


교회가 왜 신앙의 태반에서 자란 수많은 사람들을 엑소더스(출애굽)하도록 부추겼을까요? 어쩌면, 사도요한이 말했던 그 2가지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하지 못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도록 도와주지 못하는 건물로, 친목단체, 계모임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4. 생명을 산다는 것?


그제 성탄절 가정예배지 안의 설교는 송영윤 목사의 허락을 받아 포천중리교회의 지난주일 설교원고를 실었습니다.


설교의 뒷부분은 ‘예수와 임마누엘’의 뜻을 풀이하면서 다음과 같이 두 뜻을 통합하며 설명했습니다.


‘예수’라는 말의 뜻은 ‘여호와께서 구해주신다’입니다. 죄에서 구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런데 이사야서에는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두 이름의 뜻이 다르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같은 뜻입니다. 합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해주시는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자기를 돌아보고 허물과 죄를 반성하며 용서를 구하는 사람과 하나님은 함께 계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이름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의미를 가장 적절하게 통합한 탁월한 해석이었습니다. 이 부분을 오늘의 말씀과 연결하면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매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비춰보고 돌아봐야 합니다. 자신의 왜곡된 허물과 죄를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는 사람으로 서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기꺼이, 즐겁게 함께 ‘임마누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여기서 그치면 개인주의적인 강복추구신앙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임마누엘’의 뜻, 다시 말해 우리와 어울릴 수 없는 분이 기꺼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뜻을 깊이 새긴다면, 우리 또한 우리 주변과 거리를 좁히며 어우러져 생명을 나누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오늘날 한국인에게 가장 결여한 것 중의 하나가 ‘더불어 사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함께 사시기 위해, 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그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당연 이 땅의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실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5. 나는 살아있다


오늘 예배순서지 안의 ‘움이 트는 생각’에 ‘나는 살아있다’는 제목의 글을 나누었습니다. 글 내용은 tvN에서 했던 예능 프로그램의 내용을 두고 쓴 글이었습니다. ‘나는 살아있다’라는 프로그램은 오직 살아남겠다는 각오로 6명의 여성이 생존수업에 참여해 매회마다 달라져 가는 성장 리얼리티였습니다.


끝부분에 6명 중의 한명인 오정연씨가 남긴 소감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습니다.


"수동적으로 살아지는 게 아닌, 살려고 노력하고 그렇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의미가 있음을 느꼈다. 위기상황에서 생각보다 이기적이게 될 것 같았는데 오히려 더 이타적이게 되더라”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는 나만 챙기고, 내 가족만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더 많은 사람을 품고 함께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구요. 2021년도 그리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언제 전염병이 종식될지 알 수 없는 위기상황입니다. 올해보다 어쩌면 더 어려워 질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일 수록 우리 서로 손을 잡아주고, 끌어주며 함께 걸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야 말로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누리며 나누는 복음의 삶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오래 되고, 더 악화되는 바이러스 상황에서 인류는 양극단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이기적이 되기도 하고, 더 이타적이 되기도 합니다. 이 속에서 벌어지는 불평등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또 생명을 잃어가기도 합니다.


이런 와중에 다른나라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백신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난리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남들이야 죽든지 말든지 우리부터 살아야 하겠다는 지독한 집단적 이기주의 표현입니다. 한 때 세계에 팽배했던 다른나라의 것을 착취해 자국의 부를 챙기던 제국주의의 그림자를 보는듯 합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교회가 어려운 시대일수록 더 많은 사람을 품고, 챙기고, 섬기지 못한 채 사람들을 밖으로 내쫓는 이기적 산실이 되어 갑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나누지 못한 채 주변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

우리가 잃어버린 기본이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근본이 무엇인지 새겨봅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표적이 아니라, 증인들의 손을 거쳐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이 오늘도 우리를 믿음으로 세워가게 하옵소서. 그 말씀에 날마다 자신을 비취며 진리에 반역하는 자아를 죽여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날마다 살아나는 부활의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그 생명으로 주변을 살려가는 생명의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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