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11.01 움오름 주일 설교 - "성령을 받으라"(요 20:19-23)








요한복음 20:19~23

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1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2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설교문


1. 성결교회와 성령


저는 주일학교를 비롯해 중,고등부 교회교육을 성결교회에서 받았습니다. 성결교회는 사중복음(四重福音, The Four-Fold Gospel)이라고 해서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강조합니다. 거듭남, 거룩함, 병고침,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는 4겹의 원칙입니다. 성장기에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4가지의 원칙들은 한 가지의 바탕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입니다.


성령님의 역사 아래 한 인간이 새롭게 태어나는 거듭남입니다. 죄와 사망을 향해 내달리던 삶이 거룩함을 덧입는 성결입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에 묻어있던 병을 떨치고 일어나 건강한 사람으로 사는 신유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늘과 땅을 새롭게 창조하실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며 오늘을 생기있게 살아가는 재림입니다. 성령님의 일하심이 아니고선 그 어떤 것도 일어날 수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은 일들입니다.


이런 배경 하에 여러 신앙교육과 행사들을 하다보니 성결교는 자연스레 성령님의 역사를 강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가 겪은 성결교회는 많은 부분 성령의 은사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부흥회라고 불리던 은사집회는 성령님의 은혜 안에서 한 인간의 내면이 변화되어가는 것과는 거리가 많았습니다. 성령집회, 은사체험은 늘 건축헌금과 약속헌금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한 인간의 인격이 변화하고 새로운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밖 사람들의 이웃이 되기 보다는 자기 몸집키우기라는 교세확장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성장기의 이런 경험을 되뇌다보면, 성령받아서 뭐할건데라는 회의가 듭니다. 오용에 따른 아픔의 결과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인 요 20:22은 “성령을 받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엔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받아야 하는지? 성령받았으면 그 지향점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성령님과 더불어 우리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 시간 이것들을 염두에 두고 ‘성령 받음’의 참 의미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2. 숨을 내쉬다


못자국과 창자국으로 선명한 흉터를 보이시며 주님은 두 번이나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제자들 속엔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평강을 말씀하신 주님은 이어 제자들을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대행자요, 대리자인 ‘사도’(ἀπόστολος, 아포스톨로스)로 보내신다는 의미였습니다.


그 말씀에 이어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근데 이 말씀을 하시기까지 주님의 행동이 평범치가 않습니다. 22절을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숨을 내쉰다’는 ἐμφυσάω(엠퓌사오)는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숨쉬기 위해 내쉰다는 의미가 아니라, 숨을 불어넣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코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 바티칸 박물관 투어를 하다보면, 마지막으로 반드시 거치는 곳이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입니다. 이 성당은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 장소이며, 교황이 추기경을 접견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1508년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탁을 받고 바티칸 궁 안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 작업을 했습니다. 1000제곱미터(302평)의 넓이에 300여 명의 인물을 그려넣는 대작업이었습니다.


제대 위에서 시작해서 출입구 쪽으로 옮겨 가면서 천지창조로부터 노아의 방주에 이르기의 창조 과정은 모두 아홉 장면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근육질의 그리스 영웅같은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천지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가르며 나타나십니다. 이어 손 끝에 타오르는 창조의 힘으로 아담을 살아 숨쉬게 합니다.


손으로 창작활동을 하는 예술가답게 미켈란젤로는 창조와 생명을 손끝과 손끝이 닿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화가의 상상력이긴 하지만, 손끝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창조의 모습은 경이롭기 그지 없습니다. 물론 언뜻 보면 성경과 다른 모습입니다. 창세기는 분명 하나님이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했습니다. 명백히 다른 묘사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그것은 동일한 행위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생명의 기운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그 생기는 사람을 살아 숨쉬는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표현이 다를 뿐 출처와 결과가 동일합니다.



3. 두 가지 “숨”


‘숨을 내쉬다’, 또는 ‘숨을 불어넣다’라는 헬라어 동사 ἐμφυσάω(엠퓌사오)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오늘 본문인 요 20:22에만 사용되었습니다. ἐμφυσάω(엠퓌사오)와 같은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동사가 나파흐(נָפַח)입니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단 2번 사용되었습니다.


