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09.20 움오름 주일 설교 - "막달라 마리아가"(요 20:1-10)

9월 20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20:1~10

1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2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3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4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5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6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7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8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9(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10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설교문


1.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흔히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고 합니다. 한 시대의 승자가 자신을 정당화 하기 위해 스스로를 미화하는 반면, 패자는 왜곡하고 은폐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역사라는 것이 많은 부분에서 승자중심이다 보니 부당하게 사라지고 은폐된 역사가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와 교회의 초기 역사도 이런 틀에서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구성원의 1/2 이상이 여성이 자리함에도 불구하고 남성중심의 역사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많은 교단들에선 여성목사안수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의사결정과정에서도 여성은 배제시키고 있습니다.


21세기에도 교회의 상황이 이러하다면, 2천년 전 초기 기독교 신앙공동체 안에서는 어떠했겠습니까?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성경을 읽다보면, 여성들이 등장하는 부분이 남다르게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그 어떤 이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랐던 제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사복음서를 지나 사도행전에 들어서자 마자 사라졌습니다. 왜? 무엇 때문일까요? 이 시간 짧게나마 제자 막달라 마리아를 살펴봄으로써 그녀가 지닌 의미의 무게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2. 사도 중의 사도


91년 교황 그레고리 1세는 부활절 강론을 하면서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결정적으로 막달라 마리아의 명예를 훼손시킨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동방교회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원래 귀족 출신이었을 뿐 아니라, 경건한 여인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인이 무려 1400년간 부당하게 인격의 훼손을 당했다는 것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카톨릭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비로소 복권된 것은 20세기가 되어서이니 말입니다.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는 막달라 마리아가 간음한 여인이나, 베다니아의 마리아(나사로와 마르타의 동생), 또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른 여인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공식적으로 밝혔습니다. 그리고 198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 중의 사도’라고 선포했습니다. 나아가 2016년 교황 프란치스코는 7월 22일을 막달라 마리아를 기념하는 축일로 격상시켰습니다.


이처럼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카톨릭 교회의 복권이 있기 전까지 그녀에 대한 평가는 철저하게 남성 중심에서 이루어졌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마도 교황을 비롯한 남성 성직자 그룹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힘의 논리가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합리적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까지 초대교회의 영향과 전승이 남아 있던 때를 살았던 초기 교부 성 어거스틴(St. Augustin, 354-430)이 막달라 마리아를 가리켜 ‘사도 중의 사도(Apostolorum Apostola)’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도’란? 예수님의 12제자를 의미하는 바, 막달라 마리아는 12사도 보다도 더 사도로서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3. 폄하의 4가지 이유


이처럼 막달라 마리아는 초대교회 속에서 영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 가운데 저평가 되고, 잘못 기억되어 왔습니다.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협의회에서 국제관계분과장을 역임했던 김원율님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비밀>(세가인쇄)이라는 책을 통해 그 이유를 4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당시 유대사회의 남성중심적 가부장적 문화 때문입니다.


둘째, 12사도의 대표였던 베드로와 막달라 마리아와의 갈등 때문입니다.

: 독일 학자 칼 라인하르트가 1896년 카이로에서 발견한 파피루스 사본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의 뒷 부분에는 불만에 가득 찬 베드로의 목소리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비밀을 이렇게 여자에게 말씀하셨다니 가당키나 합니까? 관습을 뒤엎고 여자의 말에 귀 기울여야 옳습니까? 정녕 우리보다 더 사랑하시어 이 여자를 택하신 것입니까?”


이것은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님이 얼마나 사랑한 제자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 막달라 마리아를 12제자를 대표하던 베드로가 얼마나 가부장적인 태도로 견제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셋째, 기독교 역사가들의 의도적인 폄하 때문입니다.

: 마가복음은 16장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가리켜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여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기록자인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요, 충실한 제자였으며, 영적 아들로 불렸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당시 예수님을 수행했던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편견에 찬 의도적인 폄하를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넷째, 교황 그레고리 1세의 발언 때문입니다.

: 이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591년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라고 부름으로써 결정적으로 그녀를 폄하시킨 것입니다.



