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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0.10.18 움오름 주일 설교 -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23)









요한복음 20:19~23

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1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2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설교문


1. 문들을 닫았더니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다루고 있는 요 20장의 세번째 단락입니다. 첫째 단락은 여인들의 빈무덤 발견과 두 제자(베드로, 요한)의 사실확인(요 20:1-10)입니다. 둘째 단락은 홀로 빈무덤 앞에서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과 나눈 대화(요 20:11-18)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그 뒤를 이은 이야기(요 20:19-23)입니다.


본문의 시작인 19절은 요한복음의 특징답게 날짜와 시간과 장소를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입니다. 때는 바로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시간개념상 저녁이라는 것은 해가 진 이후이므로 대략 오후 6시 - 8시(3월-4월 기준) 사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리아를 만나셨던 시간은 주일 새벽, 여명이 밝아올 때였고, 제자들을 찾아오신 시간은 주일 저녁입니다. 그렇다면, 주일 낮 시간 동안은 무얼하셨을까요? … 지난주일 살펴보았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일화(눅 24:13-35)’가 그 시간 중의 한 부분임을 볼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실의와 실망에 빠져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며 부활하심을 직접 보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절 앞부분이 부활주일 저녁무렵의 상황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예루살렘 모처에 숨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이란? 유대지역에 사는 일반적인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대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산해드린 공회세력을 의미합니다. 그들도 여타의 사람들과 같은 로마 식민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권력화되고 조직화된 그들은 로마총독 빌라도를 겁박하여 없던 죄도 만들어 예수님을 처형시켰습니다. 이것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제자들은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던 예수님도 체포된지 하루가 되지 않아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을 보니, 자신들은 한줌도 안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주목해 볼 것은 제자들이 닫았던 것은 단순히 하나의 ‘문’이 아니라, ‘문들’(θύρα, 쉬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모여있던 집의 문이란 문은 모두 꽁꽁 걸어 잠그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제자들의 두려움과 공포가 컷다는 뜻입니다.



2. 예외없는 두려움


사고나 사건을 겪으며 사람이 죽음에 대한 위협을 받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두려워 떨게 됩니다. 이건 평소 성격이 소심하거나 활발하거나로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날 집 안에서 떨며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제자들은 소심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즉흥적이고 에너지가 넘쳤던 베드로를 비롯해 우뢰의 아들들이란 별명을 지니고 있던 야고보와 요한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매우 외향적이고 활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남다른 권력욕에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다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결코 소심하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누구나에게 예외없이 찾아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잘 나가던 사람도 뭔가 하나 예상하지 못한 타격을 입게 되면, ‘뭘 먹고 살아야 하나?’를 고민하는게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주일 저녁 집안의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제자들은 별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일상적인 모습입니다. 두려워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초상입니다.


20대 - 30대를 남다른 열정과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던 분이 있습니다. 60대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요즘 그분의 직장생활이 쉽지 않습니다. 가정엔 자녀의 문제로 어려운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몸 건강에도 이상신호가 발견되어 향후 조심하지 않으면 심각한 단계로 갈 수 있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분과 통화할 때면 늘 걱정이 깔려있습니다. 두려움과 염려가 마음의 많은 부분을 덮고 있습니다.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토록 단단하던 분이, 누구보다도 신앙이 돈독하던 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만보니,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였습니다. 원치않는 여러가지 일이 겹치고, 지속되다보면, 누구든 그럴 수 있는 거였습니다. 이처럼 두려움과 걱정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고객이고, 대상입니다. 그러고 보면, 두려움이란 것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연적으로 만날 수 밖에 없고, 겪을 수 밖에 없는 필수요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3.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이렇게, 무지와 무능을 숙명처럼 안고 사는 인간의 삶에 두려움이 필연적이라면 그냥 둬야 할까요? 녹이 쇠에서 나왔으나 그대로 두면 쇠를 녹이듯 두려움과 염려는 영혼에서 나왔으나 영혼을 잠식시킵니다. 방치해 둬서는 안될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을 어떻게 처리하고, 대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본문 속 예수님의 말씀이 비춰주고 있습니다.


아파트 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이해하기가 어렵겠지만, 과거 시골에서 사셨던 분들은 금방 이해하실 겁니다. 시골엔 사람이 모이면 대문부터 시작해서 대부분 문들을 열어둡니다. 지금도 제 고향마을만 하더라도 낮이건 밤이건 간에 대문을 열어두는 집이 대부분입니다. 특별히 명절엔 온통 불을 밝히고 오랜만에 외지에서 방문한 친지나 이웃사람들이 왕래하게 합니다.


근데 2천년전 유대 땅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에 유독 한 집은 달랐습니다. 대부분의 집들이 문을 활짝 열어놓고, 불을 밝히고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그 한 집은 그럴수가 없었습니다. 상실과 두려움이 그들을 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른 아침,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의 부활소식과 전하시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선, 손으로 직접 만지지 않고선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 대조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 마리아는 분명 아침부터 밤이 늦도록 집 밖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부활의 소식을 전해들은 남자 제자들은 믿을 수 없었기에 문을 겹겹이 걸어 잠그고 집 안에 숨어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날 제자들이 걸어 잠근 것은 단순한 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신앙없는 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전 예수님께선 마 10:28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자들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몸만 죽이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위해하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최대치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입니까? 이 세상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바탕엔 부활신앙이 있기에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대신 몸과 영혼 모두 멸하실 수 있는 분,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고 하십니다. 그분을 두려워하면, 다른 것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정작 두려워 해야 할 분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할 대상을 두려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매한가지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행태를 보면, 하나님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주요한 삶의 요소입니다. 이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곧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승리와 기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두려움과 관련하여 오실 메시야에 대한 모습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 11:3입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2천년전 이른바 사회 지도층이고, 종교 지도자라고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는 것을 당연시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선 그들처럼 살지 않으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워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이에겐 그외의 것들은 중요치 않습니다. 하나님 한분 눈치만 보니, 괜히 사람들 눈치보고, 인기와 소문을 따라 판단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대상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우리 인생을 걸고 섬기는 이는 누구입니까?



