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12.13 움오름 주일 설교 -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요 20:24-29)-대림절 3주









요한복음 20:24~29

24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8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9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설교문


1. 도마의 예수님 이야기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던 해인 1945년 12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집트의 한 농부가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500km 떨어진 나일강 상류 나그함마디 산기슭에서 땅을 파다가 토기 항아리를 발견했습니다. 그 항아리 안에는 오래된 파피루스 문서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농부는 항아리 속 파피루스 문서들을 시장 골동품상에게 팔아 담배, 설탕 등을 구입했습니다. 이 문서가 바로 1947년에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 성서(Dead Sea Scrolls)와 함께 성서 고고학상 최대의 성과로 불리는 도마복음서입니다.


그런데 왜 도마복음이 산기슭 땅 속에 들어 있었을까요? 학자들은 니케아 공의회 의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아타나시우스파에 의해 선별된 27권의 기독교 문헌들을 신약성경의 정경으로 공인했습니다. 그리고 27권 이외의 모든 책들을 파기 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여파로 이집트에 있던 기독교 최초의 수도원 파코미우스(Pachomius monastery at Tabennisi, north of Thebes, in Egypt) 수도승들이 27권 이외의 책들을 수도원 도서관에서 몰래 빼내 항아리에 밀봉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찾기 쉽도록 산기슭 큰 바위 밑에 있는 땅 속에 숨겼습니다. 그 문헌들이 바로 도마복음서를 비롯한 나그함마디의 문서입니다.


발견된 도마복음은 기원후 300년 이후 필사한 것이지만, 최초 도마복음이 씌어진 것은 대략 기원후 100년경으로 봅니다. 요한복음과 비슷한 시기입니다. 기존의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이적을 비롯해 종말, 부활, 믿음, 심판, 대속 같은 것을 기록하고 있는 과는 달리 도마복음은 예수님의 어록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신 우리 속에 빛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 그 깨달음을 통해 새사람이 되는 것을 강조합니다. 공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과는 50% 정도 일치합니다.


이런 부분을 보며 어떤 학자들은 도마복음이 당시 유행했던 영지주의 사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통한 구원을 주장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좀 더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 70여년이 지나는 동안 믿음만을 강조하고, 예수님의 이적을 중시하다 보니, 정작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따라사는 것이 뒷전이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 새로운 자아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야고보서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고 선언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2주전 도마복음서를 쭉 읽어보았습니다. 모두 114절로 구성되어 있는 도마복음은 정경에도, 외경 안에도 들지 못한 위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엔 기독교 신앙의 기본에 충실한 메시지들이 가득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깨달음을 통해 내 속에 있는 천국, 내 속에 있는 하나님, 내 속에 있는 진짜 나를 발견함으로써 자유와 해방을 얻고 새 생명으로 태어나라고 강조합니다.


군데군데 웃음짓게 만드는 구절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13절의 내용입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3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누구와 같은지 나에게 말해보라.”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스승님은 정의로운 천사와 같습니다.”

마태가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스승님은 현명한 철학자와 같습니다.”

도마가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스승이시여, 저의 입으로는 감히 당신이 누구와 같으신지 말씀드릴 수 없나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니라.

"나는 너희들의 스승이 아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취해있고, 내가 주의하라고 말한 끓어오르는 샘물을 마시고 도취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도마를 데리고 다른 곳에 가셔서 그에게 몇마디 말씀을 하셨다.도마가 그의 동료들에게 돌아왔을 때 친구인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다.

"예수께서 너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도마가 그들에게 말했다.

"만일 내가 너희에게 그분이 하신 말씀 중에서 단 한마디라도 말한다면 너희들은 돌들을 집어서 나에게 던질 것이다. 그러면 그 돌들로부터 불길이 솟아나 너희들을 집어삼켜버릴 것이다."