4. 성경 속 막달라 마리아를 찾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막달라 마리아의 역사적 평가가 왜곡되었다면, 이전 성경 속에서 만나는 그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녀는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 제자가 되었으며,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을까요?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 호수 서쪽 연안에 위치하고 있던 막달라(Μαγδαληνή) 지역 출신의 유대인 여성입니다. 막달라는 염색업과 직물업을 비롯해 어업과 조선업이 발달한 상업도시였습니다. 고대 대부분의 상업도시들이 그러하듯 돈거래가 많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상업도시들은 의례 다른 지역들보다 더 도덕적으로 부패하곤 했습니다. 막달라라는 도시도 예외가 아니었을 겁니다.


이런 상업도시에서 자란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언급은 성경에 모두 12번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에 3회, 마가복음에 4회, 누가복음에 2회, 그리고 요한복음에 3회입니다. 앞서 두 차례에 걸쳐 말씀드린 591년의 교황 그레고리 1세의 ‘창녀’발언을 비롯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폄하 발언은 복음서의 기록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된 ‘주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던 여인’으로 보는가?, 또는 누가복음 7장에 기록된 ‘주님께 향유를 붓던 죄인인 여자’를 막달라 마리아로 보는지 그 여부에 따라 나눠집니다.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를 보다 균형잡힌 시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많은 시간의 간극과 역사의 굴절이 있었기에 100% 액면 그대로 바라보고 평가하기는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좀 더 왜곡을 줄이고, 폄하를 넘어서 더 진실한 모습에 다가가는 것일까요?



5. 오해를 넘어


2003년 댄 브라운이 출간해서 논란을 일으켰던 <다빈치코드>라는 추리소설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작품 속에 숨겨진 코드를 찾아서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 시온수도회와 오푸스데이가 얽힌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예수님이 결혼을 했는데, 아내가 막달라 마리아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당시 임신중이었는데, 이후 프랑스로 도망가 예수님의 혈통을 이어 나갔다는 것이 주된 줄기입니다.


한편으론 신선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론 귀가 솔낏할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댄 브라운의 책을 보거나 그의 책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관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는 그가 처음 주장한 것도 아니고, 과거 영지주의 이단이 주장하던 것의 재탕일 뿐 별로 새로운 것도 아닙니다.


성경 너머의 것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있겠지만, 때론 우리에게 허락된 경전의 바탕 위에서 차분히 한 인물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남녀 모두를 제자로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에는 결코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매춘부 또는 예수님의 아내였다는 이단들의 그 이론들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설화의 가지들일 뿐입니다. 또한 그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6. 부활의 첫번째 목격자 & 증인


마가복음의 기록자인 마가가 베드로와 가까웠던 관계로 그 관점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폄하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굳이 부활사건의 목격기사에 ‘막달라 마리아’를 일곱 귀신 들렸던 자라고 수식했다는 점), 그것은 사실 그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보다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일곱 귀신에 들려 온전치 못했던 그녀가 예수님으로 인해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 치유받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님을 압니다. 눅 17:17에서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치유받은 10명의 나병환자들중 겨우 1명만 다시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치유받은 모든 이들이 예수님을 추종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을 고쳐주신 예수님을 사랑했으며, 온 힘을 다해 따랐던 사람입니다. 단순히 따랐던 것이 아니라, 죽음의 자리를 넘어 그 이후까지 진심으로 주님과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주님이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님을 위해 새벽에 겁도 없이 향품을 들고 무덤을 찾았던 사람입니다. 행여라도 금요일 급하게 장례를 치르는 바람에 주님의 몸에 향품을 덜 바른 것은 아닌지 그 안타까움 때문에 새벽같이 무덤을 찾았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권위를 내세우며 자리다툼을 하던 잘난 12제자들이 모두 도망가서 숨어 있던 그때에 조차 그녀는 십자가 아래에서 주님의 마지막을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사흘 후 다른 여인들과 더불어 주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사도요한은 이런 마리아의 모습을 알았기에 요한복음을 기록하며 함께 했던 여인들의 대표로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을 기록하며 그녀의 이런 마음을 담아내려 했습니다.


