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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0.10.04 움오름 주일 설교 - "어찌하여 우느냐?"(요 20:11-18)








요한복음 20:11~18

11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12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13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14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15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16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18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설교문


1. 희한한 일일세!


대다수의 제자들은 여인들이 전하는 빈무덤 이야기를 믿지 않았습니다. 거짓이 많이 가미된 허탄한 이야기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 무덤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과연 그 새벽에 무덤의 돌은 옮겨져 있었으며, 지키던 군병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 안은 비어 있었고, 시신을 둘렀던 세마포와 머리를 감쌌던 수건은 따로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며, 베드로와 요한은 여인들이 전한 이야기가 허탄한 말이 아니라, 사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요 20:9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 부분에서 ‘알지 못하더라’는 것은 ‘인식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3년을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었기에 부활의 현장을 보고도 그것이 부활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들 속엔 그 사건을 부활로 여길 믿음이 부재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일어난 사건 너머를 보게 하는데, 그들 속엔 그것을 볼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현장을 체험했음에도 그것이 믿음을 굳게 하기 보다는 또 다른 의심을 안게 했습니다. 이들이 되돌아 가는 모습을 눅 24:12이 다음과 같이 보다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와 요한은 이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들이 ‘놀랍게 여겼다’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이전 ‘개역성경’이 말하듯이, ‘기이히 여겼다’는 표현이 좀 더 실제감을 전해주는 번역이라 하겠습니다. 쉽게 말해, 두 제자는 부활의 현장을 확인하고도 ‘거참 희한한 일이네’라고 생각하며 그냥 귀가했다는 의미입니다.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 방식을 사람들은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시는 그 현장 속에서도 우연이라 여기고, 운이라고 단정합니다. 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혹 보는 눈이 좀 있다 하더라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때로 그럴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땅은 각기 다른 성질과 환경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것을 심었다 하더라도 땅에 따라서 자라는 정도가 다릅니다.


지난 봄 같은 가게에서 호박모종을 사서 제 어머니와 각각 3포기씩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동일한 모종을 심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천양지차였습니다. 저의 집 한켠에 심은 호박 2포기는 심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고, 하나 남은 것은 지금까지 겨우 호박열매 2개만 맺었습니다.


반면, 고향집 어머니집의 호박은 지난 주까지 계속 애호박을 맺고 있습니다. 열매를 너무 많이 맺어 이웃집에 나눠주더라도 어머니 혼자 처치 곤란일 정도로 많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하나입니다. ‘흙’, 바로 토양입니다. 저도 나름 거름주고, 열심히 물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식물이 자라기에 박한 토양 때문에 호박을 거둘 수 없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토양도 마찬가지입니다. 혹 신앙생활의 세월이 많이 지났음에도 믿음의 열매들이 없습니까? 아니면, 일어나는 일들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지 않고 믿기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무슨 뜻인지는 알겠으나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습니까?


만약, 우리의 상태가 이러하다면, 문제는 하나님의 역사가 부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받아들일 우리 믿음이 부재한 것일 수 있습니다. 갈아 엎어야 합니다. 새로운 작물을 심기 전 기존의 흙을 갈아 엎듯이, 기존의 묵은 우리 마음과 영혼의 토양을 갈아 엎어야 합니다. 위의 것을 아래로, 맨 아래 것을 뒤집어 위로 세워 햇볕이 들고, 흙과 흙 사이에 숨이 통하게 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식물이 자라고, 열매맺고, 믿음이 자라는 땅이 될 수 있습니다.



2. 서서 울고 있더니


매정하게도 빈무덤을 확인한 베드로와 요한은 곧장 집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그렇게 되돌아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막달라 마리아의 맘 속엔 이런 원망과 생각이 혹 자리잡지는 않았을까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확인이었단 말인가? 주님의 시신이 없어진 이 사실이 그들에겐 진정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 왜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되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


막달라 마리아, 그녀에겐 주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사실확인보다도 더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없어졌다는 사실 그 자체였습니다. 그 사실이 짓누르는 슬픔에 그녀는 도저히 무덤 곁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무덤 곁에 서서 우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가끔 머리를 숙여 무덤 안을 다시 흘깃 쳐다보곤 했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시신의 사라짐 앞에서 슬픔을 눈물에 담아 서럽게 흘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객관적으로 판단하자면, 그녀의 행위는 타당하지 않았습니다. 사실확인 후 집으로 되돌아간 그들이 훨씬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것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그녀도 생각이 있고, 사리를 분별할 줄 압니다. 제자들이 그냥 자기들만 되돌아갔을까요? 같이 가자고 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그녀는 홀로 남아서 그렇게 울고 있었을까요? 이에 대한 답은 앞선 10절을 직역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0절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를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갔다”(ἀπῆλθον οὖν πάλιν πρὸς αὐτοὺς οἱ μαθηταί)


