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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0.10.25 움오름 주일 설교 -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19-23)










요한복음 20:19~23

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1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2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설교문


1. 평온한 날


심리학자 섀드 헴스테터(Shad Helmstetter)가 인간의 생각에 대한 통계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루에 깊이 자는 시간을 빼고 20시간 동안에 5만 - 6만 가지 생각을 합니다. 한 시간이면 2,500가지, 1분에 42가지 생각을 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생각의 85%가 부정적인 생각이라는 점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듣는 말도 75% 이상이 부정적인 말입니다.

- 《SELF TALKING》, 섀드 헴스테터 지음, 정경옥 옮김, 에코비즈


왜 사람들 생각의 85%가 부정적이 되고, 듣는 말의 75%도 부정적이 될까요? 근심에 묶여 있고, 걱정에 매여 살기 때문입니다. ‘근심’은 ‘해결되지 않은 일 때문에 속을 태우고 우울해 하는 것’입니다. ‘걱정’은 ‘어떤 일이 잘못될까 불안해하며 속을 태우는 것’입니다. 공통적인 것은 나 스스로가 해결할 수 없는 일 때문에 속을 태우는 것입니다.


영상을 통해 지난주일 설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를 들은 분이 박목월 선생의 시 <평온한 날의 기도>를 보내왔습니다.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이

평온한 날은

평온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게 하십시오.

(… 하략 …)


시를 보면, ‘참 좋다!’라는 생각과 함께 이런 의문이 듭니다. ‘사람사는 세상에 어떻게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는 그런 날이 있지?’


그런데, 시를 읽고 또 읽으며 음미하다 보면, 시인이 이야기한 평온한 날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날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날은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는 날이 아닙니다. 그것을 무균실 같은 날이 아니라, 모든 아픔과 눈물을 감싸안는 하나님의 날입니다. 평온하지 않은 날을 평온하게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역설의 시간입니다. 그렇게 보면, 시의 맨 하단부에 배치한 시인의 기도는 걱정의 시간을 사는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됩니다.


주여, 고르게 흐르는 물길을 따라

당신의 나라로 향하게 하십시오.


(……)


움이 트고 싹이 돋아나듯

믿음의 새 움이 돋아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의 생각이 미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있는 시간은 근심과 걱정에 포로된 시간이 아닙니다. 믿음의 새 움이 근심의 시간을 평온한 날로 변하게 합니다. 걱정으로 요동치던 심연이 평온한 마음으로 바뀌어갑니다. 주님을 깊이 생각함으로 마침내 평온한 날이 됩니다. 우리를 귀히 여기시고, 사랑하는 주님의 생각이 우리 마음을 덮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과 화평


지난주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스승을 죽였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생명마저 없앨 수 있는 위력을 소유한 이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 의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의 위협은 더이상 위협이 아님을 보이셨습니다. 죽음조차도 무력화시키시는 주님의 부활은 근심과 걱정의 권세는 능히 깨뜨리시고도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평안히 있을 지어다”라는 주님의 인사는 제자들 속에 믿음의 새 움이 트게 하는 선포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주님의 ‘샬롬’(שָׁלוֹם)이었습니다. 나아가 그것은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평화, 하늘이 주는 평강을 누리게 되었다는 공식 선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롬 5:1은 각주처럼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we have peace with God).


또한 요 16:33이 이를 확증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근심할 수 밖에 없고, 걱정이 많은 세상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래도 평안을 누리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를 화해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이 평안의 비결을 알게 된 사도 바울은 생의 마지막 로마감옥에서 빌립보 교우들을 향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빌 4:11-13을 유진 피터슨의 the message 번역본으로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제 나는 나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정말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적은 것을 가지고도 많은 것을 가진 것처럼 행복합니다. 나는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많이 가졌거나 빈손이거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지,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어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습니다.


2천년전 노사도가 발견했던 그 평안의 비밀을 오늘 우리도 배웠으면 합니다. 그래서 좀 더 가지는 것이 절대행복이 되어 있는 이 시대 속에서 참된 만족, 참된 행복, 참된 평안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3.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을 향해 ‘평안’을 선포하셨던 주님의 인사 속엔 중요한 한가지의 의미가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배신자를 향한 용서와 포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후 첫번째 만남의 자리, 배신했던 제자들로서는 반갑기도 반갑지만, 얼마나 어색하고 부담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미워하고, 독설을 뱉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주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사자인 예수님에 의한 따뜻한 용서였습니다.


평강의 인사에 이어 주님은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눅 24:40에 ‘손과 발’을 보여주셨다고 하는 것과 요한복음을 종합해 보면, 주님께선 손과 발 뿐 아니라 옆구리의 창자국까지 모두 보여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증명함과 아울러 몸의 부활까지도 증거하는 메시지입니다.


