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11.15 움오름 주일 설교 - "내 손을 보고,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요 20:24-29)

2020년 11월 28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20:24~29

24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8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9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설교문


1. 도마에 대한 보고서


예수님의 12제자 중 사람들로부터 가장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 인물은 누구일까요? 단연 가룟 유다입니다. … 그 다음으로 박한 평가를 받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도마가 아닐까요? 사람들이 도마를 말할 때마다 수식어로 넣는 말이 있습니다. ‘의심많은 도마’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보통 의심은 믿음과 반대편을 지칭합니다(실은 믿음으로 가는 과정). 그러고 보면, 도마는 현실 평가에서 뒤에서부터 넘버2가 맞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오늘 본문 가운데 있습니다. 25절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다른 10명의 제자들이 하나같이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는데도 도마는 믿지 못하겠답니다. 그가 믿지 못하는 이유가 그의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이 말은 당신들의 말로는 믿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남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못 자국을 보고, 자신의 손가락으로 못 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쑥 들어간 창자국을 확인하지 않고선 믿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몇 가지의 전제조건들이 충족될 때에야 비로소 믿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믿지 아니하겠노라”는 도마의 말을 원문으로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는 그의 강한 신념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οὐ μὴ πιστεύσω(우 메 피스튜소).


우리말 성경에는 ‘아니하겠다’는 부정의 뜻이 한 번밖에 번역되지 않았는데, 원문에는 οὐ(우)와 μὴ(메)라는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단어 2개를 연이어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중복이 긍정을 나타내는 우리말과는 달리 헬라어는 부정 표현의 의미를 더 강조합니다. 이를 부정일치(negative concord)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반영하여 재번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결코 믿지 않겠다”. 이와 같은 느낌을 잘 살린 새 유대번역 성경(NJV)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I refuse to believe”(나는 믿기를 거부한다)


직접 보고, 만져보지 않고선 믿지 않겠다는 도마의 단호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도마의 발언이 있다보니 사람들은 하나같이 도마를 일컬어 ‘의심많은 도마’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에 있어 우리도 도마와 별반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도 나름 전제조건을 걸고 믿어왔지 않습니까? “만약 무엇무엇 해주신다면 잘 믿겠습니다”라는 우리들의 기도 속 요청을 들여다 보면, 도마는 우리보다 훨씬 더 순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미끼로 우리 욕망의 성취를 구하지만, 그래도 도마는 믿음 그 자체를 위해 전제조건을 내걸었지 않습니까!



2. 정말 의심많은 도마?


의심많은 도마’ … 숯한 시간동안 사용해 온 이같은 수식이 정말 타당할까요? 정당한 표현일까요? 함께 생각해 보시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숨어있던 집을 찾아오셨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공교롭게도 도마만 없었고, 10제자들 모두가 모여있었습니다. 예수님은 10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10제자들이 요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으로 여겼기에 실제 몸의 고난의 흔적을 일일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의심하는 제자들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감격스럽고 기쁜 그 자리에 누구만 없었습니까? 도마입니다. 도마만 그 자리에 없어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8일 후에 제자들이 모인 집에 와서 보니 다른 제자들이 하나같이 주님을 보았다며 도마보고 믿으라는 겁니다. 그러니 도마 입장에서 보자면,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만져보고, 확인하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25절)고 말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이에 동의한다면, ‘의심많은 도마’라고 다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남들이 받지 못한 특별한 혜택이나 대우를 바란 것도 아닙니다. 그저 다른 제자들이 보았고 받았다고 하는 그 정도만 요구한 것입니다. 남들만큼만 그도 보고, 만져 보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기에 ‘의심많은 도마’라기 보다는 ‘도마의 정당한 요구’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너희에게 평강이 …


본문 26절은 ‘여드레를 지나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26절을 다시 봉독해 보시겠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여기서 ‘여드레가 지났다’는 것은 실제 8일이 지났다는 말이 아니라, 유대인의 유월절 축제기간인 만 7일이 지나고 다시 주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시작일과 마침일을 모두 포함). 이 말은 동시에 10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뵌지 1주일이 지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명한 부활의 증거를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문이란 문은 온통 걸어 잠군 채 있었습니다. 이는 여전히 두려움에 붙잡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지난 번과 동일하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번과 똑같은 말씀을 지금 3번째 하시는 겁니다. 양육하고 가르치다 보면 했던 말 또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고쳐지지 않고, 나아지지 않을 때 마음이 어떠십니까? 말 그대로 속상하시지요. 한 마디 하면, 둘 셋은 바라지도 않는데, 그 한 마디만이라도 제대로 알아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시지요?


