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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0.11.08 움오름 주일 설교 -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요 20:19-23)









요한복음 20:19~23

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1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2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설교문


1. MAGA(마가)


지난 11월 3일(화), 59번째 미국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었습니다(45대 혹은 46대 대통령을 선출). 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미국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인단을 뽑는 선거가 있었습니다. 같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여타의 나라들과 다르게 미국은 직접선거와 간접선거를 섞은 제도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정치사의 암울했던 시기에 시행됐던 체육관선거라는 대의원제를 연상케도 하지만 이와는 많이 다릅니다.


진행순서를 보면, 먼저 각 주별로 선거를 하여 인구 수에 비례하여 확정된 선거인단을 뽑습니다. 이번 선거의 선거인단은 모두 538명이기에 누구든지 270명을 확보하면 승리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주 별로 어떤 정당이 단 한표라도 승리하면 해당정당이 제출한 선거인단 전원이 대통령을 뽑는 구조입니다. 일명 승자독식구조이다 보니 전체 선거에서 더 많은 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패하는 경우가 지금까지 5차례나 있었습니다(대표적인 예가 지난 2016년 힐러리 클린턴이 300만표를 더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경우).


이렇게 선출된 선거인단은 오는 12월 14일(토) 빈공란에 자신이 원하는 대통령의 이름을 직접 기입하는 투표를 합니다. 그 결과는 내년 1월 6일 개표되고, 그에 따라 새대통령(또는 연임)이 1월 20일 취임합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비롯해 많은 부분에서 미국의 것을 전수받았습니다. 오늘날도 경제 및 지정학적인 면에서 불가피한 의존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태평양 건너 반대편에 있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관심을 둘 수 밖에 없습니다.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를 보며 안타까움과 더불어 안쓰럽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제를 처음 시작한 나라에서 선거의 가장 정점이라고 하는 대통령 선거가 선악을 구분짓는 편가름대가 되었습니다. 민주국가에서 최고 지도자가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의 제도를 믿지 못해 결과를 부정하고 소송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기독교 복음주의자 76%가 트럼프를 지지했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이 통계는 곧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기독교가 세계 정의와 평화의 훼방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서 벗어나 정의와 평화보다는 제국주의적 독선과 오만으로 치달아 왔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혐오를 조장하고, 혐오를 팔아 자신들의 영적우월주의를 견고히 했습니다. 정치인들은 이들과 손잡고 권력을 얻고 유지해 왔습니다. 한마디로 맛을 잃은 소금과 사악한 세력의 야합입니다. 이것이 신앙을 탈선케 했고, 정치를 오염시켰고, 사회를 망가뜨리는데 주요 역할을 해 왔습니다.


18세기 유럽 계몽주의를 대표하던 볼테르(Voltaire, 1694년 - 1778년)는 망해가던 신성로마제국에 대해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답지도 않으며, 로마도 아니다” 라고 일갈했습니다. 지금의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성하지도 않고 미국답지도 않고 미국도 아닙니다. “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는 문구는 트럼프 선거의 구호입니다. 이를 해석하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만들자)”입니다. 앞 철자를 따서 일명 ‘MAGA’(마가)라고 부르는 구호처럼 미국은 진정 다시 위대해 질수 있을까요?



2. 신앙을 다시 위대하게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현재의 기독교는 신성하지도 않고, 기독교답지도 않고, 기독교도 아니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변론이나 변명이라도 하실 수 있겠습니까? … 참담한 점수표를 안을 수 밖에 없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 그리스도인들의 행태는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이를 되돌려 우리가 믿는 신앙을 다시 위대하고, 고귀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러한 관심사를 안고 오늘의 본문을 묵상하다 보면 그 길의 빛을 봅니다.


몇주째 묵상해 온 본문말씀의 끝부분은 ‘죄사함’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문이란 문은 죄다 걸어 잠그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들 가운데 서서 그들을 보시며 두번이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어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무릇 참 사람이란 하나님의 영으로 숨쉬는 존재임을 일깨워 주시는 주님의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숨을 들어 마신만큼 내쉬며 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아골골짜기, 해골의 무덤에서도 생명을 불어넣는 주님의 대행자로 살아가라는 당부였습니다.


이 부분은 계속해서 나누고 있지만, 우리에겐 이런 자격과 능력이 안됩니다. 실력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기에 우리는 자주 호렙산의 모세가 됩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도 5번이나 연이어 “나는 안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거부합니다. 그런데도 왜 주님은 우리를 주님의 대리자와 대행자로 삼으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주님의 대행자로 세워주시는 분,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실상을 알면 거부할 수 밖에 없지만, 성령님의 일하심을 믿으면 수용하고 감당해야 마땅합니다.