나아가 이것은 죄책감에서 제자들을 자유케 하시는 주님의 배려였습니다. 못자국 난 손과 발을 보이시고, 옷을 걷어올려 옆구리의 창자국까지 보이신 것은 마치 이런 느낌을 들게 합니다.


“봐, 이것 봐! 손, 발에 못자국 있지? 여기에 창자국도 있어. … 나는 진짜로 부활했단다. 그러니 이제 더이상 두려워 하지마! 더이상 미안해 하지마! 이젠 죄책감과 미안함에서 자유하렴!”


그러자 제자들은 이런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고 20절은 전합니다. 최근 한 사람이 남긴 삶과 말 속에서 이와 같은 용서와 화해의 그림자를 느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알려졌던 전 우루과이 대통령 호세 무히카가 지난 20일, 85세로 정계를 완전 은퇴했습니다. 1960년대에 군사독재에 맞서 게릴라 전선 지도자로 활동했던 그는 총15년간 감옥살이를 당했습니다. 이후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어 여러 직책을 거쳐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집권과 동시에 막강한 권력을 가졌지만, 그는 반대 세력에게 어떤 보복도 하지 않았습니다.


상원에서 그가 한 고별사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다음은 그 고별사의 한 부분입니다.

증오는 불길입니다. 불타는 사랑은 뭔가를 창조하지만, 증오는 우리를 파괴합니다. 나는 수십 년 동안 내 정원에 증오를 키우지 않았습니다. 미워하면 어리석음에 이르고, 객관성을 잃는다는 게 내 삶에서 힘들게 얻은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엔 분노가 많습니다. 사회의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공평치 않다는 생각이 분노를 가중시킵니다. 나만 억울하다는 상대적 박탈감이 분노를 유발하고, 어느 순간에 폭발해 주변사람에게 터집니다. 똑같지 않은 조건에서 경쟁하다 밀린다고 생각하니 더 억울해하고 화낼 일이 많은 겁니다. 이런 면에서 호세 무히카가 남긴 한 문장은 매우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나는 수십 년 동안 내 정원에 증오를 키우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정원엔 배신한 제자들로 인한 증오가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반복된 주님의 인사는 미안해 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제자들을 향한 화해의 메시지였습니다. 용서와 포용의 인사였습니다.



4.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흉터로 선명한 주님의 손과 발과 옆구리를 보며 기뻐하던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다시 한번 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1절 후반절입니다.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같이 주님도 제자들을 보내신다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를 알기 위해선 ‘보내다’라는 헬라어 동사 ἀποστέλλω(아포스텔로)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ἀποστέλλω(아포스텔로)라는 동사의 명사형이 ἀπόστολος(아포스톨로스)입니다. ἀπόστολος(아포스톨로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사도’라는 뜻으로 번역이 될 뿐 아니라, ‘사자’, ‘대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부활하신 주님은 거짓말쟁이며, 배신자요, 겁쟁이인 제자들을 만난 첫 자리에서 주님의 대행자로 그들을 보내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한 나라의 외교관을 보낼 때도 신중하게 뽑고 뽑아서 보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대표할 사람으로 이런 저급한 배신자들을 보내시겠다는 말이 가당치나 한 말입니까?


지난 10월 17일 저의 페이스북 계정이 10년전 사진을 표시하며 지난시간을 회상시켜 주었습니다. 그 사진은 제네바한인교회에서 고별설교를 하던 장면이었습니다. 사진의 배경에 그날 설교제목이 이렇게 투사되어 있었습니다.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그날 저는 근 6개월동안 지속해 왔던 열두 제자에 관한 설교를 마무리 지으며 이렇게 나누었습니다.


베드로는 말과 행동이 도무지 맞지 않는 사람이었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하여 자주 격분하던 ‘우뢰의 아들’이었습니다. 게다가 도마는 냉소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나 다대오, 그리고 가나안 사람인 시몬은 별다른 특징이라고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도무지 진심을 파악하기 힘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압권은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배신의 칼을 갈던 가룟 유다까지. 한 마디로 도저히 조합도 조화도 되기 힘든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들이 ‘이 열둘’ 입니다.


제자들이 좋은 놈 같다가도 순식간에 나쁜 놈, 이상한 놈이 된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모르셨을리 만무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그런 부적격자들을 주님은 당신의 대리자, 대행자로 보내신 걸까요?


그것은 비록 믿지 못할 제자들이고 함량미달인 사람들이었지만, 그들과 함께 하실 믿을만한 분이신 보혜사 성령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때로 그들을 위로하시고, 권면하시고, 세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믿지 못할 그 제자들에게 그 큰 명령과 임무를 맡기셨던 겁니다. 함량미달인 그들을 주님의 대행자요, 대리자로 보내신 겁니다.