지금 예수님이 딱 그런 경우입니다. 보여 주고, 가르쳐 주고, 알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똑같습니다. 얼마나 속상하셨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주님은 여전히 같은 말씀을, 같은 톤으로, 같은 마음으로 하고 계십니다. 자식이든, 학생이든, 아니면 후배나 부하직원이든 간에 양육하는 이의 마음이 이와 같다면, 바뀌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그나마 사람같이 행동하고, 사람노릇하고 있다면, 이것은 우리의 애씀 덕분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참고 견디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주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고, 아껴 준 부모님과 선생님을 비롯한 분들이 계셨기 때문임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4. 주님의 손과 옆구리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해 평안을 기원하신 주님은 이어 도마를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7절입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확인하고, 손으로 주님의 상처난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고 싶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싶었던 제자 도마가 원했던 것은 ‘부활의 증거’였습니다. 그는 그 증거를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 속에서 찾았습니다.


그런 도마를 향해 예수님은 고난의 상처, 아픔의 흔적을 직접 손으로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도마 입장에선 깜짝 놀랄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손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면 믿겠다는 자신의 말은 분명 예수님이 계시지 않던 자리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자신이 했던 그 말을 정확히 반복하시며 그렇게 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어 믿음 없는 자가 되지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도마는 어떻게 했습니까? 진짜로 주님의 상처난 손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부활하신 주님을 보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28절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평서문처럼 보이는 이 문장의 원문은 사실 감탄문입니다. 그 느낌을 살려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못자국난 손을 내미시며 만져보라고 하시는 주님의 그 손을 도마는 실제 만져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확인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선명하게 드러난 주님 손의 상처만으로도 주님의 부활을 충분히 확인하고도 남았습니다.



5. 고난의 흔적


군 제대 후 제가 20대 청년부 활동을 했던 교회는 매년 신앙대강좌를 개최했습니다. 신앙대강좌라고 해서 기독교인만 강사로 오는 게 아니라, 동국대에서 가르치던 스님이 오시기도 했고, 당시 지성의 대명사이자 무신론자였던 이어령 선생님이 오시기도 했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이 오셨을 때는 제가 군에 있을 때여서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강좌테이프를 통해 ‘교회 밖에서 본 교회’라는 그분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암투병 중에서도 고귀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계시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그분은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왜 교회에 다니지 않는지를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의 도마의 말을 들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도마가 예수 부활의 증거로 요구한 것이 바로 고난의 흔적이었고, 예수님께서 부활의 증거로 도마에게 보여 주셨던 것 또한 고난과 아픔의 상처였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할 증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진리 때문에 고난 당한 흔적, 시대의 아픔에 동참한 상처 자국, 세상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당한 희생의 흔적.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이러한 흔적과 자국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하여 보여 주는 것이라고는 집단화된 이기심, 거대한 야망, 그리고 세속화된 성공주의와 출세주의 뿐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셨던 증거가 결단코 아닙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당하셨던 고난의 상처와 아픔의 흔적을 보여 줄 수 있는 교회를 소개해 주십시오. 나는 그 교회 교인 되기를 고려해 보겠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이 말씀을 하신 후 14년 뒤인 2007년 7월 24일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문화적인 현상으로서 기독교를 인정하지만, 신앙의 대상으로는 미신이 아니냐? 그런 미신을 내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고, 인간사회에 문화적인 현상으로 인정할 따름이다”라고 공공연히 강의하던 분이 그 신앙의 대상 앞에 평생 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표면적으로야 알려진 바와 같이 딸 이민아 목사와 손자의 병이 치유된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면엔 분명 딸의 고난과 치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상처와 아픔의 흔적 을 발견했기 때문일 겁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를 보여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그 아픔의 흔적을 드러내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도바울은 골로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골 1:24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받을 수 밖에 없는 고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손해보지 않고, 상처받지 않으면서 그렇게 살았던 사람있습니까? 만약 그런 복음이 있다면, 그것은 짝퉁 기독교요, 사이비이지 참다운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온전한 진리를 전하기 위해 고난의 흔적을 자신의 몸에 새겼습니다. 자신에게 부어진 아픔의 흔적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가장 소중한 증거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야 말로 그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의 표식이었습니다.



6. 제가 1/2을 내겠습니다


몸부림 치는 저의 이야기입니다. 오해없이 들으셨으면 합니다.