먼저는 창 2:7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후 하나님은 사람의 코에 생기(living spirit)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생기는 하나님의 숨결, 하나님의 영입니다. 이후 사람은 동일한 재료로 창조된 짐승과 다른 존재인 하나님의 형상인 생령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정체성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잃은 사람들의 실상과 그 결과를 에스겔 선지자는 겔 37장, 마른 뼈들의 골짜기를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이 중 겔 37:9에 다음과 같이 구약성경 중 2번째의 나파흐(נָפַח)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여기서 ‘불어서 살아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숨결, 생기입니다. 셀 수조차 없이 무수한 뼈들의 골짜기는 한 마디로 죽음 그 자체였습니다. 어떠한 생명도 소망도 자리할 수 없는 절망의 골짜기에 하나님의 숨결이 붑니다. 마른 뼈들이 연결되고, 살아납니다. 살아나서 하나님의 군대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숨결, 하나님의 호흡,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입니다.


이 생기는 짐승과 똑같은 흙으로 만든 존재가 짐승과 다르게 살아가게 합니다. 죽었던 존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군대가 되게 합니다. 희망도 없고 꿈도 모르던 사람을 꿈꾸게 합니다.



4. 성령을 받아라


생기라는 존재, 하나님의 호흡이라는 성령님이 이와 같은 일을 하신다면, 그 성령님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을 받는다는 것의 구체적인 결과는 어떤 것일까요? 이 부분을 보다 선명하게 하기 위해 기존에 교회 안에서 통용되던 ‘성령받음’에 대해 먼저 살펴봄으로써 그 바른 의미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는데,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성령님은 구원받음의 증표로 여김받았습니다. 고전 12:3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성령님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성령 받음이라는 등식이 성립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는 게 맞는 말일까요? 받았는데, 또 다시 받아라는 명령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셨을 때 “받다”라는 동사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받다’라는 동사 λαμβάνω(람바노)는 ’붙잡다’라는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받아라”는 의미는 다른 면에서 이미 우리 속에 오신 성령님을 “꼭 붙들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령님을 붙들고 산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통용되던 용어로 바꾸면, “성령 충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과 80년대와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방언하고, 병 고치고, 예언하는 것 등 성령의 은사로 특정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충만은 그 보다도 훨씬 더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 충만은 한 개인이 성령님을 마음대로 부리는 능력이 아닙니다. 마치 한 개인이 하나님과 사람의 중간자처럼 군중 속에 군림키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격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물들게 하는 겁니다. 겁쟁이였고, 배신자였던 제자들을 평강으로 인도하고, 주님의 대리자요, 대행자로 세우셨듯이 연약한 인간을 그리스도의 증거자로 서게 하는 겁니다.


젊은 날을 교회와 그리스도를 위해 충성을 다 하신 권사님과 지난 주중 잠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전염병의 시대를 지내다보니 교회와 신앙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젊은 시절부터 단 하루도 새벽기도를 비롯해 교회출석을 빠지면 안되는 줄 알고 사셨습니다. 십수년 전부터 봐왔던 그분은 제가 보기에도 교회에 열심이고, 충성인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열심이던 교회가 문을 닫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모임 자체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 거였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성령 충만! 성령 충만!!”을 구하며 새벽기도부터 철야기도까지 분주히 다니던 그 생활은 하나의 예는 될 수 있으나 절대 답은 아닙니다.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성령님을 붙잡고, 성령님께 붙잡힘을 받는 겁니다. 그 숨결에 물들어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가는 겁니다. 온통 교회행사와 모임에 모든 일상을 쏟아붇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인격에 동화되어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로 이웃들과 같이 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받음이며, 성령님을 붙잡은 결과입니다.



5. 숨을 마시는 만큼 내쉬는 산 교회가 되어


몇년 전에 관람했던 영화 <1987>의 뒷부분을 우연히 다시 보았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민주화 운동 과정을 다룬 영화 '1987'의 앤딩크레딧 속 장면이 가슴에 저며 왔습니다. 갓 출소한 70살의 문익환 목사께서 21살 청년의 장례식에 조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열사들의 이름을 외치며 오열했습니다.


"박종철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그 외침과 오열은 기독교가 외면 당하고, 신앙이 천대시 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곳은 거룩한 예배당이 아니라, 슬퍼하고 아파하는 이웃들이 있는 광장이었습니다.


1967년 늦봄 문익환 목사께서 “산 교회”라는 제목의 설교 중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토로하셨습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하느님께 찡얼거리다가 겨우 천당에나 들어가는 죽은 교인이 아니라, 팽하게 근육에서 차 넘치는 도덕력과 초롱불처럼 빛나는 창조적인 눈을 가진 교인이 왁자한 교회, 숨을 마시는 만큼 내쉬는 산 교회로 한국의 교회도 체질 개선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문익환 목사님 설교 "산 교회"(1967) 중, <꿈은 가두지 못한다>, 137.


