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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0.10.11 움오름 주일 설교 - "내가 주를 보았다"(요 20:11-18)

최종 수정일: 2020년 10월 13일









요한복음 20:11~18

11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12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13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14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15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16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18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설교문


1. 왜 몰라 보았을까?


1) 얼마나 사랑했길래?


빈무덤을 확인한 다른 제자들은 기이히 여기면서도 자기 집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들을 따라 갈 수 없었습니다. 차마 아무 일 없다는듯 자신의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주님의 시신을 찾아가려 했습니다.


지금은 장례가 나면 대부분 병원 장례식장을 이용합니다. 화장하기 전까지 시신은 냉동고에 보관해 둡니다. 제 유년시절만 하더라도 이런 류는 거의 없었습니다. 열이면 열 모두 시신을 염해서 관에 넣어 자기 집 방에 두었습니다. 관은 병풍으로 가린 뒤 그 앞에서 문상객을 받았습니다. 늦은 밤 문상객들이 돌아가고 나면 맏상주 홀로 관이 놓인그 방에서 잠을 자는게 보통이었습니다.


겨울이면 덜 하지만, 여름철 같은 경우 시신이 썩는 역한 냄새가 났습니다. 그걸 다소 상쇄키 위해 병풍 앞엔 늘 향불을 피워 두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습니다. 요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 되던 때에 방문하신 예수님이 무덤 문을 열라고 하시니 그 누이 마르다가 이렇게 대답했지 않습니까!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 11:39)


같은 가족이라도 죽은 몸이 되고, 시신이 썩어 냄새가 나면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를 보십시오. 돌아가신지 사흘이나 된 주님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기만 하면 자신이 가져 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그만큼 그녀는 주님을 사랑했음이 분명합니다.


2) 못 알아본 또 다른 제자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습니다.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했던 마리아는 왜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을까요? 왜 예수님이신줄 금방 알아채지 못했을까요? … 비슷한 경험을 기록하고 있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일화(눅 24:13-35)’ 속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보겠습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베드로와 요한의 행동대로 표현하자면, 그들도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엠마오(Greek: Ἀμμαοῦς, Hebrew: אמאוס)는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10여km 떨어진 마을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서 그들은 스승의 비참한 십자가 죽음과 빈 무덤에 대한 이야기로 마음 아파했습니다. 깊은 상실과 절망 때문인지 그들은 같이 이야기하며 걷는 이가 예수님이신 줄 알아 차리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그 두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궁금해 하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의문이 풀렸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이신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저녁이 되어 엠마오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함께 걷던 예수님께 식사를 같이 하자고 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쪼개어 주셨습니다. 그때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자신들과 함께 했던 그 분이 누구이신 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축복하시며 빵을 떼어 주시던 그 음성이 길쭉하고 침침한 방에 울려 퍼질 때 무덤 앞의 마리아처럼 그들의 귀가 열렸습니다. 이어 마침내 눈이 열려 주님이신줄 알아 보았습니다. 주님의 온유하신 음성이 굳어지고 어둠에 함몰된 그들의 심연을 뚫고 빛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마주앉아 성찬의 빵을 쪼개어 주시던 그분이 그토록 그리던 주님이신줄 알아차렸습니다.



2. 확증편향 & 메아리방(Echo Chamber)


그렇다면, 왜 그들은 무려 10여km를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예수님을 알아채지 못했을까요? 무덤 앞의 마리아처럼 그들 속에 자리잡아 있던 ‘확증편향’ 때문입니다. 우리말 사전은 ‘확증편향’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 신념, 판단 따위와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방식”. 간단히 말씀드리면, 흔히 하는 말로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와 같은 것이 바로 확증편향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보고 싶은 것만 보았습니다. 확증편향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치관, 신념, 판단 속에 ‘부활’은 존재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주님이 나타나시고, 같이 걸으시며 이야기 하셨어도 비슷한 사람이지 주님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겁니다.