5. 내가 너와 함께 할게


저는 목회를 하는 그 누구보다도 목회에 있어 모자람을 절감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움오름가족님들에게 늘 미안하고, 주님께 항시 죄송한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신학교 다니던 한 때 제가 정말 능력있는 목회자라고 자신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잠시 드릴 자랑같은 말을 용납해 주시길 바랍니다.)


엄격하기로 악명높았던 설교학 교수님(정장복) 아래에서 <설교의 실재>를 A를 받았습니다. 설교하고 내려 온 직후부터 민망할 정도의 극찬을 들었습니다. 이어 1년 동안 <교회교육>이라는 잡지에 제 설교가 실렸습니다.


수련회를 하거나 캠프를 기획해서 진행하는 것마다 성공했습니다. 처음엔 반대하던 사람들마저 감동시키며 소위 대박을 쳤습니다. 그 결과 여름수련회 전에 실시하는 전국교사세미나에 강사로 서기도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가장 핫한 교회 중의 하나였던 강남에 있던 모교회의 전도사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자만했겠습니까?


그런데, 2001년 1월 눈덮인 경기도의 한 수도원에서 1주일 동안 머물며 영성지도를 받을 때 이런 제가 완전히 깨어졌습니다. 저의 실상 앞에 섰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대로는 목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매일 18시간 가까이를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때를 썼습니다.


“하나님, 적어도 사역자로 부르셨고, 보내실 꺼라면 모세에게 주셨던 폼나는 지팡이는 하나 주셔서 보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홍해를 치면 홍해가 갈리고, 바위를 치면 생수가 나오는 정도의 개인기는 가지고 사역에 나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날도 여전히 투정하며 눈위를 걸을 때,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래전 수도사들이 쓰던 손가락 굵기의 가늘고 메마른 막대기를 가리키시며 “저것이 내가 네게 주는 지팡이다.”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저는 하나님께 싫다라고 외치며 그렇게 하고서는 도저히 갈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제게 “저 막대기가 내가 네게 주는 지팡이다”라고 다시 한번 더 말씀하시며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너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할게”

“그게 뭡니까?”

“내가 너하고 함께 할게,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가 무엇을 하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할게”


“내가 너와 함께 할게”라는 이 말씀에 저는 더 이상 아무런 말씀을 드리지 못한 채 그저 그 가는 막대기를 들고 울었습니다. “주님, 그것만 하면 됩니다. 함께 해 주신다는 것! 그것만 있으면 됩니다.”라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것은 함량미달인 저와 더불어 함께 가시겠다는, 같이 일하시겠다는 주님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습니다.



6. 주님의 대행자, 대리자


자, 여기서 우리 같이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무자격자이고, 함량미달인 제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의 삶에 이른바 엄청난 플러스알파 (+α)가 생긴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 끝난 겁니까?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저는 늘 제 자신의 부족함에 몸서리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회 앞에 항시 미안함을 가졌습니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없애보려고 늘 몸부림쳤습니다. 저의 연약함 속에 담길 하늘의 은혜를 구하며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렇게 내딛으며 왔습니다.


일명 ‘신인 협동설(Synergism)’입니다. 신인협동설은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기독교의 구원론입니다. 이는 ‘양념 반, 후라이드 반’식의 구원은 결코 아닙니다. 당연히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따라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인간의 책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7. 503주년 종교개혁 기념주일에


오늘은 종교개혁 503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워낙 오랜 전염병으로 전세계가 고통하다보니 조용히 지나가지만,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의미있는 날입니다. 이 중요한 날에 오늘의 본문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얼마 전 고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박영돈 교수가 오늘날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에 구원론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종교개혁의 핵심교리가 마치 순종하지 않아도, 거룩하게 살지 않아도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오용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태와 방종에 빠져 오래 신앙생활해도 순종하는 삶의 열매도 없고 인격의 변화도 없이 달랑 믿음 밖에 없는 이상한 신자를 양산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친 “오직 믿음”이라는 교리는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로 이루신 구원만이 우리를 의롭고, 거룩하게 하며 구원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은 우리의 모든 공로를 배제하지만, 결코 인간의 믿음과 순종의 삶까지 제외시킨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데도 아무런 변화 없이 산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되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내적성화와 외적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면 우리 믿음을 심각하게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오직 믿음”이란? 믿는이의 순종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되려 더욱 강화합니다. 신인협동설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인간의 책임을 다 하는 겁니다. 배신자였고, 죄의 노예였고, 함량미달이었던 우리를 주님의 대행자로 삼아주신 그 은총에 감사하여 믿음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8.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오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열두 제자에게 한정된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염병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선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할까요?


