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11.29 움오름 주일 설교 - "믿는 자가 되라"(요 20:24-29)-대림절 1주

최종 수정일: 2020년 12월 5일









요한복음 20:24~29

24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8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9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설교문


1. 크리스마스 캐럴


1843년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는 <크리스마스 캐럴(A Christmas Carol)>이라는 중편소설을 발표했습니다. 이 유명한 소설은 우리말의 ‘자린고비’보다 더 구두쇠의 대명사가 된 스크루지 이야기입니다. 디킨스의 소설 중 가장 대중의 사랑을 받은 작품인데, 간략하게 줄거리를 회상해 보겠습니다.


동업자 마래가 죽자 주인공 스크루지는 혼자 가게를 경영해 갑니다. 스크루지(Scrooge)란 이름이 ‘구두쇠(screw)+사기꾼(gouge)’의 합성어이듯이, 그는 욕심쟁이요, 사기꾼 구두쇠였습니다.


이런 삶을 살다보니 자연스레 ‘외톨이’가 되었고, 하나님이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스크루지의 동업자 마레의 망령을 통해 경고하셨습니다. "살아 생전에 욕심쟁이요, 구두쇠였기 때문에 쇠사슬에 묶인 채 이렇게 고생하는데, 너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했습니다. 뒤이어, "그러나 네게는 구원의 길이 남아 있다. 내일 밤부터 하룻밤에 한 가지씩 너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보이는 망령이 나타나 네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리라"고 말한 뒤 사라졌습니다.


마레의 망령을 통해 예고된 것처럼 성탄절을 앞두고 하나님은 스크루지의 꿈 속으로 세 유령을 보내,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보게 하셨습니다. 시계가 새벽 1시를 치자 첫 번째 유령이 나타나서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과거 크리스마스 유령’으로서, 스크루지의 쓸쓸한 소년 시절과 지금은 없는 착한 누이, 그리고 그가 돈 때문에 버린 옛 애인을 보여주었습니다.


두 번째 유령은 '현재 크리스마스 유령’으로서, 그를 자기 가게의 서기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곳엔 가난했지만, 모두가 모여 "메리 크리스마스" 하며 행복하게 보내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또한 스크루지를 위해 축배를 드는 조카의 집도 보여주었습니다.


세 번째 유령은 '미래 크리스마스 유령’으로서, 스크루지가 차디찬 방에 홀로 죽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본 스크루지는 완전히 변해서 유령을 붙들고 필사적으로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러다 깨어 보니 그것은 꿈이었고, 때는 크리스마스 아침이었습니다. 지나온 삶이 후회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그냥 슬퍼하며 주저앉아 있을수만은 없었습니다. 회개한 스크루지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먼저 익명으로 서기 크로체트네 집에 큼직한 칠면조를 보냈습니다. 이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많은 액수의 돈을 기부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카네 집으로 달려가 즐거운 크리스마스 만찬에 참석했습니다.

이렇게 그해의 크리스마스는 스크루지에게 복된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2020년 끝자락에 맞이하는 대림절과 성탄절이 우리에게도 삶을 새롭게 하는 은혜의 시간 ‘크리스마스 캐럴’이 되었으면 합니다.



2. 디킨스의 크리스마스와 우리의 크리스마스


1997년 12월 3일 우리나라가 IMF구제금융신청이라는 국가 부도에 직면할 때였습니다. 개인이나 회사가 부도를 맞이하는 경우는 지켜봤어도 국가의 부도라는 사건은 상상치도 못했기에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환율은 끝도 없이 치솟고, 자산가치는 바닥을 모르고 내려앉았습니다. 회사가 문을 닫고 길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보면서 두 사람(맹문재, 여국현)이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A Christmas Carol)>을 번역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그 두 사람은 수많은 소설들 중에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번역하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19세기 중엽 디킨스가 겪은 영국의 상황과 20세기 말 한국이 맞이한 상황이 묘하게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렇지만 화려했던 겉모습과 달리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뒷모습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빠른 속도로 성장한 도시는 빈곤, 실업, 저임금, 경쟁, 계층 갈등에 쫓기는 빈민들을 양산했습니다.


성장기에 디킨스는 이런 아픔을 온몸으로 겪었기에 그 누구보다도 근로자와 사회적 약자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디킨스는 <크리스마스 캐럴>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해결을 촉구했습니다. 지배계층의 사람들에게 인간성을 상실하고 비인간화된 도시 상황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동시에 사회의 모순에서 야기된 빈민들이 자신의 소설을 통해 조금이라도 위로받기를 바라는 맘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은 단순한 소설이 아닙니다. 그것은 소외와 아픔을 사랑으로 극복하려는 사회변혁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사회의 아픔을 복음으로 치유하고 회복하려는 성탄의 이야기입니다.


디킨스가 추구한 사회의식에 무척이나 공감이 갑니다. 낙엽처럼 나뒹굴던 1997년 12월 해고노동자들의 눈물 뿐 아니라, 무너져 내리는 2020년 코로나 시대의 아픔도 절절히 와닿습니다. 이런 이유가 아주 오래전 읽었던 스크루지의 이야기 <크리스마스 캐럴>을 다시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거짓말쟁이, 사기꾼 구두쇠 스크루지 또한 아픈 시대의 상처난 산물이었지 않을까요? 거대한 자본을 보유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물자 자체가 부족해 가난한 게 아니었습니다. 극단적인 빈부의 차이 속에서 위에서 아래로 흘려보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나눔없는 사회라는 게 모든 물길을 꽁꽁 걸어 잠근 상류지대의 댐으로 인해 메말라 가는 하류와 같으니까요.