지난 주중 걸으면서 이어폰을 통해 라디오를 듣는데, 탤런트 임채무씨의 인터뷰가 나왔습니다. 그는 1984년도 78%라는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 <사랑과 진실>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던 연예인입니다. 당시 이 드라마가 방영되던 시간대엔 서울 하수구에 설겆이하는 물이 흐르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인기있었던 작품입니다. 이후 가수활동을 비롯해 사제를 털어 경기도에 놀이동산 <두리랜드>를 운영해 오고 있는 대단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진행자가 임채무씨에게 성공적인 삶의 비결(철학)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때 임채무씨가 해병대 복무경험을 들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해병대 생활 중 부대장이 제게 명령할 때 단 한번도 망설이거나 “노”라고 한적이 없습니다. 저보다 훨씬 경험이 많고 전문가인 그분들이 보기에 ‘임채무’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맡기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당연히 최선을 다해 만들어 내고, 이뤄냈습니다. 이 삶의 태도와 방식이 오늘날 저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삶이 생각대로 되지 않고 버겁더라도 불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늘이 보시기에 ‘아, 이놈은 잘 해낼 수 있을꺼야!’라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맡기셨기에 그는 최선을 다해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겁니다.


임채무씨의 답변을 들으며 한명의 그리스도인이요, 목회자로 사는 제 자신의 삶의 태도와 모습을 되돌아보았습니다. ‘나는 주님이 맡기신 일을 이런 태도로 이루어 가고 있는가?’ … 자기반성이 되었습니다. 때론 “제가 해 보겠습니다!”라고 해야 하는데, 예전의 이 패기와 열정은 어디 갔는지 부끄럽고 죄송했습니다.


움오름의 가족님들은 어떠십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인생의 얼마 정도를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고 계십니까? 어느 부분에서 성령 하나님과 협업해 가십니까? 부모로서 내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숨쉬는 존재가 되도록 얼마나 애쓰고 계십니까? 가정의 한 구성원으로서 얼마만큼 우리 집, 우리 가정을 생명의 공간으로 가꿔가고 계십니까?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몇 번이나 “제가 해보겠습니다”라고 해 보셨습니까?


제작년에 시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던 한 얘기엄마(김소원 집사)가 제게 했던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멈춰있던 저를 자주 책망합니다. 그리고 움직이게 합니다. “저는 제 쓸 것 다 쓰고 나중에 남는 시간을 주님을 위해 쓰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제 인생에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3.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성령을 받으라”는 주님의 명령은 받고 안받고의 옵션(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응당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받아야 할 필수사항입니다. 그 이유는 지난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로 주님의 대행자로 살기 위해선 반드시 성령님과 함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 받으라”는 말씀에 이어 주님은 죄사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23절을 같이 봉독하시겠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오랫동안 해석에 있어 카톨릭과 좁혀지지 않는 이견을 보여왔습니다. ‘너희’를 누구로 볼 것인가에 대한 차이입니다. 카톨릭의 경우 ‘너희’를 수제자 베드로로 한정했습니다. 이어 로마의 교황들이 죄사함의 권세를 물려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죄사함의 권세는 카톨릭 교황에게 주어진 특정되고 한정된 권한이라는 뜻입니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너희’를 1차적으로는 제자들 전체를 의미했고, 그 다음으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지칭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부가적인 설명을 더 드리지 않더라도 ‘너희’가 누구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선 명확하시리라 봅니다.


그렇다면, 죄사함의 주체와 권세가 그리스도인 제자들에게 이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까? 막 2:7에 보면, 어떤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모르고 한 말이긴 하지만, 죄사함의 권세는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있었습니다. 그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라는 이 말씀이 진정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 부분과 비슷한 구절을 찾아 살펴보시겠습니다. 마 18:18입니다.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여기서 ‘풀리리라’에 해당하는 부분이 오늘 본문 요 20:23의 ‘사하여 질 것이요’입니다. 이 두 구절은 모두 수동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을 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실제 그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수동형은 신약 성경에서 ‘신적 대리행위의 결과’를 나타내는 형태로 사용되었습니다.


마 18:18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교회의 설립약속에 이은 말씀입니다. 이는 교회와 관련한 여러가지 문제의 해결과 권한을 행사하는 대리인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와 달리 요 20:23은 복음전파의 사명에 있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세움받는 것과 관련한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대리인이 성령님과 함께 죄에 속박된 사람을 해방시키고 자유를 누리게 하는 일입니다.


이 부분을 고형원 전도사는 2007년 만든 <그날>이라는 찬양 가운데 이렇게 잘 표현했습니다.