베드로와 요한은 단순히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돌아간 것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기준이 ‘자기’(self)였기 때문입니다. 3년을 예수님을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중심엔 주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말씀이 핵심가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가 중심이고, 그런 삶을 살다보니 자연스레 자기자신에게 귀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녀에게 중심은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이 그녀의 중심이었고, 주님의 말씀이 핵심가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중심이 사라진 상황 속에서 그녀는 도저히 다른 제자들처럼 쉽게 자신에게로 되돌아 갈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자신을 위해 어떤 결정이 더 유리하고 덕이 되는지 선택하고 따르는 것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덤 곁을 떠나지 못하고 서서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믿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점점 자신의 중심성을 벗어나 주님으로, 주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기준을 삼는 것 말입니다. 가끔 보면, 믿음 좋아 보이던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으며 갑자기 무너지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것은 믿음이라기 보다는 믿음처럼 보였던 신념임을 확인하곤 합니다. 겉으론 유사하지만, 누구를, 무엇을 자기중심성에 두느냐에 따라 그것은 믿음일 수 있고, 신념일 수 있습니다.


첫 부활의 아침, 무덤 앞에 서서 울고 있던 한 사람과 곧장 자신에게로 되돌아간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믿음과 신념의 차이가 만든 결과를 확인합니다.



3. 누구를 찾느냐


베드로와 요한과 다른 여인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고도 다시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사라진 주님의 시신을 찾기 위해 무덤 곁에 남았습니다. 기이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그 일들 앞에서 하염없이 울며 찾고 또 찾기를 바랬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이해 너머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신비에 다가가고,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 막달라 마리아가 보여준 이것이 아닐까요? 찾고, 또 찾으며 그 곁에 머무는 것 말입니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이사야 선지자는 사 55:6을 통해 하나님을 찾고 또 찾을 것을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막달라 마리아가 울다가 몸을 굽혀 무덤 속을 들여다 보니 방금 전까지 없었던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정체를 알지 못했던 마리아는 동산을 관리하는 사람인줄 인식했습니다. 그때 천사들이 물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자리에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 부르던 “여자여”라는 호칭을 쓰며 막달라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어리둥절했을 마리아가 울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13절 하반절입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이렇게 대답하고 몸을 돌이키자 앞에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람이 예수님이시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15절입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한번 더 반복된 “여자여”라는 호칭과 더불어 예수님은 우는 이유와 누구를 찾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왜 우는지를 몰라서일까요? 그렇다면, 우는 이유와 누구를 찾는지를 동시에 물을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 이 물음 앞에서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15절 후반절입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울던 와중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그 질문의 진의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대답했습니다. 자신이 우는 이유가 누군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이 질문하는 자가 시신을 가져간 주범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살짝 노기를 띄면서도 그에게 “주여”라는 호칭과 함께 시신을 어디에 두었는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이 문장을 뉘앙스에 맞게 재번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이보세요. 당신이 그분을 옮겼거든, 어디에 두었는지를 말이나 해 주세요. 내가 그분을 모시겠습니다.”


마리아의 이 말 속엔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그가 얼마나 주님을 귀히 여겼는지가 여실히 보여집니다.



4. 만약 시신이 그대로 있었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이처럼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사랑했기에 주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보고 서럽게 울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예수님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라고 칭하는 이들조차 사실확인 후 자기의 일상으로 되돌아 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이 슬픔과 절망을 안고 도저히 일상을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근원적인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만약, 그날 새벽에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그대로 안치되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 신학자 리차드 렌스키(Richard C. H. Lenski, 1864 – 1936)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까닭에 울었으나 만약, 그 날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 속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그녀와 우리는 영원히 울게 되었을 것이다.”