‘끓어오르는 샘물’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비롯해 해석의 난해함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마복음서의 구석구석에는 13절과 같이 도마가 얼마나 예수님과 친밀했는지, 예수님을 사랑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가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내면화하면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 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본 고로 믿느냐?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요한복음은 유독 제자 도마와 관련한 일화와 말을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눈에 보기에 도마가 특이했고, 또 그와 친했기에 그의 복음서에 여러 번 등장시켰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친하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소개하고, 그 예수님을 믿도록 설명하고 설득하는 복음서에 그런 사적감정이 개입되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요한은 사도 도마의 이야기를 기록했을까요? 어쩌면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하던 시대배경과 기독교 신앙이 처한 상황에 도마의 이야기가 가장 적합한 이야기였기 때문은 아닐까요?


요한복음을 기록하던 기원후 90년 - 100년 사이의 교회 안팎의 상황에 대해서는 2주 후 요 20:30-31을 나눌 때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29절 말씀과 관련한 배경상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29절을 다시 봉독하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도마에게 당신의 상처난 몸을 직접 보고, 만져봄으로써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놀란 도마는 지체없이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신약성경에 예수님을 향한 여러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요한복음만 해도 요 1:34에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고 선언했습니다. 요 1:49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는 나다나엘의 고백이 있습니다. 모두다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렇지만, 도마의 위 고백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예수님의 근본에 가까운 신앙고백이었습니다. 특히 사망 권세를 깨고 부활하심으로써 이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28절에서 도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 속에 ‘나의’라는 1인칭 단수 소유대명사를 굳이 2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했습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특성상 ‘나의’라는 소유대명사를 쓰지 않더라도 명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누구의 주님이고, 누구의 하나님을 말하는지 구분이 가능합니다. 그런데도 2번을 반복해서 사용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그만큼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마는 주님과 3년을 함께 동거동락하면서도 그분이 누구이신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믿고 따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십자가에서 잃고 다시 그 주님의 부활하신 모습과 대면하며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앎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었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셨던 겁니다.


이에 도마는 영어의 ‘the’와 같은 정관사 ὁ(호)를 사용하여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ὁ κύριός μου καὶ ὁ θεός μου(호 큐리오스 무, 카이 호 데오스 무). 있는 대로 번역하자면 이런 고백입니다. “나의 (유일하신) 그 주님, 그리고 나의 (유일하신) 그 하나님”


도마의 이 고백에 대해 주님은 앞서 읽었던 29절의 말씀과 같이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무조건적인 맹신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엔 2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그 동안 보여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기에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에 의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는 말씀은 주님을 직접 뵙지 못한 상태에서 신앙생활하는 세대를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고, 부활을 직접 목격했던 1세대들 대부분이 순교하거나 별세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보았기 때문에 믿는다는 주장이나 보지 못했기에 믿지 못하겠다는 주장 모두 수정이나 정리가 필요한 때였습니다.


이런 신앙의 분위기를 감지한 사도요한은 도마의 부활체험 이야기 속에 주님의 말씀을 소개함으로써 보지 못한 상태에서 믿는 사람들을 교육하고 격려하기를 원했던 겁니다.


정리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다”는 말은 결코 맹목적인 신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일 맹신을 원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66권이나 되는 이 방대한 계시의 말씀을 주셨을 까닭이 없습니다. 또한 임마누엘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어 당신 자신을 직접 계시해 주실 이유도 없었습니다.


이와같이 “보지 않고 믿는다”는 말이 맹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미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3년간 함께 계시면서 당신이 하나님이시다는 표적을 얼마나 많이 보여 주셨습니까! 그것만으로도 주님의 부활을, 주님의 하나님 되심을 얼마든지 믿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3.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이 부분에서 잠시 근원적인 생각을 해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두 모였을 때를 골라서 단번에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들이 모였을 때 1차로 보여주신 후 다시 다음 주일이 되는 만 7일 후에 도마를 포함한 11제자 모두가 모였을 때 2차로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왜 이렇게 번거롭게도 같은 일을 2번이나 반복하셨을까요?