‘연장자’, ‘선임’ 등을 뜻하는 시니어(senior)는 단순히 나이 든 사람을 뜻하기 보다는 연륜있는 어른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험이 짧은 젊은이들이 묻고, 의지하고, 존경하는 대상입니다.


하지만, 근래 우리 사회에서 시니어는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유는 달리 말씀드리지 않더라도 아실 겁니다. 근데, 시니어에다 +(플러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이건 거의 ‘건드릴 수 없는 존재’(The Untouchables)가 됩니다. 아무리 논리적, 이성적으로 설명해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꽉 막혀있고, 완전 굳어 있는 내놓은 존재라고 여깁니다.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고, 연륜이 쌓이면 아는 만큼, 경험한 만큼 넓어지고, 깊어져야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가 더해질 수록 더더욱 고귀해지고, 품위가 있어야지요. 이게 당연지사 아닙니까? 근데도 외골수에, 옹고집에, 막무가내로 악만 빡빡 쓰는 존재라면 이건 뭔가가 잘못 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 아닙니까?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여러 측면에서 분석해 볼 수 있겠지만, 확증편향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 말씀도 자기 듣고 싶은 것만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도 듣기보다는 자기 할 말만 하는 기도를 해 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믿는 것에 부합하는 것만 받아들이고, 자신의 믿음에 어긋나는 것은 아예 걸러냈기 때문입니다. 외부와 차단된 메아리방(Echo Chamber)에서 내가 낸 소리만 더 크게 계속 들으니 이런 확증 편향이 강화된 겁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의 정치적 양극화를 겪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종교 안에서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 또한 확증 편향 때문이라는 진단이 옳다면,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을 원한다면, 지금껏 우리가 취사선택했던 것 바깥에 있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이야기, 내 바램만 줄기차게 쏟아내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라고 했던 우리 기도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더 기다림을 지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렘브란트와 엠마오 이야기



1628년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눅 24:13-35) 이야기를 읽고 묵상한 후 <엠마오의 저녁식사>라는 제목의 첫 번째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렘브란트는 예수님의 ‘나타남’과 ‘사라짐’을 동시에 한 화면에 담고자 했습니다.


우선 그는 공간을 둘로 구분하고, 빛도 두 곳으로 나누었습니다. 왼쪽의 멀리있는 빛을 통해서는 부엌일에 분주한 여인을 그렸고, 오른쪽의 가까이 있는 빛을 통해서는 빵을 떼시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바로 그 순간 어두움과 빛이 예수님의 윤곽을 경계로 선명히 충돌합니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에서 주인공을 예수님이 아닌 제자로 삼았습니다. 평소의 그의 그림과 달리 예수님을 어둡게 표현했습니다. 마치 촛불을 밝히는 심지의 검은 부분처럼 예수님은 어둠으로 자신을 두르고 계십니다. 빛을 발하는 분이 그 비춤으로 생긴 그림자 속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묘하고도 흥미로운 발상인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확실히 렘브란트는 보면 볼수록 화가이기 이전에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이요, 영성가였음에 분명합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빛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엠마오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순간 주님께서 사라지셨다는 말씀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일 겁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빛을 극적으로 활용하는 여타 렘브란트의 그림들과는 극명하게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개 렘브란트의 그림은 빛이 어디를 비추는가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 작품은 빛이 어디에서부터 기원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빛이 시작한 발화점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인데도, 예수님을 실루엣처럼 어둡게 처리했습니다. 주님께서 빵을 떼어 주시자 제자들의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았는데, 그때 주님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기 때문입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차린 때는 저녁무렵,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인식한 때는 새벽입니다. 둘 다 어둠이 지면에 내렸듯이 그들의 마음엔 절망이 어두움 처럼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날도 어둡고 마음도 어두우니 주님이신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렘브란트의 <엠마오의 저녁식사>는 예수님의 나타나심과 사라지심을 동시에 묘사하면서 빛의 발화점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어떤 빛에 기대어 살아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나아가 자기 가치관, 신념, 판단 속에 갇혀 있던 우리가 누구에 귀 기울이며 살아야 할지를 생각케 합니다.