그리고 이토록 주님을 사랑했던 사람이기에 주님께서 당신의 부활을 가장 먼저 보이셨고, 알리셨다는 당위성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예수님의 결정은 매우 많은 위험성을 담보한 시도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사회에서 증인으로서의 효력과 신뢰를 갖기하기 위해선 2-3명의 증인이 필요했는데, 그 자격요건에 증인은 남성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당시 사회 통념상 증인으로서의 자격에 미치지도 못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에게 가장 먼저 부활한 모습을 보이셨을까요? 또 다른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증인의 임무를 주셨을까요? 그것은 비록 사회적 기준으로서는 적합하지 못했더라도, 주님께 있어서 부활의 증인의 가장 첫째되는 자격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청년시기만 하더라도 간혹 이런 말을 하는 이름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이 왜 여인들에게 가장 먼저 보이셨는지 아세요? … 여자들은 입이 가볍기 때문입니다. 말하지 말라고 해도 말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많은 이들이 웃으며 듣고, 아멘하던 그것들은 실은 매우 남성중심적 시각이었고, 여성폄하적 내용이었고, 사실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먼 내용이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가장 먼저 부활하신 모습을 보이셨습니까? 사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모두가 거리를 두던 십자가 아래에서 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함께 했던 그 여인들은 주님을 가장 사랑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이야말로 부활의 증인으로서 손색이 없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7. 사랑했고, 바라보았으며, 찾았고, 경배한 제자


1988년 8월 15일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여인의 존엄과 소명에 관한 <여성의 존엄> 16항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역할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현재의 교황 프란치스코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 어거스틴이 언급한 ‘사도들의 사도’라는 호칭을 붙였습니다. 동시에 2016년 <로마미사경본> 7월 22일에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고유 감사송을 넣게 했습니다. 다음은 그 감사송 해설의 일부입니다.


“감사송 본문은 그리스도의 두 가지 행위에 주목하게 합니다. 곧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과 …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심입니다. 무엇보다도 감사송이 말하는 것은 …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당신 자신을 마리아에게 분명하게 밝혀 주셨으며, 현재의 체험에 비추어 과거를 기억하도록 그를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랑하였고(dilexerat), 바라보았으며(viderat), 찾았고(quaesierat), 경배하였다(adoraverat)’라는 네 동사로 요약됩니다.”


한 마디로 장엄하고 명쾌한 해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랜 역사의 왜곡을 넘어 막달라 마리아를 이렇게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했으며, 바라보았으며, 찾았으며, 경배한 사람”



8. 20세기의 긴즈버그 & 1세기의 막달라 마리아


어제 설교를 준비하던 중에 NY TIMES(뉴욕타임즈) 속보가 메일로 왔습니다. 9월 18일(금) pm 8:12(미국 현지시간) 미국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가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였습니다. 여성 인권과 소수자의 편에 섰던 진보의 아이콘이었던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워싱턴DC의 연방대법원 건물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첫번째 이름인 “RUTH를 빼고 TRUTH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그녀는 독보적이고 탁월한 여성운동가요, 판사들의 판사였습니다. 긴즈버그의 부고를 알리며 존 G. 로버츠 주니어 대법원장은 그녀를 이렇게 기렸습니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인 위상의 법학자를 잃었습니다. 대법원은 소중한 동료를 잃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애도하지만, 미래 세대들이 루스 배더 긴스버그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지칠 줄 모르고, 단호한 정의의 챔피언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Our nation has lost a jurist of historic stature. … We at the Supreme Court have lost a cherished colleague. Today we mourn, but with confidence that future generations will remember Ruth Bader Ginsburg as we knew her - a tireless and resolute champion of justice.”


작년에 긴즈버그 대법관에 관한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을 봤습니다. 원제목이 <On the Basis of Sex>, 직역하자면, ‘성의 토대 위에서’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개화된 20세기에도 여성에 대한 차별과 무시가 만연했습니다. 그 차별의 토대 위에서 긴즈버그는 여성들의 인권과 권리를 개선하기 위해 자신의 온 생을 던졌습니다. 그 혼신의 결과 세상은 하나씩, 하나씩 바뀌어 왔고, 조금이 나마 개선된 토대 위에서 오늘날 여성들이 출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세기 긴즈버그 대법관이 왜곡된 인권과 사회의 토대를 바로 세우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것처럼, 1세기 막달라 마리아는 초기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틀을 사랑이라는 토대 위에서 세워갔습니다. 비록 신앙공동체라는 교회마저 세속적 가치와 논리에 의해 남성중심, 가부장적인 장치들이 견고하게 작동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했고, 주님의 말씀을 살았고, 주님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 배신으로 찢어졌던 신앙공동체는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의 헌신적 사랑과 섬김에 의해 다시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이게 결코 하찮은게 아닙니다. 우리나라 기독교를 보십시오. 일본식민지 시절 일제는 대한제국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전쟁체제를 만들기 위해 신사(神社)에 절을 하게 했습니다. 신사란? 일본 왕실의 조상을 기리는 사당입니다. 일제는 그 신사를 우리나라 각지에 세우고 절하게 함으로써 황국 신민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대부분의 목사와 교회들이 우상숭배를 금하는 교리를 저버리고 신사에 절을 했습니다. 이후 한국의 기독교는 크게 둘로 나눠지고 분열되었습니다. 신사참배한 교인들과 거부한 교인들. 여기에 따라 교회는 당연스레 찢어지고 나눠졌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을 배반하고 저주까지 한 제자들을 어떻게 사도라고 인정하고, 지도자라고 따를 수 있었겠습니까? 배반자가 리더가 된 들 누가 인정하고, 누가 따르겠습니까? 그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단연 없습니다. 아마 저같으면 이렇게 이야기했을지도 모릅니다. “너나 잘 하세요!”