제자들 모두가 모인 시간을 몰라서 그랬던 것일까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주님의 부재시 도마가 했던 말도 정확하게 아시는 분이 어떻게 제자들이 모두 모인 때를 모르셨겠습니까? 더군다나 부활 후 40일 동안만 이 세상에 계셨던 주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제한된 시간에 굳이 같은 일을 2번씩이나 반복하며 시간을 쓰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부러 도마가 없었던 때를 골라서 제자들을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도마가 자리를 비운 때를 골라서 나타나셨을까요? 그 이유는 앞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라고 물으신 주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후에 주님을 직접 눈으로 뵙지 못하고 믿음생활을 하게 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겁니다.


주님은 도마로 대표되는 ‘보고 믿는 자들’과 초대교회 교인들을 비롯해 오늘날 우리같은 사람을 상징하는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을 서로 대조하셨습니다. 주님은 양쪽 모두를 향해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선택은 ‘보는 것과 보지 못한 것’에 좌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직접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체험했다면 더 확신을 갖고 잘 믿을 수 있었을 것같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 사람들을 보십시오. 눈으로 예수님의 이적을 직접 목격하고, 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예수님을 영접하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자들 중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던 때에 그 자리에 함께 하면서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마 28:17이 다음과 같이 그 부분을 증언합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주님은 사람들의 이런 속성과 생각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생각과는 달리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며 주님을 목격했던 사람들보다도 예수님의 승천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며 주님을 믿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더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주님을 직접 눈으로 뵙지는 못했지만, 주님께서 남기신 말씀에 근거하여 부활을 믿으며 그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 사람들이 더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더 복되다’는 것은 주님께서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을 더 인정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믿음을 더 귀하게 보신다는 의미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팔복에서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 μακάριος’(마카리오스),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어째서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말씀일까요? 되려 답답한 것 아닙니까?


답답할 수 있습니다. 이게 과연 맞을까라는 회의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걸어가는 인생 속에서 느끼고 경험하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체험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행복이란 이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이것은 말로 설명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신뢰하며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는 체험입니다.



4. 대림절 셋째 주일에


오늘은 주님의 오심을 기억하며,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셋째주일입니다. 다시 오신다는 주님을 기다린 시간도 천년이 2번이 바뀌었습니다. 기다림이 지루할 수 있고, 의심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주님을 더더욱 신뢰하며 우리의 선배들은 그 긴시간 믿음의 경주를 해왔습니다. 점점 주님의 오심이 더뎌지고, 늦어지더라도 등불의 기름을 준비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왔습니다. 그 결과 그분들의 믿음의 배턴(baton)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대, 전염병이 언제 종식될지 모르고, 어쩌면 바이러스와 함께 쭉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이 시대를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이 물음에 답을 찾으며 잠시 도마복음을 떠올려 봅니다.


도마복음은 내가 바로 살아 계신 아버지의 아들, 딸이라는 사실, 내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하라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이 땅에서의 삶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진주 같은 진리다고 선언합니다.


요한복음이 빛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면, 도마복음은 빛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 스스로도 빛(빛의 자녀)이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비추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라고 합니다.


어두우면 어두울 수록 더 빛을 밝게 비추며 사는 것이 빛의 역할, 빛의 자녀의 도리입니다. 난로가 날이 춥다고 불평해서 되겠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주님을 마주하기에, 곤한 일상 속에도 희망을 담고 행복을 만들어가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나만 힘들다고, 나만 불행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점점 더 작은 가슴 안고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기에 어두운 전염병의 시기에서도 기다림의 불을 밝히며 살아가는 믿음의 용사되게 하옵소서.


추운 날에도 가슴에 간직한 따스한 사랑의 불씨를 피우며, 희망을 그려가는 너그러운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보지 못하기에 더 보게 하시고, 마주하지 못하기에 더 대면하는 역설로 믿음의 경주를 해 감으로써 더 복된 사람, 더 행복한 전도자 되게 하옵소서.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 버리고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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