이런 사회 속에서 스크루지도 가난해질까 걱정이 되었고, 불안했던 겁니다. 가난해지지 않기 위해 그는 사람과의 단절도 감수하며 돈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스크루지가 만난 꿈 속 유령들은 스크루지의 불안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스크루지는 그의 불안을 전혀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 갔습니다. 쥐어짜고, 긁어모으는 것은 가난의 불안을 해소할 궁극적 방법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움켜잡음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되려 손을 펴서 나누고 흘려 보냄으로써 해결될 문제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B.C 970년경 솔로몬은 잠언 11:24-25을 통해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24절: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절: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갑자기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스크루지를 보며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소유가 곧 힘이요, 능력이었으니 그것을 포기한 것같은 스크루지가 얼마나 어리석어 보였겠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그 어리석음이 스크루지를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했습니다. 길거리로 내몰렸던 가난한 이들이 따뜻한 성탄절을 맞이하게 했습니다. 그들을 사회적 구원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워낙 성탄절이라는 기원이 이런 어리석음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비웃음거리가 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분이 가장 연약한 아기로 짐승의 우릿간을 산실 삼아 태어나셨습니다. 어리석음과 비웃음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보십시오. 그 어리석음으로 인해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지 않습니까! 어처구니 없는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인해 우리에게 생명의 삶이 허락되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런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마음에 새긴다면, 2020년 성탄절은 어떤 절기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움켜 잡는 성탄이 아니라, 펴서 나누고, 흘려보내는 성탄이 되어야 합니다. 낮아짐과 나눔으로 자발적 어리석음과 비웃음의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생겼듯이, 우리로 인해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이 펼쳐지지 않겠습니까!



3. 메시지와 메신저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불안해 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그들 불안의 궁극적 해결이 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부활을 제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불안해 하며 문이란 문은 온통 잠그고 지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25절)고 말했습니다.


부활을 목격했다면서도 이전의 삶과는 전혀 다르지 않은 제자들을 보며 도마가 그 말을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믿었다면 그것이야 말로 이상했지 않겠습니까? 우리만 하더라도 보십시오.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의 삶과 태도가 그가 전하는 메시지와 닮아 있지 않다면 누가 그것을 믿고 받아 들이겠습니까?


이에 도마는 부활을 목격했다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전하는 말과 삶이 닮아있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일갈이었습니다. 25절 하반절입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어떤 면에선 차가운 실증주의자 같이 보이지만, 적어도 도마는 전하는 메시지와 메신저는 닮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도마였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뵌 이후 그는 그 어떤 제자보다도 더 멀리, 더 멀리 복음을 전하다 52년경 인도 동남부 마드라스(현 첸나이)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를 위한 증거로 생명까지 걸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고보니, 도마는 이름만 그럴듯한 예수님의 제자, 명목상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2천여년 동안 도마는 의심많은 제자라고 오해 받아왔지만, 우리는 도마의 말 속에 참된 믿음을 향한 갈망을 엿봅니다. 그 갈망으로 인도인의 영혼 속에 구원의 길을 열은 그의 아름다운 삶을 마주합니다.


도마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왜 한국사회 속에서 기독교의 복음이 외면 당하는지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을 이야기하면서도 지극히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는 교회 때문입니다. 부활의 메시지를 말하면서도 이 세상이 다 인것처럼 사는 그리스도인 때문입니다.


귀하신 움오름가족님들~

혹이나 기독교의 메시지와 메신저가 이처럼 괴리된 현실이 우리와 무관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요?



4. 믿는 자가 되라


두번째 찾아오신 주님은 도마의 바램대로 못자국난 손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7절입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주님은 도마에게 당신의 상처난 자국을 보고, 만져보라고 말씀하시며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에게 믿음을 요구하신 겁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1차적으로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하셨던 주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영원한 부활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한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은 이후 다락방의 문을 열고 나가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핵심은 단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가 아니라, 여타 종교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이 부활이 있기에 생의 두려움을 넘어서게 하고, 인간존재를 움추리게 하는 불안을 넘어 생명을 나누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그것은 ‘죽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 된 내가 죽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참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것처럼 움켜 잡으며 살던 손을 펴서 약한 이들의 손을 잡고 살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부활의 삶, 부활을 믿는 삶은 내 안의 자기보호적인 구두쇠 스크루지가 죽고, 허물어지는 겁니다. 새로운 삶을 사는 부활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어처구니 없는 크리스마스의 아기 예수님을 닮아 자기를 나누는 비웃음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오심을 기억하고, 다시오심을 대망하는 대림절 첫째주일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진정 주님의 부활을 믿는 메신저가 그가 전하는 메시지 닮은 ‘책임있는 삶’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에, 주님 안에서 우리의 부활도 소망하는 그리스도인이길 소망합니다. 메시지와 괴리된 메신저자 아니라, 우리가 전하는 부활의 메시지와 꼭 닮은 책임있는 메신저로 살길 구합니다.


염려와 불안이 상존하는 세상의 삶 속에서도 주님의 부활을 믿기에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으로 당당히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불안한 미래를 위해 쥐어짜고, 움켜잡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흘려보내는 생명의 유통자로 존재케 하옵소서. 이것이 주님께 보여드릴 우리의 믿음이게 하옵소서. 이것이 부활의 목격자요, 그 상처를 지닌 메신저로서의 참된 신앙이게 하옵소서. 이것이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대림절이게 하옵소서.


겨울을 맞아 전세계적으로 코로나가 대유행해 가는 어두운 시절입니다. 시대가 어둡고, 아픔이 더할수록 더더욱 책임있는 친구요, 이웃으로서 함께 하는 믿음있는 그리스도인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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