누가 성령 받은 참다운 그리스도인입니까? 누가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까? 안으로, 또 안으로 숨을 들어마시기만 하는 교인이 아닙니다. 들어마신 만큼 밖으로 내쉬는 사람, 밖으로 내쉬는 교회입니다. 들어마신 숨을 내쉬지 못하면 죽은 사람이듯, 하나님의 숨결로, 하늘의 복으로 들어마시기만 하는 교회는 결코 산 교회가 아닙니다. 자기들만의 천국을 위해 하나님께 칭얼대다 겨우 구원받는 존재일 뿐입니다. 빛나는 창조적인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넣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면, 오늘 전염병의 시기에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그리고 교회는 과거와 같은 모습으로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6. 어떻게 숨쉬고 있습니까?


숨쉬는 것을 한자로 호흡(呼吸)이라고 합니다. 내뱉다는 호(呼)와 들이시다는 흡(吸)의 조합입니다. 그러니까 숨쉬는 것은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호흡은 일상 중에 늘 동일하지 않습니다. 평지를 걸을 때와 가파른 산을 오를 때의 호흡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평지를 잘 걷는다는 것은 산을 잘 오를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은 될 지언정 결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증가하는 심장박동수를 감당해 낼 수 있는 호흡이 되어야만 평지를 넘어 경사지를 오를 수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염병의 시기엔 높다란 종탑과 웅장한 예배당을 지닌 교회와 상가 한켠을 빌려 쓰는 교회가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그만큼 이 시대가 교회에 있어서 가파른 시대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과거의 관행대로 호흡하며 관성을 따라 산다면 교회는 들이마신 숨을 내쉴 수 없는 존재가 될 겁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것들이 멈추고 단절된 때에 몸으로 진리를 살아가기 보다 눈과 귀로 설교듣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그건 숨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한 분이 최근 6-7년을 다니던 교회를 옮겼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를 선택하는 기준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설교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렇군요”라고 대답했지만, 안타까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선배들이나 우리들이 설교 잘 한다는 목사를 좇아서 이 교회, 저 교회로 옮겨다닌 결과가 무엇입니까? 오늘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외면받는 처지가 된 겁니다.


몇년 전에 어떤 분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 다닌 교회에서는 담임목사 설교를 들으며 ‘우와! 설교 잘 하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교회에서는 설교를 들으며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분의 말씀을 보면, 움오름교회는 설교 잘 하는 것과는 관계없는 것 같아 안심은 됩니다. ^^


다시 돌아와서,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를 정하는 기준, 다시 말해 어떤 기준으로 교회를 세워가야 할까요? 오늘 말씀에 잇대어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숨결로 호(呼)하고 흡(吸)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원칙과 법칙에 물들어 가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철학으로 삶의 기둥을 세우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현세적인 것이 아닌 하늘의 고귀한 가치를 따라 사는 교회입니다. 성령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게 붙잡혀 이끌림 받는 교회입니다. 그 결과 자기 몸집을 키우기 보다는 자기 몸을 쪼개어서라도 이웃과 나누며, 이웃을 섬기는 작은교회입니다.


모두가 진심 이런 교회를 원한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 성령님으로 호흡하는 생령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7.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오늘은 11월의 첫날이며, 첫주일입니다. 겨울을 목전에 둔 늦가을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며 시 하나를 나눕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라고 알려졌지만, 실은 뇌성마비를 앓아온 김준엽 시인의 작품으로 판명된 시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김준엽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에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주는 말과 행동을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 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의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놓아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헛된 바람을 안고 인생을 살지 않게 하옵소서. 허황된 것만 좇다가 실제의 삶을 외면하지 않게 하옵소서. 영원한 바람, 하나님의 생명을 들이키고, 내쉬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순간마저 살게 하옵소서. 평지를 걸을 때나 가파른 산을 오를 때도 넉넉히 견디는 숨결의 사람으로 시대를 살게 하옵소서.


조그마한 일에도 놀라고, 작은 사건에도 안절부절하는 얄팍한 호흡으로 세상을 견디지 않게 하옵소서. 때마다 하나님께 칭얼대다 겨우 천당에 들어가는 안타까운 교인이 아니라, 근육에 차 넘치는 생명력과 초롱불처럼 빛나는 창조의 눈동자를 갖고 사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교회 밖 사람들의 이웃이 되게 하시고, 힘든 아이들의 아비가 되고, 어미가 되는 넉넉한 생명의 사람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숨이 붙어 있는 한 이렇게 일평생을 살다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우리 주님 앞에 서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인생에 가을이 왔을 때 하나님 앞에 자랑스레 대답할 말 안고 살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숨결로 호흡했고, 아버지의 들숨과 날숨으로 사랑했습니다.”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회 13회

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logo_color.png

©2019 by 움오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