추석 연휴가 끝나자마자 대구외곽에 있는 제 어머니집을 새로 짓고 있습니다. 있던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것이 아니라, 신축하다 보니 인허가에서부터 건축에 이르기까지 신경쓰야 할 일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일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예상치도 못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건축 이외의 별별 요소들이 문제로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을 해결하고 조율해 오다 보니 어느덧 집 외관의 틀(골조)이 만들어 졌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중 어려웠지만, 잘 해결된 일이 있습니다. 현재 건축중인 제 어머니집은 DGIST(대구경북과학기술원)와 6m 폭의 길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10년 넘게 빈 토지로 뒀다보니 동네사람들이 하나 둘 농기계를 비롯해 폐기물을 그 길 옆에 방치해 두었습니다. 그 중 발암물질로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는 슬레이트 지붕재가 쌓여있었습니다. 이걸 동네의 한 집에서 철거해 그곳에 야적해 둔 겁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돈을 주고 처리하고 싶지는 않고, 자기 집에 두기엔 싫어서 였습니다.


80세가 넘은 그 어른께 전화를 드려서 집 건축공사 관계로 차량통행과 작업에 방해가 됨으로 좀 치워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분은 폐기물을 왜 거기에 두었는지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한 뒤 결론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 방해되면 네가 옮겨서 우리 집 마당에 갔다 놓아라!”


더이상 말이 통하지 않기에 통화를 마친 후 친구인 이장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장은 그 집 아들에게 자신이 말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필요하다면, 제가 1/2이라도 부담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집 아들은 아버지와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한 10만원 정도면 치우겠지만, 그정도 돈을 내고 해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그게 거치적거리면 실어서 우리집에 갖다놓아라”는 겁니다.


이장이 짐작하기론 70여만원이면 치울 것 같았지만, 폐기물 수거업체에 연락해 보니 그 정도 양은 140만원을 주어야 치울 수 있었습니다. 고민 끝에 읍사무소 환경담당 공무원에게 전화해서 자초지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정식 공문을 발송해서 행정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후 제 어머니께서 사시기에 어려움이 있으니 그러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1/2 부담을 할테니 어떻게 해결해 주실 수 없는지 재차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감사하게도 현장을 직접 확인한 담당공무원은 이장에게 이야기해서 그집 아들이 10만원을, 제가 40만원, 나머지는 읍사무소의 유휴예산에서 충당하는 것으로 하고 폐기물수거업체에게 수거토록 했습니다. 이렇게 일을 처리하자 폐기물을 버린 집의 아들이 제게 전화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안하게 됐고, 고맙다…”


법으로 하고, 법으로 따지자면 가당치도 않는 일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자기 편이성과 관성이 관례가 된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저의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 사람 같이 신앙을 이야기할 이 없는 시골마을에 시집와서 평생을 그곳에서 사신 제 어머니의 삶과 신앙의 방식이었습니다. 자식들에게 신앙을 물려주고, 완고한 이웃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며 살기 위해 어머니는 손해를 떠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을 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제 어머니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담는 길이었습니다. 세상을 향해 보여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상처와 아픔의 흔적이었습니다.



7. 부활의 증거 & 감사의 표징


분위기가 나지 않아 잘 다가오지 않으시겠지만, 오늘은 지난 1년을 돌아보며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근데, 코로나가 덮친 2020년 한해가 감사가 되십니까? 감사가 된다면 뭐가 감사하십니까? 보통 감사라고 하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간혹 잃은 것에 대해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살펴본 우리는 이를 바탕으로 무엇을, 어떻게 감사해야 할까요? 전제조건을 달며 신앙을 거래하던 우리를 끝까지 놓지 않으신 주님께 감사하십시다. 보여 주고, 가르쳐 주고, 알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변화가 더딘 사람임에도 한결같이 대해주심에 감사하십시다. 누군가가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상처와 아픔의 흔적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감사하십시다.


무엇보다도 진정 이것이 감사하다면, 우리 삶을 이렇게 세워가십시다. 진리 때문에 고난 당한 흔적, 시대의 아픔에 동참한 상처 자국, 세상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당한 희생의 흔적이 우리 삶에 새겨지도록 세워가십시다. 이러한 흔적과 자국이야 말로 우리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부활의 증거입니다. 동시에 주님을 향한 우리의 진정한 감사의 표징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긴 전염병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게 하시고, 하나님께 더 다가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딘가에서는 사재기를 하며 나만은 잘 살아야지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것을 나누며, 힘겨운 이들 곁에 서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런 우리의 감사가 말의 향연이 아니라, 점점 더 삶의 모습이 되기를 구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서 그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상처와 아픔의 흔적이 없다면, 어찌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비옵나니, 움오름과 우리는 진리 때문에 고난 당한 흔적, 시대의 아픔에 동참한 상처 자국, 세상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당한 희생의 흔적을 지닌 그리스도의 몸 되게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를 살리시고, 살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감사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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