4. 나를 붙들지 말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던 마리아는 “마리아야~”라고 부르는 음성에 정신이 화들짝 들었습니다. 동산지기라면 절대로 자기 이름을 알고 있을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평소 자신을 그렇게 부르신 이는 주님 한분이셨기에 그제서야 마리아는 자신의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부활이란 없다는 생각을 버리고, 앞에 계신 주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랍오니”(선생님)라고 부르며 반가운 마음에 주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나를 만지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손대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붙잡고 늘어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원문의 단어가 현재형으로 사용된 것을 감안해 보면, 그것은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붙들고 있는 것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자 있는 힘을 다 붙들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다시는 예수님을 잃어버리거나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꼭 붙잡고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리아를 향해 주님은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다”라며 붙잡은 손을 놓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에겐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기에 놓아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현재의 순간이 좋은 나머지 집착하거나 머물러 있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로 갈 육체이기에, 그 몸을 숭배하며 그것에 머물지 말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과거 육체를 갖고 인간으로 사실 때와는 전혀 다른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과거의 주님과 똑같다는 생각으로 주님을 대한다면, 그것은 바른 생각도 아니거니와 주님과의 관계와 신앙은 더 자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세월은 사람을 변하게 합니다. 세월 자체가 변하게 한다기 보다는 그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사람은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과거의 한 시점의 모습으로 그를 붙들고 있다면, 그것은 그 누군가를 되려 죽이는 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나님께로 올라 가시듯이, 비록 비루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돌이켰다면,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고후 5:16-17은 과거에 묶여 있고, 과거를 붙들고 있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권면하십니다. 유진 피터슨의 the message 번역본으로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소유나 외모로 평가하지 않는 것은 그 같은 결심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일찍이 메시야를 그런 식으로 잘못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분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중심을 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누구든지 메시아와 연합하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고, 새롭게 창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옛 삶이 지나가고, 새로운 삶이 싹트는 것입니다.



5. 내가 주를 보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주님의 승천에 관한 앞으로의 계획을 맨 먼저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계획을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에 마리아는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18절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도저히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 만큼 큰 아픔이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 마리아는 모든 면에서 달라졌습니다. 부활이 실재한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그 부활의 증거일 뿐 아니라, 생명의 주관자이시다는 사실은 마리아의 삶의 가치와 방향을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무덤을 향해 내달리던 것보다 더 다급히 제자들이 있는 안가를 향했습니다. 그리고 소리쳤습니다. “내가 주님을 보았다”. 이 말은”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증언이요, 선포였습니다. 이제 마리아는 자신이 만나고 경험한 새 생명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참 생명의 능력과 속에서부터 샘솟는 기쁨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해봅니다. 과연 제자들은 “내가 주를 보았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을 신뢰했을까요? 막달라 마리아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을까요?


이어진 말씀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요한복음은 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뛰어넘어 곧 바로 그날 저녁 때에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궁금합니다. 최초 빈 무덤의 목격담을 이야기하자 베드로와 요한을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거짓이 많아 믿을 수 없는 ‘허탄한 이야기’라고 평가절하했습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과연 두 번째로 나타나 이제는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라고 증거하던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과연 신뢰했을까요?



6. 복숭아와 배 나무 아래의 길을 만들다


자신의 증언을 허탄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막달라 마리아는 전해야 했습니다. 이전에도 믿지 않았고, 이번에도 믿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빈 무덤을 목격했고,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난 사람으로서 그녀는 결코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직무유기였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주를 보았다”는 마리아의 말은 직접 목격한 사람으로서 마땅한 일이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증언이었습니다.


부활은 이처럼 나 하나만의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믿든 믿지 않든 간에 나를 넘어 타인에게 증언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해야 할까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말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는 이 시대에 말이 아닌, 어떤 방법으로 부활을 증거해야 할까요?