9. οὔτις(우티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초기 교회는 분열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12제자 덕분일까요? 그들이 탁월해서, 잘 나서였을까요? 아니면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능력 때문이었을까요? 물론 성령님의 능력이 당연히 바탕이 되었겠지만, 12제자 덕분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것은 주님을 배신한적도 저버린 적도 없던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의 수고와 섬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성령님 안에서 묵묵히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배반했던 제자들을 품었기에 초기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지난주중 미드를 보는데, οὔτις(우티스)라는 옛 그리스어 단어 하나가 귀를 울렸습니다.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οὐ (ou, “not”) + τῐς (tis, “somebody”)로서 ‘아무것도 아닌 자’, 무명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교회와 기독교는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무명의 헌신 덕분에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이 무명의 헌신을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교회는 각종 이해와 이권의 집합체, 이익집단인냥 세를 과시하며 억지를 부립니다. 완고한 고집이 신앙으로 둔갑되어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거짓이 신앙의 절개와 순결로 둔갑하여 점점 사회의 기본인식과 간극이 넓어지고 떨어져 갑니다.


이런 때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으로 이웃들과 함께 해야 할까요? 그런 면에서 왜곡된 인식과 차별의 토대 위에서도 아름다운 신앙의 역사를 일구어갔던 막달라 마리아의 삶은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남다릅니다. 차별과 왜곡의 토대 위에서도 믿음의 삶을 일구었던 그녀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신앙의 자리가 됩니다. 비록 사회는 인정해 주지 않았으나 부활의 증인이 되어 다른 이들을 부활의 자리, 믿음의 자리로 이끌었던 그녀의 발자국은 마침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이 됩니다. 교회세습에 이어 전염병 시기에 그리스도인 스스로도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남들도 우리를 믿어주지 않고, 우리 스스로도 우리를 신뢰하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안타깝지만, 이러한 시기야 말로 우리 자신들이 막달라 마리아처럼 무명의 헌신과 섬김으로 짙은 어둠을 밝혀갈 때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비록 사회의 통념과 가치가 인정해 주지 않았지만,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오늘 우리를 되돌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οὔτις(우티스), 무명의 헌신을 통해 교회를 신앙으로 세워갔던 여인들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그분들이 배반했던 제자들을 품고, 인정해 주고, 세워주었던 까닭에 초대교회가 든든히 설 수 있었음을 압니다.


그분들의 그 이름없는 헌신과 사랑이 사람을 세웠고, 왜곡된 제도 하나 하나를 바로 세워왔음을 압니다. 비록 여전히 한쪽으로 기울어진 논리와 세속적 가치가 지배적이지만, 그래도 우리 역시 믿음의 여인들처럼 무명의 헌신을 멈추지 않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했기에,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마저 품었던 그 넉넉한 품을 오늘날 이 땅의 교회된 우리들이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배제와 혐오의 논리가 작동하는 약육강식의 사바나가 아니라, 함께 세워가는 주님의 포도원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오랜 역사의 왜곡을 넘어 막달라 마리아가 마침내 “주님을 사랑했으며, 바라보았으며, 찾았으며, 경배한 사람”으로 기억되듯이, 우리 또한 우리 삶이 주님을 사랑했으며, 바라보았으며, 찾았으며, 경배한 사람으로 기록되게 하옵소서. 무명의 헌신으로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우리시대의 막달라 마리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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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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