 

생명의 한계와 능력의 한계를 숙명처럼 안고 존재하는 인간에게 죽음은 존재의 종말인 동시에 인간이 지닌 슬픔의 극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자리엔 늘 애통과 눈물이 상존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슬픔과 절망을 주님께서 희망과 기쁨으로 바꾸셨습니다. 과거 죽음은 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의 소멸이었지만, 주님의 부활로 인해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의미에서 부활절 첫날 빈 무덤을 바라보자면, 그날 무덤은 비어있어야 했습니다. 비록 막달라 마리아가 서럽게 울고, 통곡했지만, 그날의 그 울음은 그녀를 비롯한 모든 이들을 위해 마땅히 흘려야 할 눈물이었습니다. 만약 그날 그 새벽 시신이 그대로 있었다면, 그 기쁨은 잠깐이었겠지만, 슬픔은 영원한 것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5. 하나님 앞에서 울다


작년 연말 저의 집에 오셨던 어머니께서 제 책꽂이에 있던 책을 읽으시다 미처 덜 읽으셨던 책이 있었습니다. 예전엔 그럴 때 다음에 와서 읽겠다고 하셨는데, 그때는 그 책을 꼭 갖고 가서 읽고 싶다고 하셔서 그렇게 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책 제목이 <하나님 앞에서 울다>(제럴드 싯처, 좋은씨앗) 입니다.


원제목이 <A Grace Disguised: How the Soul Grows Through Loss>인데, 우리말로 옮기면, <위장한 은혜: 상실을 통해 우리 영혼은 어떻게 성장하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중에도 확인한 것은 저의 어머니는 그 책을 식탁 위에 두고서 하루에도 수차례 그 제목을 보고 계셨습니다. 어쩌면 제 어머니는 당신의 생애 찾아온 깊은 슬픔과 상실의 아픔 속에서 어머니의 영혼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직접 체험하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상실이라는 비극적인 경험과 그로 인해 우리 생활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변화들을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그 상실이 너무 아프고, 가슴이 시리고 저리도록 슬픕니다. 하지만, 빈 무덤의 상실과 슬픔이 종내에 부활의 기쁨과 감격의 전제였듯이, 상실로 인해 이르게 될 영광과 성장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상실이 가져올 변화를 기대하게 합니다.


8개월째 접어든 코로나로 어려운 이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어쩌면 어렵지 않은 이들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가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지난 주중에 집 앞 가게를 지나는데, 오래토록 그 자리에 있던 음식점을 인부들이 철거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귀 기울여 보니 철거하는 가게 맞은편에 있는 까페에서 나오는 오펜바흐(Julian Riem Offenbach)의 <자클린의 눈물, Les Larmes Du Jacqueline>이었습니다.


묵직한 첼로 선율이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첼리스트 자클린 뒤프레의 눈물처럼 활을 타고 흘러 내렸습니다. 참 묘한 감정이 일었습니다. 눈물나는 세상입니다. 아니 울고 싶은 세상입니다. 지난 9월 30일 언택트 공연한 나훈아씨의 노래 <테스형>의 가사처럼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


노래를 부르던 노 가수는 아프다며, 슬프다며 질문만 던졌지만, 우리는 압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아픔, 이 힘듦이 그 자체로 끝날 것이 아님을 압니다. 언젠가 사랑하는 주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셨듯이, 우리 이름을 부르실 때 왜 우리 눈에 그토록 눈물이 필요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2천년 전 빈 무덤 앞에서 마리아를 만나주셨던 그 주님께서 반가이 우리 손을 잡으시며 “애썼다”라고 토닥여 주실 때, 지나간 우리의 슬픔은 기쁨을 위한 전주였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 하늘 꽃 >

-박남희


아버지 말씀하시길

내 집에서 가장 이쁜 꽃은

눈물 꽃이니,

세상에서

나의 고통으로 고통할 때

피어나는

하늘 꽃이니.


언젠가

오래 그리던 아버지 만나

목 어긋 안고 울다가, 웃다가

아버지 어깨 너머로,

하얗게 핀

눈물 꽃 보리니.


다시 돌아갈 고향집에

아버지 이뻐하시는

하늘 꽃

가득 피우기 위해.

오늘도 가장 낮은 무릎 꿇고

아버지 사랑 구하노니.


아버지 말씀하시길

내 집에서 가장 이쁜 꽃은

눈물 꽃이니.

세상에서

나의 고통으로 고통할 때

피어나는

하늘 꽃이니



하나님~

우리 삶에 상존한 상실로 아파할 때, 고통으로 슬퍼할 때, 아버지 이뻐하시는 하늘 꽃 피우게 하옵소서. 아버지 집에서 가장 이쁜 꽃, 눈물 꽃을 피우며 이 땅을 윤기있고, 물기있는 기름진 곳으로 가꾸어 가는 자녀들 되게 하옵소서. 빈 무덤의 슬픔을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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