4. 너희에게 평강이


제자들이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걸어 잠근 문을 지나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19절 하반절에 보면, 제자들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제자들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겠습니까? … 아닙니다. 기쁨은 언감생심, 아마도 놀래서 뒤로 자빠졌을 겁니다.


분명 모든 문을 잠궈두었기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을텐데, 주님이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분명 3일 전에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처형되신 분이셨기에 귀신(영)이라 생각해서 더더욱 기겁했을 겁니다.


여기서 두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왜 주님께서 문을 노크해서 열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제자들 사이에 나타나 모두를 놀라게 하셨을까라는 의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왜 예수님께선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인사를 건네셨을까라는궁금함입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눅 24:38-39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3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절: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먼저, 노크없이 홀연히 등장하신 이유입니다.

: 예수님의 홀연한 등장은 마리아를 통해 분명 부활을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제자들이 꽤심해서 깜짝 놀래켜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두렵고, 의심에 둘러 쌓인 그들의 두려움을 깨기 위해 더 큰 두려움과 충격으로 다가가기 위함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살과 뼈가 있는 육체임에도 불구하고 시공간을 초월하신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심으로써 부활에 대해 새롭게 인식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부활의 몸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은 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인사를 하셨을까요?

: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이 인사를 예수님은 요 20장에서 무려 3번(19, 21, 26절)이나 하셨습니다. 이 인사와 더불어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시며 제자들을 안심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인사를 하신 이유는 당시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로 한 것이 ‘평강’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평강’ 또는 ‘평안’이라는 뜻의 헬라어 εἰρήνη(에이레네)는 히브리말로 샬롬(שָׁלוֹם)입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함몰된 제자들에겐 평안과 평화가 자리할 틈이 없었습니다. 이를 잘 알고 계신 주님께서 그들의 두려움의 근본을 흔드시며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선포하신 겁니다.


창 17:1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셨는데, 그것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근데, 왜 하나님은 수많은 수식이나 설명 중에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사용하셨을까요? … 그것은 당시 아브라함에게 가장 필요한 것, 다시 말해 부재한 것이 전능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세때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24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이젠 더이상 아브라함이나 부인 사라는 자손을 낳을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소망이 다 사라진 무능함의 정점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함이 가장 필요한 때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무능한 아브라함의 생에 무엇이 가장 필요한 것인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에 함몰되어 있던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로 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거듭해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셨습니다.(이 평강에 대해선 다음 주일에 좀 더 세밀히 살펴보겠습니다.)



5.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요즘 우리사회는 코로나 팬더믹과 더불어 라임, 옵티머스 사태 등으로 시끄럽습니다. 잊을만하면 터지는 이런 류의 금융사고를 지켜보며 드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또 있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 등 쳐먹었겠구나! …”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로 살기가 걱정인 사람들이 등치고 사기쳐 한몫 챙기려는 이들로 더더욱 힘겹습니다. 이러니 삶이 더 퍽퍽해 집니다. 미래에 대한 준비라는 이름으로 문들을 걸어 잠급니다. 두려움에 여기저기 마음을 닫고 자기를 지키는데 온 힘을 쏟습니다.


두려움과 염려로 문을 닫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사도바울은 빌 4:6-7을 통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사도바울은 겹겹히 자물쇠로 채워진 로마감옥에서 내일을 전혀 보장받을 수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칠흑같은 지하감방 만큼이나 그의 미래는 어두웠습니다. 도무지 평강이란 단어는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며 필요한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합니다. ‘아뢰라’는 말은 ‘맡기라’는 뜻입니다. 누군가를 믿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데 자신의 것을, 자신의 미래를 맡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은 ‘하나님께 네 인생을 맡겨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맡기면 모든 것에 통달하신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는 겁니다. 왜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평강과 우리 마음을 연결시켰을까요? 그것은 우리 예배당 한켠에 마인더스가 걸어놓은 잠 4:23의 말씀과 같이 우리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주님의 평강은 단순한 평화, 한 때의 일시적인 위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샬롬’입니다. 왜 지금 내가 이 상황에 있는지? 왜 이것을 겪어야 하는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그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과 생각에 주시는 평안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신뢰하고 믿는다면, 오늘의 이 상황 앞에서, 이 시대의 두려움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느끼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살지 않기를 구합니다. 죽음과 공포와 두려움 앞에 무기력한 포로가 되지 않기를 구합니다.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워함으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자들 앞에서 당당한 그리스도인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을 즐거움으로 삼아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승리하는 기쁨을 누리길 원합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두려움의 시대일수록 더더욱 마음의 문들을 꽁꽁 걸어 잠그고 살아가기 보다는 염려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는 믿음의 자녀들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통치하게 하옵소서. 그 다스리심 아래서 우리 생명의 근원인 마음이 평강에 평강을 누리게 하옵소서.


오늘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선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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