사망의 그늘에 앉아 죽어가는 나의 백성들

절망과 굶주림에 갇힌저들은

내마음의 오랜슬픔

고통의 멍에에 매여 울고 있는 나의자녀들

나는 이제 일어나 저들의 멍에를 꺾고

눈물씻기기 원하는데 누가 내게 부르짖어

저들을 구원케 할까 누가 나를 위해 가서

나의 사랑을 전할까 나는 이제 보기원하네

나의 자녀들 살아나는 그 날 기쁜

찬송 소리 하늘에 웃음소리 온 땅 가득한 그 날



4. 불의 전달자, 생명의 전달자


오늘날의 교회상황을 떠올리다 보면 연상되는 영화가 있습니다. 2009년 개봉된 더 로드(The Road, 2009)인데, 당시 마음을 내어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영화 이전에 한 분(유연희 집사)의 추천으로 아마존에서 코맥 맥카시의 원작 책을 사서 먼저 읽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본 사람들도 리뷰에서 높은 평점을 주면서도 “차마 두 번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영화와 같은 상황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품을 수 있을지 두렵다고 했습니다.


영화는 온통 회색빛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노숙자처럼 쇼핑카트를 끌고 무작정 남쪽을 향합니다. 이른바 할리우드식 영화이건 한국의 재난영화이건 간에 그 속엔 필히 영웅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더 로드> 속엔 영웅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부인의 유언에 따라 길을 걷는 아주 평범한 아버지와 아들만이 존재할 따름입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배고프고 목말라서 괴로워 하는 것 그 이상입니다. 그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아버지는 소년에게 과거의 가치들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착한 사람들이고, 불을 운반하는 사람들이다. 책이나 영화에서 불이 의미하는 것은 문명이었습니다. 다시 문명을 새울 수 있는 동력이 되는 불 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들이 운반하는 불이라는 메타포(은유) 속에서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보았습니다. 원작 책의 마지막에서도 그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죽은 아버지 옆에서 울고 있던 아이를 데려간 가족이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며 책은 끝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그 분의 숨결을 너에게,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는 그 숨결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줘야 한단다”


교회는 가혹한 세계에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곳이어야 합니다.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위해 불을 옮기고, 생명의 숨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 우리가 속한 기독교는 결코 분열과 차별의 종교가 아닙니다. 정치와 야합해 선과 악을 가르고, 그것으로 내 세력을 더 크게 키워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신앙은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의 길이며, 거짓과 위조의 세계 속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이며, 죽어가는 이들을 위한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을 길로 인도하고, 진리를 보여주며, 생명을 전하는 도구요, 전달자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5. 얼마나 살렸느냐?


지난 11월 4일(수) 한 일간지(국민일보)에 33살 청년(김준용)의 신앙과 삶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돈’ 좇으며 허황된 인생 살다 이젠 생명의 전달자로 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모태신앙이었지만, 부모님이 시켜서 교회출석만 할 뿐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청년이 사업실패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과 마주합니다. 공허와 절망만 남은 상태에서 술과 담배에다 도박중독까지 이릅니다.


그러던 중 지인을 통해 다시 복음을 소개받고 셀그룹 제자양육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아름답게 사용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실하게 양육과정을 모두 마친 이 청년은 요즘 매주 7-8명의 믿지 않는 사람들을 양육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양육하기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며 전략을 짭니다. 선물을 갖고 심방을 하며, 쉴 틈 없이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제자양육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경험하기에 새벽마다 이 기도만 드린다고 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 저를 사용해 주세요.”


코로나로 인해 전도도 어렵고 예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셀그룹 제자양육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일대일 양육에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쏟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별다른 희망과 소망이 없던, 절망의 33년 인생을 살려 주셨습니다. 저 역시 누군가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습니다. 또 다른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전달자가 되겠습니다.”


우리에겐 이런 감사와 고백이 있습니까? 그래서 누군가에게 우리도 희망의 증거가 되고 있습니까? 생명의 전달자가 되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행 20:22-24을 통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22절: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절: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절: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는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결박이나 환난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 생명의 불이 이 땅 조선을 거쳐 21세기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에게 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불이, 생명의 복음이 우리 앞에서 소멸된다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무엇이라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죄사함의 복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렸는지 물으신다면 몇명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너는 내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렸느냐?”라고 주님이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너는 생명의 전달자였느냐? 너는 나의 대리인이었느냐? 그게 아니라면, 네 정체는 무엇이었느냐?”라고 주님이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언젠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물으실 질문들을 생각하다 보면, 오늘 우리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되돌려서는 살 수 없는 삶이지만, 지금부터라도 다르게 살기 원합니다. 불의 전달자, 생명의 전달자가 되어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생명의 숨을 전달하는 주님의 사람으로 살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나므로 하나님의 웃음소리가 울려나게 하시고, 이 땅에서 우리가 믿는 이 신앙은 다시 신성해 지고, 기독교다운 기독교가 되게 하옵소서.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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