지난 주중 눈에 들어와 마음에 줄곧 남았던 글귀가 있습니다. 중국 한나라 사마천의 '사기' 중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에 나오는 말인데, 문장은 이러합니다.


桃李不言 下自成蹊

도리불언 하자성혜


해석하면, 이런 뜻입니다. “복숭아와 오얏나무는 말이 없으나, 그 아래엔 저절로 길이 생긴다.” 이 말은 덕행이 있는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이 의미를 좀 더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계절에 따라 나무들은 제 할일들을 말없이 해 갑니다. 자연의 순환과 순리에 맞춰 묵묵히 과업을 이뤄갑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든, 혹은 눈이 내리고 서리가 내리든지 간에 그 계절에 맞게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감당해 갑니다. 그러다 보니, 봄이 되면 꽃을 피우고, 가을엔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나무의 삶이 이러하니 말로 오라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그 나무 아래로 모여듭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없던 길도 새로 생길 정도입니다.


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인 오늘날 우리는 어떤 말로 복음을 전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현란한 말솜씨로 그들을 설득시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본분에 충실한 교회, 믿는 바의 가치대로 묵묵히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열매를 삶으로 맺고, 나누며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이 시대 사람들이 바라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어제 한참 설교준비를 하는데, 이전 교회 있을 때 제가 결혼집례했던 형제가 전화를 했습니다. 아기가 손에 화상(1도)을 입어 병원갔다 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바쁘냐고 하길래, 내일 오랜만에 성찬공동예배를 위해 설교준비한다고 했더니(… 중간생략 …), 몇명 모이냐고 했습니다. 제가 한 20명이라고 했더니, 그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아니, 목사님~ 아직도 20명이면 어떻게 해요?”


뭐,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한동안 속상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있던 사람들마저도 나오지 않고, 떠나는 마당에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을리가 만무합니다. 그렇지만, 마음에 다시 다짐해 보았습니다. 왜 움오름이란 나무 아래엔 사람들이 오는 길이 없냐고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저 이 시대와 계절에 합당한 역할을 해 가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역할과 책무를 감당해 가면 됩니다.


지금 추진해 가고 있는 저소득층 예술지원사업과 지역아동센터와의 협업사업을 비롯해 북쪽 동네사람들을 챙기는 그 일들을 잘 감당해 가다 보면, 길을 저절로 생기지 않겠습니까? 이 일들은 단순히 사회사업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가치를 실현해 가는 믿음의 현장입니다. 이렇게 생명을 살고, 생명을 전하고, 생명을 이식시킨다면, 우리는 주를 만난 이 시대의 막달라 마리아가 됩니다. 묵묵히 진리와 복음을 살아가는 삶은 또 다른 형태의 “내가 주를 보았다”라는 부활의 증거가 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교회의 언어가, 그리스도인의 말이 사회와 공감을 나누지 못하고, 공전을 거듭할 때, 교회의 위기는 그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말의 위기가 아니라, 정신과 생각을 담고 있는 말이 더이상 신뢰를 주지 못하고 공감을 하지 못하는 독백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지 못하고 홀로 외딴 섬이 되어가는 현실의 기독교와 교회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도 얼마나 안타깝고, 마음 아프십니까? 2천년 전 마리아는 “내가 주를 보았다”라는 한 문장의 말로도 충분히 주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었는데, 오늘날 백마디를 하고, 천마디를 하더라도 전할 수 없는 참담한 결과 속엔 믿는 것과 거리가 멀어버린 우리의 삶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우리로 귀에 듣기 좋은 소리 울리며 살아온 메아리방에서 벗어나기를 구합니다. 확증편향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음성에 진심 귀기울이며, 귀에 쓴 소리도 감사하게 마음에 담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묵묵히 진리를 살아감으로써 시대 속에 신뢰를 쌓아가는 교회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언젠가 우리 역시 마리아처럼 “내가 주를 보았다”는 짧은 한 문장으로도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할 수 있는 교회와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지속되는 전염병의 시대, 침울해진 우리 삶에 부활의 빛으로 오셔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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