그것은 은혜 앞에 단순히 입으로 “아멘”이라고 반응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 삶은 우리의 모든 근육을 동원해 하나님의 말씀이 왜 영혼을 소생시키시는지를 증명하고 증거하는 삶입니다. 그 삶은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심판하심과 상주심을 믿기에 기다리며 나아가는 삶입니다. 그 삶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기에 부끄러움을 견디며 살아가는 삶(히 12:2)입니다.


예배순서지 <움이 트는 생각>란에 ‘없다와 있다’라는 제목의 글을 보셨을 겁니다. 글은 10대부터 100대까지 각 세대별로 없는 것이 무엇이며,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후 마지막은 출애굽기의 모세를 부르시던 이야기로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의 부름 앞에서 모세는 자기는 자격이 없다고 5차례나 극구 사양했습니다. 자신은 안된다는 겁니다. 능력이 없어서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 모세를 향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출 4:2)


하나님은 모세의 손에 있던 메마른 막대기 하나만으로도 기적을 만드시고, 홍해를 가르는 역사를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플러스 알파(+α)로 함께 하시는 한 우리 삶에 부족한 것이 무엇이고,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현재 우리에게 없는 것은 무엇이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것들 중 어느 것에 묶여 있습니까? …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며 제자들을 파송하셨던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주님의 대행자로 세우십니다. 이제 주님의 대리자로 우리 삶의 현장을 살아갈 때입니다. 주님이 보내신, 주님께 파송받은 대사요, 사도로 살아갈 때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이 은혜 앞에 우리 손에 있는 것으로 최선의 책임을 다 할 때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로 그날을 살게 하옵소서.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는 날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감싸안는 하나님의 날을 살게 하옵소서. 고르게 흐르는 시간의 물결을 따라 점점 더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가게 하옵소서. 근심과 걱정의 시대 위에도 믿음의 새 움을 싹 틔우는 신앙의 사람이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정원엔 증오의 씨앗을 키우지 않게 하옵소서. 억울하다는 원망과 박탈감으로 시간을 허비치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진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 안에서 자족과 평안의 비밀을 간직한 자로 살게 하옵소서.


비록 우리가 함량미달이고, 저급한 배신자였을지라도 믿고 맡겨주신 주님의 뜻을 바라보며 일어서는 사람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없는 것에 주목하고 함몰되어 살아갈 것이 아니라, 우리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며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부끄러움 많은 우리 삶일지라도 보내심을 받은 사람으로 최선의 경주를 다함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교회가 환영받지 못하고, 기독교신앙이 조롱당하는 시대 앞에서 겸허히 우리를 돌아보게 하옵소서. 주신 은총에 합당한 삶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책임을 다하지 못했던 생활에서 이제 돌아서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특정 교회나 부정을 저지른 종교지도자만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참된 변화, 책임을 다하는 신앙을 살게 하옵소서. 그로 인해 이 시대의 종교개혁, 참된 신앙의 개혁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윤성천 집사 봉헌기도


오늘 예배도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저희들의 심령을 깨워 주심을 감사합니다.

저희들의 몸과 마음은 늘 근심, 걱정,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 실패에 대한 두려움, 주위 사람들의 평가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롭질 못합니다.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있습니다. 성공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더 많이 소유하고 싶은 욕망도 쉽게 떨쳐지지가 않습니다.

평안을 주시는 주님,

혼자 힘으로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제자리에 맴돌 뿐이지만 주님은 이 모든 것들을 감싸안으심으로써 평안에 이르도록 해 주십니다.

정직한 영을 주셔서 거짓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미움도 감사로 바꿔주시고 두려움과 조급함의 자리도 담담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과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맞이하여 저희들을 대리자로 보내신 주님의 뜻을 생각해 봅니다.

주님은 저희들이 언제나 어디에나 계시는 주님을 잃어버리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어진 소명을 잘 감당하기를 원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믿음이 성장하여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더 무게를 두고 믿음에 맞는 행동을 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두려움에 움츠려들지 않고 주님을 믿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길 원하고 계십니다.

없는 것을 찾기보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최선의 책임을 다하길 원하십니다.

믿고 맡기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저희들이 하나하나 주님의 계획들을 이루고자 하오니 주님께서도 잘 지켜봐주시고 도와주시옵소서.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로 어려운 시기가 지속되고 있는 이때에 우리가 짊어져야 할 소명을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신 것의 일부를 정성스럽게 하나님께 올립니다. 올려드리는 마음을 기억하여 주시고 주님이 기뻐하실 일에 쓰임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봉헌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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